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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번에는 제목이 스포일러인 글을 써보려고 한다. 이 글의 주제는 '우리 아이들이 방관하지 않도록 가르치자'이다. 




1. 방관자 효과와 괴롭힘의 원

 

괴롭힘이 일어났을 때, 보통은 괴롭힌 사람과 괴롭힘 당한 사람으로 나누어서 생각하게 된다. 괴롭힌 사람을 가해자라고 하고 괴롭힘 당한 사람을 피해자라고 한다는 것을 모를 사람은 없을 것이므로 자세한 설명은 생략한다.


그런데 공동체 내의 괴롭힘이나 따돌림, 왕따 문제가 발생했을 때 단순하게 가해자와 피해자로 나누면 뭔가 좀 부족하다.


우선, 가해자와 피해자로 나누어서는 예방 프로그램을 만들 수가 없다. 


가해자 예방프로그램? 영화 마이너리티리포트에서 가해자 예방프로그램의 멋진 예를 보여주더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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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분들 예지몽에 너님의 가해장면이 나오면 인생이 좋게 된다는 범죄예방프로그램. 강력범죄 0%에 수렴하는 아름다운 미래사회.


범죄예방이랍시고 모두를 잠재적 범죄자 취급하면서 덕지덕지 CCTV를 설치하는 것도 일종의 가해자 예방프로그램이라고 볼 수 있겠지만 경찰에서 한다면 모를까 가정이나 교실에서 아이들에게 할만한 예방프로그램은 아닌 것 같다. 박 씨 부녀가 좋아하는 어떤 모범적인 도시국가에서는 법을 어겼을 때 맴매 맞는 모습을 시청하면서 가해자 예방을 한다더라. 그렇지만 애들한테 너네들은 다 커서도 잘못하면 체벌당한다고 협박하는 것이 효과가 있다면 그야말로 교사라는 직업은 없어져도 될 것 같다.


그렇다면 피해자 예방 프로그램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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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상 사람들은 괴롭힘 피해자들이 약하기 때문에 당하는 것이라 말한다. 그럼 강해지면 될까? 약한 사람은 괴롭힘당해도 될까? 맹수에게 쫓기는 가젤 떼처럼, 맨 뒤의 가장 약한 개체가 물어뜯기는 동안 안전한 시간을 벌고 한숨 돌리면서 살면 되는 것인가? 점점 강해져서 가해자가 되더라도? 


얌전한 아이, 자상한 아빠, 엄마 였던 사람들이 왜 유독 특정 집단 내에서는 극악무도한 가해자가 될까? 이에 대해서는 가해자와 피해자로 나누어서 설명할 수 없다. 왜냐하면, 이런 집단 내에서의 폭력은 집단 내의 다른 사람들의 역할을 떠나서는 존재할 수가 없기 때문이라고 한다. 그래서 집단 내 다른 사람들의 역할을 유형별로 분류한 것이 아래의 괴롭힘의 원이 되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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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피해자 : 괴롭힘을 당하는 사람.

- 가해자 : 최초로 괴롭힘을 제안하거나 실행한 사람.

- 동조자 : 가해자를 따라서 같이 괴롭힘에 가담한 사람.

- 조력자 : 가해에 직접 가담하지는 않았지만, 가해자와 동조자를 응원하고 부추긴 사람.

- 소극적 조력자 : 가해자와 동조자를 마음속으로 응원하고 동경하는 사람.

- 방관자 : 상황을 외면하거나 아예 관심이 없는 사람.

- 소극적 방어자 : 피해자를 안타깝게 생각하고 도와주고 싶지만 실천하지 못하는 사람.

- 방어자 : 피해자를 위해 행동하는 사람.


괴롭힘이 일어나면 집단 구성원은 이 8가지 유형 중 한 역할을 맡게 된다. 원하든 원치 않든 간에. 


학창시절, 혹은 최근 겪었거나 보았던 따돌림이나 괴롭힘의 상황을 떠올려보자. 가해자와 피해자 외의 나머지 역할을 수행하던 사람들을 찾을 수 있을 것이다. 당신은 어떤 역할을 하셨나? 보통 가해자나 방관자였던 사람들은 괴롭힘이 있었는지조차 기억하지 못하기에 괴롭힘 상황을 기억하는 사람은 대부분 피해자이거나 소극적방어자라 한다.


만약 학교폭력위원회가 소집된다면, 가해자, 동조자, 조력자까지는 징계를 받는 범위 속에 있게 된다. 다시 말해 넓게 보면 가해자 범주에 속하게 된다는 말이다.


반면, 소극적 조력자, 방관자, 소극적 방어자는 굉장히 다른 성격의 역할이지만 겉으로 보기에 구분을 하기가 힘들다. 이들 셋은 넓은 범주의 방관자에 속한다. 그런데, 피해자의 눈에 이들은 어떻게 보일까? 피해자의 눈에는 소극적 조력자, 방관자, 소극적 방어자는 모두 소극적 조력자로 보인다. 내가 이렇게 괴로움을 당하고 있는데 침묵하고 가만히 있는 사람이라면 가해자에게 암묵적으로 지지를 보내는 사람이라 보는 것이 당연하다. 가해자의 눈에도 내가 이렇게 괴롭히는데 가만히 있는 사람들은 내가 멋있어 보이거나 재미있어하기 때문이라고 생각하게 된다. 그래서 집단 속에서 아무것도 하지 않는 이들, 소극적 조력자와 방관자 그리고 소극적 방어자는 피해자를 절망 속으로 몰아넣고 가해자에게 자신감의 날개를 달아주는 역할을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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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니까, 집단 내 괴롭힘에서 이들 방관자(소극적 조력자, 소극적 방어자, 방관자)의 역할이 핵심이라고 볼 수 있다. 이것을 방관자 효과라고 한단다. 그리고 가해자/피해자와는 달리 방관자는 예방 프로그램이 가능하다. 그리고 가해자/피해자 예방교육과는 달리 매우 교육적이고 인도적이다. 내 이웃, 내 친구의 아픔에 공감하고 괴롭힘당하는 사람을 위해 목소리를 내는 연습. 이것을 통해 약자들이 연대하지 않아 파편화되어 유린당하는 것을 어느 정도 막을 수 있다는 희망을 갖게 되는 것이다.


얼마 전 청예단이라는 곳에서 나온 강사분들이 학교폭력예방교육을 한다고 교실로 오셔서 학교폭력예방책을 아이들에게 알려주었다. 엄청 반가워하면서 들었지만 알려주신 방어방법은 '학용품에 이름 쓰기', '위축되지 않고 말하기', '말투를 어눌하게 하지 말고 말하기', '괴롭힘당하면 선생님이나 부모님에게 알리기' 등이었다. 잔뜩 기대했는데 자기방어를 통한 각자도생법을 아이들에게 알려주실 줄이야. 방어자의 핵심은 자기 자신에 대한 방어라기보다는 약자를 돌아보고 서로를 돌보아주는 시스템 구축이다. 


방관자에서 방어자가 되는 것. 평화샘 프로젝트의 핵심 내용이다.


평화샘 교실에서는 끝없이 아이들과 함께 방관자에서 방어자가 되는 연습을 한다. 괴롭힘이 일어나면 (사실 일어나기 전에 방어 행동을 통해 예방하지만) 나 몰라라 하지 않고 누구든지 먼저 나서서 행동하도록 하는 것이다. 피해자의 아픔에 공감해보는 시간을 갖고, 만약 방관하고 행동하지 않았으면 상황극을 통해 행동하는 연습을 한다. 그리고 행동하지 않은 것에 대해 성찰해본다. 그렇게 서로를 보살펴 주고 진정한 공동체가 되어가는 과정을 '보살핌의 원'이라고 부른다.


비단 교실뿐 아니라, 가정, 마을, 직장에서도 구성원들이 함께 문제의식을 갖고 필요성에 합의하면 얼마든지 해볼 수 있다. 그 합의점에 도달하는 것 자체가 쉽지 않은 일이지만, 이 글을 읽으시는 분들이 부모라면 가정에서는 적어도 쉽게 해볼 수 있을 것이다. 교사라면 교실에서 가능하다. 꿈 같은 얘기겠지만, 최소한 지향점으로 정하고 수렴해보려고 노력해볼 수는 있다.




2. 유치원에서 : 방관했더니 다음은 내 아이 차례


딸 아이가 유치원에서 겪은 일이다. 딸 아이를 포함해 세 명의 여자 아이가 친하게 지내는 것 같았다. 주말에 초대를 해서 놀러 오기도 하고 아이가 놀러 가기도 하며 잘 지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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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느 날 아이와 유치원 생활에 대해 이야기하는데, 셋이서 무엇을 하면서 노는지 물어봤더니 엄마아빠 놀이를 한다고 했다. 


"역할은 어떻게 정하니?"


"XX이가 정해 줘."


"(일났다 싶음.) 그렇구나. 그럼 어떻게 정해줘?(일말의 공정함을 기대해봄)"


"XX이는 엄마, 나는 큰언니, 그리고 ㅇㅇ이는 애기."


"그렇구나. XX이는 맨날 엄마만 해?"


"응. 그리고 나는 큰언니, ㅇㅇ이는 애기야."


"ㅇㅇ이가 맨날 애기하면 힘들지 않을까?"


"음....잘 모르겠어."


"XX이에게 돌아가면서 하자고 얘기해보는 것은 어떨까?"


"음.... 알았어."


그리고 딸아이는 유치원에서 XX이에게 제안할 용기를 내지 못했다. 나도 ㅇㅇ엄마에게 아이들 놀이상황을 알리고 함께 이야기해봤어야 했는데 ㅇㅇ엄마 연락처를 몰랐고, 선생님에게 연락해서 알아보는 수고를 할 정도로 부지런하지 못했다. 그리고 석 달 뒤.


"참, 요즘에도 엄마아빠 놀이 해?"


"응."


"요즘에도 XX이는 엄마, 너는 큰언니, ㅇㅇ이는 애기야?"


"(시무룩함)아니, 내가 애기래."


"그렇구나. 요즘에는 늘 애기야?"


"응."


이야기를 나누어보니 대략 한 달 전부터는 딸에게 애기역할이 주어지고 있었다.


"맨날 애기역할 하니까 어때?"


"재미없어."


그리고 딸은 한 동안 울었다. 나도 함께 울었다.


세 명의 아이가 있을 때, 한 명의 아이에게 권력을 쥐어주고 두 명의 아이가 권력자의 가랑이 사이로 지나가려는 경쟁을 하게 된 순간, 예정된 결과였다. 몇 달 전 ㅇㅇ이가 매일 아기역할을 했을 때 문제제기를 하고 풀어갔더라면 어땠을까? 딸아이는 당시 ㅇㅇ이도 몇 달 동안 애기 역할을 하면서 힘들었을 것이고 그런 상황에서 도와주지 못했다는 것. 그리고 그 결과 내 차례가 되었을 때 ㅇㅇ이도 나를 도와주지 않게 되었다는 것을 배웠다. 다음 번에 같은 상황이 되면 도와주고 이야기할 수 있을지 모르겠지만, 과거로 상황을 돌려서 ㅇㅇ이를 도와주는 연습을 했다. 그리고 현재로 상황을 돌려서 XX이가 역할을 정해줄 때, 애기 역할을 매일 해서 힘들다 이야기를 해보는 상황으로 연습을 계속했다. 유치원 선생님에게 상황을 알리고 딸아이가 놀이시간에 이런 괴로운 상황에 처해있다는 사실과 관심을 가지고 도와달라는 요청도 했다.


때는 12월. 방학이 다가오고 있었다. 방학식 때 합창 연습 등을 하느라 놀이시간이 생략되는 경우가 많아 딸아이가 문제제기를 할 기회가 자꾸 미루어졌다. 방학을 사흘 정도 앞둔 날, 딸아이가 드디어 'XX야, 매일 애기 역할 해서 힘들어'라고 이야기를 했고, 그래서 XX는 애기역할을 돌아가면서 하자고 했다고 한다. 애기역할을 돌아가며 하자 말하고나서 딸아이부터 다시 순서가 돌아가 그 날 또 애기를 하고 오기는 했지만. 그리고 다음 날은 ㅇㅇ이가 애기를 하는 차례, 그 다음 날은 방학식이어서 학년이 끝난 데다 다음 해에 같은 반이 되지 않아 XX가 기꺼이 애기 역할을 했을지는 알 수 없게 되었지만.


XX가 태생이 악해서 다른 두 명을 갉아먹은 것은 아니다. 다만, 본의 아니게 다른 사람들에게 상처를 주고 있었고, 그 행동이 다른 사람에게 상처를 준다는 것을 알 기회를 가지지 못했다. 그리고 상처를 받은 아이를 다른 친구들이 돌아보지 못했다. 이런 상황에서 어른들이 개입하고 알려주지 않으면 XX는 가해자로, ㅇㅇ이와 딸래미도 상황만 허락하면 가해자로 자라게 될 것이다. 최소한 방어자로 자라기는 어려울 것이었다.


방관하면 다음은 내 차례라는 사실을 뼈저리게 느낀 사건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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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지점에서, 아이들이 자라다보면 의례 있는 일이고 그러면서 자란다고 하실 수도 있다. 그렇다면 부모나 교사의 역할은 무엇인지 여쭤보고 싶다. 별 일 아니니까 어금니 꽉 깨물고 '모든 게 다 잘 될 거야. 긍정의 힘을 믿어. 화이팅! 나는 행복하다.'를 외치면서 마음의 맷집을 키우도록 독려하는 것일까? 아니면 남의 아픔에 공감하고 옆에 있어주고 손을 잡아주는 것일까? 답은 정해져있다. 


이론적으로는 맞지만, 현실적으로 나 혼자만 그렇게 기를 수는 없는 노릇 아니냐고? 교육은 예방주사와 같다. 다수의 사람이 맞으면 이 사회는 약육강식의 각자도생 사회가 되지 않는 사회적 면역시스템을 갖출 것이다. 우리 나라 같이 국가 정책에 신뢰를 안 보내는 나라에서 다수의 사람에게 예방주사를 놓아줄 수 있는 사람이 누가 있을까? 평화샘이 교실 프로젝트로 시작된 이유도 여기에 있다. 교실을 허브로 가정과 연계하여 관계적 폭력과 방관자효과에 대해 나누고 보살핌의 원을 함께 만들어 간다면? 


이것이 평화샘 선생님들과 연구소 사람들이 생각한 대안이다.




3. 동네에서 : 육아 원칙 합의의 중요성


타운하우스에 입주하고 벌써 4년이 지났다. 교실에서 아이들과 함께 보살핌의 원을 만들어가면서 공염불이 아니라는 것을 눈으로 확인하고 나자 욕심이 생겼다.


우리 동네에서는 왜 못하겠어? 우리 동네에도 제법 많은 아이들이 있는데.


그런데, 아이들만 된다고 되는 것이 아니었다. 당시 말이 느리고 운동능력은 웃자란 친구(4세)가 다른 아이를 밀고 때리고 하는 경우가 잦았다. 그 과정에서 맞은 아이랑 때린 아이랑 엄마들 사이에서 묘한 감정의 골이 생겨났다. 마을의 6, 7세 아이들이 4세 아이를 사냥하러 가자고 여럿이 장난감 칼을 들고 쫓아다니고 4세 아이가 도망다니는 상황도 목격 되었다. 평소 다른 아이들을 때렸기 때문에 사냥당해도 된다는 것이 아이들 논리였다. 엄마들 사이의 감정의 골은 더 깊어졌을 것이라는 것은 말할 것도 없다. 4세 아이는 맞아서 상처가 난 것도 아니었기 때문에 찾아가서 맞았다고 항의할만한 거리가 못 된다는 시각이 퍼져있었다. 


고작 7살밖에 안 된 아이가 너 몇살이냐며 까불지 마라고 동생들을 억압하는 상황도 심심찮게 벌어지고, 7살 아이들에게 유리하게 짜여진 놀이 규칙 속에서 다른 아이들은 왜인지 모르지만 찜찜한 놀이에 참여하곤 했다. 그리고 그 속에 5살이었던 딸도 있었다.


동네 사람들은 아이들끼리 잘 논다고 믿었다. 자신의 아이가 그 속에서 상당한 스트레스를 받고 있다는 것을 알면서도 아이들끼리 놀다가 생긴 일이기 때문에 어른이 개입하면 안된다는 원칙에 속앓이만 하는 경우를 많이 보았다. 엄마들끼리 친하기 때문에 문제가 있어도 엄마들 사이의 관계를 인식하여 문제제기를 제대로 못하는 경우가 많았다. 


아이들 관계와 놀이 문화에 대해 이야기해보자는 제안에 화답하는 사람은 없었고, 결국 내 아이라도 건져내자는 생각에 엄마, 아빠가 없는 경우 언니, 오빠들과의 놀이에는 참여하지 않도록 단속하게 되었다.


이후 동네에서 아이들 사이에 보살핌의 원을 만들어보기 위한 노력을 몇 년 동안 했는데, 거기에 대해서는 이 글의 연재에서 한 꼭지를 할애해서 다루어 보려고 한다. 망한 시도도 많았지만 효과를 본 시도도 있었다. 때문에 아이를 기르시는 부모님들이 한 번 읽어보시면 적어도 나처럼 망하지는 않을 듯 하다.


아무튼, 육아 원칙이 합의되어있지 않는 상태에서는 아파트든 전원주택이든 약육강식 이외의 관계를 보기가 쉽지 않을 것이다. 더구나 어려서부터 장난감을 갖고 자라온 아이들이라서 어린 아이일수록 사람을 대상화하는 경향이 있더라는 것은 덤으로 발견하게 된 사실이다. 사람을 만나고 그 과정에서 관계를 맺고 갈등을 해결하고 하는 경험이 없는 상태로 나이만 먹게 되었다면 더욱 그러했다. 사람을 그냥 움직이고 말하는 장난감으로 인식하더란 얘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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누군가가 사람은 장난감이라고 알려주지 않고, 몇 살 많다고 마음대로 해서는 안된다고 알려주지 않고, 잘못했다고 여럿이서 한 명을 괴롭히면 안 된다고 알려주지 않으면, 그리고 결정적으로 괴로워하는 사람이 있을 때 여럿이서 도와주고 약자의 편에서야 한다는 사실을 알려주지 않으면, 아이들은 그런 것들을 배우지도 못한 채 자라난다.


옛날 동네에는 이런 것들을 알려주는 동네 형, 동네 언니들이 있었다고 한다. 그러던 것이 어느 순간부터 다 사라지고 맥이 끊겼다. 때문에 지금 부모세대 앞에 던져진 시대적인 과제가 이것이 아닐까 싶다. 예전 동네 언니, 동네 형의 역할을 해줄 어른이 필요한 시점이니까. 그렇지 않다면, 국가 차원에서 동네 형, 언니 양성소를 만들어서 교육해서 각 동네로 파견해야할 텐데, (그러면 일자리도 창출되는 아름다운 창조경제의 꽃을 피우겠지만) 그렇게 해서 동네에 보살핌의 원이 만들어질 것 같지는 않다. 진짜 보살핌의 원은 그 공동체에 속한 사람들이 만들어가는 것이기 때문에.




4. 어른들 세상 : 뒷담화와 오지라퍼


아이들의 문제에 대해 동네 어른들과 나누어 보았으면 좋겠다는 생각을 하며 전전긍긍 시간을 보냈다. 아이들 사이의 관계적 폭력과 약육강식의 놀이문화, 그리고 약자가 괴롭힘을 당할 때 죄다 방관하고 있는 현실, 이런 것들에 대해 이야기해보려고 하던 중, 동네 어른들 세상도 별로 다르지 않다는 것을 깨달았다. 앞에서 말 못하고 뒤에서 소문을 만들어내기 일쑤였으며 넷이 있다가 셋이 되면 없어진 한 명에 대한 이야기를 나누고, 셋이 있다가 둘이 되면 또 없어진 한 명에 대한 이야기를 나누는 아름다운 술자리, 속상한 것에 대한 '공감'이라는 허울 아래 펼쳐진 뒷담화 형식의 관계적 폭력은 그렇게 마을을 좀 먹어 가고 있었다. 친분을 다진다는 명목으로 마련되는 마당에서의 저녁식사에는 초대받지 못한 자들과의 친분은 단절되고 있었고. 너는 우리에 속해 있지 않다는 것을 공공연하게 드러내는 자리가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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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을에 문제가 생기거나, 아이들 사이에 문제가 생겼을 때 적극적으로 개입하게 되면 오지랖 넓은 오지라퍼인 것 같아 눈치가 보인다. 게다가 직업 특성상 선생질한다는 지적에 상처도 잘 받고.


주변에 뒷담화자와 오지라퍼가 있다면, 아마도 둘 중 오지라퍼가 혐오의 대상이 될 공산이 크지 않을까 싶다.

 

뒷담화라는 것이 임금님 귀는 당나귀 귀처럼, 힘없는 사람들이 강자들에 맞서기 위해 여론을 형성하는 과정이라면 당연히 해야할 것이겠다. 그런데, 자신의 이익에 반하는 다른 사람을 음해하거나 관계를 차단시키기 위해 행해지는 경우라면, 이것은 그냥 관계적 폭력 아닌가 싶다. 쓸 데 있는 일에 하는 참견, 도와줘도 되냐고 물어보고 하는 도움, 이런 오지랖은 좀 넓히고 사는 것이 어떨까.




5. 방관하지 않기 위해 : 연대의 힘


막상 내 자신이, 그리고 우리 아이들에게 방관하지 말고 방어자가 되라고 말하기에 세상은 너무 험하다. 남 도와주다가 내가 험한 꼴을 당할 수도 있으니까. 그러니까 남의 일에 함부로 나서지 말고 몸 사리고 너나 살아남으라고 이야기하는 것에 대해 비난할 수는 없겠다.


그런데, 우리에게는 연대라는 무기가 있다. 혼자서는 어렵지만, 여럿이서는 가능하다.


3의 법칙이라고 부르는 이 연대의 힘. 이것을 잘 보여주는 영상이 있다.



괴롭힘의 상황이 끝나지 않는 것은 괴롭힘이 대세로 느껴지기 때문이다. 그럼에도 용기를 갖고 나서면, 적어도 지금 괴롭힘을 당하는 사람이 당하는 괴롭힘을 멈출 수는 있다. 그리고, 여러 명의 방어자가 나타나면 괴롭힘은 방향과 힘을 잃어버린다. 대부분의 집단 내 괴롭힘은 내가 괴롭히는 것을 아무도 말리지 않고, 그것은 내가 괴롭히는 것을 암묵적으로 지지하기 때문이라는 기대를 하게 만들기 때문이다. 그 기대가 박살나면 괴롭힘의 원동력은 없어진다.

 

방어자가 아무도 없는 교실. 그 교실 속에서 매일 매일 따돌림 당하며 살아가는 아이. 그런 아이가 교실마다 한 둘은 있다. 우리 반에는 없다고 확신할 수 있을까? 어른의 눈에 아직 발견되지 못했을 뿐, 아이들은 다 알고 있다.


방어자가 아무도 없는 집단. 그 집단 속에서 매일 매일을 피해자로 살아가는 사람. 내 주변에는 그런 사람이 있는 것은 아닐까? 지금 내 눈에만 안 보이는 것은 아닐까? 혹은, 피해자가 이상하기 때문에 자초했다고 생각하고 있지는 않은가? 이 세상에 따돌림 받아 마땅한 이상함은 없다. 


이 속도로 써서 어느 세월에 올릴지 모르겠다. 내가 쓰는 이야기는 평화샘 프로젝트를 교실과 가정과 마을에 적용해보면서 격었던 일들과 함께 비빔밥으로 딴지사람들과 나누는 것이라서 전문성이 떨어질 수 있다. 연구소분들과 평화샘의 선생님들이 쓴 저서를 읽어 보면 마치 매트릭스의 빨간약처럼 그 전에는 안 보이던 것들이 보이기 시작할 지도 모른다. 다음 편에서는 평화샘에서 제안하는 공동체 평화의 4대 원칙에 대해 이야기 할 계획이다.



P.S. 


우리 댓통령님이 이상한 것도 대통령이라는 직책에서는 하면 안될 것 같은 말과 행동과 결정을 너무 많이 해서 그런 것이다. 그냥 우리 동네 할매라면 역시 따돌리면 안 되는 거다. 정 밉거든 잘 구슬려서 10억만 달라고 해보자. 재산이 조단위라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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