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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가 그런 말한 적 있지? 더위는 한이 안 되고 귀찮을 뿐이지만 추위는 한(恨)이 된다고 말이다. 쪄 죽는다 말은 해도 더워서 죽기는 쉽지 않지만 추위에는 사실 대책이 없거든. 인류의 발전과 확대에 추위는 장성같은 한계이자 프로메테우스 같은 은인이었어. 겨울은 인류에게 엄혹한 칼날을 휘둘렀지만, 동시에 인간은 그걸 극복하면서 생활 영역을 넓히고 문명을 발전시킬 수 있었으니까.


전쟁을 할 때도 겨울은 큰 장애이자 은인이었다. 나폴레옹이나 히틀러를 몰락시킨 1등 공신은 결국 러시아의 동장군 아니겠니. 핀란드를 공격한 소련군이 박살이 난 이유 중의 하나도 자기들도 러시아 사람이랍시고 핀란드 추위를 무시한 거였지. 우리 역사에도 많이 나와. 안시성 전투 때 당나라 병사들은 요동의 추위 앞에서 무릎을 감싸안고 엉엉 울었다고 해. 임진왜란 때 가장 멧돼지처럼 설친 가등청정의 부대는 함경도의 강 추위에 부대원 절반 가까이를 잃고 철수하기도 했지.


역사상 유명한 동계 전투는 많지만 한국 전쟁 당시의 장진호 전투는 결코 빼놓을 수 없는 한 페이지야. 우선 장진호가 어디인가부터. ‘무슨 난관에 부딪히더라도 ’라는 뜻의 우리나라산 사자성어 관용어구가 있어. 알아맞춰 봐. 그래 ‘삼수갑산에 가더라도’다. 삼수갑산이란 함경남도 삼수와 갑산를 일컫는 말인데 이 두 고을은 과거 관(官)의 손길조차 닿지 않는 오지 중의 오지였던 거지. 사람이 짐승보다 귀하다는 고장이었지. 갑산이라는 이름은 산들이 갑옷처럼 둘러쳐져 있다는 데에서 나왔고 삼수는 세 물줄기가 흐르는 곳이라는 뜻이었어. 바로 압록강의 지류인 부전강, 장진강, 허천강이야.


일제는 이 지역에 댐을 건설하고 수력 발전소를 지었어. 삼수갑산도 오지 중의 오지에서 한켠 벗어나는데 댐 건설의 영향으로 대형 호수가 생겨나 풍광 좋은 볼거리가 되기도 했지. 그런데 안 좋았던 것 하나는 대형 호수로 발생한 환경적 변화로 겨울 기온이 내려간 거야. 원래부터 한반도에서 가장 추운 지역이긴 했지만 한층 더 모진 추위가 기승을 부리게 되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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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50년 10월 1일 한국 육군 3사단이 마침내 38선을 넘고 이어 맥아더 장군은 한국의 완전 통일을 위한 북진을 선언한다. 그런데 맥아더가 애써 무시한 위험 요소가 하나 있었어. 바로 중국의 참전이었지. 중국은 UN군이 38선을 넘는다면 가만 있지 않겠다는 사인을 계속 보냈지만 우리의 맥아더 장군은 짱꼴라들, 올 테면 와 보라는 식으로 코웃음쳐 넘겼어.


이미 ‘순망치한’의 논리로 모택동은 참전을 결심했고 한국군이 평양을 점령할 즈음이면 이미 대군이 압록강을 넘어오고 있었는데도. 심지어 중국군 포로가 잡혀서 자신들 몇 명이 넘어왔다고 술술 불어도 미군은 믿지 않았어. 아니 믿기 싫었겠지. 사람은 언제나 믿고 싶은 것만 믿으니까.


자 여기서 미군 해병 1사단의 얘기를 시작해 보자. 미군 해병대 1사단의 이름은 사실 역사에 드높아. 전쟁이 터지면 거의 1착으로 투입되는 미군의 잽이자 스트레이트 같은 무기. 과달카날 전투에서 일본군을 끝끝내 무찌른 부대고 인천 상륙 작전의 선봉에 선 부대야. 그들은 이번엔 원산 상륙 작전을 펼친다. 그런데 해병대의 책임은 아니었지만 매우 우스운 꼴이 되고 말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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원산 앞바다에 인민군들이 잔뜩 깔아놓은 기뢰를 정리하는 통에 상륙이 늦춰졌는데 한국군이 육로로 급속 북상해서 원산을 점령해 버린 거야. 천하의 미군 해병대가 ‘웰컴 미군 해병대 - 한국군 일동’ 표지판을 본 셈이지. 입이 댓발은 나온 해병대는 미군 10군단장 알몬드의 통제 하에 개마고원 쪽으로 북진하게 돼.


해병 1사단장 올리버 스미스는 알몬드에게 불만이 많았어. 알몬드는 2차대전 때 유럽 전선에서 주로 싸웠고 스미스는 남태평양에서 일본군과 싸웠는데 상대해 본 적의 성격이 워낙 달랐던 거야. 이 차이의 결과는 인천 상륙 후 서울 수복 작전 때 여실히 드러났지.


“이제 우리가 서울로 치고 올라가면 포위됐다고 생각하고 물러날 거요. 유럽에서 독일군이 그랬듯이.” (알몬드) “동양 애들은 달라요. 얘들은 당장 의미 없이 죽는다고 해도 지휘관의 명령이 없으면 그냥 자리에서 죽어요. 일본군하고 상대 안 해 보셨지?” (스미스) 스미스가 맞았지. 미군과 한국군은 인천에 상륙하고 거의 2주가 지난 뒤에야 서울 수복을 하게 됐거든. 차 타고 달리면 1시간 거리를 진격하는데 2주일 걸린 거지. 스미스는 알몬드라면 이를 갈았지만 할 수 있나 보직이 깡팬데.


아무튼 해병대는 북한의 임시수도 강계를 향해 진격하기로 했지. 그런데 그러려면 개마고원을 넘어야 했어. 우리나라 지도를 보면 고만고만 동서로 좁게, 남북으로 길쭉하게 올라가다가 별안간 머리 큰 아이처럼 그 동서가 넓어져. 그 드넓은 산악지대 숲에는 매우 조악한 군대가 웅크리고 있었지. 무려 10만 명이 넘는 중공군들이었어. 미군과 중공군은 낮 기온 영하 20도, 밤 기온 영하 32도의 한파 속에서 지상 최대의 동계 전투를 벌이게 돼.


마침내 중공군이 모습을 드러내 미군의 다른 부대와 한국군을 넉다운 시켰음에도 알몬드는 “패잔병들일 뿐”이라며 진격을 고집하는 어리석음을 드러냈지만 해병사단장 스미스는 명령 불복종 혐의에 모자라지 않을 정도의 느린 진군을 고수했어. 부대가 산개하지 않도록 주의했고 보급로와 심지어 공항까지도 건설하는 것을 잊지 않으면서 말이야. 알몬드가 멍청한 명령을 내리자 이렇게 말하며 씹어버리기도 했어. “이런 명령을 내릴 리가. 아마도 정신이 나갔던 게야.”


마침내 중공군이 해병대를 덮친다. 중공군의 공격과 그보다 더 지독한 한파 속에서 미군 해병대는 그야말로 악전고투를 거듭하게 돼. 그 참상에 대해선 많은 기록이 남아 있지만 이 전투에서 올리버 스미스 휘하의 미군 해병대는 그들의 명예를 역사에 내걸게 된다. 사단장 올리버 스미스는 중공군이 포위한 상태에서 방어 병력도 변변찮은 하갈우리라는 곳에 사단 사령부를 차린다. 지휘관 자신 목숨을 건 거지. 중국군의 간단없는 포위 공격에 시달리면서도 그들은 전우의 시신을 남겨두지 않는다는 원칙에 따라 부상사와 시신을 차에 싣고 자신들은 걸어서 철수하는 비장한 모습을 보여 주기도 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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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렇게 해병대가 악전고투를 하면서 무너질 듯 무너질 듯 버티는 모습을 보면서 중공군들도 이를 갈게 돼. 어라 이것 봐라. 중공군들 역시 악착같이 해병 1사단에 매달리게 됐고 덕분에 해병대 외에 미군들과 한국군들은 탈출할 기회를 얻지. 무려 7개 사단의 중공군이 해병대만 패겠다고 덤벼들었거든. 이 시기 올리버 스미스 사단장은 전쟁사에 길이 남을 명언 하나를 남기게 돼. 종군 여기자 히긴스 (이 여자 얘긴 또 할 기회가 있을 거다)가 “지금 후퇴하는 겁니까?”라고 묻자 올리버 스미스는 “후퇴라니? 젠장맞을 우리는 다른 방면으로 공격하고 있는 거요.” ("Retreat, hell! We're not retreating, we're just advancing in a different direction.")라고 대꾸한 거야.


장진호 전투에서 벌어진 웃지 못할 일화 하나. 격렬한 전투를 치르던 해병대원이 후방에 무전을 치게 돼. 무전 내용은 이것이었어. “투시 롤을 즉시 공급해 주기 바란다.” 투시 롤은 미군 보급품 중의 하나인 카라멜 사탕이었는데 해병대 사이에서는 이게 박격포탄의 속어로 쓰였다고 해. 사면중가(사면이 중국인 노래)인 상황에서 혹 무선이 도청 될까봐 속어를 쓴 건데 이 무선을 받는 사람들은 해병대가 아니었거든. 좀 어이가 없다 싶었지만 미군 수송기들은 막대한 사탕을 뿌려댔어. 해병대는 “이 돌대가리들아!!!” 비행기에 퍽큐를 퍼부었지만 그 사탕들은 뜻밖에도 여러 명의 목숨을 구해.


이 캬라멜에 초콜렛을 입힌 사탕은 우리가 등산 갈 때 초콜렛을 준비하듯 열량을 유지하기 위한 요긴한 식량이 됐던 거야. 모르핀이나 링거 수액마저 얼어붙는 추위에 전투식량은 꽁꽁 얼어붙어서 그걸 먹다가 설사병 걸리는 병사들이 동상자들이나 많았던 장진호 근방에서 이 ‘투시 롤’은 신묘한 효과를 냈던 거지.


장진호 전투는 중공군과 미군 양쪽 모두에게 깊은 기억을 남겨. 중공군은 세계 최강 미군을 박살냈다고 기세등등했고 미군은 열 배 가까운 적의 포위망 속에서 끝내 탈출을 성공으로 장식한 기적으로 그 기억을 미화한다. 워싱턴 D.C의 한국전 참전 기념비는 바로 이 장진호 전투를 모티브로 하고 있어. 판초우의를 껴 입은 미군들이 조심스레 한 발 한 발을 내딛는 모습이지. 지금도 장진호 전투의 생존자들은 ‘초신 (장진의 일본식 발음) few'라는 모임을 가지고 있다고 해. 그들 모임에는 푸짐한 투시 롤 사탕이 제공된다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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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옛날 듣도보도 못한 나라의 영하 삼십도 산골짜기에서 동상 걸려 오들오들 떨다가 죽거나 누구인지 모를 적과 싸움 끝에 언 땅에 묻힌 미국과 중국 병사들을 떠올리면 문득 처연해진다. 종군 기자 데이비드 더글러스 덩컨이 찍은 사진 한 장을 보면 더욱 그래. 온 몸을 꽁꽁 싸맨 채 얼어붙은 통조림을 들고 어딘지 모를 곳을 응시하고 있는 한 해병의 모습은 전쟁의 공포, 극한의 체험 후의 허탈함, 생존의 기쁨과 그제사 되돌아 보게 되는 회한의 장면, 그리고 먹고 살아야 하는 한 인간의 본능까지 모든 게 담긴 것 같지 않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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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쟁 이야기를 끄적이면서 드는 생각이지만 우리 세대가 평생 전쟁을 겪지 않고 죽을 수 있다면 그 어떤 신산한 세월에도 불구하고 우리는 수천 년 한국인의 역사 가운데 가장 행복한 세대가 되지 않을까 하는 거야. 1950년 11월 27일 불뿜기 시작한 장진호 전투 같은 일이 우리 앞에 일어나지 않기를.





산하


편집 : 꾸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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