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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 살아온 얘기를 풀어 놓으면 소설책 몇 권이 나온다.”는 말을 많이 듣는다. 그럴 때마다 나는 조금씩 주눅이 든다. 공적 업무가 아니라 사적인 영역에서 내 살아온 얘기를 하자면 소설책 몇 권은커녕 A4 용지 두어 장에 그칠 것 같기 때문이다.


집안이 망했거나 가족 간에 불화했거나 뭐에 미쳐서 몇 년을 말아먹거나 죽네 사네 목숨 걸고 연애를 해 봤거나, 무슨 죽을병에 걸려 봤거나 땡전 한 푼 없어 며칠을 굶어 봤거나 등등 드라마틱하고 스토리가 될만한 사연이 하나도 없는 것이다.


평범한 집안에 태어나 큰 문제 없이 자랐고 사춘기가 뭔지 잘 모르고 지나갔고 재수 안 하고 대학 들어갔고 데모를 해도 고양이 세수 식으로만 했고 (그래서 나는 운동권 출신이란 말을 사양한다) 어찌어찌 취직해서 별문제 없이 결혼하고, 주욱 직장생활을 해 온 이 ‘순풍’ 인생이 ‘소설 같은 내 인생’ 앞에서 경외감이 앞서는 건 어쩔 수 없을 터.


그러다 보니 난 왜 이렇게 불행한가 하는 생각을 지금껏 별로 해 본 적이 없다. 불행이라는 단어의 비읍자가 비칠 때마다 “염병한다 니가 불행하면.....” 하는 진압의 발길질이 대뇌에서부터 펼쳐졌고 직업상 너무나 많은 기구하고 기이한 사연들을 접했기에 상대적으로 행복감을 재확인할 때가 많았기 때문일 것이다.


쥐어짜서 생각해 본다면 1994년 백수로 언론사 입사 시험에 매달리던 가을은 무척 암울했다. 전 해에는 필기시험에서 미역국을 드럼으로 먹었는데 94년에는 거의 면접까지는 당도했지만 면접에서 미끄럼을 일곱 번 넘게 탔다.


지금도 신정동 송중기를 자처하는 외모로서 외모에 큰 신경을 쓴 적이 없으되 이때는 면접관 보기에 그렇게 아닌가? 싶어 거울도 들여다보곤 했다. 면접을 못 봤다 싶은 것도 아니고 나름 잘 대답도 하고 면접관들이 고개를 끄덕이며 경청(?)하기도 했는데 결과는 계속 추풍낙엽이었다.


한국경제신문이었나 필기에 붙어서 면접을 보러 갔다. 사실 기대도 안 한 시험이었다. 시험 전날 누가 군대 휴가를 나와서 밤새 술을 먹고 시험 보러 갔는데 영어 듣기평가 때 졸기까지 했던 것이다. 그런데 어찌 필기 시험이 됐고 면접 보러 오란다.


이건 기적이었다. 하늘은 스스로 돕는 자를 돕는 법이다. 아침 일찍 일어나 목욕하고 머리 다듬고 넥타이 전포(戰袍)매고 검은 양복 갑옷 입고 수험표를 칼 삼아 쥐고 출정에 나섰다. 기다려라 한국경제신문. 한창 면접을 보는데 난데없이 면접관이 질문을 해 왔다.


“영어 듣기가 안 좋은데 왜 이런가?”


억. 뭐랄까 이때 “아직 리스닝은 좀 부족합니다. 정진하겠습니다.”라든가 뭐 기타 모범 답안이 많았겠는데 내 입에서 튀어나온 말은 나 스스로를 놀라게 했다. “아... 그 전날 밤새 술 먹어서요.”


아 그때 면접장 분위기라니. 서류 보고 있던 사람, 한눈 팔던 사람 등 전원이 나에게 집중했다. 이재용 부회장이 두려워했다는 박근혜의 레이저 따위 그때 면접관들 눈초리에 비하면 낡아빠진 형광등보다 못했을 것이다.


“시험 전날 술을 먹었어?”


“아 네... 제 친구 아버님이 돌아가시는 바람에.... 제게도 무척 잘해 주신 분이었고....”등등 적절하게 대처할 멘트가 당연히 튀어나와야 함에도 역시 내 입에서는 매우 정직한 발언이 흘러나오는데 또 한 번 경악했다. “친구 녀석이 말년휴가를 나와서요.” 이제는 분위기가 얼음장이 아니라 얼음장 깨지는 소리가 났다. 면접관 한 명이 날카롭게 물어 왔다.


“자네는 우리 회사 시험보다 말년 휴가 나온 친구와의 술자리가 더 소중했던 건가.”


그 뒤 면접장에서 무슨 질문이 나왔고 대답을 했는지는 아무런 기억이 나지 않는다. 그야말로 멘붕이었다. 나라도 그런 멍청한 대답을 하는 면접생은 기억에서 지워 버릴 터였다. 핑 눈물이 돌고 다리도 휘청거렸다. 


가을 하늘 공활한데 내 머리 둘 곳 없구나 싶어 처량하기도 하고 나는 원래 이런 놈인가 자학도 동해의 파도처럼 밀려 왔다. 텰썩 텰썩 튜르릉 콱. 용산역에서 내려서 이촌역으로 가는 전철을 갈아타야 했는데 멍하니 있다 보니 영등포역이었다. 아 이런 쓸모없는 자식.


그때 영등포 역전 약국에서 약사로 돈 많이 벌고 있던 고향 친구가 생각이 났다. 밥이나 얻어먹자. 통화하면서 푸념을 했더니 측은한 목소리가 돌아왔다. “기분 풀어야겠네. 오늘 내 근무 일찍 끝나니까 영화나 보러 가자. 술이나 사 줬으면 싶어도 내 못 먹으니 니 혼자 먹기도 그렇고.."


그래서 지금은 사라진 경원 극장에서 영화를 보고 밥도 장히 잘 얻어먹었다. 내가 참 단순한 사람이라고 느끼는 게 이럴 때인데 영화 한 편과 밥 한 끼에 오후의 충격을 상당 부분 까먹게 됐다. 그런데 아홉 시경 친구와 헤어지는데 삐삐가 찍혔다. 학교 앞 단골 술집이었다.


“아무개 제대했다. 와라.” 공중전화박스에서 들은 얘기. 제대 얘기에 또 한 번 팍 빈정이 상했다. 언넘의 말년 휴가 때문에 내 인생이 헝클어졌단 말이다. 이 나쁜 시키들아. 안 간다! 이래야 정상인데 대뇌에서는 그렇게 지시하고 있는데 입에서는 다른 소리가 튀어나오고 있었다. “30번 타고 가면 4-50분 내에 간다.” 술을 먹고 싶었던 게지. 돈 잘 버는 여자 사람 고향 친구가 아무리 맛있는 함박스테이크를 사 줬어도 이 불우한 취직 재수생은 술을 먹어야 했던 게지.


웬만큼 취한 후 난 왜 이 모양인가를 술 한 모금 마실 때마다 주절거렸던 모양이다. 친구들이 다독다독 너 괜찮은 넘이야 위로하다가 나중에는 그래 너 그런 놈이다 소리 지르고 그랬으니까. 그때 기타 잘 치던 친구 하나가 이런 노래 저런 노래 부르다가 내 귀에 꽂히는 노래를 시작했다. 노래가 위로가 된 기억은 하고많지만 그날의 노래는 아주 특별하게 선연하다. 조동진의 <행복한 사람>이었다.



“울고 있나요 당신은 울고 있나요

아아 그러나 당신은 행복한 사람

아직도 남은 별 찾을 수 있는

그렇게 아름다운 두 눈이 있으니

외로운가요 당신은 외로운가요

아아 그러나 당신은 행복한 사람

아직도 바람결 느낄 수 있는

그렇게 아름다운 그 마음 있으니"



지금도 그렇지만 내게는 어떤 계기로 뇌와 귀에 꽂혀 버린 음악을 며칠 동안 흥얼거리는 습관이 있다. 영화 <박열>을 본 뒤 인터내셔널가를 하도 흥얼거려 팀원들이 무슨 노래냐고 물어볼 정도다. 그때도 그랬다. 아주 잠깐 나락에 빠진 듯했던 한 보통 청년은 그 노래를 며칠 동안 내내 부르고 흥얼거렸다. 아아 그러나 아아 그러나 당신은 행복한 사람.....에 잔뜩 감정을 싣고, ‘아름다운 두눈이 있으니’에 눈을 부릅뜨면서.


이 노래를 부른 가수 조동진 씨가 별세했다. 행여 일하면서 만날 기회가 있었으면 반드시 이 얘기를 하고 사의를 표했을 텐데, 22년 동안 아쉽게도 인연이 닿지 않았다. 고인의 명복을 빈다. 가수는 가도 노래는 남는다고, 내가 그를 따라 세상을 등지기 전까지 그날의 조동진의 노래는 내 추억 속에서 아름답게, 그리고 바람결 느껴지도록 살갑게 남으리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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산하

편집 : 딴지일보 cocoa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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