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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은 영화 <VIP> 대한 스포일러를 함유하고 있습니다.

관람을 예정하시는 분들은 얼른 글로부터 도망가심이 옳습니다.



영화 <나인>에서 주디 덴치는 특유의 시니컬한 말투로 영화감독에 대해 정의합니다.


"영화감독은 과대평가된 직업이야. Yes No 알면 되거든엑스트라? Yes. 립스틱? No. 그게 전부지 ."


대평가라는 부분에서는 동의하기 힘들지만, ‘선택 하는 일이라는 것에는 동의합니다감독은 이야기의 전개, 이야기에 적합한 배우의 연기, 화면의 사이즈, 음악과 조명을 선택하고  결과에 책임을 지는 사람입니다. 이것은 감독의 선택들에 대한 이야기입니다.


한국 영화계가 <VIP> 뜨겁다. 영화 장면으로 불거진 여성혐오 논란 때문이다각종 영화 커뮤니티와 SNS상에서는 영화 <VIP> 초반부에 등장하는 윤간, 강간 장면이 불필요하게 잔인하며 여성을 쾌락적 도구로만 그렸다는 비판과, 잔인한 장면임은 사실이나 연쇄강간살인마인 극중 인물을 표현하기 위한 필수 불가결한 장면이었다는 의견이 맞서고 있다. 거기에 영화를 보지도 않은 사람들이 영화를 깎아 내리기 위해 일부러 해당 장면을 왜곡하며 별점테러를 하고 있다는 의혹, 배급사인 워너 브라더스 코리아측의영화를 보지 않고 헐뜯는  파시즘에 가깝다 이례적으로 수위 높은 발언이 논란에 불을 지피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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궁금해졌다. 영화에 대한 비판은 타당한가? 지나치게 부풀려졌는가? 이전에 영화 자체는 어떠했는가? 영화를 보지 않고는 길이 없기에 결국 나는 고이 아껴둔 KT 포인트를 사용해 극장으로 향했다. 그리고 주머니 동전을 털어 사이다를 샀다. 영화가 시작할 때쯤엔 차갑고  쏘는 맛이었던 사이다가, 영화가 끝나고 자리에서 일어날 때쯤엔 얼음이 녹아 이도 저도 아닌 밍밍한 설탕물이 되어 있었다.


마치 영화처럼 말이다.


<신세계> 흥행 감독의 반열에 올랐고, 이전에도 <악마를 보았다> <부당거래> 각본을 쓰며 흥행 작가로 이름을 날린 박훈정 감독의 신작 <VIP> 북한 고위층의 자제이자 연쇄강간살인범인 김광일(이종석) 사이에 두고 그를 체포하려는 경찰 채이도(김명민) 그를 보호하려는 국정원 요원 박재혁(장동건), 거기에 더해 국정원으로부터 김광일을 인도받고자 하는 CIA 요원 (피터 스토메어) 김광일을 목표로 북한에서 서울로 건너온 리대범(박희순) 각자의 목적을 가지고 대립한다는 내용의 영화다.


얼핏 보면 감독의 전작인 <신세계> 확장된 구조라고 생각할 있겠으나, 박훈정 감독은 전작과는 전혀 다른, 또한 결정적인 선택을 하게 된다. 사람이 아닌, 사건에 집중하기로 것이다.


그가 각본을 류승완 감독의 <부당거래>, 그의 흥행작 <신세계> 되짚어 보자.


<부당거래> 경찰과 검찰, 그리고 스폰서 사이에서 벌어지는 이야기라면 <신세계> 경찰과 거대 범죄조직, 그리고 경찰의 비밀 작전으로 범죄조직에 위장 잠입한 이자성의 이야기라고 있다. 누군가에게 영화의 이야기가 어떻게 펼쳐지는지 물어본다면, 줄거리를 상세하게 풀어놓을 있는 사람은 그리 많지 않으리라 생각한다. 하지만 영화 캐릭터의 행동이나 대사만큼은 강렬하게 남아 있을 것이다. 심지어 영화를 보지 않았어도 "호의가 계속되면 그게 권리인 알아요"라는 대사나, <신세계> 엘리베이터 신만큼은 모르는 사람이 없을 것이다. 사례는 그간 박훈정 감독이 이야기 속의 사람에 집중해 왔음을, 그리고 선택이 관객들에게 적중해 성공하였음을 단적으로 드러낸다. 하지만 그의 신작 <VIP>에는 사람이 보이지 않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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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 인물들은 평이하기 짝이 없다. 초반의 자극적인 장면이 무색하게도 연쇄강간살인범인 김광일은 부잣집 망나니와 크게 다르지 않아 보이고, 경찰 채이도는 시종일관 욕과 담배연기를 내뱉으며 동료 경찰들도 부담을 느낄만큼 과격한 수사를 일삼지만 분노의 이유가 충분히 설명되지 않은 채, 그저 폭력경찰로만 남는다. 국정원 요원인 박재혁은 자신의 안위와 윤리적 가치, 거대 조직의 압박 사이에서 갈등해야 마땅함에도 그저 무기력한 중년 남성일 뿐이고 무려 북한에서 (아마도 목숨을 걸고) 넘어왔을 리대범은 채이도의 이란성쌍둥이인 무자비한 살인귀일 , 행위의 원인은 충분히 다루어지지 않는다. 모든 주역들이 입체감이라고는 하나 없이 지루한 스테레오타입으로만 존재할 뿐이다.


이미 영화를 관람한 이들은 고개를 갸웃 거릴지도 모를 일이다. 그들의 행동에 원인이 되는 사건은 영화에서 충분히 설명되기 때문이다.  그대로사건 충분히, 아니 지나치게 반복적으로 설명된다. 어느 정도인가 하면, 이미 인물이 대사로 설명한 내용을 이후에 플래시백으로 다시 보여줄 정도다. 하지만 그럼에도 나는 설명이 부족하다고 느꼈다.


사건 대한 인물의리액션 없기 때문이다.


우리는 사건만으로 긴장감이나 분노, 통쾌함을 느끼지 않는다. 사건 속의 인물의 리액션을 통해 그의 감정을 공유하는 쪽이 훨씬 자연스럽다. <신세계> 이자성이 조직과 경찰사이에서 갈등할 , ‘- 내가 조만간 걸릴 같네? 이거 난감하네.' 하며 무던하게 넘겼다면, 우리는 그럼에도  인물이 다급하고 위험한 상황임을 알아서 받아들이며 긴장감을 느낄 있었을까.


모두가 간절한 상황임은 틀림이 없는데, 인물들은 마치 부처인 꼼짝도 않는다. 관객들이 감정이입 하기에 가장 용이한 캐릭터인 박재혁이 겨우 한 방울이나마 흘리는 상황은 그가 사우나에 들어갔을 때 뿐이고, 채이도는 평상시에도 워낙 욕쟁이에 폭력적인 헤비스모커인지라 결정적 상황에서의 욕도, 폭력도, 담배도 힘을 잃는다. 그가 원하는 대로 수사가 진행되지 않을 수사본부를 부수며 광분하는 장면에서, 불의에 분노하는 경찰이 아니라 미운 살이 떠올랐다면 다한 아닌가.


그리고, 어쩌면 가장 설명이 필요했던 캐릭터인 김광일을 묘사하는 데 있어 감독은 최근 문제가 되고 있는 신으로 모든 설명을 대신 뒤,얼마나 나쁜 놈인지 봤지? 이제 맘껏 미워하면 라는 식으로 퉁치고 넘어가 버리는 하다. 영화 후반부에 김광일이 처음으로 평정심을 잃고 분노하는 원인이며, 동시에 채이도가 심각한 부상을 당하는 결정적 원인이 되기도 하는 한 마디 어찌나 어이가 없는지 실소를 자아내기에 충분하다.


길어야 10. 128분이라는 러닝타임에 10분만 캐릭터의 내면묘사에 활용했다면, 나의 평가는 현저히 달라졌을 것이다. 처음부터 끝까지 김광일이라는 인물로 긴밀히 연결되어야 마땅한 다른 인물들의 시너지는 전혀 다루지 않은 개인플레이를 시켜 놓고서는, 마지막 장면에서 그들의 모습을 플래시백으로 보여주며 모든 것이 김광일을 쫓다가 허무하게 사라진 이들의 복수라는 팀플레이식으로 표현한다면, 엔딩이 어떻게 힘을 받을 있겠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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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야기의 전개를 철저히 사건 중심으로 진행하며, 사건 인물들의 묘사마저도 사건을 설명하는 것으로 대신하기로 결정한 순간, 모든 것이 망가져버린 셈이다.


박훈정 감독은 최근 인터뷰에서 차기작 <마녀> 대한 이야기를 하던 <VIP> 문제가 장면에 대해 이런 말을 덧붙였다. "나조차도 불편한 장면이었기에 파장이 있을 것이라는 예상은 했지만 예상보다 강한 비판이 있었다. 이번 논란을 겪으며 여성에 대한 나의 이해도가 떨어지는 아닌, 여성에 대해 내가 아예 무지한 아닐까 생각했다" . 그의 고민을 적극 환영한다.


장르영화에서 잔혹한 장면은 어쩌면 필수불가결한 요소인지도 모른다. 더군다나 연쇄강간살인범을 묘사하는 데에 있어 여성 피해자의 모습을 보여주는 선택을 하지 않기는 쉬운 일이 아니라고 생각한다. 하지만, 쉽지 않을지언정 불가능하지 않다는 또한 분명하다. 영화 역사에 길이 남을 캐릭터인 <양들의 침묵> 한니발이나 <다크 나이트> 조커, <사이코> 베이츠는 그렇게 탄생했다.


여성으로만 국한하는 것이 아니라, 어떤 잔인한 장면에도 충분히 고민하고 영화 속에서 책임을 다하기를, 그저 관객들에게 쇼킹함과 불편함만을 남기는 도구로 사용하지 않기를 장르 영화의 광팬으로서 기대한다. 그것이 가능하다면, 충분히 고민한 흔적이 보이는 장면에까지 장르영화의 특성으로서 이해해주지 못하고 비판의 칼날을 세우는 관객은 많지 않으리라 생각한다. 더불어, 논란이 여성 주인공에, 여성 악당이 등장하는 차기작 <마녀> 엄청난 자양분이 것이라 확신한다. <VIP> 박훈정 감독이 끝내주는 장르영화 감독으로 한 단계 진일보하기 위한 디딤돌이라고 여기면 좋겠다.


물론 제작사나 배급사는 엄청나게 싫어할 이야기겠지만 말이다. 





나피디


편집 : 꾸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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