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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자아이들과 치고받고 싸우던 ‘골목대장’ 여자아이들은 하나둘 사라졌다. 막 2차성징이 시작된 여자아이들은 남자아이들에게 가슴을 맞고 돌아와 울곤 했다. 또래보다 키와 덩치가 엄청나게 컸던 그 아이, 약간 어눌하지만 여자아이들 앞에 나서 싸우며 ‘왕언니’를 자처했던 그 애는 더 이상 어떤 위협도 되지 못했다. 남자아이들은 그 애의 육중한 몸과 거대한 가슴을 두고 키득거렸다. 머지않아 누군가 그 애를 ‘따먹었는데’ 너무 못생기고 뚱뚱해서 엎어놓고 했다는 소문이 돌았다. 초등학교 앞에는 양팔을 벌리고 자전거를 타면서 지나가는 여자아이들의 가슴을 실수인 척 만지고 지나가는 변태가 있었다. 내가 태어나서 처음 겪은 성추행이었다.


중학교에 진급하면서 여자아이들은 ‘운동장에서 쫓겨났다.’ 남자아이들이 달리기 연습을 하는 여자아이들의 출렁이는 가슴을 관찰했기 때문에, 여자아이들은 팔뚝을 옆구리에 붙이고 주먹을 가슴 앞에서 흔들며 뛰는 방법을 익혔다. 남자아이들은 그 ‘여자다운’ 달리기 자세가 우스꽝스럽다고 흉내를 내며 웃어댔다. 여자아이들은 변화한 몸을 창피해했다. 어느 날엔 중년 남교사가 수업 시간 교탁 선반에 성기를 비비며 자위를 한다는 제보가 아이들을 뒤집어놨다. 아이들은 꾀를 내서 교탁에 분필 가루를 묻혀두었고, 바지춤 앞섶이 하얗게 되어 교실을 나간 남교사에게는 ‘자위맨’이라는 별명이 붙었다. 남자아이들은 각종 도구를 활용한 창의적 자위 스킬을 공유했는데 어찌나 떠들썩하던지 그 이야기가 내 귀에까지 흘러들어왔다. 그즈음 영화 <몽정기>가 개봉했다. 나는 그렇게 동급생들도, 선생님도, 옆집 오빠도, 누구네 아빠도, 모든 남자는 자위나 섹스를 ‘해야만 한다’는 사실을 받아들였다. 남자의 성욕은 통제가 불가능하다고 온 세상이 열변을 토하고 있었기에.


여고생들은 화장을 시작했다. 교사들은 화장한 여학생을 지목해 “호박에 줄 긋는다고 수박 되냐”고 구박했다. 그래 봐야 못생긴 얼굴이라는 뜻이었다. “술집 나가냐”고 비웃기도 했다. 젊은 여교사는 남고생들이 주도하는 파워 게임의 먹잇감이었다. 그 시기에 이미 성인 여성을 깔아뭉갤 만큼 강력한 젠더권력을 가지게 된 남자아이들은 꽤 으스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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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BS>


점심시간 복도에서는 일진 남자애들이 같은 무리의 여자애들을 발로 차며 장난치는 풍경이 연출되었다. 그리고 동네 중학생들도 “둘이 나가서 셋이 나온다”고 수군댈 만큼 평판이 아주 나빴던 내 모교, 그래서 ‘뺑뺑이’ 배정 후 나를 울게 만들었던 학교에 마침내 ‘섹스 스캔들’이 터졌다. 한 여학생이 찍은 누드 동영상이 같은 학년 남학생들 사이에 쫙 퍼진 것이다. 소문은 삽시간에 번졌다. 여학생들은 수군거리며 피해자를 욕했고, 남학생들은 피해자의 교실까지 찾아가 면전에 모욕을 줬다. 교사들도 더는 모른척할 수가 없었다. 여학생은 도망치듯 전학을 갔다. 동영상을 유포하고 돌려본 남학생 무리는 가벼운 징계를 받고 학교생활을 지속했다.


이때까지 아무도 우리에게 “그러면 안 된다”는 말을 해주지 않았다.


납작한 가슴이 아닌 유방을 갖게 되는 순간부터다. 이 사회에서 지극하게, 그리고 지독히도 성애화된 ‘젖’을 달기 시작하면서 여성은 ‘기본형 인간’으로부터 급격히 갈라져 나온다. 남자됨은 더 많은 자유를, 여자됨은 더 많은 제한을 불러오는 것처럼 보였다. “남자가 그럴 수도 있지”라는 관용과 격려가 남자아이들의 세계를 확장하는 동안, 여자아이들이 딛고 서 있던 영토는 “여자가 그러면 못 쓴다”고 혀 차는 소리에 가로막혀 점점 축소되었다. 나는 의문을 품은 채 성 역할 속으로 끌려들어갔다. 다리를 벌리고 앉는 버릇, 팔자걸음을 고치는 것부터 시작이었다. 자궁 단면도를 펼쳐 보이며 출산하는 모체로서의 기능성을 강조하는 성교육 덕분에 여성의 외음부가 어떻게 생겼는지 포르노를 보고 나서야 알았다. 다년간의 성 경험에도 섹스를 요도로 하는 줄 알만큼 나의 동성 친구들도 자기 몸에 무지했다. 여자들은 나도 잘 모르는 내 ‘몸’가짐을 외부로부터 지키고 있었다. 이유는, 그냥 그러라고 배웠으니까. 남자아이들이 자위를 하고, 동정 딱지를 떼고, 여자 따먹은 것을 훈장으로 여기는 사이 여자아이들은 걸레라고 욕먹기 싫으면 까막눈 처녀가 되어야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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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차성징을 기점으로 여성과 남성 사이에 성립되는 정복지-정복자 구도는 여성성과 남성성을 결정한다. 욕구, 야망, 무절제, 폭력성 등을 남성성으로 규정하는 문화는 여성성이라는 대립항의 존재로 완성된다. “남자가 그러면 안 돼”라는 말은 여성성을 회피나 극복의 대상으로 설정하는 반면, “여자가 그러면 안 돼”라는 말은 여성이 침범할 수 없는 전유의 영역으로 남성성을 보존한다. ‘남자니까’, ‘여자니까’ 무엇을 해야 하고 하면 안 된다는 주문을 이행한 아이들은 각자의 방식으로 남성성을 흠모하도록 자라난다. 여성은 남성의 사랑을 받음으로써 남성성의 우산 아래 보호를 받고, 남성이 궁극적인 남성성을 증명하기 위해서는 여성보다 동족의 인정이 필요하다. 성별 모델의 전형성은 결혼 제도 속에 들어갔을 때 극치를 달성한다. 여성성에는 남성의 노동력 회복(가사)과 신규 노동력 생산(출산)이라는 가정 내 ‘재생산’ 업무가 할당되고, 남성성에는 ‘남성들의 사회’에 진출함으로써 가정 안팎에서의 권위를 쟁취하라는 목표가 주어질 때: 가부장제의 충실한 하수인이 되는 것이다. 이 모델이 정답은 아니라고 말해주는 어른을, 나는 단 한 명도 만나본 적이 없었다. 전 생애에 걸쳐 전방위적으로 주입되는 ‘가부장제 교육’은 사실상 학교에서 본격화되었으니까.


하나하나 기억할 수도 없을 만큼 많은 사건이 있었다. 나는 5년마다 리셋되는 아주 나쁜 기억력을 갖고 있어서 학창시절의 많은 부분을 잊고 살았는데, 예전 일들을 조금이나마 복기할 수 있게 된 것은 SNS상에서 공교육 현장의 여성혐오 실태를 고발하는 공론화 계정들 덕분이었다. 분노와 공포로 써 내려간 글들을 읽으면서 나는 십 몇 년 전과 별로 달라지지 않은 현실에 적잖이 충격을 받았다. 아니, 어떤 면에서는 더 나빠진 것도 같았다. 나는 오랫동안 떠나있던 그 장소에서 지금은 무슨 일들이 일어나고 있는지 전혀 몰랐다. 여자아이들이 조금만 목소리를 높이면 ‘메갈’이라고 손가락질당한다는 사실을, ‘앙 기모띠’라는 유행어가 여자아이들의 입을 틀어막는다는 사실을, 아직도 남교사들이 여학생들에게 성희롱을 일삼는다는 사실을 말이다. 구태를 유지한 학교 풍경은 세대가 교체되면 세상이 ‘저절로’ 개선되리라는 순진한 믿음을 비웃고 있었다. 사실 이것은 믿음이나 희망이기보다, 교육 현장에서 탈출한 비당사자로서 취할 수 있는 가장 게으른 선택지 – 수수방관이라 해야 옳을 것이다.


물론 내 세대에도 여자아이들을 집요하게 괴롭히는 남자아이들, 여자아이들의 발언권 행사를 견디지 못하는 남자아이들은 있었다. 그러나 나는 이 사회의 여성들이 점점 막다른 골목을 향해 가고 있다고 느낀다. 최근 남성 유튜버 ‘신태일’과 ‘김윤태’가 여성 유튜버 ‘갓건배’를 겨냥한 살인 협박 방송으로 관심 끌기에 성공한 뒤, 이에 뒤처질세라 ‘갓건배 저격 방송’에 뛰어든 남자들 가운데는 초등학생이 적지 않았다. 성인 남성들의 여성혐오 콘텐츠는 하루빨리 남성의 젠더권력에 탑승하고 싶어 안달이 난 남자아이들에게 “그래도 된다”는 허락을 내리고 있었다. 여자가 미우면 욕하고 죽이고 싶은 사람이 너뿐만이 아니라는 용기를 주고, 남성문화의 일원이 되는 것이 얼마나 안전하고 재밌는 일인지 가르치고 있었다. 늘 존재해온 여성혐오 문화가 영상매체 특유의 접근성을 타고 더 빠르고 쉽게 확산되는 이 시점에, “그럴 수도 있다”라거나 “그런 건 큰 잘못도 아니”라며 남자아이들의 허물을 감싸주기 바쁜 어른들만큼 “그러면 절대 안 된다”고 알려주는 어른도 많을지 생각해 봤다. 나의 학창시절, 나와 친구들이 분별력을 가진 교사들을 충분히 만났더라면 성인이 된 후의 나의 삶에도 유의미한 변화가 있었을 거라는 아쉬움이 있기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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페미니즘 교육은 너무 오래 지연됐다. 아이들을 아무런 ‘이즘’의 개입도 없는 중립 상태에서 교육해야 한다는 주장은 가부장제 또한 선택된 이념이라는 사실을 간과한다. 가부장제가 중립이라는 착각 속에서 아이들은 지배 이데올로기를 무조건 학습하도록 방치되어 왔다. 최근 온라인 매체를 통해 초등학교의 페미니즘 교육을 소개했던 M교사에게 쏟아지는 힐난은 이 사회의 진보를 가로막는 반동적 에너지의 크기를 반영한다. 처음에는 “여자아이들이 남자아이에게 운동장을 빼앗겼다”는 말이 어불성설이라 비난하더니, 뒤이어 M교사의 SNS와 블로그를 뒤져 논란의 소지가 있는 발언들을 캐기 시작했다. 밑도 끝도 없이 페미니즘은 ‘정신병’이라 주장하고, M교사가 부적절한 성교육을 했다거나 성 소수자 혐오를 조장했다는 헛소문을 퍼뜨리고, 관련 기사마다 따라다니며 악플을 달고 학교에 민원을 넣는 정력은 기존 지배체계를 방어하겠다는 의지에서 나온다. M교사뿐만 아니라, 이후 성평등 교육을 주제로 매체와 인터뷰를 했던 다른 교사들 역시 공격에 노출되었다(기사링크). 포털 사이트는 쏟아지는 혐오 발언에 아무런 조치를 하지 않았고, 교육청에서는 뒷짐 진 자세로 사태를 방관한다. 이에 대한 항의의 표시로 SNS에서 시작된 ‘우리에겐_페미니스트_선생님이_필요합니다’ 해시태그는 지난 27일 밤 절정을 이뤘다. 수없이 많은 시민이 해시태그 손글씨와 함께 교육현장에서의 성차별 경험을 공유하거나 페미니스트 (예비)교사임을 인증하며 응원 의사를 밝혔다.


‘앞으로도 한동안 페미니즘을 주창하는 많은 여성은 신분을 감추고 활동하게 될 것이다. 그 동력을 좌절시키는 온갖 훼방들에 맞서 자기 밥그릇조차 지키기 쉽지 않아 보인다. 그래서 더더욱 우리는 지체할 수 없다. 아이들을 동등한 시민이 아니라 여성과 남성으로 성장시켜 온 교육의 실패를 지금이라도 바로잡아야 한다. 이러한 목표를 달성하기 위해서는 가부장제와 여성혐오 문화의 압력 속에서 바른 방향을 설정해줄 수 있는 교사가 절실히 필요하다. 바로 페미니스트 선생님이다.



#우리에겐_페미니스트_선생님이_필요합니다





탱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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편집: 딴지일보 챙타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