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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5. 03. 30. 월요일

햄촤











어릴 땐 있지, 악당이라고 하면 마냥 못되게 생긴 얼굴이 전부인 줄 알았어. 공포영화이긴 하지만 <나이트 메어>의 프레디 크루거처럼 얼굴에 막 화상을 입었거나 <헬레이저>의 핀헤드처럼 얼굴에 바늘이 막 꽂혔다던가, 아니면 <배트맨>의 조커처럼 얼굴에 회반죽을 바른 듯한 화장에 찢어진 입꼬리를 가진 뭐 그런 얼굴들 말이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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좌측부터 프레디, 핀헤드, 조커

 

어릴 때 놀이터에서 친구들을 만나서 놀면 영웅 놀이 같은 걸 즐겨했었지. 영웅의 이름은 그때그때 유행하던 걸로 꾸준히 바뀌었어. 어떤 날엔 실버호크였다가, 어떤 날엔 고바리안이었다가, 또 다음 달엔 캡틴 파워가 되었다가 뭐 그랬지. 우리들의 어린 날에 영웅은 항상 넘쳐나서 이름이 동날 일은 없었어.

 

문제는 누군가는 반드시 악당 역할을 맡아야 한다는 거였어. 보통은 무리 중에서 가장 나이가 어리거나, 나이가 가장 어리지는 않지만 국민 학교 3학년 이상 나이 먹은 형이 없는 애가 악당을 떠맡았지. 때로는 자기 동생을 놀이터에 데리고 나온 형이 자기는 주인공을 맡겠다면서 대신 동생에게 악역을 떠넘기며 다른 아이들과 흥정하는 진풍경도 벌어졌어.

 

기억은 잘 안 나지만 나도 악당 역할을 종종 떠맡았던 것 같아. 물론 기분이 썩 좋지는 않았겠지만, 나는 영웅을 하겠다고 다른 아이들과 말다툼을 하느니 그냥 떠맡는 편이 속편한 그런 성격이었어. 내가 하지 않으면 다른 누군가는 또 악당이 되어야만 하는 거잖아. 누군가는 서운함과 아쉬움을 끌어안아야만 놀이가 시작될 수 있다는 게 어린 나로서는 이해가 좀 가지 않았지만 받아들였었지.

 

그런데 어느 날이었나. 부모님이 날 극장에 데리고 가셔서 <스타워즈: 제다이의 귀환>을 보여주셨는데, 다스 베이더가 너무 멋져 보이는 거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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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F까지 진출한 다스 베이더 옹 올레 WARP~!”

 

물론 루크 스카이워커나 한 솔로도 멋있었지만, 어린 내 눈엔 이름도 잘 모르는 서양인 아저씨들의 얼굴보다는 로봇을 연상시키는 검은 헬멧을 뒤집어쓴 모습이 훨씬 뇌리에 깊이 각인되어버렸던 걸까.

 

TV에서 매일 해주는 만화영화가 아니었기 때문에 유행처럼 아이들이 <스타워즈> 놀이를 하는 일은 드물었지만, 어쩌다 기회가 생기면 나는 다스 베이더 역할을 맡는 것도 주저하지 않았어. 물론 다스 베이더는 전형적인 악당은 아니었지. 그는 주인공인 루크의 아버지였고, 나름대로 사연이 있어 악당이 되었지. 무엇보다 마지막엔 자신을 희생하면서 아들을 구하고 황제를 처치하기까지 했으니까(수십 년 전 영화 내용을 갖고 스포일러라고 딴죽 걸진 않겠지?).

 

그렇기에 다스 베이더라는 캐릭터에 내가 더욱 매료되었던 것일지도 모르지. 다만 마지막에 검은 색 가면을 벗지 않았더라면 더 좋았을 텐데. 하얀 얼굴에 대머리를 한 아저씨가 나타나서 조금 상처를 받았거든. 내심 <기동전사 건담>샤아 아즈나블같은 모습이라도 기대했던 걸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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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와 만화임을 감안하더라도 극복하기 힘든 갭...

 

다스 베이더라는 캐릭터를 통해 악당 역할도 가끔 나쁘지 않다는 생각을 하게 된 것만으로도, 어린아이에겐 무언가 커다란 내면의 변화는 아니었을까? 아니면 이미 어른이 된 시점에서 어린 시절 일화에 과하게 의미부여를 하고 있는 걸까.

 

아무튼 나이를 먹어가면서 악당이 꼭 그렇게 기괴하고 특이한 얼굴을 가져야만 악당이 아니라는 것도 알게 됐어. 오히려 이 악당이 과연 진짜 악당이 맞는 건지, 악당이라 생각했던 사람이 사실 영웅은 아니었는지, 영웅이라고 칭송 받는 놈이 사실은 나쁜 놈은 아니었는지 헷갈리는 경우도 많이 생겼지. 살면서 우리가 보게 되는 세상에는 어릴 적 만화영화에서처럼 간단명료하게 영웅/악당으로 나누기 어려운 일들로 가득하더라.

 

아들을 살리기 위해 인질극을 벌인 영화 <Q>의 아버지를 놓고 우리는 단순히 법을 어겼다는 이유로 그를 악당이라고 할 수 있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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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Q>의 한 장면

 

만약 내가 <퍼펙트 월드>에서 어머니에게 학대 받던 아이를 데리고 새로운 삶을 꿈꾸던 탈옥수 버치의 이야기를 현실의 신문기사로 접했다면, 그저 탈옥수에 아동유괴까지 한 파렴치한 이상으로 생각하진 않았을 거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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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퍼팩트 월드> 중 버치

 

<다크나이트>에서 도로를 종횡무진 하는 배트맨의 모습과 하늘을 자유롭게 날아다니는 아이언 맨의 활약에 우리는 카타르시스를 느끼지만, 현실에선 그들도 교통법규와 항공법을 지켜야 하는 한 명의 시민일 뿐이잖아. 법이 누구에게나 평등하다는 말대로라면 두 사람도 크건 작건 범죄자로 구분될 여지가 있지 않나? 막말로 두 사람은 갑부라서 벌금을 내거나 다른 사람의 자동차나 공공기물에 입힌 피해를 보상할 순 있다 쳐도, 그러면 가난하면 영웅질도 못한다는 얘기로 흐르는 것 같고 말이야.

 

누군가의 거액의 기부행위가 그 사람의 탈세나 비리라는 죄목을 덮어주는 면죄부가 될 순 없듯이, 영웅들의 등록, 허가되지 않은 불법개조 차량이나 교통법 위반행위를 일일이 적발한다면 그들 또한 어떤 의미에선 악당에 가깝다고 볼 수 있지 않을까?

 

, 하긴 그래서 마블 코믹스에선 <시빌 워>라는 이벤트가 벌어지기도 했었지. 곧 제작될 <캡틴 아메리카>의 세 번째 영화의 부제 또한 <시빌 워>이기도 하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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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웅과 악당 간의 단순한 선과 악의 대결이 아닌, 영웅과 영웅끼리의 이해관계로 인한 갈등과 대결이라니, 어찌 흥미롭지 않을 수 있겠어.

 

현실 쪽으로 조금 더 시선을 기울이면 <살인의 추억>이나 <조디악>처럼 실제 사건을 바탕으로 한 영화들도 있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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범인의 얼굴이 드러나지 않는 두 영화의 포스터

 

두 영화는 알고 보면 전혀 다른 스타일의 영화지만, 미결 사건으로 남은 연쇄살인사건을 다뤘다는 소재의 공통점 때문에 <조디악> 개봉 당시 함께 언급되기도 했지. 그래서 그런지 조금은 길고 느린 템포의 <조디악>긴장감 없는 다큐멘터리 같은 영화라는 관객들의 혹평도 많았는데, 그렇게 단정 짓기엔 좀 억울한 부분이 있지 않나 생각하지만 그건 좀 다른 맥락이니 일단 넘어갈게.

 

여하튼 <살인의 추억><조디악> 두 영화는 모두 범인의 모습을 보여주지 않는다는 점, 고쳐 말하면 범인이 확실히 누구인지 영화 속에서 지목하지 않는다는 점에서도 비슷한데, 바로 그 점이 두 영화의 분위기를 무섭게 만드는 주요한 요소라고 생각해. 범인이 드러나지 않는다는 것, 잡히지 않는다는 것은 단순히 그 모습이 드러나지 않는다는 점에서 찝찝하고 무서움을 주기도 하지만, 무엇보다 범인의 입으로 범행의 이유를 직접 들을 수 없다는 점이 어쩌면 가장 무서운 점이 아닐까.

 

왜 그렇잖아. 영화 속 악당들의 가장 식상한 행동 패턴 중 하나가 주인공을 위기에 몰아넣고 방아쇠 한 번만 당기면 승리할 수 있는데, 거기에 대고 주절주절 자신의 범행 동기와 앞으로의 계획을 장황하게 늘어놓다가 결국 역전의 빌미를 주고 모든 게 수포로 돌아가는 바보 같은 상황이잖아. 이런 애들을 요즘말로 설명충(說明蟲)’이라고도 하더라. 보는 사람은 조금 짜증날지는 몰라도, 아무런 단서도 범행 이유도 제공해주지 않는 악당보다는 주인공의 입장에선 차라리 설명충이 낫지 않을까?

 

<살인의 추억>에서 송강호랑 김상경이 박해일 붙잡아놓고 나중엔 그러잖아. “왜 그랬어?”하고 묻고 묻다가 안 되니까 네가 그런 거 맞지? 너 범인이지?”하며 거의 읍소라도 하듯이 묻거든. 하도 답답하니까, 이유 그딴 것도 안 궁금하고 일단 범인이 누구인지나 알고 싶은 거야. 물론 그건 영화를 보는 관객들도 마찬가지였겠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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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디악>의 주인공들도 답답한 건 마찬가지야. 80년대 시골 경찰의 막가기 식 수사방법이 두드러지는 <살인의 추억>과 달리 <조디악>에선 기자와 형사가 함께 머리를 맞대서 암호도 풀고, 필적 감정도 하고, 생존자를 만나서 면담도 하고 갖은 방법을 다 썼는데도 아, 답이 안 나오는 거라.

 

영화 속에서 형사들이 조디악 살인범을 소재로 한 영화 <더티 해리>를 보고 나오는데 영화를 보다 중간에 나간 형사 한 명이 어떻게 끝나?’하고 물어봐. 그러자 총으로 쏴서 죽이던데하며 한 형사가 대답하고 질문한 형사는 피식 하며 실소를 터트리는 장면이 있는데 그게 참 씁쓸한 뒷맛을 남겨. 현실에선 범인을 잡더라도 법규와 절차 다 무시하고 그렇게 쉽게 처벌할 수는 없다 이거지.

 

두 영화는 결국 가장 범인 같은 사람을 지목하긴 하지만 관객에게 확답은 주지 않아. 현실에서도 미결인 사건을 바탕으로 했으니 어쩌면 당연한 얘기지. 그래서일까, 영화를 보고 극장을 나서 그 이후에도 묘한 여운이 남아.

 

봉준호 감독도 <살인의 추억>을 만들면서 영화가 개봉하면 극장 어딘가에 앉아서 실제 범인이 관람하고 있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을 했다고 하잖아. 어쩌면 나와 같은 상영관에 범인이 앉아있었을지도, 또 영화를 보며 자신의 꼬리가 여전히 밟히지 않았다는 사실에 뿌듯한 미소를 짓고 있었을지도 모른다고 생각하면 어쩐지 오싹한 기분이 들어. 그놈들은 어디서 뭘 하고 있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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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건 당시 수배 전단지

 

봉준호 감독의 또 다른 영화 <괴물>도 문득 떠올려봤는데, 여기서 악당의 의미는 좀 더 헷갈리고 애매모호해지는 것 같아. 송강호 딸내미 고아성을 잡아간 건 분명히 괴물이잖아? 영화 제목도 <괴물>이고. 그러면 여기서 악당은 분명히 괴물이어야 말이 되는데 영화를 끝까지 보면 꼭 그렇지만은 않단 말이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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애초에 괴물이 태어난 건 미군기지에서 포름알데히드를 한강에 버렸기 때문이고, 고아성이 살아있는데도 불구하고 제때 구하러 가지 못한 건 의사들도 공무원들도 송강호와 가족들의 말을 믿어주지 않았기 때문이고, 그나마 가족끼리라도 아성이를 구하려고 하는데 당국에선 현상금까지 붙여서 수배를 하지를 않나.

 

뭐 이렇게 책임소재를 묻고 따지다 보면 누가 제일 잘못했는지, 가장 나쁜 놈이 누구인지 알 수가 없는 지경에 빠져버리지 뭐야. 따지고 보면 괴물은 그저 배가 고파서 사람을 물고 갔을 뿐인데.

 

그리고 얼마 전에 <호빗>3부작이 마무리됐지. <반지의 제왕>개봉한다고 좋다며 극장 쫓아간 게 엊그제 같은데, 그게 벌써 2001년의 일이야. , 시간 진짜 빨리 가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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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느덧 고전이 되어버린 <반지의 제왕>

 

<반지의 제왕>의 악당 이름이 뭐더라? 나즈굴, 사루만 이런 애들 말고 끝판왕 말이야. 그 눈깔 커다란 애... 아 맞다, ‘사우론’. 걔가 왕이었지. 그런데 생각해보면 걔가 한 게 뭐 있나 싶더라고. 물론 그 많은 오크 군대랑, 아홉 명인가 되는 나즈굴들이랑 마법사 사루만도 사우론의 꼬붕이었지. 그건 나도 알아. 그러니까, 실질적으로 나쁜 짓은 걔네들이 다 하고 사우론은 그냥 그 큰 눈깔로 지켜보기만 한 거 아니냐고.

 

근데 갑자기 그게 더 나쁘다는 생각이 드는 거라. 자기 손은 까딱도 안 하면서 밑에 있는 사람들한테 오만 나쁜 짓은 다 시키는 거 말이야. 걔가 원하는 것은 결국 프로도가 갖고 있는 절대반지인데, 절대반지는 권력을 상징하잖아. 사우론은 그 절대적 권력을 얻으려고 전쟁을 벌이고, 숲을 밀어버리고, 무고한 사람들을 학살한 셈인데 그 과정에서 자기는 뒤에 쏙 빠진 채 높은 산 위에서 그 큰 눈깔만 번뜩거리고 있었던 거야. 얄미운 놈. 3부작의 마지막 편인 <왕의 귀환>이 개봉한지도 벌써 10년이 지났는데 괜히 사우론이 요즘 누구랑 닮은 꼴 아닌가 싶은 생각도 잠깐 들었는데, 뭐 그건 나만의 착각일 듯.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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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래서 요지가 뭐냐고? 딱히 요지는 없어. 영화 속 악당들을 생각하며 횡설수설하다보니 글이 여기까지 와버렸네. 그냥, 요즘 들어 자꾸 생각하게 되는 것 같아. 영화 속에서조차 쉽게 나쁜 놈을 구분할 수 없고 악당을 잡을 수 없다는 게 내가 나이를 먹어서 그런 영화가 눈에 더 들어올 뿐인지, 또 현실 속 진짜 악당은 어떤 놈들인지, 우리가 매일 같이 인터넷에서 기사를 접하고 댓글을 쓰듯 그렇게 쉽게 누군가는 선인이고 누군가는 악인이라고 재단할 수 있는 문제인지 뭐 그런 문제들.

 

어쩌면 우리가 매일 나쁜 놈들이라고 누군가에게 손가락질하는 사이에 사우론처럼 더 큰 악당들이 더 커다란 악행을 우리 몰래 저지르고 있는 건 아닐까. 손가락질을 멈춘다고 또 뭐 뾰족한 수가 있긴 할까.

 

또는 더 멀리 있는 악당을 찾는답시고 정작 내 주변에 있는 악인들을 모른 채 지나치는 건 아닐까. 혹은 나 역시 나도 모르게 누군가에게 악당이 되어가고 있진 않을까. 뭐 그런 생각들을 하고 있다는 그냥 그런 얘기. 이 글을 읽는 여러분 중엔 악당이 없길 바라며.




 


[악당 특집] 


"악당을 보았다!"







햄촤

트위터 : @hamchwa


편집 : 딴지일보 cocoa