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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케다 신겐이 물려받은(?) 카이(甲斐) 땅은 말 그대로 사방이 ‘적’으로 둘러막혀 있는 땅이었다(덤으로 기근으로도 유명했다). 남쪽으로는 스루가(駿河)의 이마가와 요시모토(今川義元), 동쪽으로는 사가미(相模 : 현재의 가나가와 현)의 호조 우지야스(北条氏康 : 신겐, 겐신과 함께 관동을 호령했던 패자)가 버티고 있었고, 서쪽으로는 아카이시 산맥(赤石山脈 : 남알프스), 북쪽으로는 아직 부딪히진 않았지만 평생의 라이벌이 되는 에치고(越後 : 현재의 니가타현)의 우에스기 겐신이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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딱 보면 알겠지만 섣불리 움직이기가 힘든 상황이었다. 농민이 곧 병사가 되던 시절. 농업 생산력이 뒤처진 카이의 다케다 가문은 살아남기 위해 어디든 치고 올라갈 수밖에 없었다.

 

결국 향한 곳은 시나노(信濃 : 현 나가노현)였다. 물론 시나노 지역이 젖과 꿀이 흐르는 가나안 지역은 아니었다. 넓기는 했지만, 비옥하다고 말할 수 있는 토지는 아니었다. 그래도 카이에서 말라죽느니 어디든 치고 올라가야 하는 게 현실. 결론은 시나노였다.

 

 

 

실수가 교훈이 될 때

 

21살 때 다케다 가문을 접수한 다케다 신겐은 다케다 가문의 숙원 사업이었던 시나노 진출에 나서게 된다. 아니, 시나노에서 먼저 치고 들어왔다. 신겐을 얕본 거였다.

 

“어린놈이 더 크기 전에 싹을 밟아놓자!”

 

결과는 양민학살. 1542년 스와 요리시게 가문이 박살 났고, 뒤이어 후지사와 요리시카 가문, 가시하라 기요시게 가문, 다카토 요리쓰구 가문이 차례차례로 박살이 난다. 문제는 이때부터였는데, 만만한 군소 영주들을 다 박살 낸 이후 시나노 연합군 포로 3천 명을 모조리 학살한 거였다.

 

“저기, 그래도 앞으로 다스릴 걸 생각한다면 무조건 다 죽이는 것보다는 우두머리 급만 처리하는 게 낫지 않겠습니까?”

 

“아예, 배신의 싹을 없애버려야 해. 우리는 이쪽에 들어온 세력이잖아. 시범 케이스란 걸 보여 줘야지만, 다른 놈들도 고갤 숙일 거야.”

 

신겐은 3천 명의 포로를 모조리 죽였고, 덤으로 여자와 아이들도 노예로 삼았다. 신겐 인생 최대의 악수(惡手) 중 하나였다. 이 때문에 시나노의 호족들과 백성들의 신뢰는 땅으로 떨어졌고, 이는 반란과 불복종으로 이어졌다. 이건 전초전에 불과했다. 진짜 악수는 따로 있었다. 바로 무라카미 요시키요(村上義清)와 전투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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북시나노의 맹주였던 무라카미 요시키요는 패배를 모르던 신겐에게 연거푸 패배를 안겨줬다. 특히 뼈아팠던 게 다케다 가문의 중신이었던 요코타 타카토시(横田高松), 와타나베 운슈(渡辺雲州)를 잃었다는 거다. 물론, 이후 전투에서 무라카미 요시키요를 토벌했고, 무라카미는 몰락하게 된다.

 

이 싸움을 통해 신겐은 세 가지를 얻게 된다.

 

첫째, 시나노의 확보

 

이건 더 설명할 필요가 없을 거다. 신겐은 다케다 가문의 숙원을 풀게 된다.북시나노를 완전히 확보한 건 아니었기에 훗날 분쟁의 불씨가 된다. 실제로 북시나노의 패권을 두고 신겐은 겐신과 맞붙게 된다.

 

둘째, 평생의 숙적 우에스기 겐신과의 조우

 

신겐에게 패한 무라카미 요시키요는 우에스기 겐신에게 몸을 의탁하게 되고, 그의 부하가 된다. 신겐과 겐신은 서로를 노려보며 피 튀기는 혈전을 벌이게 된다.

 

(다케다 신겐과 우에스기 겐신이 혈투를 벌였던 ‘카와나카지마 전투’에 대해서는 우에스기 겐신 편에서 다루겠다. 배경지식이 필요한 전투에 대해서는 따로 박스기사 형태로 작성해서 연재하겠다)

 

셋째, 개인적인 성장

 

시나노라는 발판을 확보한 후 신겐의 모습은 시나노 진출 전의 모습과 많이 다르다. 원래 그런 능력을 가지고 있었는데, 발현이 안된 것인지 아니면 시나노 진출에서 어떤 ‘교훈’을 얻은 것인지에 대해선 판단 내리기 어렵다. 개인적으로 무라카미와의 전투 이후 많은 부분에서 교훈을 얻었다는 생각이다. 이때부터 신겐은 ‘외교전’에 뛰어들게 됐고, 모략에 나서게 된다. 전쟁에 있어서도 변화된 모습을 보인다.

 

“싸우지 않고 이긴다.”

 

시나노 진출 이후 신겐은 전투의 방식이 달라졌다. 싸우기 전에 모략을 걸거나 외교적으로 유리한 정세를 만들었다. 만반의 전투 준비를 해 ‘이길 수 있는 싸움’을 만든 다음 전투에 들어선 거다.

 

전투에 대한 생각 자체가 바뀐 것이라 말할 수도 있다. 무라카미 군에게 참패한 이후 자신의 군사(軍師)였던 야마모토 간스케(山本勘助)에게 자신의 패인을 물었다. 이에 대한 간스케의 대답이 명언이다.

 

“10할의 승리는 10할의 패배를 부르는 법입니다. 오다이하라라에서 대승을 거뒀지만, 우에다하라에선 대패한 것만 봐도 알 수 있지 않나이까?”

 

이 말을 듣고 크게 깨달은 신겐은,

 

“무릇 승리는 5할의 승리를 최상으로 삼고, 7할을 중(中), 10할 완승을 하(下)로 삼는다. 5할은 용기를 낳고, 7할은 게으름을 낳고, 10할은 교만을 낳기 때문이다. 10할의 승리 뒤에는 10할의 패배가 따르지만, 5할만 이기면 질 때도 5할이면 수습이 된다.”

 

라는 말을 가슴에 담아두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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야마모토 간스케(山本勘助)

 

(신겐에게 ‘승리’에 관한 교훈을 안겨 준 야마모토 간스케는 말 그대로 ‘전설적인’ 참모였다. 그의 능력도 능력이지만 ‘존재’ 자체가 전설인 존재였다. 지금도 그가 실존했던 인물인지에 대해선 논란이 많다. 그에 대한 사료가 거의 없고, 의례 그렇듯 ‘영웅’의 이야기는 후세에 ‘영웅담’으로 각색돼 퍼지면서 간스케의 실존 여부를 확인하는 데 장애물이 됐다. 최근 들어 그의 이름 앞으로 작성된 문서가 발견되면서 실존설에 무게가 실리고 있다)

 

 

 

리더십이 필요했던 사정

 

다케다 신겐의 인생을 거슬러 올라가다 보면, 뭔가 좀 ‘괴리감’이 느껴진다. 영화나 드라마에서 보면 난세를 헤쳐 나간 ‘영웅’의 모습이다. 그를 주제로 한 일본의 수많은 저작물들(경제경영이나 리더십 관련 책자)을 보면, 신겐은 최고의 리더십을 발휘한 훌륭한 경영자처럼 보인다. 증거로 내놓는 것이 그 유명한 신겐의 ‘12훈(訓)’이다. 신겐이 부하들에게 남긴 12가지 교훈 정도로 보면 되는데, 그 내용은 참으로 고색창연(古色蒼然)하다.

 

1. 마음속에 딴 생각이 없으면 몸이 편하다.

 

2. 마음속에 자만이 있으면 존경심을 잃는다.

 

3. 마음속에 욕심이 없으면 의리를 행한다.

 

4. 마음속에 사심이 없으면 의심받지 않는다.

 

5. 마음속에 노여움이 없으면 말씨도 부드러워진다.

 

6. 마음속에 용기가 있으면 뉘우침이 없다.

 

7. 마음속에 인내심이 있으면 일을 성취한다.

 

8. 마음속에 탐심이 없으면 아부하지 않는다.

 

9. 마음속에 미혹이 없으면 남을 의심하지 않는다.

 

10. 마음속에 잘못이 없으면 두려움이 없다.

 

11. 마음속에 흐림이 없으면 항상 고요를 지킬 수 있다.

 

12. 마음속에 교만이 없으면 남을 공경한다.

 

참 좋은 말들이다. 그런데, 이 12개 교훈을 신겐은 실천했을까? 그의 행적을 토대로 이 12훈을 보면, “무슨 개소리야?”란 말이 절로 튀어나온다. 좀 더 직설적으로 말해볼까?

 

“해봤네. 해봤어.”

 

첫 번째 교훈부터 의심이 든다. 두 번째, 세 번째, 네 번째 교훈까지 계속 의심이 든다. 신겐의 행적을 보면, 딴 생각도 가지고 있었고 자만도 있었고(존경심을 잃었으니까) 욕심도 많았고(의리를 내팽개쳤으니까) 의심도 많이 받았다(사심이 있단 소리다). 그는 주변국 모두와 전쟁을 치렀고 동맹도 맺었다. 그리고 동맹을 내팽개치고, 어제의 동맹을 공격하기도 했다(그리고 가문을 박살 내고, 덤으로 아들도 죽인다).

 

좋게 말하자면,

 

“전국시대에서 살아남기 위한 냉정하지만 합리적인 선택”

 

나쁘게 말하자면,

 

“근시안적 시야를 가지고 눈앞의 이익만 챙기다 망한 경우”

 

라고 볼 수 있다. 신겐의 입장이 이해가 안 가는 건 아니다. 신겐은 어쩌면, ‘리더십을 강요’당했을지도 모른다. 카이, 시나노의 상황을 보면 쉽게 알 수 있다. 병농일치 사회에서 농업 생산량과 농민의 수는 곧 생존과 직결된 문제다. 카이는 척박한 땅이었다.

 

겨우 손에 넣은 시나노에서는 완전한 통제가 어려웠다. 다케다 가문은 느슨한 형태의 호족 연합체 성격을 띠고 있었다. 즉, 이들은 다케다 신겐의 절대적인 카리스마와 리더십에 기대어 유지되는 집단이었다. 살아남기 위해서는 싸워야 했고, 싸워 이겨야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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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케다 신겐이 백성들의 마음을 얻었다며, 그의 선정(善政)의 증거로 제시되는 ‘오공오민’ 정책도 따지고 보면, 신겐의 고육지책이라 볼 수 있다. 이 당시 세수체계는 칠공삼인이 기본이었다. 즉, 영주가 수익의 7을 가져가고, 농민이 3을 가져갔다.

 

신겐이 들어서고, 이를 5대 5로 조정한 거다. 백성들에게 더 많은 수익이 돌아가도록 한 자체는 옳은 일이지만, 왜 그랬는가의 배경을 봐야 한다. 다시 말하지만, 카이는 척박한 땅이었다. 여기에 거듭된 전쟁으로 농민들이 전장으로 끌려다녔다. 이 상황에서 농민들의 불만을 잠재워야 했다.

 

신겐의 냉혹함을 생각했을 때 아무런 이유 없이 ‘선의(善意)’로 세금을 내려줬다고 보긴 어렵다. 신겐의 성격까지 갈 필요도 없다. 대부분의 권력자들은 자신에게 어떤 위협이 오기 전까진 보수적인 모습을 보인다. 만약 어떤 ‘필요’가 없었다면, 신겐이 선정(?)을 베풀었을까? 그는 살아남기 위해 할 수 있는 모든 걸 다 한 거다.

 

 

 

다음 편에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