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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대중 조선일보 고문의 명문을 단어 몇 개만 바꿔 봤다. 역시 명문은 이렇게 해도 말이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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철들고 30년을 지켜본 조선일보라는 신문의 실체는 한마디로 '정치적 확신범'이었다. 오로지 자기들의 신념에 따라 눈 감고 귀 닫고 우회전에 매진한, 좋게 말해 의지의 연속이었고 비판적으로 보면 오만과 불통의 과속이었다.

 

연역적으로 관찰하건대 그들에게는 몇 가지 기본 룰이 있다.

 

한국의 진보 세력(이랄 것도 없지만 조선일보의 눈에 진보로 보이는 집단)에 대한 국민의 실망과 환멸을 100% 활용한다. 실수 하나 있으면 두고두고 물고 늘어진다. 김대중 노무현 정권 때 했던 덮어놓고 물어뜯기를 반복한다. 반대자는 '좌경'으로 몬다. '내로남불'의 선봉이다. 트럼프의 '천방지축'과 김정은의 '핵'을 이용해 한반도의 전쟁과 공포의 기운을 조성한다. 기업의 구조조정(이라고 읽고 자유로운 해고라고 읽는다)을 통해 자본 만능의 기틀을 세운다 등으로 요약할 수 있다.

 

조선일보는 모든 정권이 집권하자마자 재빨리 자신들의 입맛에 맞는 아젠다를 설정했고 스스로 놀랄 시일 안에 아젠다 설정 효과를 따냈다. 좌랄 것도 없는 이들을 좌로 몰아 좌·우 대립을 부추겼고 '남·남갈등'을 우려하면서 갈등의 원인을 숨겼다. 그 와중에 저들은 나라 전체를 기울어진 운동장으로 만들어갔다. 자신들의 영향력을 정치·교육·문화·경제·법률 면에서 하루가 멀다 하고 잠식하고 들어갔다. '금광‘으로 벼락부자가 돼 조선일보를 사들였던 방씨 일가의 조상이 보기에도 너무나 격세지감과 멀미를 느낄 만한 세월이었다. 그들의 의지와 수완이 무섭기까지 하다.

 

조선일보는 후퇴하지 않는다. 국회도, 야당도, 노조도, 시민 단체도, 기타 자신에 반하는 모든 상대는 ‘조지는’ 대상일 뿐 타협하지 않는다. 저들은 바로 전직 대통령을 자살로 몰아넣고도 콧구멍을 후비는 사람들이며, 억울한 사람들이 피를 토해 지천으로 흘러도 눈 하나 깜박하지 않는 사람들이다. 미·북 정상회담이 성공하고 문 정권이 6·13 지방 선거에서 이기고 나더라도 그들은 어떻게든 자신들의 입맛에 맞는 ‘국민의 뜻’을 찾아낼 사람들이다. 없으면 만들어낼 것이다. 야권도, 언론도, 시민 단체도 다시금 그들의 눈치를 봐야 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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현재 여당은 대통령의 지지율 고공 행진에 상당 부분 기대고 있지만 그 효과는 그리 길지 못할 것이다. 남북 이슈가 끝나면 경제 이슈, 부동산 이슈, 교육 이슈 등 얽히고설킨 난제들이 등장할 것이고 그때 한 발짝이라도 멈칫거리거나 잘못 짚으면 어김없이 조선일보는 그 한 발짝을 천 보로 과장하여 떠들어댈 것이다. 이 프레임에 빠진 이들은 허우적거리며 실수를 연발하고 조선일보는 다시 이를 먹이로 삼을 것이다. 이것이 조선일보가 지난 세월 살아온 방식이다.

 

조선일보에 두 가지만 언급하고 싶다. 하나는 평화이고 다른 하나는 정의다. 지금 조선일보는 남북 화해와 평화라는 새 역사의 출발 소식에 소화불량이 걸려 있다. 배가 아파 데굴데굴 구르고 있다. 우리의 당부는 전쟁과 대결을 건성건성 신문 부수 올리기 재료로 삼지 말라는 것이다. 대한민국의 평화와 젊은 세대의 목숨을 최우선에 두라는 것이다.

 

우리가 가보지 않은 길을 갈 때 판단할 준거로 삼을 것은 경험칙(經驗則) 뿐이다. 과거의 경험으로 오늘과 미래를 잴 수밖에 없다. 삼천리 강토를 잔인하게 '파괴'하고 가족까지 죽이며 서로에게 못할 짓을 하게 만들었던 ‘그놈의 전쟁’을 ‘용기 있는 자의 선택’으로 미화할 때 우리 국민은 혼란스럽다. 오늘날 이 모든 고통과 모순의 근원이 ‘국토 완정’과 ‘북진 통일’을 내세웠던 남과 북 정권의 대립, 그리고 마침내 그 욕망을 현실화시킨 전면전에 있음을 기억해야 한다.

 

역사는 경험칙으로 이뤄진다. 세계사를 보면 자신만만하게 "며칠이면 됩니다"라고 떠들던 자들이 일으킨 전쟁의 결과만큼 참혹한 것은 없었다. 1차 세계대전 이전 군중들은 환호하며 도시의 중심가에 몰려들어 적국의 수도로 쳐들어가자고 외쳤다. 그 젊은이들 태반이 기관총탄의 밥이 되고 독가스에 삼켜지고 참호 귀신이 됐다. “할 수 있습니다” 부르짖은 처칠이 터키 갈리폴리에 밀어 넣은 영국 함대와 오스트레일리아 뉴질랜드 군단은 수십만의 목숨을 그냥 땅과 바다에 내버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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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금 우리는 조선일보의 호전적인 선동의 목적이 어디에 있는지, 엊그제까지 전쟁 분위기의 공포에 떨던 한국에 펼쳐진 평화 무드에 왜 낯설어하는지 그 이유를 똑똑히 알고 있다. 평화를 위한 노력이 우리의 자존을 해치기는커녕, 오히려 고려 시대 이래 유례가 없는 외교적 자존감을 획득하고 있는 현실을 조선일보가 왜 인정하지 못하는지 알고 있다.

 

아무리 비싼 평화라도 전쟁보다는 저렴하며 가장 용감한 이는 전쟁이 아니라 평화를 위해 싸운다는 것이 우리의 상식이다. 그런데 조선일보는 지금 분노에만 가득 차 있다. 점차 상실해 가는 자신의 영향력에 안절부절하며 평화를 말하는 모든 노력에 오물을 퍼붓고자 자신이 더럽혀지는 것조차 잊고 있다.

 

그 와중에 조선일보는 경제를 논하며 정의를 죽이고 있다. 이미 정의가 살아나는 것이 불편할지도 모른다. 대기업 회장 가족이 밀수를 하고, 사람들에게 물을 끼얹고, 전기 아깝다고 플래쉬 모자 쓰고 청소하라고 하고... 그런 인간 이하의 가족들이 설치고 다니는데도 여전히 ‘반기업 정서’를 노래하고 그들에 반하는 노력들을 좌파의 준동이라며 흘겨보고 있다.

 

국민을 먹여 살리는 일은 국가의 존재 이유다. 모든 국민들에게 일 한 만큼의 대가를 받고, 저마다 행복한 삶을 누릴 수 있는 최소한의 길을 보장하는 것이 국가다. 그 과정을 누구나 동의할 수 있게 만드는 것이 바로 정의다. 조선일보로서는 가장 부족한 대목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