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캐나다 윈저 대학의 서상철 교수는 우리나라가 여전히 신분사회라고 한 바 있다. 과거, 주어진 계급에 따라 신분이 뚜렷하게 구분되었던 봉건사회와 형태는 다르지만 본질적으로 계층이 구분된다는 점에서 공통점이 있다는 것 의견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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굳이 전문가의 의견이나 학문적 견해에 기대지 않아도 한국이 계급사회인 것은 자명하다. 자본주의가 가진 최대의 맹점이 사유재산과 소득의 불균형으로 인한 부의 불평등이라고 한다면, 이러한 불평등으로 생산된 사회내의 계급은 민주주의 사회에서도 여전히 존재하기 때문이다.

 

‘민중은 개, 돼지’라는 발언이 우리 사회에 충격을 가져다 준 것도 우리 사회 내 ‘계급화’에 대한 물증이 되었기 때문이다. 교육부의 고위관계자의 입에서 나왔다고는 믿기지 않을 이 발언은, 지배층과 피지배층으로 나뉘고 그 속에서도 소득수준에 따라 세분화된, 보이지 않는 계급에 대한 모순을 보여줬다.

 

냉전 이후, 이데올로기 전쟁에서 성공한 서방 국가들이 21세기 지구촌에 선물한 것은 무늬만 ‘자유’와 ‘평등’이었다. ‘자유민주주의’에 대한 기조 형성이 되었지만, 시장경제에 노출된 세계에 ‘평등’의 가치는 하락할 수밖에 없었다. 본디 인간의 본성이 자유를 갈망한다. 하지만 평등을 위한 통제된 자유가 결국 불평등을 초래한다는 여느 학자들의 주장과 같이, 평등의 가치에 무게를 둔 민주주의는 자본주의가 낳은 소득의 불평등으로 계급을 재생산해냈다.

 

‘에리히 프롬’(Erich S. Fromm)이 자신의 저작인 ‘소유냐 존재냐’(To have or To be?)에서 밝힌 것처럼, 20세기를 살아가는 인간은 더 이상 ‘존재’만으로는 가치를 인정받지 못하게 되었다. ‘얼마나 소유했느냐?’가 인간의 판단기준이 된 것은 시대의 숙명이 되었다. 혈통에 의해 신분이 결정되던 과거와는 다르게, 오늘날은 소득과 부에 따라 계급의 수직 상승도 가능하다. 하지만 계급 상승의 기회가 부여된 이후 인간은 보이지 않는 계급의 상승을 위해, 너도 나도 ‘돈’이라는 정체를 알 수 없는 욕망의 뿌리에 목매게 되었다. 자유와 평등의 가치를 실현하겠노라 외쳤던 ‘자유민주주의’는 그렇게 제한된 자유와 불평등을 양산하게 된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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승동교회 이야기: 초기 한국교회가 마주했던 계급 갈등

 

불과 100여년 전까지만 하더라도 우리나라는 철저한 계급 사회였다. 인구의 대다수는 ‘평민’(平民)이라 불리는 피지배 계층이었고 그 중에는 ‘성’(姓) 조차도 가질 수 없는 천민이나 노비들도 있았다. 이러한 시대적 배경을 안고 시작된 초기 한국교회에서 신분에 따라 나뉜 계층간의 갈등은 자명한 일이었다.

 

1894년 사무엘 무어(Samuel F. Moore, 이하 사무엘) 선교사가 세운 ‘곤당골 교회’를 모체로 한 승동교회는 일제강점기에 민족운동과 사회운동의 주축이 되는 곳이었다. 승동교회는 진취적이고 활동적인 곳이었지만 동시에 초기 한국 기독교 역사에서 어떤 신분 갈등이 있었는가를 잘 보여주는 곳이기도 하다.

 

곤당골 교회 내에 ‘예수학당’이라는 소규모 학교를 열어 교육에 힘쓴 사무엘 선교사는 학생 중 한 명의 부친(추후 기독교인이 되고 세례를 받은 후에 ‘박성춘’이라는 이름을 갖게 된 백정)이 ‘장티푸스’(Typhoid fever)에 걸려 죽었다는 소식을 전해 듣는다. 지금이야 장티푸스는 예방과 치료가 가능하지만 당시만 하더라도 죽을 병에 가까웠다. 위생관리만 철저히 하면 걸리지 않을 수 있는 병이었지만, 백정 신분이었던 박성춘은 관리는커녕 치료조차 받을 수 없는 상황이었다.

 

사무엘 선교사는 자신과 함께 활동하고 있던 ‘제중원’(濟衆院, 조선시대 세워진 최초 근대식 병원)의 ‘올리버 에비슨’(Oliver R. Avison, 이하 에비슨, 세브란스/연희전문학교 교장 역임)에게 박성춘의 치료를 부탁한다. 당시, 에비슨은 왕실의 주치의로도 활동하고 있었는데, 고종의 주치의가 최하계급인 백정을 치료했던 것이 당시 큰 화제가 되기도 했다.

 

캐나다 선교사인 에비슨은 조선의 사회계급 구조에 큰 영향을 받지 않았고, ‘평등’을 강조하던 당시 기독교 가치관에 따라 박성춘을 치료하는데 거부감을 갖지 않았다. 에비슨 선교사의 치료를 통해 죽을 고비를 넘긴 박성춘은 사무엘 선교사의 도움이 있었다는 사실을 안 후 곤당골 교회에 나갔는데, 이때 ‘회심’(回心)을 하고 기독교 신앙을 갖는다. (사무엘 선교사로부터 ‘박성춘’이라는 이름을 얻게 된 것도 이때부터였다)

 

그런데 문제가 발생한다. 당시 곤당골 교회에 출석하는 이들은 대부분이 양반이었다. 때문에 교인들은 백정출신의 박성춘이 교회를 다니는 것에 반대했다. 양반과 백정이 한 공간에서 있을 수 없다는 이유였다. 사무엘 선교사는 하나님 앞에서는 누구나가 똑같고, 교회에서 신분에 따라 차별을 하는 행위는 옳지 않다고 양반들을 만류했지만, 수 백 년 동안 계급에 노출되어 있던 이들에게 ‘무계급/평등’은 이해하기 힘든 가치였다. 극심한 갈등을 거듭한 끝에, 곤당골 교회의 주축이었던 양반들은 자신들만 모일 수 있는 교회를 설립하기에 이른다.

 

이후에도 수없이 많은 계층간의 갈등을 겪은 승동교회는 분열과 결합을 거듭했고, 1911년 박성춘이 승동교회의 장로가 될 무렵, 이에 반대한 양반계층은 ‘안동교회’를 개척/자립시킨다. 백정출신인 박성춘이 장로가 되었을 때, 왕족이었던 이여한 장로가 있었기 때문에 왕족과 백정이 한 공동체를 이루는, ‘보편적인 교회’가 되었다는 평가가 있긴 하지만, 끝끝내 계급의 격차를 극복하지 못해 교회가 나뉘었음은 분명한 사실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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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독교는 평등을 지향한다: 계급제도를 철폐하기 위하여

 

사무엘 선교사는 계급의 철폐를 위해 정부에 탄원서를 제출하는 등, 미국의 노예해방 같은 운동을 펼치기도 했다. 사무엘 선교사의 노력을 천민들도 ‘민적’에 자신의 이름을 올릴 수 있게 되었고, 갓을 쓸 수 있게 되었으며(갓은 양반만 쓸 수 있었다), 법적으로 계급에 상관없이 동등한 대우를 받을 수 있도록 노력했다.

 

광주의 기독병원 원목실장으로 5.18 광주시민운동의 참상을 미국에 전달했던 ‘찰스 헌틀리’(Charles B. Huntley, 한국명: 허철선, 1936~2017) 선교사와 그의 아내인 ‘마르다 헌틀리’(Martha Huntley, 한국명 허 마르다)는 저서 <새로운 시작을 위하여>에서, 19세기 말~20세기 초 초기 한국교회사에서 있었던 사무엘 선교사의 계급철폐를 위한 노력을 ‘세계를 뒤집어 놓은 사건’이라고 명명하면서, “링컨 대통령의 노예해방선언을 얻은 미국 흑인들의 기쁨은 한국 백정들의 기쁨보다 결코 더 크지 않았다.”라고 기술했다.

 

박성춘은 백정출신으로 계급 갈등으로 인한 갖은 수모와 고초를 겪어야 했지만, 박성춘의 아들 박서영은 ‘제중원’(연세대학교 세브란스의 모체)의 1회 졸업생이 되었고, 자신의 아버지를 살린 에비슨 선교사와 함께 10년간 제중원에서 의사로 활동했다. 조선 땅에 발을 디딘 지 14년만인 1906년, 계급철폐를 외쳤던 사무엘 선교사는 정작 자신이 걸린 장티푸스는 치료하지 못하고 세상을 떠났지만, 그가 남긴 백정해방운동은 당시 조선사회에 큰 의식의 변화를 가져왔다.

 

 

계급제도의 부활: ‘평신도’(平信徒)라 불리는 ‘평민’(平民) 계급의 등장

 

조선 말, 양반의 몰락이 가져다준 것은 신분제의 철폐가 아니라 피지배층의 신분상승이었다. 특수계층에 속한 인간을 하나의 소유물에 인식했던 시절, 19세기 말 한반도에 들어온 기독교는 ‘하나님 앞에 모두가 평등하다는 기조 아래 인구의 대다수였던 피지배 계층에게 인간답게 살 수 있는 가능성을 제공해주었다. 기독교는 보편적 구원에 대한 메시지와 함께 계급제도를 타파할 수 있는 ‘희망’이었다.

 

하지만 기독교는 제도화되면서 변질되어 갔다. 특히 ‘교회’(敎會)가 세워지고, 교회 안에서 ‘직책’(職責)이 구분됨에 따라 ‘교직’(敎職)을 가진 자와 가지지 않은 일반 신자로 구분되기 시작했다. 그렇게 ‘평신도’(平信徒)라는 말이 생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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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런데, ‘평’(平)이라는 단어는 그 단어 자체만으로도 계급의 성격을 갖는다. 특권계급이 아닌 일반시민을 나타낼 때 쓰는 ‘평(平)민’ 과 같이, ‘평(平)신도’ 역시 특수한 직책을 맡지 않은 ‘계층’으로 구분된다. 이 ‘평신도’는 예수의 제자들과 사도들을 중심으로 중심으로 한 초대교회 때에는 없던 개념이었다. 로마의 기독교 공인 이후, 제도화 되어가는 교회 내에서 조직의 편리한 운영을 위해 생겨난 것이다.

 

‘평신도’라는 단어 자체도 성경에는 등장하지 않는다. ‘평신도’의 어원 역시 헬라어인 ‘λαός’(라오스, crowd/people)라는 단어에서 파생된 ‘λαϊκός’(라이코스, of the people)로 성경에는 ‘보잘 것 없는 사람들’ 혹은 ‘범인’(凡人)과 같은 평범한 사람을 지칭할 때 사용된 단어다.

 

처음 예수에 대한 이야기가 전해지면서 시작된 초대교회는 ‘직’(職)을 중심으로 움직이지 않았다. 특히 고린도전서 12장에 나오는 ‘은사’(恩賜)에 대한 성경의 기록을 보면, 신이 인간에게 부여한 각기 다른 재능에 따라서 역할이 구분된다는 것을 확인할 수 있다. 고린도전서 12장은 보다 쉬운 이해를 위해 인간의 몸을 비유하며 설명하는데, 눈, 코, 입, 팔, 다리 등에 각기 다른 역할이 부여되어 있음을 예시로 하여 역할 구분을 이야기 한다.

 

“그러므로 눈이 손에게 말하기를 "너는 내게 쓸 데가 없다" 할 수가 없고, 머리가 발에게 말하기를 "너는 내게 쓸 데가 없다" 할 수 없습니다.”

<고린도전서 12장 21절>

 

위 구절은 교회 공동체에서는 누가 누구 위에 존재할 수 없는, 직분이나 계급으로 계층적인 구분이 될 수 없음을 말하고 있다. 이렇듯 성경은 직분으로 계층을 나누지 않았다. 그렇다면 기독교 정신에도 위배되는 ‘평신도’라는 말이 왜 등장했을까?

 

‘로마의 클레멘트’(Clemens Romanus, 로마의 있는 교회를 ‘사목’(司牧, 사제가 신도를 통솔하는 행위)했다고 하여 붙여진 이름)라 불리는 교황 클레멘스 1세(Clemens I)는 기독교의 첫 번째 ‘교부’(敎父)다. 예수의 제자인 베드로에 의해 서품을 받은 것으로 알려진 클레멘트는 베드로가 죽은 직후부터 기독교회와 관련된 대표자로서의 직무와 권한을 계승했다고 알려져 있다.

 

이러한 클레멘트 1세가 작성한 문건 중 유일하게 남아 있는 것이 ‘고린도 교회에 보내는 편지’(클레멘트 첫째 서간)인데,  여기에서 처음으로 ‘평신도’라는 단어를 사용한다. 당시 사제들이 여러 가지 논란에 휩싸이게 되어 ‘직’을 잃었는데, 클레멘트 1세가 화합을 촉구하는 서신을 작성한다. 이 때 제사장(레위지파)과 구별되는, 교회 내의 '직분이 없는 자들'을 가리키는 말로 ‘평신도’를 사용했다. 로마에서 기독교가 공인이 된 이후 천주교회는 교회내의 계급을 정하여 성직과 평신도를 구분하고 이를 ‘교리화’(敎理化) 하였다.

 

 

애초부터 ‘평신도’는 없었다

 

이렇기 때문에 종교개혁의 정신을 계승한다는 한국교회가 ‘평신도’라는 단어를 사용하는 것이 의아할 수밖에없는 것이다. 루터는 ‘교황’과 같은 집중된 권위의 존재를 부인하기 위해 ‘프로테스탄트’(Protestant, 저항하는 자)가 되었다. 개신교는 출발할 때부터 ‘성직’ 계급과 ‘세속’ 계급을 엄별한 중세의 로마천주교회를 거부한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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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교개혁의 핵심 사상이었던 ‘만인제사장’ 교리도 각 사람이 종교적 권위자가 내려보낸 ‘공식’적인 성서 해석에 억지로 복종하기보다는, 스스로 성경을 해석할 수 있다는 데 의의를 두고 있다. ‘평등’에 무게를 둔 종교개혁의 정신은 로마천주교회가 말하는 성직자들과 평신도 사이에는 지위에 차이가 없다는 점을 강조한다.

 

뿐만 아니라, 루터와 함께 종교개혁의 기틀을 마련한 ‘존 칼빈’(John Calvin)도 자신의 저작인 <기독교강요>(Institute of Christian Religion)에서, 교회 안에서 맡은 직분에 대해 “노동자가 일을 할 때에 연장을 쓰는 것과 같다.”고 말하며 특별한 권위나 권력을 갖고 있지 않음을 강조한다. 기독교에서 ‘평신도’라는 단어는 애초부터 없던 단어인 것이다.

 

 

마무리

 

계급과 계층이 나뉜 차별있는 사회를 지양하고, 모두가 신 앞에서 ‘평등’하다는 가치를 지니고 있는 것이 기독교 정신이다.

 

승동교회의 개척자인 사무엘 선교사가, 양반들의 귀싸움에도 끝까지 백정의 입장에서 차별을 허락하지 않았던 것도, 초대 교회에서 수많은 사람들이 각자 맡은 바 은사에 따라 공동체를 꾸렸던 것도, 모두 성경이 말하고자 하는 평등을 나타내고자 했던 것이다.

 

계급과 계층은 제도를 통해 체계화 된다. 상하수직 구조가 뚜렷한 우리나라의 조직문화가 사회의 병폐를 만드는 가장 근본적인 원인이듯, 한국교회에서의 직책구분과 이에 따른 계층 문화는 한국교회를 가장 병들게 만드는 이유가 될 수도 있다.

 

그러니 기억하자. 애초부터 평신도는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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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교회에 말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