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신 기사 추천 기사 연재 기사 마빡 리스트

 

 

 

 

 

201238528_1280.jpg

 

숙명여고 사건을 다룬 산하 칼럼을 보면, 한국 교육 시스템에 대해 뭔가 믿음을 찾고 싶다는 희망을 읽을 수 있다(관련기사: [산하칼럼]거짓말에 대하여 : 숙명여고 쌍둥이 시험지 유출 사건을 보며) 심정은 이해가 간다. 하지만, 이분 칼럼에서 현장의 경험을 토대로 얻은 깨달음을 재확인하는 구성을 자주 보곤 했는데, 그처럼 이쪽 분야에 가까우면 가까울수록 그 시스템이 얼마나 허약하고 무리한 믿음에 기대어 왔는지를 경험적으로 깨닫게 된다.

 

우리 사회가 갑자기 천지개벽하여 바뀌지 않았다면, 숙명여고 사건과 같은 유형은 발생할 수밖에 없는 일이었다. 사실 이미 지방 학교에서 비슷한 사건이 있었고, 여러 학교에서도 발생했다가 공론화 이전에 막았으리라고 본다. 숙명여고가 끝내 이 사건을 덮지 못했던 것은, 내신 성적에 대한 압박이 유난히도 거센 강남 지역 속에서도 가장 민감하게 반응하는 학교였기 때문이기도 하다.

 

학생부 전형에서는 내신 성적이 사실상 대학 지원 수준을 결정한다. 평균 3점대가 넘으면 최상위권 대학은 아예 지원을 하기 힘들고, 2점대는 일단 들어가야 된다. 여기에 또 하나의 변수가 있다면, 성적이 상승 추세로 변화한 학생의 경우 좀 더 후한 평가를 해줄 수 있다는 것이다. 그러나 최상위권 대학에 지원하려면 그래도 평균 점수가 2점대 안에는 들어와야 한다. 내신 평균이라면 1학년 때부터의 성적이 모두 합산되는 거니까, 달리 말하면 2학년 1학기까지 뭔가 극적인 반등을 이루지 못한다면 학생부 전형으로 상위권 대학 지원은 물 건너가는 것이다.

 

대체로 학교에서 공부를 잘하는 애들은 정해져 있으니까, 1학년 지내보면 상위권 지원 가능한 학생들이 대충 가늠이 된다. 이 학생들은 이제 내신 성적에 온 힘을 쏟아야 하는데, 갑자기 새로운 얼굴이 2학년 때 갑툭튀를 하면 견제가 되지 않을 수 없다. 이 견제는 학생과 학부모 사이에서만 일어나는 것이 아니다. 학교 입장에서도 갑툭튀는 반가운 현상이 아닌 것이, 1학년 때 성적이 좋았던 누군가가 뒤로 밀려났다는 의미이므로 그만큼 입시에서 불리해진 것이다. 그런 학생들을 잘 관리해서 좋은 대학에 보내야 하는데 차질이 생긴 것이다. 특히나 서울대 몇 명 보냈는가로 비교가 되는 강남 고등학교들에서는 문제가 커진다. 서울대는 내신 평균이 1점대는 들어와야 지원 가능하다고 본다. 2학년 때 한두 번 미끄러지면 그대로 끝장이다. 성적이 급상승한 갑툭튀는 이미 1학년 때 성적이 좋지 못하기 때문에 서울대 지원이 어렵다. 고로 갑툭튀는 그 학교의 서울대 지원자 수를 감소시키는 요소가 된다.

 

SSI_20180903225207_V.jpg

 

이를 감안하고 숙명여고 사건을 되짚어 보면, 학교 측이 보인 태도가 매우 이상하게 느껴진다. 학부모들이 문제 제기를 했을 때 학교 측은 이를 무마하고 변명하기에 애썼다. 경쟁이 치열한 숙명여고 같은 학교에서 이런 문제는 더욱 첨예하게 다뤄졌어야 함에도 불구하고 말이다. 한 문제 틀리면 2등급이고 두 문제 틀리면 3등급인 경우도 많으며, 한 명이 빠짐으로 인해 누군가는 2등급에서 1등급이 되고 지원 대학이 달라질 수 있다. 이런 사실에 유달리 민감한 지역에서 학교가 보인 이상한 태도는, 이런 비리가 일회성이 아니었으리란 심증으로 작용해 반발을 부채질했다고 생각한다.

 

학생부 전형이 대세가 된 요즘이 수능 위주의 시대와 다른 점은, 학교의 권위가 강해졌다는 것이다. 학생 생활 기록부에 적힌 단 한마디의 말이 학생의 평가를 바꿀 수도 있다. 수업 시간에 자거나, 교사의 지시에 반항하는 일은 찾기 힘들다. 대학에 가려고 생각하는 고등학생이라면 말이다.

 

그렇다면 이 권위에 걸맞게, 요즘 학교들의 '내용물'도 더 공정하고 합리적으로 바뀌었어야 할 것이다. 더 신경 써서 문제를 내고, 동아리 활동을 관리하고, 활동 방향성을 제시해주고, 비리가 없도록 내부 단속을 하고... 이 지점에서, 이 글을 읽는 분이 종사하는 자기 분야에 대해 생각해보시라. 어떤 분야든 상관없다.

 

- 윗선에 있는 사람들이 부리는 횡포가 줄어들고 있다고 생각하는가?

 

- 권력을 가졌을 때 임의로 하지 않고 합리적으로 처리하는 성향이 늘었는가?

 

- 당면한 사건만 덮자는 임기응변이 아니라, 근본적으로 일 처리를 효율적으로 하려는 경향이 늘었는가?

 

- 문제가 생겼을 때 공정하게 처리하는가?

 

이런 물음들에 대해 나는 이렇게 생각한다. 개인의 입장에서는 이런 변화가 많이 감지되지만, 사회 시스템의 변화로 연결되지는 않았다고 말이다.

 

그리고 시스템의 정체는 어느 한 분야에만 국한되지 않는다. 내가 종사하는 분야에서 그렇다면, 다른 분야도 대동소이한 것이다. 예전 고등학교의 시험 관리가 철저하지 못했다고 생각한다면, 지금에 와서 그렇게 믿고 있을 이유도 없다. 하물며 객관적으로 측정 가능하지 않은 활동 평가에 대해서 투명성을 바랄 수도 없다. 그러니 학생생활기록부에 기록된 학생의 모습이 천편일률적으로 '매우 뛰어나고', '타의 모범이 되고' 해도 이상하지 않다. 이따위 걸 신뢰하느니, 숙명여고 쌍둥이들에 대해서 그랬듯이 그 학생들이 다닌 학원에 가서 실력을 물어보는 게 나을 거다.

 

이렇게 애초에 신뢰가 보장되지 않은 학생 평가 시스템을 도입해서, 그 시스템을 근거로 대학을 지원하도록 만들어 놓고, 그걸 확대 시행하도록 해놓았으니 문제가 생기지 않을래야 않을 수가 없는 것이다. 학생부 전형의 도입은 사교육에 빼앗긴 교육 주도권을 학교가 되찾아오도록 해주었지만, 그 권위를 제대로 행사할 실력과 안정성을 갖추지 못한 문제를 안고 있다. 이에 대한 비판과 지적을 외면한 결과가 숙명여고 사건과 같은 비리다.

 

189539_130588_3638.jpg

 

많은 사람들이 이 사건을 접하고 정시, 즉 수능 위주의 전형을 확대하라고 주장한다. 그 단점을 몰라서 하는 소리는 아니라고 생각한다. 그만큼 공정성에 대한 열망이 크기 때문이다. 입시 체제의 급격한 변화가 학생들에게 줄 고통을 생각하면, 학생부 전형도 무조건 철폐하는 게 능사는 아니라고 생각한다. 그렇다면 사람들이 수시 철폐를 외치는 이유에 대해 생각해보고 반영하려는 노력이 좀 뒤따라야 하지 않을까? 학생부 기록이 사실상 포장일 수밖에 없다는 걸 인정하고, 이를 보완할 대체재가 고등학교 내에서 불가능하다면 대학 측이 평가 기준을 존중해야 하지 않을까? 최소한 이런 논의가 시작은 돼야 하지 않을까? 이런 글을 썼던 게 1년 반 전이었는데, 아쉽게도 하나도 바뀌지 않았고 그 시작도 요원할 뿐이다.

 

 

 

Profile