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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2년 어느 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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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2002년 초에 군대에 갔다. 새천년민주당 대선후보 경선의 드라마틱한 전개를 대부분 보았으나 결말은 모른 상태로 훈련소에 입소한 것이다. 당시 유명했던 드라마가 뭐였는지는 기억이 안 나지만, 동기들 사이에서 노무현이냐 이인제냐에 대한 소식이 늘상 화제였다. 새파란 스무살 남짓 훈련병들이 모든 미디어에 차단됐으니 소위 뇌피셜로만 가득한 대화였지만, 온도만은 뜨거웠다. 그 가운데 유독 기억에 남는 한마디가 있었다. 끝내 자신이 지지하는 후보는 밝히지 않았으나 정치 상식이 가장 많았던 법대생 형이 했던 말이다. 

 

“노무현 그거 다 이미지다, 이미지.”

 

분명 ‘이미지’라는 단어 자체에는 아무런 부정적 의미가 없지만, 저 말의 맥락은 이미지라는 단어와 노무현이라는 사람을 둘 다 깎아내리려는 의도를 담는다. 저 짧은 표현에 들어있는 수많은 전제들, 정치인 지지는 상징적인 면을 보는 게 아니다, 정치인은 진중하고 무거워야한다, 지도자란 저잣거리 서민들의 호불호로 뽑히는 것이 아니다 등등. 그 형은 별 뜻 없이 한 말일 수도 있겠지만, 그 전제들이 성립한 배경이, 바로 노무현이 깨부수고자 했던 무언가라고 생각했다.

 

 

2006년 어느 날

 

내 첫 직장은 외국계 포털사였다. 내가 맡은 보직은 음악 서비스 기획과 운영. 포털사이트 메인 화면에 작은 영역 하나를 할당받고, 새 앨범이나 음악서비스 이벤트에 관련된 정보를 손톱만한 이미지 1개와 10자 이내의 짧은 글 3도막으로 실어내야 했다. 나름대로 상상력을 동원하여 클릭을 유발해보려 해도 늘 클릭수는 형편없었다. 클릭수가 낮으면 자동으로 보여지는 횟수가 줄어들고, 그러면 당연히 클릭수가 더 낮아지는 악순환의 연속이었다. 

 

그러다 유독 엄청난 클릭수가 집계된 날이 있었다. 오류나 해킹 시도가 있었나 싶었을 정도로. 평소의 100배에 가까운 낯선 길이의 숫자. 실수로 욕이라도 썼나 싶은 마음에 부랴부랴 그 날의 내용을 확인해봤다. 그리고 나는 머리를 얻어맞은 듯 멍한 상태가 됐다.

 

 백지영, 사랑 안해

 

이 7글자가 쓰여있는 게 전부였다. 별생각 없이 그냥 가수 이름과 제목을 올렸기에 기억도 없었던 것이다. 그날의 클릭수는, 내가 퇴사할 때까지 올렸던 수많은 내용 중 압도적인 1위의 자리를 한번 위협조차 받지 않았다. 

 

온라인 미디어란 그런 것이었다. 각각의 맥락과 의미를 지니는 무한한 컨텐츠들이 그 한 번의 클릭을 빼앗기 위해 피터지는 경쟁을 하는 와중에, 그저 당연하다는 듯이 그 모든 관심과 시간을 휩쓸고 다니는 존재가 등장하곤 한다. 소위 ‘대세’라는 것이다. 그 대세가 계속 큰 파도를 밀고 나가는 데에는 말장난도 필요 없고, 잔기술도 필요 없다. 그것이 처음부터 대세일 수 있었던 원인이 바로 그러한 것을 바라던 수많은 대중들의 존재에 있기 때문이다. 대중은 실존하는 사람들이다. 무언가를 기다리고 바라다가, 결국 그것이 나타나 그걸 아끼고 좋아하고 따르는 사람이 수없이 많다는 사실. 그 사실은 그저 그것만으로, 더 이상의 자세한 설명을 생략시킨다.

 

바위가 수없이 많다고 해서, 그것이 거품이 되진 않는다. 그 수없는 바위들은, 정확히 그만큼의 무게를 지니는 것이다.

 

 

2019년 어느 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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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요 뉴스 헤드라인만 보여주는 앱에서 눈에 띄는 제목을 발견했다. ‘결국 펜스 뜯고 탈출한 황교안’. 내용이 궁금해진 나는 유튜브 앱을 열고 황교안을 검색한다. 인파 속에서 허우적거리는 황교안의 얼굴이 담긴 썸네일의 영상 하나를 틀어보니, 5.18 기념식에서 벌어진 상황이 한눈에 들어온다. 페이스북과 자주 찾는 게시판에서는 이에 대한 다양한 글들을 읽어본다. 이 모든 일이 벌어지는 데에는 10분이 채 걸리지 않는다. 그 시간 안에, 나는 실제 장면의 기록과, 적어도 수십명의 견해를 습득하고서 내 나름의 입장을 형성한다. 필요하다면  5분 정도를 더 할애하는 것으로, 그 사안에 관련된 반대 입장의 정보까지 습득하여 크로스체크를 할 수 있다. 이 시대에, 여론을 확인하고 또 하나의 여론 조각이 형성되는 한 단면이다. 

 

‘인터넷이라는 데에는 모든 게 다 있어’라고 생각하던 2000년대 초반. 지금 생각해보면 빨래비누 한덩어리로 ‘빨래가 이렇게 쉬워지다니’라며 감탄하던 시절처럼 느껴진다. 하물며 스마트폰 없이 집집마다 PC 1대로 가족들이 인터넷을 같이 하던 시절과 초딩도 실시간으로 유튜브 찍어 올리는 지금을 비교할 수 있겠는가. 

 

수많은 사람들과 수많은 방식으로 연결되는 수많은 접점. 찰나와 같이 짧아진 선택의 과정, 공간과 시간의 제약이 사라져가는 정보의 습득, 그 가운데 ‘대세’는 언제든 어디서든 순식간에 등장할 수 있다. 논리적인 이유도, 합리적 예측도 어려운 유기적인 과정 속에서 태어나는 그 파도를 어떻게든 만들어보고 싶은 수많은 이들이, 물건을 팔기 위해, 이름을 알리기 위해, 돈을 벌기 위해 안간힘을 다한다. 물론, 정치인들도 예외는 아니다. 

 

정치인은 나쁜 기사든 좋은 기사든 자기 부고만 아니면 다 좋아한다는 말, 이젠 그마저도 옛말이 됐다. 다각화된 미디어 지형 속에서 2군으로 밀려난 기존 언론은, 1군의 소셜미디어와 유튜브에 바늘구멍 같은 틈이라도 찾아 머리를 들이민다. 정치인이 페이스북에 올린 글 하나가, 저명한 행사에 참석해 기조연설을 한 내용보다 더 많이 회자되는 시대. 이 시대의 정치인에게 있어 경쟁자는 상대 정당의 다른 정치인도 아니고, 같은 정당의 다른 유력 정치인도 아니다. 이들의 경쟁자는, 게이머, 브이로거, 먹방 크리에이터, 제품 리뷰어, 그 외에 수많은 이 미디어 천국의 모든이들이다. 

 

그 어느때보다 유치하고 노골적이 되어버린 자유한국당의 행동특성은 이런 맥락에서 바라보면 쉽게 이해할 수 있다. 그들의 지지자들도 이제는 소셜미디어와 유튜브에서 여론을 형성한다. 그 틈바구니 안에서 이들이 새로 나온 옥장판이나, 베트남 여행 패키지 상품에 눈을 돌리지 않게 하려면, 더 자극적이고 더 눈길을 끄는 무언가가 필요하다. 가만히 두면 점점 과격화되는 온라인 커뮤니티의 필연적 흐름에 정치인들 스스로가 합류한 것이다. ‘문재인 독재자’라는 말을 입에 담아야만 조회수를 확보할 수 있고, ‘달창’이란 말을 해줘야만 그들에게 다가설 수 있는 이 세계. 태극기 드시는 어르신들이 좋아하실 번듯함과 고상함이 무기였던 황교안이, 최근의 홍준표, 김성태와 별다를 바 없는 행보를 보이고 있다는 사실은, 바로 이런 변화의 증거인 셈이다. 

 

바로 여기서, 우리는 발견할 수 있다. 이 시대의 변화가 가져온 특이점. 

 

역사적으로, 친일/독재/적폐에 해당하는 이들이 늘상 유지하던 공통점이 있다. 그 어떤 더러운 짓을 대놓고 하더라도 공식적으로는 고상할 것, 스스로 모순적인 행동을 하더라도 겉으로는 남얘기 하듯 태연할 것, 말이 안 되는 말을 하고 있다는 걸 보인이 잘 알면서도 말투만큼은 번듯할 것. 이런 허세가 그들의 세계에서는 반드시 필요한 덕목이었던 셈이다. 그 필요성은, 그 지지층이 그들을 지지하는 정서가 ‘섬기는’ 정서였다는 점에서 비롯된다. 박정희가, 전두환이, 이병철이 하라는 대로 잘 따르면 내 주머니가 두둑해진다는 그 명제 속에서, 충성을 다하는 진짜 이유는 사리사욕이지만, 겉으로는 그럴싸하게 보일 수 있는 충성의 명분이 만들어져 있어야 하는 것이다. 

 

그래서 이들의 세계에서는 학벌이든 재산이든 명분이 중요했다. 객관적 명분이 마땅치 않다면, 어디서 몇 명을 죽일 정도로 과감한 분, 이런 상황에서도 눈빛 하나 안변할 정도로 냉철한 분 같은 신화 소재라도 필요했다. 전통적으로 말 수가 적고, 목소리가 깔려있고, 행동이 느린 이들이 역사적으로 그 세계 리더들의 공통점이었다는 사실은 우연이 아니다. 

 

그런데, 이 법칙은 이제 무효가 됐다. 이들은 더이상 그런 리더를 필요로하지 않는다. 이들이 필요한 건, 더이상 섬길 대상이 아니라, 내가 하고 싶은 말을 대신하고, 보고 싶은 행동을 보여주는 사람이다. 내가 무시하고 싶은 대상을 먼저 무시하고, 내가 거부하고 싶은 상황을 몸을 던져 거부하는 그런 사람. 그런 공감이 느껴져야만, 클릭을 하고, 구독을 하고, 공유를 하고, 좋아요를 누르며, 그래야 이 세계에서 화제가 되고 대세가 되는 것이다. 

 

알아서 섬기려 하는 자기학대적 정치문화까지도 뒤집어버린 이 시대. 이 시대는 말하자면, 그저 유권자들을 닮아가고, 유권자들이 원하는 행동과 말을 하면, 알아서 대세가 되어버리는 시대라 할 수 있겠다. 

 

그리고 저쪽 세계에 속해있지 않은 우리는 사실, 이 상황이 낯설지 않다.

 

 

돌아가, 2001년 어느 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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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무현의 당선에는 수많은 공신들이 있겠지만, 결코 빼먹을 수 없는 공로자로 ‘노사모’를 꼽는데 반대할 사람은 없을 것이다. 노무현의 삶은, 바라보면 어떤 사람들로 하여금 마음의 빚을 갖게 만드는 힘이 있었다. 그 힘에 먼저 반응한 이들이 노사모를 만들었고, 노사모를 통해 그 마음의 빚이 일반 대중들의 틈으로 확산되었다. 결국 그가 당선됐다는 사실은, 그를 바라보며 마음의 빚을 느낀 사람의 숫자가 그를 당선시킬 만큼이었다는 말이 된다. 

 

다르게 말하자면, 노무현은 그 수많은 사람들, 각자 자신의 입장에서 서로 다른 모습의 삶을 살아가지만, 어쨌든 지금 이대로는 부족하다는 갈증을 느꼈던 수많은 사람들과 가장 가까운 정치인이었을지 모른다. 이런 관점에서라면, 어쩌면 그 당시 한국은 어떤 특성을 지닌 사람들로 절반정도가 차있었고, 그들이 자신들의 원하는 바를 가장 잘 보여주는 정치인으로 노무현을 발견한 것이라고 볼 수 있다. 그렇다면, 2001년 12월, 대선후보 국민경선에 출마할 때 노무현이 남겼던 명연설은, 대중들을 설득해낸 연설이 아니라, 사실 수많은 이들이 하고 있었던 바로 그 생각을 노무현이 명료한 언어로써 담아내어 그 공감을 확인한 연설일지 모른다. 

 

"이 비겁한 교훈을 가르쳐야 했던 우리 600년의 역사, 이 역사를 청산해야 합니다. 권력에 맞서서 당당하게 권력을 한 번 쟁취하는 우리의 역사가 이루어져야만이 이제 비로소 우리의 젊은이들이 떳떳하게 정의를 얘기할 수 있고 떳떳하게 불의에 맞설 수 있는 새로운 역사를 만들어 낼 수 있다!”

 

 

저렇게 명징하고 간결하며 아름답기까지 한 연설을 통해 공감을 얻어낸 노무현과, 그러한 연설을 듣고 소름돋는 감동을 느끼며 공감을 한 사람들이 있었다. 당시 상대편은 이들에 대해 이런 말을 남겼다. 

 

‘그거 다 이미지다, 이미지’

 

이들은 2019년 이 시대에 들어, 입에 담기도 어려운 단어들을 쓰고, 얼굴에 철판 깔고서 스스로 했던 말을 뒤집는 말을 해야만 공감을 얻어낼 수 있고, 또 그래야 공감을 해주는 사람들이 되었다. 

 

공감을 살 수 있는 말과 행동을 해야만 눈에 띌 수 있는 시대. 눈과 귀를 속이는 것이 아니라, 정확히 같은 곳을 바라보고 같은 생각을 해야만 대세가 될 수 있는 시대. 고상한 척, 있는 척, 잘난 척, 아는 척하는 것으로는 비웃음은 커녕 존재 자체도 드러낼 수 없는 시대. 그 시대가 오는 것을 가장 거부하던 이들마저도, 정확히 그 시스템에 동화된 채, 그저 자신들의 수준만을 드러내고 있는 이 시대. 2019년에 이르러서야, 21세기라는 한 ‘시대’가 문화의 곳곳에 뿌리를 내려 결국 정치문화에 까지 굳건히 자리를 잡았다.

 

그리고 노무현은, 그 시대가 시작되었기 때문에 우리의 대통령이 된 것이고, 본인 스스로가 그러한 시대를 만들기 위한 정치를 했으며, 그 시대를 누구보다도 정확하게 이해한 사람이었다. 

 

그러므로, 그에게 시대를 앞서나간 대통령이라는 말은 정확치 않다. 그는 시대를 열어낸 대통령이다. 

 

그리고 한가지 잊지 말아야 할 것은, 그 시대는 그를 알아본 우리 모두가 같이 열어냈다는 점이다. 우리가 이 점을 잊지 말기를, 아마 고인께서 그 누구보다 더 바라고 계실 것이므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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