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매체비평] 제 5공화국

2005.05.11. 수요일

딴지 매체비평팀

E.H. 카아라는 역사학자가 있다.

역사학은 이 양반 이전과 이후로 나뉜다. 이 양반 이전의 역사학, 그건 과거에 있었던 사실을 그대로 복원하는 걸 의미했다. 객관적 자료를 실증적으로 연구함으로서 주관적 견해를 최대한 배제하고 과거의 팩트를 있는 그대로 살려내는 게 역사가의 역할로 이해됐다.

그런데 이 양반은 이렇게 말했다.

역사는 과거와 현재의 끊임없는 대화라고. 팩트 그 자체가 아니라 그 팩트와 상호작용하며 그걸 바라보는 역사가의 주관적 관점에 의해 재구성된 것이 역사라고. 말하자면 모든 팩트를 객관적으로 나열하는 것이 아니라 그 팩트를 주관적으로 선택하는 것이 역사란 거다.

또한 그는 역사를 연구하기 앞서 역사가를 연구하고, 그에 앞서 역사가가 처해 있는 역사적 문화적 환경을 먼저 연구하라고 했다. 역사라는 것이 진공과 같은 절대 객관이 아니라 주관적 해석일 수밖에 없고, 그렇다면 그런 주관에 영향을 준 환경까지 포함해 읽어야 한단 소리다.

그로 인해 역사는 팩트가 아니라 해석이 중요해진다. 역사란 과거 팩트들의 합집합이 아니라 역사가의 관점에 의해 해석되어진, 가공된 과거란 거다. 요기까지.

<제 5공화국>이란 드라마가 뜨고 있다.

그런데, 5공화국에 대한 책을 수 백 권 읽고 5공 인사를 상당수 만났다는 제작진의 노력에도 불구하고, 이 드라마는 결정적인 것을 놓치고 있다. 바로 역사를 바라보는 관점과 태도다.

우리가 가장 객관적인 팩트를 나열해 줄테니 - 궁정동 안가의 구조물에서부터 등장인물의 동선까지 25년 전의 그것과 최대한 근접하도록 철저한 고증을 해 줄테니 - 시청자 니덜이 해석을 해보시라.. 이 드라마의 의도는 그렇게 보인다.  

가령 드라마 상에서 전두환이라는 인물은 국가위기상황에서 카리스마를 발휘하는 매력적 인물로 비쳐진다. 알고 보면 전두환은 조직 장악력과 리더쉽이 있고, 평소에 육사후배들을 잘 챙기고 군 선배들도 자기편으로 끌어들일 정도이며, 대범함과 주도면밀함을 동시에 가지고 있고, 결국 이 모든 장점들이 결국 대통령을 만들었다... 뭐 이런 식.

더구나 대통령 시해 후 중정으로 가지 않고 육본으로 향하는 김재규의 즉흥성, 시해 와중에 궁정동 현장에 있었다는 정승화, 그리고 이런 정승화를 하극상에도 불구하고 전두환이 체포하도록 방조한 최규하의 우유부단함 등이 맞아 떨어져 전두환이 대통령이 될 수밖에 없었다... 뭐 이런 식.

물론 전두환을 대놓고 미화하고 있지도 않다. 하지만 객관적 팩트만으로 드라마를 이끌어 가겠다는 느낌이 강하다. 하지만 제작진은 착각을 하고 있다.

팩트를 단순히 사건별로 일지처럼 나열하지 않고 드라마적으로 재구성하는 자체가 이미 선택이고 해석이다. 그리고, 선택과 해석은 주관이다. 진공과 같은 객관이란 애초 없다.

장군의 리더쉽과 쌈마이의 갑빠, 주도면밀함과 약삭빠름, 카리스마와 허세, 대범함과 무식함, 자기 사람 만드는 처세와 자기들 것만 챙기는 몰염치.

그 차이를 객관적 팩트의 나열만으로 보여줄 수 있다고 믿는 건가. 아니면 어느 쪽으로 해석되든 그건 자기들 책임이 아니라고 생각하는 건가. 물론, 드라마 제작자가 역사가는 아니다. 그러나 객관적 팩트로 승부하려 했다면 그건 이미 역사가의 태도다. 스스로 역사가의 책무를 떠맡고 있는 셈이다. 전 국민을 상대로 근대사 챕터 하나가 영상으로 쓰고 있단 말이다. 그것도 모든 연령층에 무차별로.

쿠테타로 집권한 살인마 전두환이 제법 괜찮은 지도자로 비칠 수 있는 것이 자못 불편해서 그러는 게 아니다. 우린 팩트만 나열한테니 시청자가 해석하시라는 태도는, 무책임하다는 말을 하려는 거다. 그리고 무책임하단 것보다 훨씬 중요한건, 그게 위험하다는 거다.

전두환을 미리 나쁜 놈 만들어 놓고 무슨 건전 드라마 만들라는 게 아니다. 시청률과 화제성과 명예훼손과 생존인물에 대한 부담으로, 팩트 뒤에 숨지 말라는 거다. 팩트 위에 세련되게 녹여 제작진의 해석을 내놓으라는 거다. 그 해석의 방향이 어느 쪽이든 말이다.

그게 없음 당신들, 비겁한 거다.

딴지매체비평팀
  술탄(sultan@ddanzi.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