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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포항에서 뉴욕까지] Part II. 미국으로
닥터큐, 태평양 동쪽에 도착하다

2005.5.9. 월요일
딴지 해외생활 탐생반





 


  로키산맥은 어디 있을까?




1997년 봄. 박사도 받고 포스닥 오퍼도 받기는 했는데, 막상 미국 갈라고 하니까 머시 해야 될 일이 엄청 많어. 우선 여권 만들고 나서, 비자를 받을라고 하니까 미국학교에서 보내주는 서류도 한참 기다려야 하고, 대사관 제출하는 서류로 주민등록등본 머시기 하는 서류들 영어로 번역 공증 받고, 포스닥 연수비를 학술진흥재단과 미국학교에서 나누어 받다 보니까 그것도 짜맞춰서 서류 만들고, 혹시 돈이 없다고 퇴짜 놓을 까봐 은행 잔고 증명서류도 만들어야 하고, 어쩌고 저쩌고 정말 정신 없더만. 한번 해 보고 나면 별 거 아닌 일이겠지만 처음 해보는 촌놈한텐 장난 아니더라고.  


그러다 보니 박사 받고도 한 반년이나 기다려서야, 겨우 미국 가는 비행기를 탈 수가 있었어. 그 동안은 포항 실험실에서 후배들에게 하던 일 가르치고, 늘어놓은 일 마무리하면서 나름대로 바쁘기는 했지. 일 다 하고 죽은 무덤 없다고 먼 일을 해도 선을 그어서 여기까지 "끝"하고 말할 수 있는 일은 잘 없나봐. 아마 그래서 죽어도 끝내야 하는 마감일(일명 deadline) 같은 게 있는 거고, 죽는 날이 개중에는 제일 큰 마감일 아닌가 싶어.


군대 갈 때도 그랬는데, 짐도 제대로 못 싼 채 떠나기 전전날까지 밤새면서 앉아서 마지막 리포트며 논문들 할 수 있는 데까지만 써 가지고 책상 위에 쌓아놓고, 퉁퉁 부은 눈으로 학교를 떠나야 했어. 연습 자꾸 하면 죽을 땐 깔끔하게 마무리해 놓고 갈 수 있을까. 일도 그렇고, 미국 가는 준비도 그렇고, 그러게 미리미리 알아보고 계획도 세우고 했어야 했는데 말이야, 대책 없이 다 끌어안고만 있었던 거지.


요즘 젊은 친구들은 이런 거 잘들 알아서 하더라고. 우리 때보담은 영어도 훨씬 잘하는 거 같고. 아는 후배 중에는 원래 6개월 만기인 관광비자 가지고 뉴욕 와 갖고는 한 2년씩 잘 버티다 가는 친구도 봤어. 그래도 가끔은 그 때 나처럼 감 없는 젊은 친구들이 이멜질 해서 옛날 생각을 나게 하는데 함 들어바.


"저, 다음 주면 방학인데요, 놀기도 그렇고, 그 실험실 가서 일 좀 하면 안되까나요? 제가 누구냐 하먼요..."
"머 누군진 알 거 없고, 일주일에 한 70시간 일할 생각 있음 오던지. 근데 비자는 있냐?"
"어, 그거 어떻게 해 주시면 안되까요?"
"우씨, 내가 그런 걸 할 수 있으면 당장 나가서 그걸로 사업하겠다."


여하튼 2월에 학위를 받고 9월이 되어서야 꾸역꾸역 촌스럽게 싼 이삿짐 가방을 끌고 김포 공항(인천 공항 열기 전이었어) 가 비행기를 타고 미국 샌프란시스코로 날아가게 되었어. 이전에 학회에 참가하러 워싱턴에 가 본 적이 있어서, 생전 처음 가보는 미국은 아니었지만, 잠시 들르러 가던 때와는 느낌이 전혀 달라. 출발하기 전전날까지 밤새워 막판치기 일을 하느라 몸은 삐걱삐걱 아프도록 피곤했지만, 새로운 생활에 대한 막연한 불안과 긴장감으로 10시간 넘는 비행 동안 내내, 잠은 한숨도 자지를 못했어.  


머리는 그 와중에도 쉬지 않고 이런 저런 생각들을 쫓아다녀. 내가 지금 태평양을 건너가는 거니까, 동쪽으로 가는 거지? 그럼 해를 쫓아가는 거야? 거슬러 가는 거야? 가만가만, 해가 동해에서 떠스리 서쪽으로 지는데, 내가 지금 동쪽으로 가니까 해를 거슬러 가는 거구나. 그럼 나한텐 해가 더 빨리 움직이는 것처럼 보일 테고, 시간은 더 빨리 가는 것처럼 느껴지겠네. 금방 아침이 되고 또 밤이 되고...


에고, 이런 생각이 직감으로 딱 와 닿아야 천재 비슷한 거라도 될 거 같은데 말이야, 하나씩 손가락 꼽아가면서 따져봐야 되는 수준이니... 에라이, 타고 난 걸 우짜겠노. 생긴 바꾸 대로 그냥 사는 거지. 근데, 그러다 보니까 어릴 때 제트기류는 편서풍이다, 뭐 이런 거 외운 기억이 났는데, 그럼 이 비행기가 지금 바람을 업고 가는 거야, 맞바람을 받으면서 가는 거야? 잠깐, 그나저나 서풍이 서쪽에서 부는 거야? 서쪽으로 부는 거야?


이것 참 역시 기본이 중요한 건데. 외운 게 자신이 없고, 옆에 책이나 인터넷도 없으면, 아는 다른 지식으로 다시 짜맞추기 해보는 거지. 일명 연상추리력 연습. 흠, 보자.. 초등학교 때부터 배운 거. 한국에서 여름에 부는 건 고온다습 남풍, 겨울엔 한랭건조 대륙성 북풍.. 홍야홍야.. 음, 고온 다습한 바람이 바다 쪽에서는 부는 걸 테니까, 남풍은 남쪽에서 부는 바람이겠고, 그럼 서풍은 서쪽에서 부는 바람이구나. 그럼.. 한국에서 미국 갈 때는 편서풍이 뒤에서 비행기를 밀어주니까 비행시간이 덜 걸리겠구먼.. 거꾸로 돌아올 때는 좀 더 걸리고.







샌프란시스코랑 서울이랑 시차가 7-8시간 나는데, 비행기로는 편서풍 도움을 받아도 10시간 넘어서 날아가는 거 보면, 아직도 지금 비행기 속도로는 태양 움직이는 속도(사실은 지구 자전 속도겠지)도 못 쫓아가는구나. 이런 생각들 하면서 바라보는 태평양 상공은 정말 기가 막히게 빨리 어두워졌다가 다시 동이 터. 구름 너머로 떠오르는 해를 바라보는 느낌이, 마치 밤을 새고 뻑뻑한 눈으로 새벽을 맞는 것 같았어.


입국심사 서류 작성하라는 얘기를 듣고야, 이제 곧 미국에 도착할 텐데 내가 미국에서 살 준비는 제대로 하고 왔나 생각해 봤어. 우선 보자, 버클리가 어딜까나? 한국 떠나기 직전까지 일 마무리 하느라, 내가 가게 될 버클리가 서해안 샌프란시스코 가까이에 있다는 것만 알았지, 지도 한번 펼쳐볼 여유가 없었어. 그저 생각엔 말이지 태백산맥 동쪽에 면해 있는 강릉, 속초 같은 도시들처럼 비행기에서 내려다보면 미국 서부에 있다는 로키산맥이 딱 보이고, 그 서쪽 면 바닷가에 내가 내릴 샌프란시스코가 보이지 않을까 하는 상상을 해 봤어. 그리곤 비행기 창밖을 유심히도 보았는데, 도무지 어디에 붙었을까? 로키산맥 비스무리한 산맥은 안보이고 아래 보이는 해안 구조는 복잡하기만 해.


비행기가 어느 방향으로 날고 있는지도 모르겠어. 태양 위치로 봐서는 비행기가 북쪽을 바라보며 착륙하는 거 같으니까, 그럼 바다가 왼쪽에 보여야 할 거 같은데, 이게 뭐야 바다는 오른쪽에 보여. 예상을 벗어나는 관찰에 머리는 드디어 에고 모르겠다 나중에 생각하자 하고 포기하고 말어. 나중에 지도 찾아보면서 깨달은 건, 로키는 내륙으로 운전해서도 대여섯 시간은 가야 있는 산맥이고, 샌프란시스코 지역은 바다가 내륙으로 깊숙이 들어와 있는 만(그래서 이 동네를 Bay Area라고 부른다)을 이루고 있어서 내가 본 건 내해였다는 걸 알았어. 그러니까 바다가 오른 쪽으로 보였지. 그 만으로 들어가는 입구에 자리 잡고 있는 게 유명한 금문교(Golden Gate Bridge)잖아. 이름 때문에 다리가 금색일 줄만 알았는데 막상 보니까 빨간색 다리더라고.  


무사히 비행기에서 내리긴 했는데, 입국심사 줄이 어찌나 긴지 한 시간 넘어 걸려서야 겨우 공항을 빠져 나왔어. 그랬더니 피터 슐츠 교수 실험실에 먼저 포스닥으로 와 계시던 선배 되시는 분이 마중 나와 계시더라구. 내가 포스닥을 할 학교는 서부의 명문 캘리포니아 대학 버클리 분교이고, 버클리는 학교를 끼고 있는 조그만 소도시래. 크기나 인구로만 보면 서울의 "구" 하나보다 작은 대학도시야. 버클리 남쪽으로 오클랜드라는 좀 더 큰 도시가 있는데, 내가 집 구할 때까지 임시로 묵게 될 <고려 하숙>이 오클랜드에 있대.


샌프란시스코에서 베이브리지를 건너 오클랜드로 들어가는 길가에는 공장지대와 대규모 부두 시설들이 보였지. 말로만 듣던, 나른해질 만큼 강렬한 캘리포니아의 햇살 아래 펼쳐져 있는 그 콘크리트와 금속성의 풍경이, 널찍널찍하게 흩어져 있는 빈 공간들과 함께 가슴 서늘하도록 삭막해 보였어. 오클랜드는 흑인 빈민들이 많이 모여 살아 그렇게 안전한 곳이 아니란 얘기를 들어서인지 마음은 더 웅크러 들고. 주택가에 들어서서도 지저분해 보이는 가게 간판들, 허름한 집들, 보수가 제대로 되지 않아 여기 저기 패인 도로를 보면서, 이런 게 미국의 실제 모습일까 싶었어.


후에 깨끗하고 좋은 다른 미국 동네들도 가보긴 했지만, 외국인이나 가난한 이들이 많이 모여 사는 대도시 대부분은 첫 날 본 미국의 풍경과 그렇게 다르지는 않더라고. 기회의 땅이라는 미국, 그래 여기도 그저 사람이 사는 곳일 뿐이야.
 


  버클리


도착한 첫 날 고려하숙에 짐을 풀고 하룻밤을 보냈어. 이름만으로도 한국 집이구나 싶은 곳인데, 실제로도 대부분의 하숙생들이 한국 사람들이더라고. 주위가 안전하지 못하다는 얘기에 한동안은 해만 저물면 문밖에도 나가지 못하고 움츠리고 살았어. 3층 짜리 건물 두 개를 연결해서 만든 이 하숙집은 개개인이 쓰는 침실은 별개로 되어있고, 화장실과 샤워는 각 층마다 공유하게 되어 있어. 저녁 식사 시간만 정해져 있는데, 식사 시간에 맞추어 오지 않으면 주요리는 보장되지 않지만, 밥하고 기본 반찬은 항상 준비되어 있어 언제라도 먹을 수 있대. 하숙비가 그렇게 비싸지는 않아서 그만하면 한동안 지내기에는 충분해 보였어.


하루 이틀 지내면서 보니까 한국인 하숙생들 사이에 미국인 친구도 하나 끼어 있는 걸 알았지. 대학을 마치고 샌프란시스코에 있는 무슨 아시아 자선단체에서 자원봉사자로 일한다는 이 친구, 한국말 수준이 장난이 아니야. 어느 날 나한테 묻는 질문, "일제치하"와 "일제식민지" 어느 쪽이 한국 사람들 감정에 덜 거슬리냐는 거야. 징그럽다는 생각과 함께 문득 든 생각이, 이 친구 아마도 미국 정부가 키우는 전문 스파이 요원일거야 하는 거였어. 생각해 봐. 한국 사람들만 있는 하숙집에 기거하면서 수입이 확실치 않은 자선단체에서 일을 하고, 정치색이 짙은 단어를 포함한 한국어 공부에 열중하는, 말끔하게 잘 생기고 비교적 고등교육을 받은 백인 남자애라면 말이지.



여하튼 하숙집 도착한 다음 날 바로 버클리 캠퍼스를 찾아갔어. 버스 타고 한 20분 걸려 캠퍼스 모퉁이에 내리긴 했는데, 캠퍼스 지도를 들고 화학과를 찾아가는 것도 만만하지가 않아. 지나가는 학생들에게 물어도, 화학과 건물이 어디에 있는지 모르는 학생들이 더 많기도 하고. 큰 대학을 다녀보지 못한 나한텐 이상한 얘기처럼 들리기만 했어.


버클리 캠퍼스는 남쪽에 정문을 두고 거의 정사각형 모양으로 캠퍼스가 펼쳐져 있는데, 남문 밖은 신촌 같은 분위기야. 히피의 본고장답게 요란스럽게, 그리고 쫌 지저분하게 차려 입은 젊은이들의 모습과 자질구레한 악세사리나 야리꾸리한 냄새 풍기는 향(이거 마약 아닐까)들을 파는 좌판들이, 남쪽으로 길게 뻗은 텔레그래프 거리에 널려있어. 학교 건물들의 배치로 어디까지가 학교 경계인지는 비교적 쉽게 알 수 있지만, 캠퍼스를 둘러싸고 있는 벽들은 따로 없어서 차 달리는 도로들이 학교 캠퍼스 경계를 구분해 주는 정도야.


캠퍼스 동쪽 산 위에는 유명한 <로렌스 버클리 연구소>와 방사광 가속기가 있고, 서쪽으로는 1-2마일쯤 거리에 바다가 있어. 내해이긴 하지만, 태평양과 연결되어 있는 그 바다야. 애국가에 나오는 동해물이 여기서는 서해물인 셈이지. 화학과 건물은 북쪽 모서리에 면해 있더라고.    


여하튼 물어 물어서 지도 교수인 피터 슐츠를 찾아갔어. 내 이름을 댔더니, 이 양반 뭐라고 웅얼거리는 목소리로 얘기를 하는데 먼 소린지 도통 못 알아듣겠어. 미국사람들도 사람마다 말하는 스타일에 따라 영어가 알아듣기 쉽기도 하고 어렵기도 한데, 이 양반은 대표적으로 알아듣기 어려운 경우에 해당하더라고. 혼자서 뭐라고 열정적으로 얘기하다가, 상대방이 쫓아오지는 못하는 농담을 던지고는, 재밌지 재밌지 하면서 혼자서 호탕하게 우하하하 웃다가, 상대방 반응이 없으면 턱을 쓰윽 쓰다듬으며, "우쨌던간에..." 하고 얼버무리는 버릇도 있는 사람이었어.


근데 한 10분 얘기하면서 분위기를 파악하고 보니까 처음에 그 분 얘기를 못 알아들었던 건, 서로 핀트가 안맞는 전혀 다른 얘기를 하고 있었기 때문이란 걸 깨달았어. 40명이 넘는 큰 그룹을 운영하다 보니까, 새로 들어오고 나가는 사람들도 항상 많은데, 찾아온 내가 연구참여를 하러 온 대학원 신입생인 줄 알았다는 거야. 큰 그룹을 운영하는 그에게는, 외국에서 날아온 포스닥이 도착하는 날짜 같은 건 그렇게 중요한 일도 아닌 모양이지. 하긴 한 달에도 두셋씩 새로 들어오고 나가고 하다보면 그게 정상인지도 모르지만, 그래도 좀 섭섭하더라고.


여하튼 그렇게 대충 인사를 나누고 나니까, 다음날 아침 8시에 다시 만나재. 해서 다음날 아침 8시에 맞춰 학교로 가려고 하다 보니, 아무래도 시간이 늦을 거 같더라고. 택시비가 얼마나 나올까 가늠도 해 볼 겸해서 처음으로 택시를 타 봤더니, 12불쯤 돼. 한국 생각하면 꽤 비싼거지, 그 정도 거리에 말이야. 근데 왜 하필 아침 일찍부터 보자는 걸까 싶었는데, 알고 보니까 이 양반, 평소엔 새벽 5시에 나와 일을 시작한다는 거야. 토요일엔 좀 늦어서 6시에 나온다나. 그리고 낮 시간 동안에는 10분이 멀다하고 사방에서 걸려오는 전화로, 찾아가도 차분하게 얘기를 할 수가 없다는 거야. 좀 진득하니 얘기할라면 아침 일찍 밖에는 안된다고 비서가 귀띔을 해 주는데, 8시면 많이 봐 준 거라나. 나중엔 진짜 아침 6시에 약속해서 만난 적도 있었어. 지독한 사람이야.


여하튼 자리를 마주하고 앉았더니, 노란 종이에 한국에서는 거의 쓰지 않을 거 같은 싸구려 같은 노란 연필 꺼내 들고는, 내가 할 일을 아무 것도 아니라는 듯이 얘기하면서 적어 나가는 거야. 그냥 스윽스윽 적어주는 게 프로젝트 서너개는 돼. 그걸 한꺼번에 다하라고...요? 개중에 하나는 2주 안에 한 서른 개쯤 화합물을 만들라는 거더라고. 이거 진짜 가능하다고 생각하고 얘기하시는 건가용? 차마 물어보지는 못하고(역시 부드러운 영어가 안되어서 말이지), 그래도 우선은 알겠다고 얘기하고 들고 나왔지.


딴 친구들한테 물어보고야 알게 됐어. 이 양반, 한 사람한테 댓 개의 프로젝트를 왕창 던져주고는 어떻게 해 나가는지 테스트도 하고, 그 댓 개 중에 하나만 되어도 큼직한 논문거리가 되니까 그걸로 좋다고 생각하는 스타일이라는 걸 말이야.


엄두가 안나긴 하지만 프로젝트도 받았고, 실험실도 배정받고 보니까, 서해 쪽으로 베란다까지 갖추고 있는 전망 좋은 8층 실험실이야. 베란다에 나가면 불어오는 바람과 함께, 저기 보이는 바다 끝에는 내 고국 땅이 있는 거려니 하는 아련한 마음이 들게 하는 곳이더만. 넷이서 같이 쓰는 같은 방 동료들은 대학원생 둘에 포스닥이 하나인데, 다들 사람 좋아 보이는 미국 친구들이라고. 처음에 어떻게 인사 나누고 사귀나 하던 걱정은 그래서 비교적 쉽게 사그라 들었어.


실험 벤치에 앉았더니 여러 가지 생각이 나. 한국에서 포항공대 한 곳에서만 10년을 지내다보니 모든 게 익숙하기만 하던 환경이었지. 그런데 이제 전혀 새로운 환경에 내던져진 것이, 마치 들어가기 주저되는 바다 속으로 억지로 등 떠밀려 들어가 어쩔 줄 모르고 있는 어린애가 된 듯한 느낌이야. 여러 해를 같은 실험실에서 일하면서 후배들도 쌓이고, 고참이 되었답시고 자질구레한 실험실 잡일은 직접 안 해본 지도 꽤 되었는데, 이젠 모든 걸 백지상태에서 혼자서 다시 시작해야 되는 거야.


크게 숨을 몇 번 쉬어보고는 실험 벤치 청소부터 했어. 이전 친구가 쓰던 물건들 버릴 건 버리고, 잘 모르는 건 안 보이는 서랍에 밀어 넣고, 새로 쓸 유리기구들 주문도 하고 말이야. 흔히 화학실험실 하면 떠올리는, 뭔가 부글부글 끓이고 하는 유리 장치들 말이야, 그런 걸 유기화학 하는 사람들은 밥그릇이라고도 부르거든. 반응을 시작해 놓고 왔다를 반응 앉히고 왔다고 표현하기도 하고. 실험실 배정 받은 날, 반응 한 솥 앉히면서 내 포닥 생활은 시작되었어.    
 


  미국에서 처음 살려면




포스닥으로 왔건 뭘로 왔건, 일단 미국에 처음 오면 미국 사회에 정착하기 위해 필요한 다른 절차적인 일도 꽤 돼. 우선 미국에 입국하는 데는 여권과 미국 정부가 발행한 비자가 필요하겠지. 단기간 다녀가는 관광비자(B 비자)와 취직을 했을 경우에 해당하는 취업비자(H 비자) 그리고 학생비자(F 비자) 등이 있는데, 포스닥 같이 비교적 단기간 연수 형식으로 오는 경우에는 문화교류비자(J 비자)를 받는게 보통이야.


J 비자는 심사가 비교적 간단한 반면에 미국에 3년 이상 머물 수 없고(신청하면 최장 6개월까지 연장되기는 해), 본국으로 돌아간 후 2년간 미국으로 돌아올 수 없다는 단서가 붙어. J 비자를 받아서 미국 와서 장기체류하는 걸 막기 위한 조치인거지. 대신, 세금상의 혜택은 받을 수 있어서, 한국인의 경우 2년간은 본국에 세금을 내는 것으로 간주하고 미국에는 세금을 내지 않아도 돼. 미국에선 세금이 수입의 1/3정도에 해당하는 걸 생각하면 상당한 혜택이기는 해.


이 세금 혜택을 받으려면 도착과 동시에 세금 관계 서류를 작성해서 보고해야 되는데, 읽고 사인해야 하는 서류들이 장난 아니야. 당연히 영어로 씌어있고 수십 페이지의 읽을거리엔 낯선 용어들만 가득해. 나같이 학교에 담당직원들이 있어서, 시키는 데로 사인하라는 칸에 사인만 한 경우는 그나마 편한 경우야. 직접 그런 법률 담당자를 찾아가서 처리해야 하는 일반 이민자들 경우에는 진땀 나는 일일 게 뻔해. 그러다 보면, 사기를 당하는 경우도 있고 부당하게 많은 수수료를 내야 하기도 하고 그렇겠지.


그리고 또 서둘러서 해야 할 일은 한국의 주민등록번호에 해당하는 사회보장번호를 신청해서 받는 거야. 세금 서류에도 이 번호는 필요하니까, 세금 서류와 거의 동시에 처리해야 돼. 정부관청에 가서 신청하고, 합법적인 체류에 문제가 없다고 판정 받으면 1-2주 안에 집으로 번호 적힌 카드가 날아와. 내가 처음 도착한 당시만 해도 그렇게 까다롭지 않게 발급을 해 주었는데, 9.11 뉴욕 테러 사건 후에는 많이 까다로워졌다고들 하더라고. 그런 경우엔 세금보고용으로 쓸 수 있는 별도 번호를 받아야 돼.


그 다음엔 은행계좌 여는 것. 돈을 주고받는 일들이 은행을 통해서만 이루어지는 경우가 많아서 은행계좌는 미국 생활에서 필수적이야. 우선 학교에서 나오는 월급이 은행으로 들어오고, 전기세나 전화세 같은 공과금은 은행신용계좌가 있어야만 쓸 수 있는 가계수표로만 받어. 처음에는 그런 공과금 납부를 수표를 써서 우편으로 보내는 게 불안스럽기도 했지. 가다가 우편사고로 없어지면 어떻게 하나 싶기도 하고, 영수증을 손에 쥐지 않는 게 불안하기도 하고 그랬어. 그렇지만 몇 년 살아보니까, 비교적 안정된 사회라서 그런지, 우편사고가 일어나는 경우가 그렇게 많지가 않더라고. 또, 은행을 통해서 수표로 처리한 건 그 자체로 추적이 가능해서 자동영수증을 받은 거나 다름없다는 것도 알게 되었어.


은행계좌에는 예금계좌와 신용계좌가 있는데, 예금계좌는 이자가 조금 더 붙고, 신용계좌는 보통 이자가 거의 없거나 있어도 아주 조금이야. 평소에 유지해야 하는 은행 잔고 최소액, 이자, 계좌 유지비 등등 무지하게 복잡한 선택이 있어서 처음 열 때는 이것도 상당한 스트레스가 되는 일이었어. 그래도 꼭 하기는 해야 하는 일이야.


그리곤, 집에 전기 및 전화 놓기. 나 같은 경우에는 하숙집에서 살았으니까, 전기는 신경 쓰지 않아도 됐어. 게다가 동네마다 신청할 수 있는 전기회사가 대부분 하나로 정해져 있으니까, 큰 문제는 아니었지. 문제는 이 전화야. 한국 같으면 최소한 가정용 전화는 한국통신에 신청해서 일률적인 요금을 적용받잖아. 미국엔 무지하게 많은 전화회사와 서로 다른 서비스들이 판을 치고 있어서 처음 고를 때는 진땀을 빼게 돼. 잘못 고르면, 2-3배까지도 다른 전화 요금을 청구 받어. 선택의 여지가 많아서 좋다고 할지는 모르지만, 처음엔 한국 같은 단순한 방식이 어찌나 그립던지 몰라.


경쟁이 심하다보니까, 상식적으로 말도 안 되어 보이는 조건을 들고 가입을 권하며 전화를 해대는 브로커들도 있어. 한 몇 달은 공짜로 해준다던가, 아예 수십 불씩 돈을 주겠다는 곳조차 있어. 한국 사람들이 많아지다 보니까, 한국인 브로커들도 많이 있는데, 복잡한 시스템을 이용해서 고의적으로 애를 먹이는 경우도 종종 봤어. 충분한 설명 없이 좋은 점만 부각시켜 얘기하다 보니까, 기본 할당 시간을 다 쓰고 추가되는 부분은 터무니없이 비싼 전화비를 내거나 해서 첫 달에 수백 불씩 내야했다는 한국 사람들 많이 있더라고. 더 고약한 건 부당한 항목으로 요금 청구를 하는 사례가 빈번한데, 일일이 확인해서 전화하면, "그럼, 그만큼은 빼 주면 될 거 아냐?"하고 태연하게 반응해.


시스템을 잘 몰라서, 혹은 어떻게 항의해야 하는지 모르는 사람들은 그냥 돈을 내는 경우가 많다는 거고, 그걸 알고 고의적으로 그런 짓을 한다는 인상을 받아서 정말 입맛이 썼어. 요즘은 한국도 핸드폰에서는 경쟁이 심해져서 그런 경우가 더 이상 미국 얘기만은 아닌지도 모르겠다만..


충분한 정보를 받지 않았다는 걸 증명하려면 설명해 준 직원의 이름과 통화시간도 꼼꼼히 기록해 두어야 하고, 나중에 딴 소리를 하면 그 때 녹음해 둔 거 틀어달라고 요청해야 할 때도 있어. 돌려준다고 한 금액도 실제로 받는 데는 몇 달씩 시간이 걸리니까 아예 머리 쓰지 않으려면 가장 기본적인 옵션으로만 신청하고, 장거리 거는 전화는 선불카드를 사서 하는 게 속 편한 지도 몰라. 익숙해지면서 조금씩은 나아졌지만 여전히 밥맛없는 시스템이야.  


그 다음으로 의무적인 건 아니지만, 없으면 미국생활에서 많이 불편한 것이 운전면허증이야. 주민등록증이란 게 따로 없다보니까, 운전면허증이 신분증으로 쓰여. 또, 공공 교통수단이 잘 되어있는 대도시가 아니면 운전 안하고는 기본 생활이 유지되지 않는 미국에서는 면허증은 거의 필수품인 거야. 내 경우에 한국에서 몇 년 운전을 했기에 우선은 국제 운전면허증을 가지고 오긴 했지만, 기한은 1년이고, 미국 안에서도 각 주마다 법률이 달라 몇 개월 안에는 필히 취득해야 하는 경우도 있어. 특히, 캘리포니아는 남미 출신을 비롯한 유색인종들이 많이 사는 곳이라 그런지, 다른 주의 운전면허증 소지자도 재시험을 보고 캘리포니아 면허증을 받아야만 한대.


운전면허증은 DMV(Department of Motor Vehicles: 자동차국)에 신청해서 필기시험을 먼저 보고, 합격하면 다시 날짜를 배정 받아 실기시험을 보게 돼. 미국에서 DMV에 가는 것만큼 짜증나는 일도 없는데, 거의 예외 없이 아침 일찍부터 가 줄을 서서 하염없이 기다려야 돼. 앞에 고작 두세 사람 있는데도 한 시간씩 걸리는 건 예사야. 교육 수준이 의심스러워 보이는 직원들의 무성의한 근무태도를 보고 있으면, 열불이 터지다가, 도대체 이런 효율성을 가지고 미국이 어떻게 세계 최고 수준을 유지할 수 있는 걸까 싶어. 예전에 우리네 관청도 이랬는지 모르지만, 가끔씩 한국 들를 때 동사무소나 구청을 가면 많이 친절해졌고, 서비스도 좋아진 걸 느끼거든. 최소한 기다리는 사람이 있는데, 옆 사람하고 딴 짓 하며 시간 끄는 건 한국사람 정서상 있을 수 없는 일 아냐?







캘리포니아여서 그런지 모르지만, 필기시험에는 한국어 시험도 있었어. 그렇지만, 반드시 한국어로 읽는 게 쉬운 건 아니더라고. 아주 깔끔한 한국말이 아니어서 이게 무슨 말을 번역한 걸까 하고 두 번 생각해야 하는 경우도 종종 있으니까.


여하튼, 필기시험은 겨우 턱걸이로 통과하고(공부한 양을 생각하면 당연한 거겠지만), 실기 시험에서 처음엔 떨어졌어. 무쟈게 친절하게 그리고 처언천히 얘기하는 백인 할아버지가 심사관이었지. 차를 몰고 시내로 나가서 이것저것 지시하면서 점수를 매기는 데, 내 결정적인 실수는 후진할 때 고개를 돌려 뒤를 보지 않은 것. 우리는 운전할 때 후진이나 차선을 바꿀 때 대개는 백미러(영어로는 rear mirror라고 하지)를 보면서 하는데, 이 사람들 규칙으론 반드시 어깨 너머로 고개를 완전히 돌려 뒤를 보면서 해야만 돼.


또 한 가지 큰 차이. 정차 신호에서는 반드시 몸이 앞뒤로 한번 흔들릴 만큼 완전 정차를 하고, 고개를 돌려 좌우를 확인(혹은 하는 척) 하고, 다시 진행해야 된다는 거야. 적당히 속도를 줄이는 걸로는 딱지까지 떼일 수 있는 위법 상황으로 간주돼. 약간 쫄아서 두 번째 시험을 보러 갔을 때는 젊은 흑인 아가씨가 심사관이었는데, 운전 마치고 돌아오니까 초등학생 야단치듯이 마구 야단을 쳐. "여기서 너 이랬지? 저기선 그래 갖구 되겠어?" 에구, 또 떨어졌구나... 하고 머리 긁고 있는데, 이 아가씨 말 끝에 "합격" 하는 거야. 휴...


겨우 운전 면허증까지 땄으니까 이젠 나도 캘리포니아에서 살 기본적인 준비는 된 거야?


 


닥터 큐(yt.chang@nyu.edu)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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