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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권고] 십대들에게 광장을 허하라

2005.5.9. 월요일
딴지 편집국



1989년은 여러 모로 꽤 재미있는 해다. 우선 베를린 장벽이 무너지면서 냉전 후 시대가 시작됐고, 제 3세계에도 영향을 미쳐 남한 사회의 운동가들에게 좌절감을 확 안겨줬다. 당 좌절감은, 이제 이상향이 사라졌으니 이념을 버리고 제도권에서 놀아도 된다는 일종의 면죄부가 되기도 했다나.


또한 이 해는, 로떼 후라버너 껌 광고로 주가를 높여가던 이미연에게도 의미심장했다. 그녀가 주연한 영화 <행복은 성적순이 아니잖아요>가 히트하고, 그녀가 등장하는 영화 포스터는 영화의 결말과는 무관하게 소년들의 보호본능을 심하게 자극했더랬다.


그런가 하면, 전교조라는 불법단체도 출범을 했는데, 그 시절 학생들에게서는 민주동문회, 줄여서 민동이라는 조직이 유행했었다. 이념화된 선배들이 순진한 고딩 후배들 꼬셔서 전교조를 지지하라며 뭔가 불온한 짓거리를 시키니 각별히 조심하라시던 모 고등학교 교장샘 훈화말씀으로 그 시절 분위기를 대체할 수 있겠다. 민동에 포섭된 고딩들을 체포한 학교 교무실에서는 매타작 파공성, 해당 학부모님 소환 등으로 사뭇 긴장감이 흘렀었다.


이상과 같은 소란의 한 가운데에서 태어난 대한민국 89년생들. 얘네덜이 요즘 일 하나를 벌였으니, 지난 주말 광화문에서의 집회다. 원래 자살청소년 추모집회였지만 교육부의 고교내신 상대평가제 전환 방침이 이슈화되면서 내신상대평가 반대내용까지 포함됐단다. 이로 인해 각 지역교육청 직원 및 교사 등 교육공무원들이 황금 같은 토욜 오후를 희생하며 다 큰 학생들의 안전한 귀가를 도왔다는 미담이 전해진다.









ⓒ민중의 소리 한승호기자


8,90년대에는 행복은 성적순이 아니잖아요 하는 수줍고도 내성적인 슬로건이 풍미했다면, 요즘 애들은 행복은 성적순 맞잖아, 나 그거 반대하거든 이라고 직접 말한다. 얘들이 그 말을 하러 직접 길거리로 나선 거다. 60년 세월의 대한민국 건국사에 매우 드문 일 되겠다.


해서 금번 집회는 지난 시절의 민동과 겹쳐진다. 대한민국 최초의 전국단위 고딩 정치결사 조직이 될 뻔 한 민동은 유야무야 사라져 갔다. 그러나 민동이 나름의 의미가 있었던 것은, 식민지 시절 만세운동이나 4·19 운동에 동참했던 10대들을 연상시키면서도 확연한 차별성을 가지고 있었기 때문이다.


이들이 원한 것은 조국 독립도, 독재정권 타도도, 그리고 조국 민주화도 아니었다. 이들을 자극한 것은 같이 부대끼던 교사의 부당한 퇴출이었다. 비록 대학생 선배들이 민주화라는 거창한 용어로 꼬드긴 부분도 있었으나, 실질적인 동기는 그랬다. 금번 89년생들의 반란도 이와 동일한 기저를 갖는다. 당 집회를, 몇몇 매체들처럼 4·19에 투사시키면서 호들갑을 떠는 것은 그래서, 완전 헛다리다. 이 친구들의 집회는 피와 희생을 불렀던 거대담론의 그것과 다르다.


10대들의 사회참여는 이제 스스로의 권익주장으로 수렴되고 있다. 대의명분과 운동 그 자체에만 집중하던 옛날 활동가들이 동구 몰락이라는 외부요인에 무너져 내린 것을 상기하면, 보다 자신과 가까운 화두를 가지고 시작하는 이들의 활동은 더 견고하다.


이 친구들의 집회는 앞으로도 계속 될라나 보다. 다음 주말에는 성적보다 더 일반적인 화두를 들고 나올 예정이란다. 두발제한 폐지. 최소 5년 전부터 꾸준히 제기되어 온 두발의복 자율화 운동은, 헌법이 보장한 공민권까지 들먹이며 논리에 살을 더하고 있다. 멋지다. 고작 머리 밀어 반항하던가 몰래 핀컬 파마하고 자위하던 세대와 얘네들은 다른 것이다.


다음 집회에는 범생이들 뿐 아니라, 날라리들도 나오기를 희망한다. 성적 이외의 자유를 외치며 범생이와 날라리가 그렇게 연대하는 거다. 내신 때문에 친구가 적이 된다며 칭얼댈 것이 아니라, 죄다 모여 지금·여기의 삶을 찢고 까불어라. 그렇게 찢기고 까불린 현실에서만이 연대와 자유라는, 진부해도 늘 유효한 알곡을 발견할 수 있을테니까.


십대들에게 광장을 허하라.


 


요새도 날라리란 용어를 쓰는지 심히 궁금한
시포(shepoor@ddanzi.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