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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화] 맛쪼니 엽기댄스 vs 중세의 춤

2002.2.1.금요일
딴지 문화부 선무당

먼동이 터 올 무렵... 짧았으되 깊었던 도시의 밤을 뒤로하고 노곤한 몸 앞세워 삶의 터전으로 허둥지둥 떠나는 자가 있다. 누적된 피로 훈장처럼 달고, 여명의 붉은빛을 눈 안에 담은 듯 핏발 선 두 눈으로 아침을 맞는 자, 이 도시의 소비자이자 소비재인 그대, 이름하여 맛쪼니... 왕년의 기상 고이 접어 화장실 신문에 끼워놓고, 여기서 턱, 저기서 턱, 아래 위 핑퐁놀이에 에너미 현상에 시달리며, 에이쑤 침대에서 자지 못하였어도 새벽을 가르며 달려야하는 자.


벌써 십수년이 흘렀던가.  "상쾌한 아침햇살 맛쪼니"라 외치던 한 무리의 그들, 행렬 지은 그 가무의 품새마저 너무나 처연하여, 맛쪼니 하고 그 이름 그대로 불리워지게 된 애닯은 사연. 아.. 그러나 그들이 읊조리던 상쾌한 아침이야말로, 그들이 살아 생전 닿을 수 없는 이어도가 아니던가. 그러기에는, 지나간 밤이 얼마나 질풍같은 것인지. 취기와 광기로 얼룩진  밤의 기억이..


 


그들에게 밤은, 광란의 디오니소스 축제였다. 거나한 술자리가 길어질수록 대화는 그 말을 잃어갔고, 언어보다는 감정이 소통되기 시작한다. 취기에 달궈진 감정이 야생마처럼 날뛰기 시작하면,  맛조니들은 몸과 영혼을 맡길 무언가를 필요로 했다.


그것은, 종종 춤이었다...


그 격정적인 춤에의 탐닉은, 질펀함을 넘어 때로는 기괴스럽게 발전하였다. 모가지를 옭죄던 넥타이라는 끈은, 오늘밤 그들의 나아갈 바를 천명하는 혁명의 붉은 띠로 머리에 드리워진다. 광란의 열기 속에서, 음악을 타고 넘은 춤은 발작으로 이어지고, 그것은 무리들에게 하나둘 번져나간다. 억압과 구속에서 해방된 인간의 몸부림은 점차 격렬하게 발전해나간다. 놀랍게도, 그것은 "모든 것을 잊게 해주는" 마법을 일으킨다. 그를 괴롭혔던 삶의 세세한 고통에서부터 그 자신까지도.  


맛조니들의 엽기댄스에 대한 세세한 설명은, 지역과 업종, 연륜에 따라 실로 다양한 현상이 있기에 가급적 설명을 자제토록 하겠다.  다만 흥미로운 것은 이름난 무도장의 수자원관리분과에서는 이들의 출입을 제한하고, 그곳의 선녀들 역시 이들의 분포정도를 수질오염의 기준으로 삼기도 할만큼,  이들의 춤사위가 열린 공간에서 전시되기에는 대체로 충격적이고 기괴한 것임을 알 수 있다.


그렇다면, 그 엽기적인 춤의 형태 이면에는 어떤 이유가 숨어있는 것일까. 무엇이 그들을 그토록 광란의 폭발로 몰고 가는 것일까.


답은 간단하다. 이들에게 있어 춤이란 가볍게 즐기는 여흥이기보다는  고통스러운 삶의 "발작적인 표현"이기 때문이다. 삶이 궁지에 몰려버린 현대판 농노들에게 있어 음주가무란, 한번의 큰 숨을 내쉴 수 있는 긴장의 탈출구인 것이다. 입구 풀어진 풍선 쉭쉭 날아가듯이, 팽팽한 긴장의 극적인 해소가 어찌 고고할 수 있으랴...


사실 이러한 기괴한 춤은 비단 오늘날의 것이 아니라, 인간의 삶이 고통스런 나락으로 빠질 때 늘 극적으로 등장하곤 했다. 앞서 말했듯이, 가난한 이의 위로자이자, 고통스런 삶의 동반자인 인간의 춤은, 그것을 추는 인간의 삶을 고스란히 반영한다.  


그럼 이제 춤이 가장 극단적으로 왜곡되어 나타났던 시대로 가보도록 하자. 춤이 쾌락과 광기를 넘어, 죽음으로까지 연결되었던, 중세의 <죽음의 춤>으로.  


사실 그것은, 우리가 익히 알고있는 아주 이상한 동화에도 또렷하게 기록되어 있었다 ...






차마 사랑하는 이의 가슴을 찌르지 못해 물거품이 되고만 인어공주, 성냥불에서 사랑하는 가족들의 모습을 보는 성냥팔이 소녀, 외톨이로 지내다가 사랑하는 가족을 찾은 미운 오리새끼....  어린 시절 누구라도 읽었을 안데르센의 동화책들이다.


낭만주의와 순수의 결정체처럼 보이는 안데르센의 동화와 달리 그의 현실적 삶은 발랄하지 않다. 그에게는 2대에 걸쳐 광인이었던 할아버지와 아버지, 행려병자로 살다가 정신병원에서 생을 마감한 어머니가 있었다. 불행한 현실에서 도피하기 위해 안데르센은 동화 속으로 숨었다. 그의 채워지지 않은 욕망은 왜곡되어 나타났다. 겉으로는 아주 아름답게. 하지만 그의 동화를 뒤집어보면, 살인, 근친상간, 폭력, 변태, 자살충동, 불륜, 저주, 집착 등 끔찍한 인간의 모습들이 숨어있다.









안데르센 동화에는 마그리트가 그린 인어처럼, 밝게 비치는 이면의 어두운 그림자가 군데군데 드리워져 있다...


철저한 이기주의로 실생활 속에서 전혀 만족할 수 없었던 영혼인 엄지공주, 목소리를 파는 괴상한 거래로 남자를 얻으려는 인어공주의 집착, 자신의 환상을 완성시키며 혹한 속에서 죽음을 맞는 성냥팔이 소녀의 자살충동..


그리고 여기, 중세의 춤을 찾는 우리가 읽어야 할  동화가 있다. 안데르센의 엽기성이 가장 드러난 이 이야기는 어린이를 위한 동화에서는 그 진의(眞意)와 잔혹성이 좀 각색되어있다. 아마도 사치스러운 과시욕이 있으면 재앙을 불러온다거나 어른의 말을 잘 들어야 한다는 일반적인 교훈을 주려는 것 일거다.


하지만, 이 이야기 속에는 춤의 마력을 경고하는 동시에 춤에 대한 저주를 내리는 중세 교회의 목소리가 숨어있다.






아주 먼 옛날, 카렌이라는 예쁜 소녀가 살았습니다. 소녀는 너무 가난해서 겨울에도 나무로 만든 신을 신어야 했기 때문에 그녀의 발은 항상 빨갛게 부어 올랐습니다. 그 마을에는 마음씨 좋은 제화업자의 부인이 살고 있었습니다. 그녀는 오래된 빨간 천으로 구두를 만들어 소녀에게 주었습니다.


카렌은 그 신발을 자기 어머니의 장례식에 신고 갔습니다. 그녀에게는 다른 신발이 없었기에 어쩔 수가 없었습니다. 한 노파는 장례행렬을 따르는 그녀를 보고 가엾은 생각이 들어 자신이 키우겠노라고 말했습니다. 카렌은 그 신발 때문에 그녀가 자신을 돌봐주기로 마음먹었다고 생각했지만, 노파는 그 신발을 불에 태워버렸습니다.


어느날 왕비의 행렬이 마을을 지나갔습니다. 카렌은 공주님이 신은 빨간 구두를 보고 세상에 저렇게 예쁜 신발은 없을 것이라고 생각했습니다. 그리고 눈이 잘 보이지 않는 노파를 속여 빨간 구두를 맞추었습니다. 그녀는 그 구두를 신고 교회에 가는 길에 카렌은 한 군인을 만났습니다. 그는 카렌의 구두를 닦아주면서 말했습니다.







"오, 예쁜 빨간 구두로구나. 구두야, 춤을 출 때는 꼭 아가씨의 발에 붙어서 끝까지 춤만 추어라" 그 때부터 카렌은 자기도 모르게 춤을 추지 않고는 견딜 수 없게 되었습니다. 이상하게도 발이 저절로 춤을 멈추는 바람에 그녀는 겨우 신발을 벗을 수 있었습니다.


이 일 이후 할머니는 빨간 구두를 벽장 깊숙히 숨겨놓았지만, 할머니가 병에 걸려 자리에 눕게 되자 카렌은 다시 구두를 꺼냈습니다.


"무도회에는 갈 수 없더라도 잠시 신어보는 것은 괜찮을 거야"


 



아무리 가난하기로서니, 자기 어머니의 장례식에 빨간 구두를 신고 가는 카렌 같은 아이도 드물 것이다. 하지만, 기아와 페스트 등 죽음이 만연한 중세에 죽음은 그리 대단한 사건은 아니었다. 더구나 어머니가 남은 마지막 가족이라면 카렌은 수차례의 죽음을 겪은 뒤였을 테니. 그래서 이 어린 소녀에게는 어머니를 묻으러 가는 일보다는, 새로 얻은  빨간구두에 더 관심이 갔을런지도 모른다.


교회의 장례식은 공식적으로 죽음을 인정하는 사회적인 절차이다. 중세인들은 죽으면 하느님의 품으로 간다고 믿었다. 그 죽음의 환영식에서 카렌의 빨간 구두는 사람들에게 "살아있음"을 각인시킨다.


상황의 패턴은 다시 한번 반복된다. 그녀의 나이든 후원자가 앓아 누웠을 때, 그녀는 다시 죽음을 돌보지 않고 생명의 상징인 빨간 구두를 꺼낸다. 죽음을 잠시 잊어버린 채, 그녀는 다시 생의 기쁨을 맛보고 싶은 것이다.


인간의 발, 가장 미천하고 낮은 신체를 감싸는 도구인 구두는 인간 신체를 영혼을 중시한 중세의 이원론에 정면으로 맞서는 상징물이다. 죽음에 대한 공포를 이용해 부활과 구원을 노래하는 교회 앞에서 빨간 구두는 너무 생명력이 넘친다. 거기에 춤이라니, 그러므로 죽음을 두려워하지 않은 이 소녀는 저주 받아 마땅했다. 그리고 그 것은 죽음보다 무서운 형벌이어야 했다.  






그런데 카렌이 신발을 신자마자 카렌의 발이 또 저절로 춤추기 시작했습니다. 카렌은 밭에서나 들판에서나, 비가오나, 눈이 오나 춤만 추어야 했습니다. 게다가 구두는 카렌이 오른쪽으로 가려고 하면 왼쪽으로, 앞으로 가려고 하면 뒤로 갔습니다.  


나무 숲 아래, 음산한 달기운 속에서 나타난 붉은 수염의 군인이 말합니다. "아주 예쁜 춤추는 신발이구나." 공포에 질린 카렌이 신발을 벗으려 했지만 신은 더욱 더 카렌에게 조여왔습니다. 카렌은 스타킹을 찢어버렸지만 신발은 다시 그녀의 발에 밀착되었습니다.


카렌은 열려있는 교회의 뒷마당(공동묘지)으로 춤을 추며 들어갔습니다. 거기에 있는 죽은자들은 춤추지 않았습니다. 춤을 추는 것보다 그 것이 더 나을 것입니다. 엉성퀴풀이 자란 한 거지의 무덤 위에서 카렌은 잠시 쉬고 싶었지만, 도저히 춤을 멈출 수가 없었습니다.


카렌이 문이 열려있는 교회문 앞에 이르자 흰 옷을 입은 천사가 큰 칼을 들고 서 있었습니다.







"너는 그 빨간 구두를 신고 춤을 추어야 한다. 네가 온기없이 하얗게 질리고, 네 피부가 쪼그라들어 해골처럼 말라붙을 떄까지 말이다. 춤을 춰라! 카렌. 네가 애걸하며 문을 두드리면, 거기에 사는 사악한 이들이나 어린 아이들이 너의 소리를 듣고, 너를 두려워 하도록 말이다. 춤을 추어라!


"제발, 자비를! "


카렌은 울부짖었지만, 천사의 대답을 들을 수가 없었습니다. 그녀의 발은 다시 춤추며 문을 지나, 들판으로 나아갔습니다.


바야흐로, 혼자만의 무도회를 끝내줄  (이미지 관리상 무장천사가 할 수 없다) 누군가가 필요한 시간이 왔다. 재앙을 끝내고 가엾은 영혼을 신의 품으로 돌려보내기 위해 형의 집행자(executioner)가 등장한다.  






황야를 지나 카렌은 홀로 떨어진 집 하나를 발견했습니다. 카렌은 거기에 누가 사는 지 알고 있었습니다.


" 제발 좀 나와보세요"


그녀를 본 망나니가 말합니다."넌 내가 누구인지 모르는구나. 나는 사악한 놈들의 머리를 잘라버리지. 내 도끼는 지금 그러고 싶어서 전율하고 있는걸."


기독교의 냉엄한 저주 앞에서, 죽음을 두려워하지 않고 춤을 추었던 소녀는 무릎을 꿇고 춤이라는 범죄를 인정한다.


"제 머리를 자르지 마세요! 그러면 내 죄를 회개할 수 없으니까요. 대신 빨간 구두와 내 발을 자르세요." 카렌이 죄를 회개하자 망나니는 그녀의 발을 잘랐습니다. 그러자 카렌의 작은 발과 빨간구두는 계속 춤을 추면서 숲 속으로 사라져 갔습니다.


 



이 이야기의 잔혹함은 어린 소녀의 발을 자른다는 것에 있지 않다. 그것은 소녀가 신은 붉은 구두에 대한 형벌이 한번에 끝나지 않는다는 점에서 더 엽기적이다.


유혹에 빠진 대한 대가는 "영원히 끝나지 않는" 춤이 주는 공포에서 시작해, 모든 사람이 그녀를 거부하는 "조리 돌림"의 모멸감과 절망을 맛보게 한 뒤에야  참형으로 이어진다. 실제로 중세의 처형은 신의 정의가 실현되는 무대이자 민중에게 공개되는 흥미진진한 라이브 참혹쇼였다.


하여, 다리를 잘린 카렌의 저주 역시 쉽게 풀어지지 않는다. 괴물이 한번에 쇼부보는것 봤는가.











"난 빨간 구두로 인해 너무 많은 고통을 겪었어. 난 교회에 가야해. 사람들이 날 보도록 말이야."


목발을 단 카렌 교회 문을 열었습니다. 그러자 거기엔 빨간구두와 그녀의 잘려진 발이 춤추고 있었습니다.


카렌은 공포에 질려 도망쳤습니다. 하지만, 그 다음 주에도 마찬가지 였습니다.


  <동화그림:이와사키 치히로>


악몽은 한 동안 되풀이 된다. 이 중죄인이 신성한 교회에 함부로 발을 들일 수 없도록. 그리고 그 불행이 사람들에게 전파되어 끔찍한 교훈으로 생생히 기억되도록.


결국 이 무시무시한 <동화>는 교회의 하녀로 일하며 밤낮으로 회개하던 카렌이 천사의 부름을 받으며 끝난다. 긴 칼 대신 장미를 든 천사가 "이제 넌 이곳에 올 수 있어" 라는 자비를 배풀며 카렌을 교회로 부른다. 이 감격에 눈물콧물 범벅이 된 카렌이 말한다. "오, 신의 자비에 감사합니다." 고난 받은 자, 진심으로 회개한 자는 하나님의 품으로. 그리하여, 이 울트라 엽기 미스테리 드라마는 종교적 색채를 띈 동화로 결말지어진다.  


죽음을 담보로 하는 저주의 춤, 어떤가. 이 황당무계한 이야기가 실제로 있었던 일이라면?


 



발이 잘리도록 춤추는 카렌의 이야기는 안데르센의 공상 속에서 탄생한 얘기가 아니다. 실제로 중세의 11세기에 넘어서면서 카렌 같은 무도광이 등장하였다.


그들은 평범한 농노들이 대부분이었다. 사람들은 미친듯이 춤을 추면서 이 마을 저 마을로 돌아다녔고, 어린이에서부터 어른들까지 많은 사람들이 이 춤으로 희생되었다. 무도광들은 거품을 물 때까지 춤을 추다가 사지를 뻣뻣하게 하고 부들부들 떨다가 바닥에 쓰러지곤 했다. 다시 의식이 들면 이들은 난폭한 몸짓을 하며 마을을 뛰어다녔다. 교회의 금지와 지시도 소용이 없었다. 교회는 이 재앙에 가까운 춤을 악마가 불러오는 것으로 판정했다.  14세기의 수도승 페트루스 드 헤덴살의 기록이다.






"남녀가 모두 악마한테 괴롭힘을 받아 짐에서는 말할 것도 없고 시장이나 교회에서 사람들의 손을 붙잡고 춤을 추면 뛰었다. 춤을 추었다고 해서 마음이 더 깨끗해지는 것은 아닌데도 그들은 구경하는 사람들을 조금도 개의치 않았다. 그들은 악귀들의 이름을 소리쳐 부르기도 하면서, 그들은 죽어갔다."


그들은 왜 춤에 미쳤을까. 무도광은 페스트가 완연히 퍼진 1349년 경에 극에 달한다고 한다. 우리가 앞서 살펴 보았듯, 죽음에 몸을 반쯤 담그고 있는 민중들의 공포는 춤으로 발산되었다. 왜? 끝없이 추는 춤, 그 육신의 발현을 통해 현실의 고통과 공포를 잊을 수 있으니까 말이다.


즉, 할머니와 어머니의 죽음 앞에서 빨간 구두를 꺼내 신은 카렌처럼.


 


 



죽음의 춤은,  죽음을 겸허하게 받아들이는 춤이 아니었다. 그것은 삶의 발작적인 표현 같은 것이었다. 사람들은 사지를 털고, 도약을 하고,  괴성을 질러댔다. 이루어진 무리들은 육신이 쓰러질 때까지 춤을 추면서, 신체의 극한에 도전했다.


땅과 하늘이 울렁이면서 광기를 발산하던 몸이 점점 기진맥진해질 무렵,  그들은 무슨 생각을 했을까.  교회가 인간의 몸과 영혼을 분리하기 전, 초기 기독교인들은 몸의 부활도 믿었다. 인간의 육신은 영혼이 잠시 걸친 옷이 아니었다.  영생의 날이 오면, 다시 살아나 영생을 누릴, 영혼과의 합일체였다. 그러나, 죽음의 현장에서 목격한 인간의 신체는 지독하게도 나약했다. 썩어가는 살과, 거기에서 풍기는 악취는 그 신체가 재생 불가능하다는 것을 생생하게 확인시켰다.


그러나, 그들도 다시 꿈꾸고 싶었을 것이다. 언젠가 이 끔찍한 죽음의 물결이 지나고 신이 약속한 그 날이 오면, 우리의 몸은 다시 땅을 딛고 태양을 바라 볼 수 있을 것이다. 마치. 신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가 그랬던 것처럼. 그래서 죽음에 몸을 반쯤 담그고 있는 그들을  곧 스러질 자신의 육체를 불태우면서 다시 몸의 부활을 꿈꾸었다.


미치도록 춤을 추면서 말이다.






PS:


끝없이 춤을 춘다. 쓰러질 때까지. 그것은 과연 동화에 기록된 과거일까.  다섯살 짜리 내 조카 녀석은 이따금씩 뱅글뱅글 돌다가 바닥에 쓰러지곤 하는 놀이를 하는데, 곰곰히 생각해보면  아마 당신도 해봤을 거다.


양 팔을 가득 벌리고 당신이 돌기 시작하면, 무거운 중력은 당신을 놓아주었다. 발은 땅을 딛지 않는다. " 녀석아, 어지럽다" 할머니의 목소리는 웅웅 거리며 귓전을 떠나간다. 공중에 떠 있는 나무들은 이미 당신의 춤에 합류해 있다. 마주한 하늘이 당신에게 속삭인다. 조금 더, 빨리 돌아봐. 저 폭신한 구름은 당신을 받아줄 것 같다. 나를 좀 멈추어 줘.


하지만 당신이 어지러운 것은, 내리쬐는 햇살이 너무 눈부시기 때문이다. 몽롱해진 의식은 어지러움이라는 고통보다는 말할 수 없는 쾌감과 더 쉽게 조우한다. 마치 아주 매운 음식을 먹었을 때처럼, 그리고 당신이 아버지 몰래 처음 담배연기를 빨아 들였을 때처럼 말이다. 그래서 당신은 뱅글뱅글 돌면서 노래도 불렀다. "고추 먹고 맴맴, 담배먹고 맴맴"



"뽕 대신 춤으로" 고통스런 삶의 치료에 약물대신 가무를 권장하는
마약퇴치 운동본부 선무당(aboutdance@hanmail.n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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