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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칼럼] 누드 클래식 -6-


2002.1.23 수요일

딴지 미주 종군기자 깐따멘


가끔씩 추억의 고삐리 밴드 시절이 생각하곤 한다. 


리드 보컬이나 리드 기타를 맡아야 폼이 난다고 믿던 그날들. 베이스 기타는 왠지 리드 기타의 실력이 되지 않아 밀려서 치는 것처럼 보이던 철없던 어린날들. 쏠로 연주를 해야지 뭔가 폼이 나지, 뒤에서 배킹을 깔면 왠지 초라해 보이던 그 튀고싶은 심정... 


하긴 이건 우리 정서만의 문제는 아니었다, 존과 폴의 리더쉽 쟁탈전이 치열했던 비틀즈부터 시작해서 전면에서 스포트라이트를 받고싶어하는 마음이야 동서고금을 어디나 마찬가지가 아닐까. 딴따라판의 역사를 점검해 봐도 그렇다, 위대한 베이시스트보다는 위대한 리드 기타리스트가 일반적으로 더욱 쉽게 손꼽게 되는 것... 다들 아시는 바다.


그러나 음악을 조금씩 이해하게 되면서, 음악은 리드보컬과 리드기타만으로 만들어 지는 것이 아니라 모든 파트가 살아 상호작용해야만 제대로 된 음악이 만들어진다는 사실을 알고 나면 비로서 단순하면서도 정확한 드럼의 비트가 얼마나 중요한 것인지, 싸운드 전체를 받혀주는 베이스의 기본 라인이 얼마나 중요한 것인지를 깨우치게 된다. 얼마전 작고한 조지 해리슨의 편안하면서도 깔끔한 기타와 링고스타의 정확하고 단순한 드럼이, 존 레논과 폴 매카트니의 개성과 앙상블을 이루었기 때문에, 비틀즈가 존재했다는 것을 알게 되는 것과 마찬가지이다.









레논과 매카트니의 재능도 해리슨과 스타의 뒷받침이 없이는 꽃필 수 없었을 것이다

스포트라이트를 향한 염원. 주목받고 싶은 욕구야 충분히 이해할만 하지만, 모든 기타리스트가 쏠로 기타리스트가 되어야할 필요도 없고 또 그래서는 음악이 만들어지지 않는다는 것, 두 번 말하면 입 아픈 이야기되겠다.





이런 맥락에서 오늘 열분들과 함 나눠보고 싶은 주제는 반주다. 클래식 음악에서는  반주가 주로 피아노를 통해 이루어지므로 여기서는 피아노 반주에 초점을 두고자 한다.


피아노 반주는 영어로는 동반된다는 의미에서 Accompaniment 라고 흔히 부르지만, 최근에는 Collaborative Piano (공동으로 연주하는 피아노) 라고 점차 바뀌어가는 추세에 있다. 반주의 역할이 쏠로 연주자나 성악가의 뒤에서 깔아주는 것만이 아니라 다른 악기나 노래와 함께 앙상블을 만드는 것으로 그 중요성이 더욱 강조되고 있다는 의미이다. 우선 음악 한 곡 들으며 이야기를 해 나가도록 하자. 


Johannes Brahms (1833-1897)의 Sonata for Cello and Piano No.2, Op.99, 1악장. 로스트로포비치의 첼로와 제르킨의 피아노 연주 되겠다. 자, 오늘의 주제가 반주라는 사실을 염두에 두고, 평소에 흔히 듣던 첼로의 주선율만이 아니라 피아노 반주에 더욱 귀를 기울여주면 감사하겠다.








" The piano has always been less interesting ti me than the music..."

반주와 합주로도 훌륭한 업적을 남긴 위대한 피아니스트인 루돌프 제르킨이, 자기에게 피아노는 음악자체보다는 늘 덜 흥미로웠다는 고백을 남긴 것도 의미심장하다.


이곡의 경우 흔히 첼로 쏘나타로 부르기 때문에 열분들중에는 이 곡이 오직 첼로만을 위해 씌여졌다든지, 피아노 반주는 첼로가 심심하지 않게 적당히 코드만 짚어 받혀주나 하고 생각했던 사람이 있을지도 모르겠다. 


그러나 정확한 곡 이름은 위에서도 보듯 첼로와 피아노를 위한 쏘나타라는 사실을 잊지 않으셨으면 한다. 따라서 브람스가 첼로와 피아노의 최고의 아름다움의 상호작용을 위해 두 파트 모두에 혼신의 힘을 기울였음은 당연한 말 되겠다.





그러나 이처럼 앙상블을 만드는데 중요한 역할을 하는 피아노 반주의 중요성이 쉽사리 간과되곤 하는 것이 우리의 현실이다.


그 원인은 아마도 최고의 독주 연주자만을 목표로 키워지는 클래식 음악계의 풍토 때문은 아닐까 싶은데... 물론, 어렸을 때부터 장래희망은 모조리 대통령이 되고 싶어하는 (엄밀히는 그렇게 큰 꿈 을 가지도록 강요당하는) 울나라의 풍토라든지, 혹은 이 글 맨 처음에 언급했듯이 리드씽어나 리드보컬만 폼나 보이던 것 필자의 옛 기억을 생각하면 이런 관념에 있어서는 유독 클래식 음악판만 짜짤히 잘못하고 있는 것은 아닐지도 모른다.


수없이 많은 어린아이들이 피아노를 배우고, 또 그중의 일부(여전히 상당히 많은 숫자다)는 피아노를 인생의 전공으로 삼지만, 이들 거의 전부의 목표는 의식적이든 무의식적이든 최고의 독주 피아니스트가 되는 것이다. 다시말해 국제 유수의 컴페티션에서 수상하며 최고의 피아니스트가 되지 못한다면, 그저 one of the 수많은 그럭저럭한 피아니스트일 뿐이다라고 생각되어지는 것이 현실인 것이다... all or nothing!


그러나 수없이 많은 피아노 지망생중 극소수의 유명 독주자로 무대에 설 수 있는 가능성은 지극히 희박하다. 이러다보니 그 이외의 모든 피아니스트는 피아니스트가 아닌 것이 되어 버리고 마니, 이거참 어처구니 없는 일이 아닐 수 없다. 최고의 피아니스트가 아니면 피아니스트도 아니라는 이런 식의 논리... 어떻게 생각하시는가?


이러한 풍토 때문인지 피아노반주에 대한 오해가 자주 일어나곤 한다.


가장 흔한 것으로는 피아노 독주를 할 만큼의 실력이 되지 않기 때문에 반주를 한다는 식의 사고방식이다. 피아노를 주선율로 연주하는 피아노 독주와 달리, 다른 악기나 보컬과 함께 앙상블을 만드는 피아노 반주는 그 역할과 성격이 달라야 마땅한 것임에도 그것을 실력의 차이로 오해하는 것은 실로 어처구니 없는 착각이다.









César FRANCK


잠시, 피아노 반주의 중요성을 잘 느낄 수 있는 곡 한곡 들으며 이야기를 계속해 나가자.


 César FRANCK (1822-1890)의 Sonata for Cello and Piano, 4악장. (참고로, 이곡은 Violin 으로 주로 연주되는 곡인데 사실 엄밀히는 Flute을 위한 소나타로 처음 작곡되었었다.) 


주선율을 첼로와 피아노가 대화를 나누듯 화답하며 클라이막스로 향해가는 상호작용을 통해 둘이 하나를 만들어가는 앙상블의 묘미를 느껴보시기를.





성악가, 바이올리니스트나 첼리스트 등의 독주 연주가들이 가장 원하는 것 중의 하나는 바로 좋은 반주자를 만나는 것이라는 고백을 종종 듣곤 한다. 우리같은 무딘 일반인들조차 노래방에서 간혹 요상한 편곡으로 우리를 황당하게 만드는  후진 반주기를 만났을 때 죽을 쑤게 되는걸 생각해 보면, 합주에서의 피아노 반주의 수준이 독주자들에게 얼마나 큰 영향을 미치는지 상상해 볼 수 있을거다.


독주와 반주의 영역이 전혀 다른 것이라는 사실은, 독주에 익숙한 피아니스트의 경우 다른 연주자들이 최고의 연주를 뽑아낼 수 있도록 앙상블을 만드는 것에 익숙하지 않기 때문에 간혹 제대로 된 반주를 해내지 못하는 경우에서도 확인할 수 있다. 


예를 들자면, 다이내믹에 있어 살릴곳은 살리고 죽일곳은 죽여가며 주선율을 받혀줘야 함에도 피아노 반주가 일관되게 강하게 나가버린다면 다른 연주자의 연주가 살지 못하는 것은 당연한 일이다. 설사 똑같이 포르테로 악보상에 표기되어있는 음이라도 좋은 피아니스트라면 합주에 있어 주된 악기와 음이 겹치는 경우 그 음을 미묘하게 양보함으로써 주선율을 살려내야 하는 것이다. 이런 앙상블을 위한 마인드를 제대로 가지고 반주하는 것은 음악을 함께 만든다 는 마인드와 노력 없이는 쉽지 않은 일일 것이다.


본 기자 몇해전 한 성악가와 대화를 나누던 중, 어떤 반주자를 원하는가하는 질문을 던졌던 적이 있었더랬다. 기자가 기대했던 것은 나의 노래에 잘 맞춰주는 반주자 정도의 대답이었지만 적장 그녀가 원하는 반주자는 곡에 대한 자신의  해석이 분명하고 함께 곡을 만들어가는 피아니스트라는 대답이었다. 수동적으로 자신의 노래에 따라오는 반주가 아니라, 그 작곡자의 의도를 분석하고 여러 외국어의 가사를 이해하여 곡의 분위기를 만들어, 자신의 목소리를 가장 그곡에 적합하도록 뽑아 내어줄 수 있는 반주를 원한다는 말이었던 것이다.


그럼 이런 관점을 염두에 둔 채 Henri Duparc (1848-1933) 의 아름다운 성악곡 Chanson Triste를 함 들어보도록 하자. 고통으로 가득한 세상이지만 사랑하는 이의 팔 안에서 평안하게 잠들고 사랑하는 이의 입맞춤과 사랑을 마심으로 고통이 치유될 것이라는 희망을 노래하는 것이 이 곡이다. 따라서 피아노는 곡이 가지고 있는 우울과 희망, 달콤함과 부드러움이라는 복합적인 의미와 분위기를 시를 쓰듯 반주함으로써 그 감정을 보컬이 충분히 살릴 수 있도록 음악적으로 또 심리적으로 써포트를 해 나가야 한다. 함 느껴보자.





카리스마적인 쏠로연주를 들으며 느끼는 전율도 크지만, 하모니와 앙상블의 조화을 통해서 느껴지는 묘미이야말로 이것이 음악이다! 라는 진한 감동을 만들어낸다는 것, 그리고 기자에게 있어서 그 무게는 날이 갈수록 점점 커지고 있다는 사실을 이 기회에 고백하고 싶다. 함께 음악을 만들기 위해서는 서로를 이해하고 호흡하며 케미스트리를 창조해야 함이 당연한 일이니... 나이가 들면서 이런 점들에 대한 이해가 점점 깊어지는 것일까.


여럿이 모여 하나의 작품을 함께 만들어가는 앙상블의 가치와 아름다움을 느낌으로서 음악을 더욱 폭넓게, 여러각도로 즐길 수 있다면, 그것은 음악만이 우리에게 주는 또다른 삶의 기쁨일 것이다.


그럼 다음시간에 계속... Enjoy! 




PS: 이곳을 통해 처음 클래식 음악을 접해본다는 분들의 멜을 받으며 감사한 마음입니다. 또한 클래식음악에 대한 딴지걸기를 글로 보내주시는 독자분들의 성의에도 감사드립니다. 다음 시간부터는 독자님들의 기고를 소개하는 기회도 가져볼까 합니다. 원하는 바가 있으시다면 연락 주십시오. 이렇게 함께 음악에 대해 이야기 나누는 것이 기쁨 아니겠씀까...


딴지 미주 종군기자 
깐따멘(cantamen@hotmail.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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