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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허기자의 장르야 놀자] 박찬욱은 할리우드를 꿈꾸는가? - <안드로이드는 전기양을 꿈꾸는가?>


 


2009. 5. 20. 수요일



칸국제영화제 경쟁부문에 진출한 <박쥐>의 일거수일투족이 매일같이 포털사이트의 대문을 장식하고 있다. 그중 눈길을 끈 기사가 있었다. 박찬욱 감독이 <할리우드 리포트>와 나눈 인터뷰였는데, “좋은 시나리오만 있다면 할리우드로 날아갈 준비가 돼있다”고 답했던 것.


이 기사를 접하곤 <올드보이> 개봉 당시 <딴지일보>와 박찬욱 감독이 나눴던 인터뷰 중 한 대목이 생각났다. 그는 자신을 SF소설 광이라고 소개하며 해외에서 찍고 싶은 영화 중 하나로 필립 K. 딕의 <안드로이드는 전기양을 꿈꾸는가?>(Do Androids Dream of Electric Sheep?)를 꼽았다.



“<블레이드 러너>를 원작에 가깝게 만드는 기획이었어요. 원작소설은 액션영화 느낌이 덜한 대신에 데커드가 스스로 레플리칸트가 아닐까 의문을 많이 담고 있죠. 그 외에도 재미있는 소재가 굉장히 많아요. TV에서 사이비종교 지도자 같은 프로그램도 나오고 재미있는 모티브가 참 많죠.”




1993년 출판됐다 절판된 <안드로이드는 전기양을 꿈꾸는가?>가 최근 복간됐다. 박찬욱 감독의 말대로 필립 K. 딕의 작품은 리들리 스콧의 <블레이드 러너>와는 전혀 다른 작품이다. 리들리 스콧은 원작소설의 방대한 이야기를 데커드(해리슨 포드)와 레플리칸트(극중 ‘로이 베티’(룻거 하우어))의 추격전으로 축소하며 원작 팬들로부터 강한 비난을 사기도 했다. 지금이야 <블레이드 러너>는 걸작으로 추앙받지만 1982년 6월 미국 개봉 당시만 해도 ‘올 여름 최대 실패작’이라는 멍에를 짊어지며 할리우드에 재앙을 안겨줬던 작품이었다.



<블레이드 러너>가 이후 팬들 사이에서 재조명 받으며 걸작의 반열에 오른 데에는 ‘데커드는 레플리칸트인가?’라는 의문이 중요하게 작용했음은 주지의 사실이다. 하지만 소설에서는 데커드가 레플리칸트, 즉 안드로이드인지 아닌지 별로 중요하게 다뤄지지 않는다.


<안드로이드는 전기양을 꿈꾸는가?>는 인간뿐 아니라 안드로이드의 생명도 모두 소중하다고 역설한다. 인간성의 본질에 대해 묻는 원작소설의 테마는 영화에서 그대로 재현됐다. 리들리 스콧은 ‘비인간화되는 인간, 인간화되는 레플리칸트’의 테마를 결말에서 집약적으로 드러내며 원작의 정수를 그대로 재현한 것이다. 하여 K. 딕은 영화가 소설과는 내용이 상당히 다르지만 핵심정서를 충실히 재현했다며 <블레이드 러너>에 상당한 만족감을 표했다. (K. 딕은 <블레이드 러너>가 각광을 받으면서 거장 작가의 반열에 올랐지만 1982년 이미 사망한 뒤였다!)




개인적으로는 데커드와 베티의 대결을 통해 장황한 설교조로 주제를 늘어놓는 영화와 달리 인간과 안드로이드 사이에서 정체성 혼란을 겪는 데커드의 심리적 여정을 따라가는 소설이 더 맘에 들었다. 그러니까 <안드로이드는 전기양을 꿈꾸는가?>가 보여주는 미래는 자아가 황폐한 심리적 공황의 시대다. 소설은 영화처럼 빈익빈 부익부의 사회상에 초점을 맞추지 않고 데커드의 마음 속 풍경을 주로 묘사하는 것이다.



데커드가 안드로이드의 정체를 숨기고 인간처럼 행세하는 현상금 사냥꾼과 짝을 이뤄 안드로이드를 제거하는 에피소드는 이를 잘 보여준다. 살상행위에 무감각한 자신과 달리 죄의식에 사로잡혀 잠바로 시체를 덮어주는 현상금 사냥꾼을 보면서 데커드는 ‘인간이란 무엇인가?’ 끊임없이 혼란을 겪으며 인간성을 깨달아 간다. 이처럼 K. 딕은 인간과 안드로이드의 대조적인 행동을 통해 인간성의 본질에 대해 질문을 던진다. 즉, 인간성의 본질을 기계의 유무가 아닌 마음 그 자체에서 찾는다. 그래서 소설에서는 동물을 사랑하는 마음, 타인의 재능을 알아보는 눈썰미, 잃어버린 자연에 대한 그리움 등 일상생활의 사소한 감정 하나하나가 큰 의미를 갖는다.



데커드 부부가 안드로이드 두꺼비를 애완동물로 받아들이는 결말은 의미 불명의 제목이 지향하는 바를 구체적인 에피소드로 통찰력 있게 풀어낸다. 이에 대해 로저 젤라즈니(<신들의 사회><별을 쫓는 자>)는 다음과 같이 얘기했다.


“필립 K. 딕의 책은 사실 생각해 보면 이야기 자체는 별로 기억나지 않는다. 그의 책을 읽고 난 후의 느낌은 강렬한 은유를 담은 시를 읽었을 때와 비슷하다.”


한마디로 <안드로이드는 전기양을 꿈꾸는가?>는 필립 K. 딕의 정수가 담겨 있는 작품이다. 과연 박찬욱 감독이 할리우드에 진출하게 된다면 <안드로이드는 전기양을 꿈꾸는가?>를 영화화할 수 있을지 귀추가 주목된다.



허기자(www.hernamwoong.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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