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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단상] 2003년 3월 1일, 그 일주일

2003.3.3.일요일


편집자 주 :
故 노무현 전 대통령에 대한 추도의 의미로 과거 본지 기사 속에 비춰졌던 노무현 전 대통령의 모습을 소개한다. 본지의 과거 기사에서도 드러나듯 그에 대한 평가는 각자의 정치적 지향에 따라 극명한 애증이 교차하는 바, 본지에서도 향후 정치인 노무현에 대한 다양한 평가를 업데이트시킬 예정이다.



노무현 대통령이 취임했다.


라디오로 취임사를 들으며 나는 1년전 국민경선 당시의 인천 지역 경선이 갑자기 생각났다. 연설의 끝부분, 제한된 시간이 다가오며 그는 체육관에 모인 유권자들 앞에서 격앙된 톤으로 조선일보를 규탄했다. 장인의 좌익 경력이 문제시 되었을 때였을 것이다. "그럼 아내를 버리란 말이냐"고 하며 노무현은 높아진 목소리로 "조선일보는 나에 대한 음해를 중지하고 당장 국민경선에서 손을 떼라"고 외쳤다. 그것이 그날 그 연설의 마지막 문장이었던 걸로 기억한다.


1년이 지난 2003년 2월 25일, 노무현은 취임사 끝부분을 똑같은 톤으로 장식했다. 내용은 "다 같이 힘을 합쳐 새 시대를 열자"는 수사적인 것이었지만, 목소리 톤만은 그때와 비슷했다. 조선일보를 규탄하던 그때의 그 격앙된 톤으로 국회 앞에서 대통령 취임사를 한 것이다. 그것은 신선하기도 했고 조금은 어색하기도 했다. 취임식이란 근엄하고 무게잡는 것이어야 한다는 고정관념이 어느틈에 내 머리속에 있었나보다.


노무현이 대통령이 되면서 달라진 것은 그런 것이다. 법무부 장관 인사의 파격성에 대해 답하면서 "검찰 내의 위계질서를 내가 왜 존중해야 하느냐"고 하는 것이라든가, 출신학교 안배에 대해 "그건 포기했다"고 직설적으로 답하는 모습 말이다.


5년전 김대중이 당선되었을 때는 그렇지 않았다. 선거과정에서부터 김대중은 불안감을 주지 않는 것을 최대의 목표로 삼았고, 반대에 부딪쳐 돌파하기보다는 달래거나 비위를 맞추는 모습을 보였다. DJ 정부의 첫 조각도 그래서 이해찬 정도를 빼고는 별다른 파격이 없었고, 오히려 보수적인 자민련 의원들이 대거 포진해 있었다.


그런데 이제는 무엇인가가 달라졌다. 김종필이니 정몽준이니 하는 원군의 도움 없이 단독집권에 성공한 정권답게, 군수 출신을 행자부 장관에 임명하고, 농민운동가 출신이며 제네바에서 삭발단식 농성을 벌였던 사람을 농림부 장관에 앉히고, 40대의 여성 변호사를 법무장관에 임명하고, 문예진흥원 원장에 민족문학 작가회의 이사장을 지명하고, 기타 시민단체 출신과 민주화 운동 세력을 중용하는 것을 보면... 순 감옥 갔다온 사람들만 득세한다고 한탄할 만도 하고, 반대쪽에서는 우리가 7,80년대 잡혀가고 매맞고 도망다닌 게 헛되이 산 게 아니었다는 긍지어린 말들이 나올 만도 하다.


그 인사가 마음에 들고 안 들고를 떠나서, 뭔가 줏대를 가지고 밀어붙인 건 군사정권 빼고는 난생 처음인 것이다.


나는 노무현 대통령의 인사를 보며, 그리고 파격이니 실험이니 하며 불안감을 부추기려는 보수언론의 목소리들을 보며, 이제야 진정한 정권교체가 이루어졌다는 축하의 글을 써야겠다는 생각을 했다.


적어도...




..... 지난주 토요일, 3.1절 전까지는 말이다.







3.1절.


기미년 3월 1일 정오
터지자 밀물같은 대한독립만세


였다고 노래에서는 가르치지만 실제 밀물같지는 않았다 한다. 3.1운동의 절정은 4월과 5월이었다. 요즘이야 인터넷이 발달돼서 하루저녁이면 전국 심지어 해외에도 퍼지지만 그때만 해도 운동이 지방까지 확산되는 데는 몇달이나 걸렸던 것이다.


그런데 기미년은 아니고 발음이 비슷한 계미년 3월 1일 정오, 이번엔 그야말로 터지자 밀물같은 인파가 시청앞 광장에 모여들었다. <반핵반김 자유통일 3.1절 국민대회>가 그것이었다.


지난번 한기총에서 주도한 시청앞 기도회와 비슷한 사람들이었지만, 이번에는 그때와는 크게 다른 점이 있었으니...




군복이 대거 등장했다는 점이다.




옷의 차이만 빼면 여기가 북한이라고 해도 믿을 수 있을 것 같은 분위기. 단상 아래는 물론이고 단상 위도 마찬가지였다.




결의문을 낭독하는 각군 대표(?)


최병렬 김용갑 하순봉 등 국회의원들도 대거 등장 (아래).



이날의 집회는 물론 일부 극렬분자(?)들의 모임은 물론 아니었다. 5만명 정도의 인파가 시청 앞 광장을 가득 메웠던 것이다. 3시부터 열린 여의도의 기도회엔 무려 10만 가까운 인파가 참여하기도 했다. 시청 앞에서는 그 넓은 광장도 모자라 덕수궁 담벼락 위에 올라가서까지 했다.





사람이 많이 모인 자리는 늘 그렇듯이, 사람 구경 하는 재미도 쏠쏠했다. 촛불집회와는 사뭇 다른 참가자들의 모습이나, 그들의 복장들...



대회장에 나오시는 노신사의 모습(좌)과
단상 위에 등장한, <야인시대>에나 나올법한 복장의 아자씨.. (우)


그러나 이날의 백미는 이런 참가자들의 면면이 아니었다. 정원식 전 국무총리, 김동길 선생, 사회자 봉두완선생, 기타 국회의원들 등 유명한 사람들도 아니었다.


"공산주의가 되느니 차라리 죽는 게 낫다"고 결의하자며 기도를 올리는 한 저명한 목사님의 무서운 말씀과 미국에 감사한다는 수많은 발언들에 이어 나온 것은...


바로 미국 국가 연주였다.


Oh, say can you see, by the dawns early light,
What so proudly we hailed at the twilights last gleaming?


이렇게 시작되는 미국 국가 Star Spangled Banner를 합창단이 부르기 시작하고 그 소리가 시청앞 광장을 가득 메웠을 때... 나는 웃고 말았다. 단상 바로 앞에서 차마 마음놓고 웃을 수가 없어서 얼굴 표정을 경직시키며 다른 곳을 바라보니, 옆에서 웬 기자 한 사람도 실소하고 있었다.


세계 어느 나라에서 그 나라 사람 수만명이 모인 집회에, 공산주의를 반대한다면서 대형 성조기를 하늘에 띄우고 미국 국가를 연주하는 곳이 있을까...?


이어서 연단에 잠시 올라온, 6.25때 평양 진주할 당시의 참모총장이었다던 분(미안타 이름을 까먹었다..)의 "부시 대통령 만세" 삼창과... 5만명이 우렁차게 함께 부르던 "전우의 시체를 넘고 넘어..."









성조기를 흔들며 "전우의 시체를 넘고 넘어.."를 부르던 연단 위 퇴역 장성들과 보수인사들의 자랑차고 득의만만한 몸짓과 표정을 나는 오랫동안 잊을 수 없을 것 같다. 연단 오른쪽에서 태극기를 휘두르며 군가를 부르던 박홍 신부의 모습도...



여러가지 피켓들...


그러나 어쨌건 그 자리엔 수많은 사람들이 있었고, 그 사람들은 어디 외계에서 날아온 사람들이 아니라 우리 주변의 아줌마 아저씨들이었다.


사실 북한을 증오하고 미국에 감사하는 감성을 가졌다는 점 자체는 전혀 문제될 것이 없다. 이런 사람이 있으면 저런 사람도 있기 마련이고, 동방예의지국이라 자처하는 나라에서 겨우 50년 지났다고 은혜를 잊어버리면 안 되쥐... 물론 이북엔 50년동안 다른 데에 감사하는 사람들이 있겠지만 말이다.


한반도 위기와 세계 불안의 원인이 미국의 일방주의적 패권 노선 때문이 아니라 이라크 후세인과 북한 김정일 때문이라고 생각하는 것도 뭐 그럴 수 있겠다. 세상 사람들 생각이 다 나와 똑같다고 주장할 권리는 애초부터 나에겐 없다. 그동안 우리 사회는 의견이 너무 똑같아서 문제였지, 서로 달라서 문제되는 건 오히려 바람직하기도 하다.







태극기에 힘차게 거수경례를 붙이던 아줌마...


그래서, 그 군복들의 향연에도 불구하고, 태극기에 거수경례를 하는 한 아줌마의 뒷모습에서 군사문화의 흔적을 발견함에도 불구하고, 6.15 합의 폐지하자는 피켓 내용에도 불구하고, 미친개에게는 몽둥이가 약이라는 폭력적 구호에도 불구하고, "여기 불순분자들이 얼마나 많이 와 있는 줄 아냐"는 그들끼리의 대화 내용에도 불구하고, 외신 기자들이 어떻게 생각했을지 궁금하기 짝이 없는 미국 국가 합창에도 불구하고...


우리의 지난 50년을 총정리해 주는 그 모든 것에도 불구하고, 나는 별다른 불만은 없었다.



적어도...


..... 그날 오후, 탑골 공원에 가기 전까지는 말이다.







오후 5시. 탑골공원에서는 <민족자주 반전평화의 날> 행사가 벌어졌다. 언론에서 해방직후의 상황이 재연된 듯하다고 썼듯이, 완전히 정반대의 3.1절 기념행사가 정반대의 세력에 의해 치러졌던 것이다.


여중생 범대위 측에서 주최한 이날 행사는 저녁에 광화문 앞 촛불시위로 이어졌다. 그런데...



탑골공원 앞은 좁은 인도만을 남겨두고 전경이 물샐틈 없이 에워싸고 있었다.




길을 지나갈 수가 없는 일반 시민들은 투덜투덜대며 멀리 돌아가든지 좁은 틈을 비집고 지나가야 했으며, 행사 몇시간 전에는 경찰이 행사차량 안의 물품을 빼앗으려 시도, 그 과정에서 자원봉사자 두명이 손가락이 부러지고 턱뼈가 탈골되는 사고도 있었다.




이것을 보며 시청에서 본 미친개에게는 몽둥이가 약
6.15 합의 폐지하자! 등의 피켓 구호를 떠올리지 않을 수 없었다.


언론에서는 양측의 집회가 동시에 열린 3.1절이었다고 공평하게(?) 썼지만, 전혀 공평하지 않았다. 한 쪽은 대형 무대와 화면, 강영훈 정원식 등 전직 총리와 현역 국회의원들이 모습을 보이고 우리가 이 나라의 주인이라는 자부심과 긍지가 가득한 행사였다면, 다른 한 쪽은 좁아터진 공간에서 일반 시민들과 차단된 채 치러진 불순한 집회였다.


쳐들어가자는 말만 하지 않았다 뿐이지 극단적 언사와 군복이 주도한 공격적인 정서의 한쪽은 시청앞 광장을 점령했고, 평화를 이야기하는 다른 한 쪽은 인도를 벗어나지 못했다. 한 쪽은 경찰이 몇블럭 떨어져서 멀찌감치 대기했고, 다른 한 쪽은 인도에서 한발짝도 못 나가게 방패로 밀어붙였다.


정권이 바뀌고, 과거 운동했던 사람들, 독재에 저항했던 사람들이 드디어 주류로 올라섰다고 생각했던 것은 착각이었다. 저 위쪽은 어떨지 몰라도 피부에 닿는 달라진 점은 별 것이 없었고, 극우는 마음놓고 주도권을 즐기고 있었으며, 화해와 평화를 이야기하는 힘은 너무도 적었고, 전경의 헬멧과 방패는 아직도 너무나 가까웠다.







그러나 그런 생각도 또 잠시.....


촛불집회를 위해 광화문으로 이동하는 길. 종각 역에서는 음악 소리가 요란했다.



여성 5인조 보컬 그룹이 공연을 벌이고 있었고, 그 소리가 지하에 가득했다. 아이스크림을 나누어먹는 연인들과, 갈 길에 바쁜 사람들과, 지하철이 도착한다는 안내방송 소리와, 약속장소에 먼저 도착해서 일행을 기다리는 사람들로 세상은 분주했다.


정권이 어쩌고, 미국이 어쩌고, 북한이 어쩌고 하는 인간들은, 나를 포함해서, 이 글을 읽는 당신을 포함해서, 아주 극소수의 이상한 사람들인지도 모른다.


복잡한 한 주일이었다.



복잡했던 일주일 그 비오는 일요일 밤에
최내현 (asever@ddanzi.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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