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홉개의 빨간 모자>라는 만화가 있었다.
이 아홉 개의 빨간 모자는 ‘형제원’이라는 시설에 있는 야구부(?) 것이었다. 돌이켜보면 이 형제원이 고아원인지 소년원인지 분명하지 않다. 주인공 독고탁이 “쓰레기들이 모인 곳”이라고 일갈했던 걸 보면 비행 청소년 수용소 같은데, 독고탁을 제외하면 큰 사고뭉치가 없었으니 그저 당시에 흔했던 고아원 같기도 하다.
형제원의 교사는 패배의식과 자기비하에 빠져 살던 독고탁과 아이들에게 야구를 가르치기 시작하고, 아이들은 야구에 몰입한다. 여기에 으레 독고탁의 라이벌로 등장하는 고아원장 아들 준과 그 여동생 숙, 그리고 또 하나의 캐릭터인 봉구가 있다.
준은 고교 야구 최고의 강타자이며 부잣집 도련님이다. 그는 ‘쓰레기’들이 야구를 한다는 것에 한껏 경멸을 드러내며 아이들의 자존심을 짓밟는다. 물론 준이 가장 적개심을 보이는 건 역시 사고뭉치 독고탁. 독고탁은 숙이를 좋아한다. 야구로 성공하여 숙이와 결혼하는 게 꿈이고, 숙이만 떠올리면 그늘진 얼굴의 사고뭉치에서 해사한 웃음의 순진한 소년으로 바뀐다. 그는 이 사실을 뒤늦게 시설에 들어온, 정체가 애매한 소년 봉구에게 털어놓는다. 자신의 비밀까지 터놓을 수 있는 친구라고 믿은 거다.
사실 봉구는 원래 재벌가의 자제로, 인생 수업을 하러 시설에 들어온 거였다(이 부분 기억이 희미하다. 알려 주시길). 또 숙이는 탁이 아닌 봉구에게 호감을 느낀다. 자기 세계로 돌아간 봉구는 숙이와 사귀는데, 독고탁은 여기서 망가진다. 속았다는 분노, 놀림감이 된 것 같은 절망감, 사랑을 빼앗은 철벽의 암담함, 그 모든 감정 속에서 독고탁은 오로지 봉구에게만 불같은 강속구를 퍼부어 무안타로 돌려세운다.
그 야구공으로 숙이의 유리창을 깨뜨리고 난 뒤 뇌까린다.
“그 녀석을 잡은 공이야.”
이 말을 하던 독고탁의 표정과 피가 뚝뚝 떨어지던 손이 지금도 선연하다. 그다지 정교하지 않은 선 몇 개로 그려진 만화였으되 어린 마음에도 ‘광기’가 무엇인지를 처절하게 깨우쳐 준 컷이었다. 독고탁은 다시 시설을 탈출했고, 경기 도중 야구공에 맞아 정신이 나가버린 시설 아이 한 명은 계속 야구를 하며 놀고, 나머지 아이들은 과거로 돌아간다. 아홉 개의 빨간 모자는 주인을 잃어 버렸다.
개인적으로 이 작품을 이상무 선생의 최고작이라고 본다. 일본인 장군의 아들이 말에서 떨어져 기억 상실에 걸린 후 갑자기 독립군으로 변신(아니 조선말을 언제 배웠지?)하는 <흙바람>이나, 말도 안 되는 드라이브볼을 던지는 <달려라 꼴찌>와는 차원을 달리하는, 그리고 약간은 억지스런 해피엔딩이었던 <비둘기 합창>과는 다른 레벨의 작품이었다는 뜻이다.
<응답하라 1988> 이전의 시대에는 한 동네에 으리으리한 정원과 풀장까지 있는(정규 풀장은 아니고 시멘트로 막아 만든) 집과 판잣집이 공생하며 그 아이들이 함께 다방구 하고 놀았지만, 실지로 여름에 풀장에서 놀았던 아이들과 동화되지도 못했고 생활고 끝에 빚에 쪼들린 나머지 연탄을 피워 놓고 집단자살을 기도한 아버지 때문에 죽다 살아난 친구와 정서를 공유하지도 못했다. 그래도 그 차이에서 오는 불편함을 그다지 느끼지 못했다.
그런 나에게 불행과 가난의 위력, 빈부와 신분의 경계, 사람이 사람에게 가할 수 있는 모멸과 차별 그리고 배신과 동정을 느끼게 해 준 것이 <아홉개의 빨간 모자>였다. 국정 사회 교과서, 장밋빛 미래와 모범적인 사람들로 그득했던 국민학교 교과서 나부랭이보다는 백 배 더 영양가 있었던 만화였다.
2016년 1월 3일, 나에게 <아홉 개의 빨간 모자의 사연>을 안겨 주었던 이상무 선생이 돌아갔다. 세월은 흐르고 사람도 돌아간다. 채 위에 물을 부으면 당연히 아래로 쏟아지듯이. 하지만 무엇인가는 채에 걸리고 남을 것은 남는다. 그 물방울과 티끌들이 모이면 역사가 되는 거겠지. 이상무 선생은 가셨지만 독고탁은 남는다. 그 까까머리 또는 까치 머리와 함께.
고인의 명복을 빈다.
P.S: 내용에 오류가 있으면 알려 주시기 바란다. 점점 기억이 엷어지는 게 슬프다.
산하
트위터: @sanha88
편집: 딴지일보 챙타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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