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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2. 9. 3. 월요일

백골프


 


 


겸애(兼愛)


 


[caption id="attachment_103309" align="aligncenter" width="300" caption="영화 '묵공(2007)'의 일본개봉 이미지."][/caption]


 


묵자 여행을 시작했으니 일단은 묵자란 인물에 대해서 좀 말해야할 것입니다, 역사적으로 대략 어느 때 태어나서 활동했는지 그리고 어느 공간에서 활약했는지 그리고 그의 출신성분등도 말해야겠고요. 그런데 이 장에선 바로 묵자의 겸애를 제목으로 하고 있습니다 .


 


묵자하면 흔히들 겸애를 떠올립니다, 상식적이죠 묵자하면 겸애. 하지만 묵자의 겸애에 대해서 딱부러지게 아는 사람 거의 없어보이고 명쾌하게 말해주는 이도 별로 못본 거 같습니다. 그래서 일단 묵자의 겸애에 대해서 짧아도 이거다라고 분명히 말씀 드리고 시작할까 합니다. 앞서 말씀 드렸죠. 겸애에 대해서만큼은 감질나게 않게 설명을 드리겠다고요. 그런데 이 장에선 자세히 논하진 않고 분명하지만 짧게 이야기하겠습니다. 묵자 사상의 핵심인데 처음부터 너무 깊고 자세히 이야기하면 김이 셀거 같아서요. 자 그럼 묵자의 겸애에 대해서 좀 알아볼까요?


 


상대가 중언부언하며 딱부러지게 자기 생각의 요지와 요점에 대해서 말하지 못할 때 우리는 그러곤 합니다 그래서 니 생각이 뭐야? 이 질문에 명쾌하게 대답하지 못하면 그 당사자는 자신의 생각을 정리하지 못했거나 관련된 일에 대해 제대로 파악하지 못한거겠죠, 아니면 그 사람이 듣는 사람을 속이는 걸수도 있구요.


 


동양철학을 공부하는 사람도 마찬가지라고 생각합니다. 공자의 문제의식이 뭐요? 그가 말하는 仁이란게 뭐요? 장자 사상의 요지는 뭐요라고 물어봤을 때 한마디로 명쾌하게 말할 수 있어야죠, 그러지 못하면 공부가 덜되었거나 사람을 속이는 것에 불과할 겁니다.


 


공자의 문제의식 내지 중심생각?? 그가 말하는 仁?? 치인이라는 우월적 지위에 안주하는 군주에 의한 정치가 아니라 수기라는 힘겨운 과제에 주력하는 지식인들이 만들어가는 정치공동체의 조화와 평화.


 



맹자: “이보라 왕, 인한 정치를 하라우, 그런데 인한 정치는 말이지 우리 지식인들이 하는거니끼니 우리 지식인 대접을 깍듯이하라, 알갔어?”


장자: 국가나 권력에 의해 강제된 표준과 쓸모에 맞는 인간이 아니라 스스로 자신이 자신의 쓸모를 찾아 사는 강호의 삶


한비자: 간신배 어떻게 누르면서 군주의 힘과 국가의 힘을 키울 것인가


노자: 천장지구(天長地久)!!!!, 하늘과 땅처럼 왕이 장구하게 제명을 누리며 살 수 있게 하는 요령과 처세술. 자연으로 돌아가자? 문명이전의 소박한 삶 추구? 모두 노자의 문제의식과 관련이 없는 것들입니다. 철저히 군주를 사상수요자로 생각해서 만들어진 것이죠.



 


그렇다면 묵자의 사상의 요지가 뭐냐는 질문을 받는다면 묵자의 겸애를 가지고 시원하게 이야기 해야겠죠.


 


묵자의 겸애란 바로 통치시스템, 사회시스템을 통한 최대다수의 기본적인 생활 보장 내지 욕구 충족입니다. 욕구입니다. 욕망(desire)이 아니라 욕구(need), 생존에 필수적인 것을 원하는 거와 관련된 것이죠.


 


겸애하면 박애 내지, 자비, 널리 사람을 사랑하라, 두루 사람을 아끼라 그런것들 떠올리신 분들이 있을텐데 어떤 추상적인 정신, 관념과 상당히 멀리 떨어진 것이 묵자의 겸애입니다. 사실 공자사상의 관념성에 문제의식을 가져 독창적인 사상을 만들어내고 공자와 유가를 공격했는데 그의 겸애가 관념 내지 추상적인 것일 수는 없겠죠.


 


[caption id="attachment_103310" align="aligncenter" width="300" caption="아마도 묵자와 그 제자들"][/caption]


 


자 이런 묵자 겸애를 이해하기 위해 몇가지 이야기를 해볼께요.


 


효성지극한 아들이 있습니다, 그런데 벌이가 시원찮아 부모 끼니도 해결해드리기 힘듭니다. 그리고 어떤 자식을 사랑하는 부모가 있는데 자식이 병이 들었는데도 약값 마련도 못해 발만 동동 구릅니다.


 


자 이런 상황에 처해 있는데 무슨 효성이고 효심이며 자식사랑과 자애를 말할 수 있을까요? 어떤 물적토대와 유리된 보통 사람의 삶?? 윤리와 도덕 그런 것이 있을 수 있을까요?? 없는거 같습니다. 그런데 말입니다 위 상황에서 답이 무엇일까요? 자식 키우는 부모가 돈 더 잘벌고 부모 봉양하는 자식이 돈 더 잘벌면 되는걸까요? 네 맞습니다, 하지만 돈 벌고 말고 그런 물적 토대와 연관되는것은 단순히 그 개인의 능력, 부지런함만으로 해결되는게 아닌거 같습니다. 눈을 사회구조와 시스템으로 돌려봐야죠. 묵자는 실제 눈을 그런것들에 돌려봤습니다.


 


자 한가지 가정을 해봅시다, 겸애를 위해 하기 위해서요.


 


사랑의 리퀘스튼가 뭔가 하는 방송을 공자님과 묵자님이 보고 있습니다.


 


공자님은 성금이 쇄도하는 것을 보고 흐뭇해 합니다. 타인의 일을 내 일처럼 여기고 남을 내 가족같이 생각하며 딱한 사정에 처해 있는 사람을 가여워하는 마음을 가지고 또 그것을 잘 키우는 사람들로 사회가 가득차면 맑고 밝고 명랑한 사회 될것이라고 생각하기에


 


근데 묵자님은 고개를 갸우뚱하면 이건 아니지라는 표정을 짓습니다 “ 안그래도 얄팍한 서민들 주머니 푼돈 그나마 가져가지 말고 저런 것을 사회시스템을 통해 해결해야지” 하면서요.


 


묵자는 직접 대놓고 그럽니다. 효도란 부모를 경제적으로 이롭게 하는거다, 의로움이란 것 자체가 나 아닌 타인을 이롭게 하는 것이다라고, 이렇게 물질이나 경제와 유리된 어떤 관념과 도덕 모두 거부합니다. 그러면서 어떻게 통치시스템과 사회시스템이 많은 사람들, 모든 인민들의 최소한의 생활 유지와 최소한의 물적토대 유지를 해결해야하나 그 문제에 천착을 하게 되죠. 그것이 바로 겸애입니다, 통치시스템, 국가시스템, 사회시스템을 통해서 모든 인민들이 최소한의 삶의 안정성을 보장하고 누리게 하는 것 그것이 바로 겸애입니다.


 


많은 분들께서 겸애하면 정신적인 사랑, 내지 관념적인 어떤 것을 떠올리셨을텐데 그런것과는 아무런 관련이 없는게 바로 겸애입니다. 묵자는 전면적으로 어떤 물질적인 이익을 긍정하고 그것을 중심에 넣고 사고했습니다. 묵자가 살았던 당시에 백성들은 세가지 고통에 시달린다고 묵자는 진단했습니다 ‘추운 자 입지 못하고, 일한 자 쉬지 못하고, 배고픈 자 먹지 못한다’ 이것이 당대에 바닥에 떨어진 인민들의 삶의 모습이었는데 입고 쉬고 먹고 이렇게 인민이 누려야할 최소한의 것들과 유리된 도덕과 관념, 윤리를 묵자는 거부했습니다. 인민들 삶의 최소한도 보장해주지 못하는데 도덕이고 윤리고, 관념이고 다 필요 없다는거죠.


 


묵자!!, 경상도 말로 먹자가 바로 묵자죠. 묵자하면 밥을 바로 떠올리셔도 좋습니다. 누군 주둥이고 누군 입이 아닙니다, 누구든 먹어야하고 굶지 말아야합니다. 이렇게 밥으로 대변되는 인민 생활의 최소한의 기초, 내지 최소한 물질적 토대 보장 그것이 바로 겸애입니다. 그 겸애가 바로 묵자 사유의 중심이고 문제의식의 핵심이고요. 뒤에 텍스트 한편 한편 천천히 차근차근 읽어나갈 때 겸애를 다시 집중적으로 논할것인데요 그래서 여기선 이렇게 맛뵈기만 좀 하죠, 일단 관념, 정신, 추상적인 것과는 상관이 없고 모든 인민 삶의 물질적 기초 보장에 관한 것이다만 기억해두셔도 좋습니다. 묵자의 겸애냐 뭐냐고 다른 사람이 물으면 그냥 이렇게 대답하세요 “최대다수의 기본적 생존의 보장”이라고요


 


 


이익(利)


 


[caption id="attachment_103311" align="aligncenter" width="300" caption="영화 '묵공(2007)' 에서도 농성술은 중요한 소재다."][/caption]


 


義,利也


 


아 이번 시간에 본격적으로 묵자란 인물에 대해서 그리고 조금은 묵자가 살았던 시대 이야기를 좀 하려고 했는데 또 좀 다른 소리를 해야겠습니다. 바로 묵자 사상에서 利, 바로 이익에 대해서요. 지난 시간에 묵자의 겸애를 말하면서 묵자의 겸애는 관념, 추상적인 도덕이나 정신과는 거리가 멀고 어떤 물적토대 내지 이익과 연관 또는 직결되는 것이라고 했죠.. 네 그렇습니다, 묵자는 이익에 관심이 많고 그것을 가지고 많이 고민했습니다. 이, 물질적인 이익 묵자 사유의 중심은 아니더라도 묵자사유에서 적지 않은 비중을 차지하고 있는 것은 사실이지요.


 


보통의 사람, 인간은 어떤 물적토대와 경제적 이익이 없이는 생존을 영위할 수 없습니다. 그리고 정상적인 통치체제 내지 시스템이라면 어떻게든 바람직하게 추구할 수 있게 해주고 또 어떤 테두리 안에서 보장을 해줘야겠죠. 그런데 이익, 한자로는 利 이것은 유독 동양철학 특히 동양철학에서 주류의 위치를 점해온 유학에서 백안시 내지 경계해야왔습니다. 항상 그래왔죠. 공자부터 시작해서요.


 


유가에서 공자 다음의 성인으로 존경 받는 맹자가 위나라 혜왕에게 유세하러 위나라의 수도 대량에 가 위나라 혜왕을 만나서 주고 받은 이야기에서 아주 잘 드러나죠. 그 자리에서 바로 위나라 혜왕은 맹자를 반기며 한마디 하는데……..


 


노선생님께서 천리를 멀다 않고 오셨으니, 역시 장차 내 나라를 利롭게 함이 있겠네요?ㅎㅎ


 


맹자가 정색하며 이에 답하길


 


"왕께서는 하필 이익(利)을 말씀하십니까?"


 


그러면서 계속 말하길 단지 인의(仁義)가 있을 뿐입니다, 왕께서 어떻게 내 나라를 이롭게 할 수 있을까라고 하신다면 대부들도 ‘어떻게 하면 내 집안을 이롭게 할 수 있을까라고 할 것이며, 사(士)나 서인(庶人)들도 ’어떻게 하면 내 몸을 이롭게 할 수 있을까‘라고 할 것입니다. 위아래가 서로 이익을 다투게 되면 나라가 위태로워 질것입니다 .만승의 나라 천자국에서 그 임금을 죽이는 자는 반드시 천승의 가문의 수장인 공경대부요, 천승의 나라에서 그 임금을 죽이는 자는 반드시 백승의 가문 수장인 대부입니다. 만에서 천을 가지고, 천에서 백을 가지는 것이 적은 것이 아니지만 만약 義를 뒤로 미루고 利를 앞세우면 모두가 빼앗지 않고는 만족하지 못할 것입니다


 


이익을 탐하면 정치적 위계질서가 무너지고 서로 죽이고 살이는 살벌한 투쟁이 벌어질 것이다~~ 맹자 텍스트는 이렇게 시작합니다. 이익에 대한 경계 내지 이익추구에 대한 경고를 말하는것으로요. 이익을 추구하다보면 갈등이 일어난다고 합니다. 그것도 극단적인 갈등이 일어나 결국 공동체의 파괴까지 초래한다고 합니다. 그러면서 이익이 아닌 義를 말합니다. 이렇게 이익(利)과 義는 모순되어 보입니다. 이익을 추구하면 공동체의 어떤 의로움은 무너지고 결국 파괴를 불러올 수 있다는 것인데 맹자 이전의 유가의 종사 공자 역시도 논어에서 이익추구의 위험성을 거듭 말했습니다. 맹자처럼 극단적으로 말하지는 않지만 계속 이야기를 했죠.


 


가령 “군자는 의에 밝고 소인은 이익에 밝다‘ , ’이익에 따라 행동하면 공동체 안에서 갈등의 소리인 원망이 많아진다‘등 그런데 묵자는 직접적으로 이익을 계속해서 말합니다.


 


이익이 있어야 인민들이 살 수 있고 기본적인 생활을 유지할 수 있다고 보기에 그렇게 말하는 것인데 대놓고 義,利也 (義는 利이다)라고까지 이야기를 합니다. 의로움이라는 것은 이익과 함께 가는 것이다!! 사회를 유지하는 질서의 기초내지 통치질서의 정당성이 바로 義인데 이 義를 말할 때 이로움을 빼놓고는 논할 수 없다는 것. 사람들을 이롭게 하지 않으면 의로움이란 것이 존재할 수 없다고 묵자는 강력히 말을 합니다. 앞서 겸애를 말할 때 어느 정도 이야기를 한 것인데 의와 리를 상당히 대립적으로 보는 유가와 달리 묵가는 이익을 윤리와 정치사상과 철학에 필요조건으로 보는 것 같습니다.


 


그렇습니다. 이렇게 이익을 강조하고 그것을 많이 이야기합니다. 그런데 여기서 주의해야할 것이 있습니다. 이로움을 강조하고 물적토대 내지 경제조건을 힘주어 말한다고 해서 그들이 단순히 이익의 총량을 늘리거나 사회 내지 체제의 생산력과 재화를 늘리는데 주안점을 두지는 않습니다. 단순히 사회 생산력을 늘리고 사회 전체가 가지는 경제적 생산력을 증대 시키자는 건 법가 사상에서라면 몰라도 묵가 사상과는 크게 관련이 없습니다.


 



 


이상하지요. 이익을 말하는데 이익의 총량을 늘리는 것에는 별 관심이 없다니. 잘 이해가 가지 않을 수 있습니다, 이익내지 재화하면 늘리고 축적하고 확대하는게 당연한거 같은데 말입니다. 그런데 그것에 묵자가 별 관심이 없다니 좀 이상하지요? 그리고 정말 묵자가 이익과 재화, 생산량, 생산력의 확대에 큰 관심이 없다면 묵자가 말하는 이익이란게 뭔지 좀 그것이 궁금할 것도 같습니다.


 


묵자가 말하는 이익은 그냥 이익이 아닙니다. 어떤 공유되는 이익, 분배 되고 나누어지는 이익을 말합니다. 그것도 묵자가 생각하는 정당한 기준 하에 나누어지고 공유되고 분배 되어지는 이익입니다. 사회구성원이 생산하는 이익과 생산물, 재화가 독점되고 또는 낭비되고 그러면서 불평등, 불균등하게 분배되고, 또 생산에 기여정도에 따라 나누어지지 못하고 이것이 묵자가 무수히 지적하는 당대 사회의 모순이고 그들이 직접 겨누는 문제인데요. 묵자가 말하는 의로움의 기초가 되는 이로움은 그냥 이로움을 말하는 것이 아니라 사회구성원들에게 나누어지고 공유되는 상호적인 이익이고 이런 이익과 상호간에 이롭게 해줌이 그들이 말하는 겸애의 알파이자 오메가입니다.


 


이렇게 의와 리는 같이가고 리가 있어야 의로움이 있는 것입니다. 그런데 좀 묵자가 생각하는 의와 리, 그리고 의와 리의 관계를 정확히 이해하기 위해선 좀 보충 설명이 있어야할 거 같습니다. 왜냐면 위에서 말씀 드린대로 그냥 리(利)가 아니고 상호공유되고 분배되는 조건하에서의 이익이니 말입니다.


 


묵자가 말한 義,利也를 義는 利이다라고 앞서 묵자가 말했다고 했는데 묵자 연구가들이 많이들 그렇게 해석해왔습니다, 이런 의미죠, 제가 언급한대로 의라는 것은 이로움을 필요조건으로 한다, 이로움이 없으면 의로움이 아니다라고요. 네 맞습니다. 그런 해석 틀리지는 않습니다. 하지만 왠지 義를 利에 종속 시키는 듯한 뉘앙스인데 그것보다는 좀 다른 해석도 한번 생각해야지 않나싶습니다. 의를 리에 종속시키는 듯한 해석만 고집하기보다는 역으로 이로움을 의로움에 종속 시키는 해석도 한번 해보죠. 의로워야 이로울 수 있다, 의로워야 제대로 사회구성원을 이롭게 할 수 있다, 의로움을 통해 이롭게 하자로요.


 


의는 이로움이다와 의로워야 이로울 수 있다는 의미가 상당히 다른거 같은데 두 해석 모두를 감안해야 묵자가 생각하는 의와 리, 의와 리의 관계가 제대로 들어옵니다.


 


예를 들어 설명해봅시다. 어느 단체 사람들이 빵을 만드는 일을 하는데 생산하던 빵이 10개에서 50개로 늘어났다고 칩시다. 생산력이 발전한거고 생산량이 많아진거고 이익이 늘어난건데 웬걸 빵을 먹는 자는 소수이거나 다수가 빵을 먹는다고 해도 빵을 먹지 못해 굶는 사람이 있습니다. 그렇다면 정의롭지 못한 것이겠죠. 이익과 무관한 정의에 관심이 없는 묵자는 역시 정의와 유리된 이익에도 관심이 없습니다.


 


오히려 20개 정도로만 늘어나더라도 일에 참여하는 사람들중에 굶은 사람이 없고 모두에게 빵이 돌아가도록 하는 것, 이것이 묵자가 말하는 義고 이런 義를 통해서 만들어지고 나온 이로움의 확대가 바로 묵자가 말하는 겸애입니다. 그리고 그 義는 묵자가 생각하는 의로움입니다. 묵자가 생각하는 정당함, 정의로움, 올바름이고 기준이겠죠. 다른 제자 백가 사상가들은 義를 수직적인 신분질서, 불평등한 관계를 전제하고 거기서 지키고 준수해야할 것들을 의, 의로움으로 이야기하지만 묵자는 그들과 다르게 의를 정의하고 평등과 관련된 맥락에서 많이 쓰는데 義 利也는 우리가 말하는 의가 있어야, 우리식대로의 의가 있어야 진정 백성들을 이롭게 할 수 있다는 말이기도 합니다.


( 순자와 한비자는 엄연한 신분질서에서 준수해야할 것을 의라고 말하고 맹자도 군신지의라고 말하면 그런 비대칭적인 관계를 염두해두고 의를 말합니다 또 지식인이 받아야할 당연한 대접을 의라고 많이 말하기도 하죠. 다들 어느정도는 불평등한 관계를 전제하고 의를 쓰는데 묵자는 다른 맥락에서 의를 정의하고 씁니다, 선진시대 문헌을 공부할 때 주의해야할 것이 한자가 같다고 그것을 각자가 동일한 의미맥락으로 쓸거라고 넘겨짚은채 독해하는겁니다)


 


자 좀 정리해보죠. 묵자가 말한 義利也는 이로임이 있어야 의로움이 성립할 수 있다는 의미이지만 또 역으로 의로움이 있어야 이로움 역시 성립할 수 있다는 의미 이 두가지를 의미를 모두 부여잡아야 묵자가 말하는 의와 리의 의미 그리고 의와 리의 관계를 제대로 이해할 수 있다는 것, 이렇게 두 개념은 서로가 서로를 껴안고 있는데 이 점을 꼭 염두해두셔야합니다,


 


자 앞서 말한대로 묵자는 利를 공자, 맹자 유가 사상가들처럼 경계하거나 그것을 위험시하지 않았습니다, 적극 긍정했습니다. 하지만 단순히 그것의 확대내지 확장이 아니라 모든 사회구성원들에게 공유되고 나누어지도록 해야한다는 것이고 묵자가 생각하는 의로움이 전제되어야합니다. 만약 이익을 분배 받지 못하고 그 공유에 참여하지 못해 삶의 기초가 위협받는 사회구성원이 소수라도 존재한다면 의롭지 못한것이고 그런 상태에서 이익은 성립할 수 없다는 것이 묵자의 생각입니다 그는 진정한 사랑과 타인을 사랑함을 이렇게도 말합니다, 전체 구성원을 모두 이롭게 할 수 있은 후에야 성립하는 것이라고.


(이것을 묵자는 겸애라고만 말하는것이 아니라 仁이라고도 말하는데 앞서 말씀드린대로 묵자는 유가사상을 한사코 반대하거나 부정만 한것이 아닙니다, 어쩌면 진정한 인과 의를 말하고 유가사상의 한계를 보완하고 극복하자는 문제의식이 강하죠. 자주 묵자는 자신들이 생각하는 겸애와 의를 仁으로 말하고도 하는데 행여 오해가 없었으면 좋겠습니다 공자 그대로의 仁이 아니고 묵자가 생각하는 진정한 의미의 仁이 있고 그것이 겸애죠)


 


자 이렇게 철저히 의로움과 이로움은 같이 가는 것이고 의로움 없는 이로움은 성립할 수 없는 것인데 이것이 현실의 대한민국을 사는 우리에게 뭔가 생각할 거리를 강하게 주는 거 같습니다.


 


정도가 심한 부의 불평등, 그리고 역시나 정도가 심한 재화의 불균등한 분배와 소유가 이루어지는 정치공동체인 대한민국, 그 대한민국에서는 국익이라는 추상적인 국가경제력의 확대 국부의 축적이라는 구호와, 프레임하에 여러 가지 국민들의 삶을 옥죄는 모순들을 은폐하고 그것을 외면하도록 사람들을 길들여 온거 같습니다, 한 사람, 한 사람, 각자에게 돌아가고 분배되는 눈에 보이는 실질적인 이익보다는 단순히 국가부의 증대, 국력의 확대 이런 추상적인 전체, 국가의 이익을 말하면서 당장의 분배를 외면하고 생산에 종사하고 노동에 종사하는 사람들을 위한 정당한 몫의 배분이 잘 이루어지지 않는것 같다 이 말입니다.


 


묵자는 단순하면서도 추상적인 국가의 전체이익, 총이익에는 무관심했습니다. 상앙과 한비자는 국가를 하나의 단일체로 보고 그 단일체의 생산력과 힘의 극대화를 꾀했지만 묵자는 아닙니다. 묵자는 철저히 국가와 공동체를 이루는 구체적인 개개인 하나하나의 삶의 영위에 필수적인 이익에만 관심을 두었습니다. 그런데 어째 현재 대한민국을 사는 우리는 추상적인 국익의 주술에 취해 사는게 아닌가 싶습니다. 오늘도 아등바등 돈 한두푼에 아쉬워하며 살아가는 우리와 무관할 수도 있는 그런 국익의 논리하에 힘들고 고된 삶을 영위해가고 그러면서 우리의 현실을 있는 그대로 또 현실을 넘어서는 어떤 청사진을 스스로 그려볼 슬기와 눈을 가지지 못한채 하루 하루 그날 그날 살아가지 않나 싶습니다. 그래서 말입니다. 묵자가 말한 의에 기초한 이익, 의가 전제된 이익, 그것을 확대 보장하는 겸애. 이것은 오늘날 우리에게 적지 않은 것을 시사해주는 것이 아닌가 합니다. 추상적인 전체의 이익, 국가의 이익 이런것이 아닌 말로 밥 맥여 주는것이 아니니까 말입니다.


 



 


아 그런데 국익이니 국력이니 자꾸 그러는데 그건 재벌의 이익내지 사회 아주 상류층의 이익이 아닐까요? 어째 항상 그들은 자신들의 이익을 그런 것으로 잘 포장하는거 같습니다. 저만의 망상일까요? 우리들은 우리의 이익을 생존권보장이니 노동자의 권리나 이익이니 말하고 이것을 주류언론에서는 이기적인 밥그릇 싸움이라고 포장해서 보도하고 (MBC고 KBS고 파업할 때 국민들의 시큰둥한 반응 어쩌면 당연한거고 자업자득이죠 ㅋㅋ) 그러는데 재벌들이고 사회최상류층 사람들은 자신들의 이익과 그 이익의 유지 더 정확히 구체적으로 말하자면 자신들만의 이익이고 타 사회구성원의 삶과 무관내지 대립적인 자신들의 이익과 확대 유지를 교묘하게 국가의 이익, 국가 경쟁력, 국가 성장 이런걸로 말바꾸고 희석시켜 국민들을 홀리는거 같다는거죠. 구체적인 모두의 이익이 중요할까요 아니면 추상적인 전체의 이익이 중요할까요?? 전자만을 생각한 묵자가 현재 대한민국에 산다면 저런 허위적이고 기만적인 프레임과 주술걸기 , 인민들 홀리기를 먼저 단호하게 공격하고 저기에서 벗어나자고 외칠거 같은데. 그래서 전 구체적인 모두의 이익을 말한 묵자의 글을 읽을때마다 속이다 후련하고 또 역으로 현실이 답답하게 느껴지기도 합니다.


 


묵자란 인물에 대해서 그리고 그의 출신성분내지 당대의 역사적 배경 내지 그가 활약했던 시공간에 대해서 이야기를 해야했는데 묵자사상에서 적지 않은 비중을 차지하는 이익에 대해서 이야기하는 바람에 그것을 다음 시간으로 미루어야겠습니다. 이익이라는 것, 묵자를 이해하는데 중요한 것이기에 미리 좀 말씀을 드린 것인데요, 다음시간에 묵자란 사람에 대해서 본격적으로 이야기 해보도록 하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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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 묵자 더 비기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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