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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2. 09. 04. 화요일

젊은농부


 


인간은 본래 ‘채식주의자’ 였을까? 아니면 ‘잡식주의자’ 였을까?


 


이 풀리지 않는 오랜 의문에 대한 답을 구하고자 하는 것은 그다지 현명하지 못한 일이 아닐까 생각합니다. 태초의 인간이 어떠한 삶을 살았든 상관없이, 지금의 인간은 밥을 먹고 채소를 먹으며 고기를 먹고 있다는 사실 자체가 중요하니까 말이지요.


 


인간이 고기를 즐겨먹는다는 사실 자체를 부정할 필요는 없다고 생각합니다. 인간이 고기를 먹는 다는 사실 자체가 비난받을 일이 아니라고도 생각하고요. 사자와 호랑이도 육식을 하고, 곤충을 잡아먹는 곤충도 존재합니다. 그들이 비난 받지 않는 것과 마찬가지로 인간의 육식 또한 비난받을 일이 아니라 생각하고 있지요.


 


하지만 ‘어떤’ 고기를 먹느냐는 중요한 문제인 것 같습니다. 어떻게 사육되고, 어떤 방법으로 도살되며, 어떤 과정을 거쳐 마트와 정육점의 진열대에 놓이는 고기인지 보다 명확히 아는 것은 중요한 일이라 생각하고 있지요.


 


고기는 고기가 되기 이전에 ‘동물’입니다. 동물은 생명을 지닌 존재이고, 우리는 인간을 포함한 모든 생명들에게 윤리적인 생각과 행위를 할 의무가 있습니다. ‘무엇을’ 먹느냐가 인간의 자유로운 선택의 범주에 드는 화두라면, ‘어떻게’ 먹느냐는 ‘옳고 그름’을 논할 수 있는 윤리와 의무에 해당하는 문제라고 할 수 있겠지요.


 



 


많은 수의 채식주의자들이 ‘육식을 반대하는 이유’로 채식을 실천하고 있기도 하지만, ‘축산업의 폐해’를 반대하는 의미로 채식을 실천하는 채식주의자들도 많이 존재하는 것이 사실입니다. 동물의 삶을 짓밟고, 환경을 오염시키는 좋지 않은 먹거리로서의 고기를 먹지 않겠다고 선언한 어느 ‘채식주의자’의 오랜 고민의 흔적이 담긴 책 『동물을 먹는다는 것에 대하여』를 읽고 짧은 독후감을 남겨 봅니다.


 


 




 


 


1. ‘생각’과 ‘식성’ 사이의 거리


『동물을 먹는다는 것에 대하여』의 저자 ‘조너선 사프란 포어’는 책의 서두에 자신이 할머니의 고기요리를 가장 좋아하던 어린 육식주의자에서, 아내와 함께 채식을 실천하는 채식주의자가 되기까지의 길고 험난(?)했던 여정을 재미있게 소개해 놓았습니다.


 


아홉 살 때의 베이비시터는 아무것도 다치게 하고 싶어 하지 않는 사람이었다. 그녀는 왜 형이랑 나랑 같이 닭고기를 먹지 않느냐는 내 질문에도 이렇게만 답했다.


 


“난 아무것도 다치게 하고 싶지 않아.”


 


“다치게 한다고요?” 내가 물었다.


 


“너도 닭이 닭이라는 거 알잖아, 그렇지?”


 


……


 


형과 나는 닭고기를 한입 가득 문 채 서로 얼굴을 마주 보며 ‘어째서 전에는 저런 생각을 한 번도 해 보지 않았을까? 왜 아무도 내게 그런 이야기를 안 해 줬을까?’하는 생각을 동시에 했다. 나는 포크를 내려놓았다. 형은 끝까지 다 먹었다. 어쩌면 내가 이 글을 쓰고 있는 이 순간에도 형은 닭고기를 먹고 있을지도 모르겠다. 베이비시터의 말이 나에게는 다 이해가 되었다.


 


……


 


이제는 달라졌어! 그렇게 큰소리치며 자신만만하게 시작했던 나의 채식주의는 몇 년 계속되다가 바지직거리다 조용히 잦아들었다.


 


……


 


대학에 들어가면서 더 열심히 고기를 먹어 대기 시작했다. 그게 무슨 의미건 간에 ‘그것을 믿지 않아서’가 아니라, 의문들을 의도적으로 마음속에서 밀어내 버렸다. 그때는 ‘정체성’을 품고 싶지도 않았다. 그리고 내 주의에 나를 채식주의자로 아는 사람도 없었기 때문에 사람들 앞에서 위선 떨 일도 없었다.


 


……


 


하지만 2학년을 마칠 무렵, 철학을 전공으로 삼아 처음으로 진지하게 여심 찬 생각을 품으면서 다시 채식주의자가 되었다. 의도적으로 잊어 왔지만 고기를 먹는 것은 내가 만들어 나가려 하는 지적 생활과는 앞뒤가 맞지 않는다고 확신했다. 나는 생활이 이성의 틀에 따를 수 있으며, 따를 것이라며, 따라야만 한다고 생각했다.


 


……



 


졸업하고서 2년 동안 고기를, 그것도 종류를 가리지 않고 양껏 먹었다. 왜 그랬느냐고? 그야 맛있으니까.


 


……


 


그 무렵 나중에 내 아내가 된 여자와 소개팅을 하게 되었다. 고기에 얽힌 그녀의 역사는 내 경우와 놀랄 만큼 흡사했다. 밤에 침대에 누워 하는 생각과 다음 날 아침 식탁에서 하는 선택이 따로 놀았다.


 


우리 둘 다 관심은 있었지만 둘 다 잊어버렸던 문제인 동물을 먹는다는 것부터 시작하면 좋을 듯 했다. 우리는 약혼을 한 그 주에 채식주의자가 되었다.


 


물론 우리의 결혼식은 채식결혼식이 아니었다. 손님들 중에는 우리와 함께 기쁨을 나누기 위해 먼 거리를 여행해 온 이들도 있으니, 그들에게는 동물성 단백질을 제공하는 것이 옳다고 우리 스스로를 납득시켰던 것이다. 그리고 우리는 신혼여행 중 생선을 먹었는데, 일본에 있었기 때문이다. 그리고 신혼집으로 돌아와서 가끔씩 햄버거와 닭고기 스프, 훈제 연어와 참치 스테이크를 먹었다. 하지만 가끔씩만 이었다. 먹고 싶을 때만 그랬다.


 


그럼 됐지, 뭐. 그렇게 생각했다. 별 문제 없는 것 같았다. 이 정도면 양심적으로 식단을 유지하고 있다고 보았다. 먹는 것만 우리 삶의 다른 윤리적 영역들과 달라야 할 이유가 뭐란 말인가? 우리는 정직한 사람들이지만 가끔은 거짓말을 하며, 배려심 깊은 친구지만 가끔은 눈치 없는 짓을 한다. 우리는 가끔씩 고기를 먹는 채식주의자들이었다.


 


고기는 맛있습니다. 그리고 고기를 먹는다는 행위 그 자체는 잘못된 것이 없습니다. 그렇기에 고기를 즐겨먹던 누군가가 어느 날 갑자기 고기 먹기를 중단하고 채식으로만 배를 채우겠다고 생각하고 실천하는 일은 굉장히 고통스럽고 어려운 일이 되겠지요. 회식 자리에서 만나는 불판 위의 고기를 거부하고, 가족이 함께 모인 자리에서 고기에 젓가락을 올려놓지 않은 채 상추와 쌈장만으로 끼니를 때우는 일은 ‘고문’에 가까운 고통일 것입니다.


 


누군가가 “왜 고기를 먹지 않느냐?”고 질문이라도 해 온다면 그것은 더욱 고통스러운 일이 되어버릴 것입니다.


 


동물의 생명을 존중하기 때문이라고 이야기해야 할지, 현재의 축산업 시스템이 지닌 문제점을 장황하게 늘어놓을지, 채식이 건강에 좋다는 뻔한 이야기를 전해야 할지… 막막한 기분마저 들어오게 되겠지요.


 


그 때문에 우리 주변에는 생각보다 많은 ‘가끔씩 고기를 먹는 채식주의자’들이 존재하고 있는 것이란 생각이 들었습니다.


 


우리가 먹는 것은 고기이기 이전에 동물이고 생명이라는 사실을 인지하고 있는 ‘생각’과, 고기를 보고 군침을 흘리고 있는 ‘식성’ 사이의 거리는 우리가 생각하는 것보다 훨씬 더 길고 먼 것 같습니다.


 


작가는 작가 자신이 느낀 그 ‘생각과 식성 사이의 괴리’에 대해 참으로 솔직한 이야기를 늘어놓으며, 작가가 독자와 같은 편임을 강조하고 있다는 느낌을 받았습니다. 문제를 인식하는 동시에 육식을 끊어버린 ‘독한 실천가’가 아니라… 긴 혼란의 시간을 겪으며 고민하고 변화해 나아간 평범한 사람들 중 하나임을 강조하며 자신의 책 제목에서부터 거부감을 느꼈을지 모를 독자들을 향해 손을 내밀고 있다는 느낌이랄까요.


 


 




 


 


2. 오해


아주 솔직하게 터놓고 말한다면 (그리고 이 페이지에서 신뢰성을 잃을 위험을 무릅쓰고 말한다면) 조사를 시작하기도 전에 무엇을 발견할지 이미 안다고 생각했다. 세세히는 몰라도, 큰 그림은 아는 줄 알았다. 다른 사람들도 같은 예상을 했다. 거의 항상, 내가 ‘동물을 먹는 다는 것’에 관한 책을 쓰고 있다고 말하면 누구나, 심지어 나의 관점에 대해 전혀 모르는 사람들까지도 이 책이 채식주의를 옹호하는 사례가 될 것이라고 가정했다. 그것은, 축산업에 대해 철저히 조사를 해 보면 결국은 누구나 고기를 멀리해야 한다는 결론을 낼 뿐만 아니라 대부분은 이미 그런 결론이 나올 줄 안다는 강력한 가정이었다. (당신은 이 책의 제목을 보고 어떤 내용을 예상했는가?)


 


나 역시 동물을 먹는 것에 관한 내 책이 채식주의자들을 지지하는 직설적인 사례 연구가 될 줄 알았다. 그런데 그렇지가 않았다. 채식주의자들을 직설적으로 옹호하는 글을 쓰는 것도 가치가 있겠지만, 내가 여기에 쓴 것은 그런 것이 아니다.


 


작가의 이야기처럼 이 책 『동물을 먹는다는 것에 대하여』는 무작정 육식을 비난하고 채식을 옹호하는 내용이 아닙니다. 그보다는 보다 근본적인 부분에서 육식에 대해 고민해보고, 축산업의 실태에 대해 있는 그대로의 정보를 공유하고자 하고 있지요. 판단은 각자의 몫으로 돌리고, 작가는 그저 있는 그대로의 사실들을 정리하여 나열해 놓았습니다. 그 과정에서 ‘동물보호론자’들의 이야기와 함께 ‘축산업주’의 목소리도 있는 그대로 전하고 있지요. 그럼에도 어쩔 수 없이 작가의 생각이 곳곳에 묻어나기는 했지만, 그래도 가능한 모든 면에서 무게의 균형을 맞추고자 노력하였다는 사실은 확연히 느껴졌습니다. 많은 사람들이 이 책을 읽기도 전에 ‘오해’부터 하게 될까 염려하는 마음이 고스란히 느껴진다고 할까요.


 


작가는 다시 한 번 강조합니다.


 


난 섣불리 어떤 답을 정해놓고 누군가를 공격하기 위해 이 글을 쓰고 있는 것이 아니라고.


 


동물을 먹는다는 것은 낙태 문제가 그러하듯 가장 중요한 세부 사항 일부(언젠가 잠재적 인간과는 반대되는 의미로서 태아인가? 동물은 진짜로 어떻게 경험하는가?)를 정확하게 알기 힘든 주제들 중 하나이며, 사람들이 가장 불편해하는 지점으로 곧장 뚫고 들어가서 방어 자세나 공격적 반응을 불러일으키기도 하는 주제이다. 그것은 딱 집어 말하기 어렵고 짜증스러우면서도 울림이 큰 주제이다. 질문이 질문에 꼬리를 잇고, 어느새 자기도 모르게 실제로 자신이 믿거나 따르는 것보다 훨씬 더 극단적인 입장을 취하게 되기 십상이다. 아니면 심지어 옹호하거나 따를 가치도 없는 입장을 취하는 경우도 있다.


 


고기를 먹는 것에 대한 논쟁이 아예 논쟁이 아니라 취향에 대한 진술이 되는 경우가 너무나 많다. 그리고 돼지고기가 얼마나 많이 소비되는가, 맹그로브 늪이 양식업 때문에 얼마나 파괴되고 있나, 소가 어떻게 도살되는가 등에 대해 우리가 그 문제를 놓고 실제로 무엇을 할 수 있는가라는 질문이 제기된다. 윤리적으로 강제되어야 하는가? 공동으로 힘을 합해서? 공동체 차원에서? 법적으로? 아니면 각자 옳다고 생각하는 대로 소화시키도록 더 많은 정보를 제공하기만 하면 될까?


 


‘육식’에 대한 문제가 민감한 사안인 것인가, 아니면 ‘축산업’에 대한 이야기가 민감한 사안인 것일까? 실제로 무엇이 그렇게 사람들을 민감하게 하는 것인지는 잘 모르겠지만, 아무튼 ‘고기를 먹는다는 것’에 대한 이야기는 분명히 많은 사람들의 감정을 건드리는 힘이 있다는 것은 분명한 사실인 것 같습니다. 예컨대… 육식과 채식에 대한 이야기를 꺼내는 것이 대다수 사람들의 ‘역린’을 건드리는 가장 확실한 방법 중 하나라는 느낌이랄까요.


 


작가는 책을 통해 거듭 거듭 조심하고 또 조심하는 듯 보였습니다.


 


 




 


 


3. 균형


 


현재의 공장식 축산업을 반대하는 사람들도, 문제제기 자체가 불만인 사람들도 모두 자신들의 논리 안에서만 머무는 것이 문제인 것 같습니다. 때문에 의견이 한 곳으로 모이기는커녕 모든 주장들이 각자의 목소리만을 키우며 도돌이표를 그리고 되풀이 되고 있을 뿐이지요. 그 모든 주장의 근거와 논리는 가끔 터무니없이 빈약하게 느껴지기도 할 정도입니다. 모두가 그저 자신이 옳다고만 할 뿐, 자신이 옳다는 그 주장에 종종 비합리가 존재하고 있다는 사실조차 전혀 인식하지 못하는 것이 큰 문제이겠지요.


 


작가는 그와 같은 문제를 제기하며 흥미롭게도 ‘개고기’이야기를 하였습니다.


 



 


미국 42개 주에서 전혀 법으로 금하지 않았는데도 ‘인간의 가장 좋은 친구’를 먹는 것은 자기의 가장 친한 친구를 먹는 것만큼이나 금기시 되고 있다고 합니다. 아무리 육식을 즐기는 사람일지라도 개는 먹지 않는다고 하지요. ‘육식’은 가능함을 넘어 반드시 필요한 것으로까지 여기는 서양의 사람들이 유독 ‘개’를 고기로 여기는 것에 만큼은 노이로제에 가까운 반응을 보이는 것이 과연 논리적으로나 도덕적으로 옳은 일일까에 대한 의문은 ‘개’를 고기로 여기는 많은 나라 사람들의 오랜 궁금증이었던 것이 사실입니다.


 


 


개를 먹지 않는 금기는 개에 관해서 무엇인가를, 그리고 우리에 관해서는 아주 많은 것을 말해 준다.


- 자기 개를 사랑하는 프랑스인들은 자기 말을 먹을 때도 있다.


- 자기 말을 사랑하는 스페인인들은 자기네 소를 먹기도 한다.


- 자기 소를 사랑하는 인도인들은 자기네 개를 먹곤 한다.


 


 


이와 같은 생각거리를 던지며 작가는 그 이름도 유명한(동물에 관해서라면 더욱 더) 『동물 농장』에 실린 조지 오웰의 이야기를 옮겨 놓았습니다.


 


“모든 동물은 평등하다. 그러나 어떤 동물들은 다른 동물들보다 더 평등하다.”


 


비난과 옹호의 근거가 참으로 빈약합니다.


 


그 빈약한 근거를 아무런 의심 없이 지주대로 삼아 누군가는 육식을 욕하고, 누군가는 육식을 옹호하고, 누군가는 다른 고기를 먹는 육식주의자들을 공격하고 있지요. 그 과정에서 어떤 동물들은 다른 동물보다 더 평등한 대우를 받고 있다는 간단한 사실마저도 인정하고 이해하지 못하는 우를 범하고 있습니다.


 


이 책에는 이와 비슷한 내용을 지닌 다른 책들과는 조금 다르게 ‘축산업계의 목소리’도 있는 그대로 담겨있다는 특이점이 있습니다. 그러한 장치들을 통해 작가 역시 ‘자기중심적인 사고’에 빠지는 우를 범하지 않으려 노력하고 있다는 느낌이 들었습니다.


 


방목 사육으로 얻은 계란이니, 목초를 먹인 소니, 들어보셨을 겁니다. 다 좋지요. 좋은 방향이라고 생각합니다. 하지만 온 세상을 다 먹이지는 못해요. 절대로. 방목으로 기른 닭이 낳은 계란으로는 십억 명도 먹일 수가 없습니다. 그리고 누가 소규모 농장이 모델이니 그 따위 소리를 한다면, 저는 그것을 마리 앙투아네트 신드롬이라고 부르겠습니다. 먹을 빵이 없으면 케이크를 주면 되지 않냐, 이런 소리지요. 고효율 농업 덕에 모든 사람들을 먹일 수 있었습니다.


 


보세요, 미국 농부가 전 세계를 먹여 살려 왔다고요. 세계 2차대전 이후에 제기된 요청이었고, 미국 농부는 그 일을 해냈습니다. 지금처럼 먹을 수 있었던 적은 한 번도 없었어요. 단백질이 지금처럼 구입할 만한 적당한 가격이었던 적은 없었단 말입니다.


 


농부들한테 무엇을 재배할지(키울지) 요구하는 쪽은 바로 소비자인데, 정작 소비자들이 마치 농부가 원해서 그렇게 했다는 식으로 나올 때가 제일 불쾌합니다. 소비자들은 저렴한 먹거리를 원했어요. 그래서 우리가 그것을 키운 겁니다.


 


가족농으로 전 세계 백억 인구를 먹여 사릴 수 있을 것 같습니까?


 


공장식 축산 농장의 농장주


 


 




 


 


4. 감상주의


이 책에 담겨있는 공장식 축산의 수많은 사례들 중 하나만을 옮겨 적어 보도록 하겠습니다. 돼지, 소의 경우뿐만 아니라, 수산물의 어획과 가금류, 기타 조류 등의 다양한 사례들이 있지만 그 중 닭의 경우 하나만을 이야기하여도 나머지의 상황을 함께 이해하기에 충분할 것 같습니다. 참으로 안타깝게도 말이지요.


 



 


전형적인 산란계(알을 낳는 닭)의 닭장은 마리당 건평 423제곱센티미터이다. 이 책의 페이지 보다는 크고 A4 용지 한 장 크기보다는 작은 크기다. 이런 닭장을 창문도 없는 헛간에 3층에서 9층까지 층층이 쌓는다. 일본에는 18층 높이에 달하는 세계 최고 높이의 배터리식 닭장도 있다.


 


붐비는 엘리베이터에 탄다고 상상해 보라. 너무 붐벼서 옆 사람에게 부딪치지 않고서는 몸을 돌릴 수도 없을 지경이다. 시간이 좀 지나면 엘리베이터에 탄 사람들은 남 생각을 할 기력을 잃을 것이다. 난폭해지는 이도 있을 것이고, 미쳐 날뛰는 이들도 나올 것이다. 먹을 것도 희망도 빼앗기면, 몇몇은 남을 잡아먹으려 할 것이다.


 


휴식도 구원도 없다. 엘리베이터 수리공 따위는 오지 않는다. 문은 단 한 번, 삶을 마감할 때, 이보다 더 나쁜 단 하나의 장소(도살장)로 떠나는 여행을 위해 열릴 것이다.


 


(중략…)


 


모든 닭이 배터리식 닭장을 견뎌야 하는 것은 아니다. 그 점 한 가지에서만큼은 (알을 낳는 산란계와는 반대되는 종으로서) 고기가 되는 닭들, 즉 육계는 운이 좋다고 할 수 있을 것이다.


 


그들은 보통 930제곱미터에 가까운 공간을 쓴다.


 


(중략…)


 


지난 반세기 동안, 실제로는 각각 분명히 유전적으로 다른 두 가지 종류의 닭, 육계와 산란계가 있었다. 우리는 둘 다 닭이라 부르지만, 다른 ‘기능’을 하도록 설계되어 전혀 다른 몸에 전혀 다른 신진대사로 움직인다. 산란계는 알을 만든다. 육계는 고기를 만든다.


 


같은 시기에 닭은 이전과 비교하여 절반도 안 되는 기간에 두 배 이상 성장하도록 만들어졌다. 예전에 닭의 기대수명은 15~20년이었지만, 요즘 육계는 보통 대략 6주 만에 도살된다. 매일의 성장률은 줄잡아 400퍼센트 정도 증가했다.


 


(중략…)


 


예를 들면, 산란계가 낳은 수컷들은 모두 어떻게 될까? 만약 인간이 그 닭들한테서 고기를 얻을 계획이 없고, 자연은 그 닭들이 알을 낳도록 만들지 않았다면, 그들은 무슨 기능을 할까?


 


그들은 아무 기능도 하지 않는다. 미국에서 태어나는 산란계들의 절반을 차지하는 수평아리들이 1년에 2억5000만 마리 이상 폐기되는 이유가 그것이다.


 


산란계 수평아리들은 대부분 연이어 늘어선 파이프에 전기가 흐르는 판 위로 들여보내져 폐기된다. 어떤 병아리들은 거대한 플라스틱 컨테이너 속으로 던져진다. 약한 것들은 바닥에서 짓밟히다가 천천히 질식사한다. 강한 것들은 위에서 천천히 질식사한다. 다른 병아리들은 산 채로 펄프 제조기 안으로 던져진다.(병아리로 가득 찬 톱밥 제조기를 상상해 보라.)


 


살아있는 병아리들이 모든 것을 갈아버리는 톱밥 제조기 안에 던져지는 장면을 ‘인상을 찌푸리지 않은 채’ 동요 없이 지켜볼 수 있는 분들이 과연 몇 분이나 계실까요. 그 장면을 아무 거리낌이나 걱정 없이 사랑하는 자녀에게 보여줄 수 있는 분들은 또 얼마나 존재하고 있을까요. 아이들이 하얀 도화지 위에 그리는 병아리의 모습이 컨테이너 안에서 질식사하고 있는 병아리거나, 톱밥처럼 갈려야 하는데 그러지 못해 터지고 갈라진 내장과 살이 덕지덕지 늘어져 붙은 ‘병아리 였던 조각’의 모습을 하고 있다면 우리 어른은 그 그림을 보며 어떤 생각들을 하게 될까요. 그 무엇보다… 우리 아이들에게 ‘동물’이란 단어의 의미가 어떻게 인식되고 새겨지게 될지 참으로 궁금합니다.


 


‘고기를 먹는’ 사람들… 그러니까… 쉽게 말하자면 제가 아는 거의 대부분의 사람들에게(물론 저를 포함하여) 위와 같은 사실에 대한 이야기를 건네는 것은 그다지 ‘효율적이지도 현명하지도 못한 일’일 것입니다. 까다롭거나, 감상적이거나, 반골의 기질을 지닌 불편한 사람이 되기 십상이기 때문이지요. 많은 분들이 ‘막연하게나마’ 이러한 사실들에 대해 알고 있어 더욱 그러합니다. ‘나도 모르는 것이 아니다.’라는 생각은 하나의 강력한 보호막이 되어 ‘고기를 먹는 것’을 감싸고 변호하게 되지요.


 


하지만 그들이 ‘진정으로’ 알고 있는 것이 맞을까요?


 


아니면… 그들에게 ‘공장식 축사’의 문제점을 말하는 이들이 그들을 공격하기 위해 그 말을 전하고 있는 것일까요?


 


그저… 있는 그대로의 사실을 전하는 것에도 강한 알러지 반응을 보이며 거부감을 드러내는 것이 오히려 더욱 감상적이고 감정적인 것이 아닐까요?


 


아무튼 『동물을 먹는다는 것에 대하여』에는 이런 흔한(?) 사례들뿐만 아니라 현장에서 일어나고 있는 거의 모든 일들이 ‘엄청나게 생생한’ 표현으로 소개되어 있습니다. 여러분의 상상력을 간단히 깨부수는 그런 이야기들 말이지요.


 


 




 


 


5. 바로 나 자신이 문제


안타깝게도(어디까지나 제 입장에서의 안타까움일 뿐이지만) 제 친지 분들 중에는 축산업을 하시는 분들이 많이 계십니다. 처음에는 한 분뿐이었지만, 십 년이 조금 넘었을 뿐인 시간이 흐르는 사이 훨씬 많은 분들이 함께 그 일을 하고 계시게 되었습니다. 처음에는 형제가, 그 다음에는 사촌이, 그리고 대를 이어 자식이 그 일을 하게 됩니다. 그 이유는 단순하지만 명료하지요. 바로 ‘돈이 되기 때문’입니다.


 



 


폭이 10미터 정도 되고 길이가 족히 100미터는 되어 보이는 양계동에 들어가 보았습니다. 그 분이 처음 그 일을 시작할 당시의 축사에 비하면 강산이 변한 만큼의 변화가 깃든 ‘최신식 축사’였지만 그곳 안의 공기는 여전히 더럽고 축축하고 침울했습니다. 그곳에서 살고 있는 닭은 ‘육계’였습니다. 그나마 예전보다는 공간도 넓어지고, 천장도 높아지고, 자동화된 환기 시스템이 있어 참으로 다행이란 생각이 들기는 했지만, 여전히 닭들이 그 안에서 불편히 살아가고 있다는 사실만큼은 전혀 변함이 없어 보였지요. 눈이 매운 그 탁한 공기와 배설물이 만들어내는 열기와 악취 속에서 살아가고 있다는 사실은 약간의 정도 차이만을 제외하고는 여전히 똑같았습니다.


 


그 양계동의 주인장에게는 그곳에 드나드는 일이 어렵고 불편하지 않게 느껴졌을까요? 아마도 그렇지 않았기 때문에 ‘최신식 자동화 설비’가 추가되었으리라 생각합니다. 이제는 물도 사료도 자동으로 공급되니, 축사의 주인은 집안에 설치된 CCTV와 온도와 습도를 알려주는 모니터를 주시하는 것으로 많은 부분에서 이전의 수고로움과 고충을 대신하고 있었습니다.


 


없는 용기를 쥐어 짜내어 그 공장(식 축사)의 주인에게 ‘자동화-규모화-산업화 되어가고 있는 농업, 축산업의 폐해’에 대해 이야기 건네 볼까 고민도 많이 해보았지만… 겁쟁이인 저는 끝내 그리하지 못하였습니다.


 


그리하지 못한 결정적인 이유는 바로 ‘소비자로서의 나’, 바로 제 자신이 가장 문제라는 사실을 알고 있었기 때문이었습니다.


 


만약 그 분이 ‘얼토당토 않은 소리’를 하고 있는 제게 이렇게 물어 온다면… “그래서 너는 닭고기 안 먹냐?”라고 묻는다면 그 순간 저는 논쟁에 참여할 자격조차 없는 패배자가 되어버릴 테니 말이지요. 저부터가 그 악순환의 사슬에서 자유롭지 못하고, 그 사슬에서 벗어나고자 진정어린 노력을 한 적도 없었다는 사실을 저 스스로가 알고 있었다는 건 정말로 다행스런 일이라 생각합니다.


 


‘지속 가능한 농사’의 필요성을 주장하며 자연스런 농사를 짓겠다고 공부하고 있는 제가 섣불리 ‘화학농(관행농)’을 공격하거나 비방하지 않는 이유도 마찬가지입니다. 아직… 여전히 저는 그 시스템(공장식 축산과 관행농)이 선물하는 ‘혜택(?)’에서 완전히 자유롭지 못하니까 말이지요.


 


수요가 없으면 공급은 자연스레 사라지게 될 것입니다. 수요가 있는 한은 절대로 공급의 지속을 멈출 수 없을 것입니다. 지금을 살아가는 우리가 맞닥트린 이 중요한 문제는 공급자와 소비자 모두의 탓이기도 하겠지만, 닭이 먼저인지 달걀이 먼저인지 따질 시간에 어느 한 쪽이든 먼저 반성하고 실천하는 것으로 첫 테이프를 끊을 수 있다면… 상황은 분명히 좋아지는 방향으로 발전될 것이라 생각합니다.


 


이는 비단 축산업에만 머무는 문제가 아니라, 농업, 교육 등 모든 사회문제에도 함께 적용되는 이야기이기도 하겠지요.


 


그 무엇보다… 수많은 ‘나 자신’들이 우선적인 문제라고 생각합니다. 목도하는 현실에 눈 감는 나, 이기적인 나, 무관심한 나, 탐욕스런 나. 그런 우리들이 지금의 이 문제를 만들어낸 주연들이겠지요.


 



 


만약 모든 사람들이 고기를 먹지 않는다면 중생을 살해하는 일도 없어질 것이오. 사람들이 고기를 먹기 때문에 고기를 구하고 또 사게 되니 자연히 죽여서 파는 사람이 생기게 되는 것이오. 이것은 모두 먹는 사람이 있어 죽인 것이므로 고기를 사 먹는 이도 죽이는 이와 다를 게 없소. - <능가경(楞伽經)> 中


 


공장식 축산업이 지닌 폐해의 절반은 소비자의 탓이라 생각합니다. 무관심과 욕심으로 일관하는 태도로 사 먹어왔던 이들은 공장식 축산의 생산자들과 전혀 다를 게 없겠지요.


 


네 탓이기 전에, 내 탓이라 생각합니다.


 


변화와 혁명은… 언제나처럼 ‘나 자신’으로부터 비롯되어야 할 것입니다.


 


반드시 그렇게 되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여전히’ (공장식 축산을 통해 생산된)고기를 먹는 나와 ‘이제는’ 바뀌어야 한다고 생각하는 나.


 


그렇게 전혀 다른 모습의 자아가 만들어내고 있는 엄청난 괴리의 간격을 좁히는 과정이 제게 어떤 의미를 지닌 시간이 되어줄지 저도 잘 모르겠습니다. 그리고 그 시간을 보내고 난 제 자신이 어떤 사람이 되어있을지도 잘 모르겠습니다. 입으로는 아픈 현실의 문제를 떠들어 대며 남의 시선 피해 적당히 조금씩만 고기를 먹는 것으로 자위하는 어설픈 채식주의자가 되어있을지, 아니면 당당히 ‘그래서 뭘?’을 외치는 ‘떳떳한 육식주의자’가 되어있을지, 아니면 혹시 스스로 먹을 고기를 마련하기 위해 좋은 방법으로 조금씩이나마 동물들을 키우고 있는 농부가 되어있을지, 아니면 육식을 전혀 하지 않는 사람이 되어있을지…


 


그 ‘열린 가능성’과 마찬가지로 이 책 『동물을 먹는다는 것에 대하여』와 이 리뷰를 쓰고 있는 저 모두 그 어떤 분들도 섣불리 공격하고 있지 않다는 사실을 다시금 되짚어 봅니다.


 


 




 


 


6. 확대경을 부수지 말자


『그리스인 조르바』에서 자유분방한 삶을 살아가는 조르바가 우리에게 이런 말을 전했던 것이 떠오릅니다.


 


“확대경으로 보면 물속에 벌레가 우글우글 하데요. 자 갈증을 참을 거요, 아니면 확대경을 확 부수고 물을 마시겠소?”


 


농약과 화학비료의 폐해를 거론하며 좋은 먹거리에 대한 이야기를 전할 때면 쉽게 만나게 되는 반응이나, 공장식 축산의 폐해를 이야기할 때의 반응이나 비슷비슷한 것 같습니다. “난 그냥 이렇게 먹다 죽겠다. 하나하나 따지다보면 먹을 수 있는 것이 없을뿐더러, 지금껏 그리 먹어도 아무 이상 없었다.”라는 식의 반응들.


 


『동물을 먹는다는 것에 대하여』라는 책이 이야기하고자 하는 것이 어찌 보면 ‘확대경’을 들이대는 것으로 생각될 수도 있지만, 그보다는 ‘옳은 방법’으로 먹고 살아가는 것에 대해 함께 고민해보자는 일종의 권유가 아닐까라고 저는 생각했습니다.


 


TV광고를 보다보면… 손 세정제를 쓰지 않아 99%의 세균을 죽이지 않으면 그 손으로 밥 한 숟가락 떠먹으면 안 되고, 강력한 살균 효과의 세제를 쓰지 않으면 식기와 옷가지 모두 우리의 몸을 헤칠 것이라 생각하도록 하는 이야기들을 접하게 되는데… 이런 것이야 말로 ‘쓸데없는 확대경’으로 우글거리는 벌레를 굳이 찾아내는 것이 아닐까 생각합니다. (우리의 손은 그 어떤 세제보다 깨끗합니다.)


 


올바른 방법으로 작물을 키우고 고기를 마련하는 방법에 대한 진심어린 반성과 고민이 그런 식으로 오해되지 않았으면 하는 바람이 듭니다.


 


그것이야말로 ‘오래도록’ ‘건강하고’ ‘맛있는’ 먹거리를 즐기는 가장 현명한 방법이라고 생각하기 때문입니다.


 


그러니까…


 



 


고기를 먹을 생각이라면, “이왕이면 깨끗하고 맛있는 고기를 먹자”는 것이랄까요.


 


여러분들에게 『동물을 먹는다는 것에 대하여』라는 책을 권해봅니다. 생각할 거리를 참으로 많이도 선물해주는 좋은 책인 것 같습니다.


 


오늘도 행복한 하루 보내세요.


 


 


젊은농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