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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2. 9. 5. 수요일

kuru


 


나는 TV드라마를 안본다.


 


그 이유는 몇가지 있지만 가카를 국민들, 특히 여성들과 노인들에게 경제의 달인으로 확실하게 인식시킨 "야망의 세월" 이나 우리의 황폐해져가는 농촌을 그린건지 아니면 꿈꾸던 이상향을 그린건지 아리송한 "전원일기" 가 생각나서 안본다.


 


[caption id="attachment_103328" align="aligncenter" width="343" caption="그런 드라마 찍지마 씨바 ! 승질 뻗쳐서 증말…"][/caption]


 


그런 내가 참으로 재미있게 봤던 드라마가 있다. 90년대 초에 봤던 "서울 뚝배기" 이다.


 



 


그 드라마 내용도 재미있었지만 드라마나 영화에서 조연이 주연보다 더 빛날수 있는 중요한 존재인 걸 알았고, 그 사례가 바로 극중에서 식당종업원 역할의 "안씨 아쒸 안동팔" 이다.


 



"지가요.. 기냥…"


"이화룡형님이..했걸랑요?"


"우리때는 수틀리면 한강 백사장에서 맨손으로 맞짱뜨고 지면 딱 무릎꿇어.. 그리고 그날부터 이긴 사람은 형님 진사람은 아우님이야.. 근데 요즘은 어떻게 된게 그냥 찌르고 쑤시고.."


"야! 이 짜샤! 이쪽에서 의리적으로 나가면 그쪽에서도 의리적으로 나와야 되는거 아냐? 자꾸 이런식으로 나오면 나, 이번에 동생들 풀어?"



 


그는 대한민국에서 모르는 사람이 없고 모르는게 없고 못하는게 없다. (가카가 이걸 보구 배웠나?) 그런데 일하는 설렁탕집에서 별로 하는일없이 시간이나 죽이고 엉뚱한 사고만 친다.


 


그리고 말끝마다 의리를 내세우면서 같이 일하는 젊은 친구들 고기 납품하는 업자 채소 배달하는 리어카장수 심지어 저 사진의 주인집 어린아이의 코묻은 백원짜리까지 뜯어 먹는다. 그런 대한민국 조폭계의 자칭 "산증인" 의리의 주먹이 어느날 리어카 배추장수와 맞짱떠서 넙치가 되도록 두드려 맞는다.


 


1980년 8월 23일


 


우리는 저런 의리의 사나이 "돌쇠"를 드라마가 아닌 현실에서 본다


 



"육사의 혼이 빚어낸 신념 과 의지 와 행동"


"私 에 앞서 公 나 보다 국가"


"이해관계 얽매이지 않고 남에게 주기 좋아하는 성격"


"영관장교 시절 매일 새벽처럼 집을 나갔다가 밤늦게 돌아오는 그를 붙잡고 칭얼대는 어린 자식들에게 군인이란 나라를 위해 죽는거고 나랏일에 밤낮이 어디 있느냐고 달랜적도 있다… 6.25가 발발하자 그는 어느 누가 시키지도 않았지만 밤마다 목총을 들고 나가 학교교사 순찰을 돌았다.. 그의 투철한 국가관과 불굴의 의지.. 비리를 보고선 잠시도 참지못하는 불같은 성품과 책임감 그러면서도 아랫사람에게 한없이 자상한 오늘의 '지도자적 자질'은 수도생활보다도 엄격하고 규칙적인 육군사관학교 4년생활에서 갈고 닦아 더욱 살찌운것인듯하다"



 



 


그의 군경력중에 1970년 베트남에서의 백마 제 29연대(박쥐부대) 연대장 근무경력이 있다. 노태우도 맹호사단 대대장으로 베트남 참전 경력이 있다.


 


베트남에는 우리 젊은이 30만명이 조국의 명령에 따라 목숨을 걸고 참전했고 댓가는 혹독했다. 5천여명이 전사했고 1만5천여명이 부상을 당했고 숫자조차 정확히 파악 안되는 수많은 고엽제 환자가 발생했다.


 


베트남 참전 환송식에서 당시 국무총리 김종필은 이렇게 말한다.


 



"여러분이 살아서 돌아 온다면 정부가 모든 책임을 다하겠다."



 


1973년 3월 23일


 


베트남전 종전후 돌아온 그들은 서서히 고엽제 후유증이 나타났고 그렇게 처참한 모습이 되어가는 그들을… 정부는 "정부가 모든 책임" 은 커녕 고엽제환자라는 존재 자체를 인정하려 하지 않았다.


 


결국 그들은 국가와 사회의 무관심과 냉대속에 가족들에게조차 버림받고 비참하게 생을 마치거나 스스로 목숨을 끊기도 하고 극도의 빈곤속에서 죽지 못해 사는 생을 이어왔다. 심지어 베트남에서 사창가를 찾다가 국제 매독, 베트남 풍토병 성병에 걸렸다고 조롱과 비웃음을 받아 수치심에 병 자체를 숨기고 살아야 했다.


 


[caption id="attachment_103333" align="aligncenter" width="500" caption="출처 : 나는 고엽제 피해자… 이렇게 될줄 몰랐다 - 오마이뉴스"][/caption]


 


70년대부터 알 수 없는 질병에 시달리던 미군과 호주 뉴질랜드 참전군인들은 78년 미국 고엽제 제조사를 상대로 소송을 건다. 고엽제 문제로 미국 의회 청문회가 열리고 전 주월 미군 총사령관 웨스트 모어랜드 육군대장이 증인으로 청문회에 출석할 만큼 큰 문제가 되었던 다국적 초대형 소송이었다.


 


하지만 이 재판은 이길수 없는 재판이었다.


 


'정부조달계약자 항변원칙'(Government Contractor Defense)이라는 대법원 판례가 있어 정부조달물품 제조사는 정부의 지시대로 제조함으로써 제조책임을 지지 않는다.


 


그러나 고엽제 제조사들은 법정화해를 한다. 재판이 시간을 끌면 끌수록 세계적으로 주목받는 이 재판으로 인해 엄청난 재판비용과 판결보다 더 무서운 기업 이미지 추락을 걱정했기 때문이다.


 


1984년 미군과 호주(7천명 참전) 뉴질랜드(600명 참전) 참전 고엽제환자들은 2억 4천만달러를 피해 보상금으로 받는다. 그러나 정작 미군 다음으로 많은 장병이 참전했고 (8년 5개월동안 32만명 참전) 당연히 미군 다음으로 많은 고엽제 환자가 발생한 대한민국은 단 1달러도 받지 못한다. 철저한 보도통제로 저 재판이 열리는 사실조차 몰라 소송의 일원으로 참여하지 못했기 때문이다.


 


유신시대는 말할것도 없었고 5공 전두환 정권은 역사상 첫 패배한 전쟁이었다는 베트남전으로 만신창이가 되어버린 미국을 겨우 고엽제문제 따위로 또다시 심기를 어지럽게 해드리는 불경죄를 저지를수 없었다.


 


1984년 J 일보에서 고엽제문제를 보도했으나 제보기자를 해고시키고 타언론이 보도하지 못하도록 통제하여 국민의 귀를 막고 눈을 가리고 입에는 재갈을 물렸다. 인터넷이 없었던 세상이었고 해외여행 완전 자유화는 1989년 시작되었다.


 


이것이 평생 의리를 목숨보다 소중히 여기고 거짓말을 할줄 모르고 청렴결백해서 수천억원을 만졌지만 노년의 재산은 단돈 29만원으로 근근히 주변 친인척의 도움을 받아 살아 간다는 이나라 참군인이었다는 작자의 진면목이다.


 


그뿐만이 아니다. 나는 70년대말 입대했다. 논산훈련소를 거쳐 자대배치를 받자 내무반장이라는 고참병장이 큼지막한 몽둥이를 들고 일장훈시를 한다.


 



"절대로 군대에서 죽지말고 악착같이 살아 남아 죽더라도 사회에서 죽어라. 군대에서 죽으면 6종 관물반납 처리되고 X 개 한마리 값 받는다."



 


당시 이등병 월급이 이천원이 약간 넘는 수준이었다 병장 월급이 사천원 조금 넘는 수준. 저 월급의 화폐가치는 입대 전날 이제 한동안 먹을수 없을것같아 먹었던 짜장면 곱배기 가격이 오백원이었다. 그러니까 이등병 월급은 짜장면 곱배기 4그릇 병장 월급은 8그릇이다.


 


베트남전에서의 전사자가 속출하자 박정희정부는 교전중 사망은 공무중 사망으로 처리하고 사망보상금은 사망직전 월급의 36배로 규정함으로써 그이상의 보상을 막는다 그리고 직무수행중 입은 손해에 대해 보상받은 경우 국가의 잘못이 있어도 손해배상을 청구할수 없도록 하였다.


 


결국 이등병이 군복무중에 사망했을 때 짜장면 곱배기 144그릇 만큼 보상금으로 받았다는 뜻이다. 당시 헌법에는 국민이 국가 또는 공공단체에 배상을 청구하는 국가배상청구권을 피해자가 군인 군속일경우 제한하는 규정이 있었다.


 


1971년 대법둰은 이 제한규정을 "군경과 민간인 혹은 군경과 다른 공무원을 합리적 이유없이 차별하는 조항" 이라는 위헌결정을 내린다. 이때 박정희 정권은 합헌판결이 나도록 장관이 책임지고 대법원판사들을 설득하라고 지시했으나 배영호 법무장관은 "사법권의 독립을 해치는 일은 할수없다" 답변하고 사표를 제출해야 했다.


 


1971년 7월 6일 서울지방검찰청 공안부는 제주로 증인검증을 위해 출장갔던 판사와 입회서기가 당시 암묵적인 관행이었던 항공료와 여관비 술값등의 향응을 받았다고 구속영장을 청구했고 이를 보복조치라고 판단한 100여명의 판사가 집단으로 사표를 제출하는 일대 파란으로 이어지고 결국 주동했던 판사들이 사임한다.


 


박정희 정권은 아예 유신헌법에 이중배상금지조항을 넣어 버리고 위헌의견을 냈던 대법원 판사들은 재임용에서 탈락한다. 이것이 바로 그 유명한 1971년 1차 사법파동이다.


 


서슬퍼런 군부독재정권하에서 국민의 기본권을 지키고자 온몸으로 맞섰던 당시 사법부 판사님들께 경의를 표한다.


 


이 사법파동은 그후 1987년 2차사법파동 1993년 3차 2003년 4차 까지 이어졌지만 오늘날 사법부는 "부러진 화살"이 국민의 지지를 받는 처지가 된다.


 


훗날 연평해전 전사자에 대한 보상금이 비숫한 시기 군산의 화재로 사망한 창녀에 대한 보상금만도 못한 좌빨정부라고 비난을 하지만 그 어처구니 없는 보상규정이 유신시절 저런식으로 만들어졌고 2004년 참여정부에서 개정되어 전사처리가 가능해지고 비로소 현실적인 보상이 이루어진다.


 


사병의 봉급 역시 참여정부 시절 9만원선까지 대폭 인상되었다.


 


1995년 베트남 국민들은 베트남 역사속의 전설로 존재하던 어느 위인의 부활로 열광한다. 살아있는 전설 의리의 주먹 "안씨아쒸 안동팔"이 하노이에 나타난게 아니다. 의리의 사나이 "돌쇠"가 박쥐연대장으로 다시 돌아온것은 더더욱 아니다.


 


대한민국과의 국교수립 과정에서 이미 8백년전에 멸족되었다고 믿어 왔던 베트남 첫 독립국가 이 왕조의 마지막 혈통 이용상 왕자의 후손들이 대한민국에 살고 있다는 사실이 알려지고 그들이 베트남을 국빈으로 방문한것이다.


 


이 왕조는 1226년 정란으로 왕족들이 모조리 살해되고 유일하게 왕자 한명이 배로 탈출, 태풍에 밀려 고려 황해도 옹진 화산에 정착한다. 백마를 타고 다녀 옹진 백성들에게 백마장군으로 불리던 그는 1253년 몽골이 침입했을때 싸워 큰공을 세워 고려 고종으로 부터 화산 이씨 성을 받고 시조가 된다.


 


베트남은 역사적으로 우리처럼 중국 라오스 캄보디아 몽골 스페인 프랑스 일본 미국등 수없이 많은 외세의 침입으로 고통받던 나라였다. 삼국지의 제갈공명이 안남 혹은 남만을 정벌하여 맹획을 칠종칠금 (七縱七擒 )으로 굴복시켰다는 그 지역이 바로 지금의 베트남주변으로 추정된다.


 


몽골 국민들의 가슴에는 언젠가 징기스칸이 환생해서 몽골을 세계최강국으로 이끌것이라는 믿음과 희망이 있듯, 베트남 국민들의 마음속에는 외세를 물리치고 베트남의 정통성을 확립하여 문물이 가장 발달했던 최초의 독립왕조 이왕가가 다시 환생해서 외세에 흔들리지 않는 강력한 국가를 만들어 태평성대를 노래할날이 온다는 믿음의 전설이 있다.


 


생각해보라. 만약 고구려가 삼국을 통일하여 강력한 통일독립국가로 번성했다면 우리는 그후 수없는 외세의 침략으로 고통받는 역사는 없었을것이고 국민들은 언젠가는 고구려 광개토대왕이나 장수왕의 후손이 다시 돌아와 부국강병 강력한 국가를 만들것이라는 희망을 품지 않겠는가?


 


이용상왕자의 후손이 대한민국에 살고 있다는게 베트남에 알려지자 "끊어졌던 이왕조의 혈통이 부활했다" 라며 언론이 대서특필하고 전국적인 감동과 흥분속에서 화산이씨 종친회 대표들을 초청하였고 도무오이 공산당 서기장을 비롯한 3부요인이 공항까지 나와 맞을만큼 대대적인 환영을 받는다. 베트남 정부는 이들에게 자국민의 법적지위를 부여하며 왕손으로서의 예우를 극진히 하였다.


 


당시 방송화면으로 보면 국빈 이상의 열렬한 환영 카퍼레이드를 한다. (우발적으로 이루어졌다는 쌍두노출 수준이 아니다.)


 


화산이씨 종친회장의 베트남공항 도착부터 옛 이왕조 시절 베트남의 수도였던 탕롱(昇龍)까지 이동, 이왕조 사당에서의 800년만에 후손에 의한 첫제사 (이왕조는 다른 왕조와 달리 왕족이 멸문지화를 당했기에 그동안 후손에 의한 제사를 지낼수 없었다 따라서 그동안 탕롱시장이 제사장을 대행했었다) 를 드리기까지 TV로 방영되었다


 


왕조가 무너진뒤 800년만의 멸족한줄 알았던 후손에 의한 최초의 제사…


 


그 제사를 드리는 종손은 물론 종친 전원이 모두 베트남어를 단 한마디도 못해 한국어로 제문을 읽고 옆에서 통역이 베트남어로 통역해서 올리는 .. 바라보던 베트남 국민들은 뜨거운 눈물을 흘린다. 감동한 직계 왕손 이창근씨는 대한민국에서의 사업을 정리하고 가족과 함께 베트남으로 귀화한다.


 


탕롱시 이 왕조의 사당 (우리의 종묘 개념이다)은 베트남의 1천동 주화에 새겨질 정도로 국민들이 신성하게 여긴다. 그리고 이 왕조와 관련하여 전해지는 오랜 전설이 있다.


 



"나무 숲이 사라지고 따오케 강물이 마를때 이 왕조가 다시 돌아온다"



 


이왕조 사당은 1019년 세워진 이래 역대황제 8분이 안장되어 있고 1952년 프랑스와의 전쟁으로 전소되었다가 1989년 재건되었다. 1952년 프랑스의 포격에서 보호하기위해 사당의 제기를 땅속에 묻고 피난했다가 훗날 정확한 위치를 찾지 못해 신성한 향로를 잃어 버렸다. 그러나 1995년 이곳을 찾은 26대 종손 이창근씨가 첫 제사를 지낸뒤 사당 땅속에 묻혀있던 우물에서 잃었던 그 향로가 발견되어 베트남의 오랜 전설이 실현되었다고 감격한다.


 


그 지방의 나무숲은 사라졌고 따오케 강이 흐르던 곳은 농토로 변했다.


 


[caption id="attachment_103334" align="aligncenter" width="500" caption="비운의 이용상 왕자의 직계 후손 이창근 씨 (출처 : 베트남 한국 교민 신문)"][/caption]


 


2002년에는 양국 예술가들이 합작하여 "이용상 오페라" 가 하노이에서 공연되었다. 지금도 그들은 매년 음력 3월 15일에는 베트남에 초대받아 탕롱시에서 이 왕조 제례를 드린다 그날이 바로 태조 이공온이 베트남 최초의 왕조인 이씨왕조를 세운날이다.


 


2007년 4월 11일 대한민국


 


고엽제전우회 총회에 참석한 박근혜 전 한나라당대표는 "애국한 여러분들이 그 대가로 고통받고 있다.. 안타깝다" 며 눈물을 글썽이며 격려사를 했다. 이에 군복차림으로 참석한 1000여명의 고엽제전우회 회원들의 감정이 폭발하면서 행사장은 눈물바다를 이뤘다.


 


박전대표가 "여러분들이 영웅…저도 여러분들의 눈물과 고통을 함께하는 전우가 되겠다" 라고 말할때 청중석은 와! 하는 함성과 흐느낌으로 뒤범벅되었다.


 


"나라가 여러분과 같은 고엽제 전우들조차 책임지지 못한다면 제대로 된 나라라고 할수없다 이제 조국이 여러분들에게 무엇을 할것인가를 생각해야 할때…고엽제 피해자들이 국가유공자 대우를 받고 전문적 치료를 받을수 있도록 앞장서겠다" 라고 말한다.


 


[caption id="attachment_103335" align="aligncenter" width="500" caption="사진 : 오마이뉴스 (펌)"][/caption]


 


"한번 공주는 영원한 공주!"


 


"나무숲이 사라지고 따오케 강물이 마르는 그날 이 왕조가 돌아온다" 라는 전설이 현실이 되어 800년 세월을 넘어 부활한 왕자님께 베트남 국민들이 감격하듯 33년의 세월을 간악한 역적무리의 마수에서 극적으로 벗어나 피신하셨던 공주님께서 대한민국 국민의 바람과 희망을 한몸에 안고 돌아 오셔서 악랄한 종북좌빨 때려 잡으며 대한민국 정통성을 확립했던 최초의 독립왕조의 역사적 시대가 다시 열리고 있다.


 


베트남 이왕조의 사당에서 잃어버린 신성한 향로를 60년만에 종손 이창근씨가 첫제사를 드리고 땅속에서 되찾아 베트남 국민들의 전설을 완성하듯 33년만에 궁정동 일대를 포클레인으로 파뒤집어 빈 양주병 빈 막걸리병을 찾아냄으로써 근면 검소하고 일밖에 모르던 공주님의 왕조가 과연 점입가경 화룡점정 부활하는가?


 


베트남전에서 희생한 피의 땀의 댓가로 받은 달러 대부분을 나라에 바쳐야 했던건 가난한 조국을 위해 어쩔수 없었다고 이해하더라도 수많은 참전전우들이 고엽제후유증으로 사망하거나 스스로 목숨을 끊는 생지옥같은 고통을 겪고 있을때 철저하게 외면했던 정부는 과연 누구 였는가?


 


베트남전에 참전했던 미군 전역 장병들이 고통에 시달리다 못해 고엽제 제조사들을 상대로 뉴욕주 지방법원에 제소함으로 소송이 시작된 싯점은 1978년 7월이었고 1979년 10월 26일 궁정동에서 총성이 울리기까지 공주는 이나라의 일인지하 만인지상으로 자타 공인 넘버 2 로 군림했다.


 


살아서 돌아오면 모든책임을 다하겠다던 정부가 철저히 당신들을 외면할때 공주님께서 고엽제전우들을 찾아 저렇게 감동적인 격려사와 후속조치로 "눈물과 고통" 을 함께 했다면 지금 저렇게 열광하는 당신들의 심정을 백번이라도 이해하겠다.


 


"달도 하나 해도 하나 그분도 하나"를 외치며 그분의 유지를 잇겠다고 나선 5공정부는 더 가관이었다. "의리를 목숨보다 더 중히 여기는 참군인의 표상" 이라던 전두환에게서 노태우로 권력이 넘어가던 무렵 어떤 찌라시는 그들 둘의 차이를 이렇게 써댔다.


 


"전두환은 길을 가다가 예전 부하가 노숙자신세가 된걸 보면 바로 입은 옷을 벗어 입혀주고 가진 돈을 전부 털어주는 스타일이고 노태우는 나중에 아무도 몰래 조용히 그를 찾아가 금일봉을 전해 주는 사람이다."


 


적선을 안할거면 쪽박이나 깨지 말라고 했다.


 


국가의 명령에 따라 목숨을 바치고 참혹한 병마에 시달리는 사람들을 법까지 어거지로 바꿔가며 보상과 치료를 거부하고 언론통제로 국민의 눈과 귀를 가리고 미국에서 벌어진 고엽제 재판마저 철저히 감춰 미군 호주군 뉴질랜드군까지 받는 보상금 한푼 받지 못하게 막아 버린게 국가와 참군인이자 의리의 화신이 할짓인가?


 


그나마 세상이 민주화 되고 언론의 재갈이 풀리면서 당신들의 참상이 보도되기 시작했고 부족하나마 지원법률이 통과되고 보상을 받기 시작했다.


 



"보상 보다도 참전에 대한 정의를 세워야 한다 친북좌파세력들이 우리들을 미국용병이라고 매도하는데 정부에서는 묵묵부답이다."



 


미국용병이라는 주장은 1995년 신한국당 김영삼정부의 김숙희 교육부 장관이 국방대학원의 특별강연에서 "베트남 전쟁은 기본적으로 우리 민족에게 직접적으로 무력의 위압이 부재한 상황에서 용병으로 참여한 전쟁일뿐"이라고 발언했다.


 


우리는 미국의 요청으로 베트남 참전을 했고 그 미국의 케네디와 존슨 행정부에서 국방장관을 지내며 미국의 베트남전 참전 결정을 했던 맥나마라가 "당시 미국 정부의 참전결정은 중대한 실수였다" 라고 회고록을 썼다.


 


94년 5월 베트남을 방문했던 한승주 외무장관이 당시 레 둑 안 베트남 대통령을 면담하는 자리에서 " 두 나라 사이에 상처가 있었다 " 라면서 간접적으로 베트남 참전에 대해 유감을 표명했다.


 


2009년 10월 이명박 대통령의 베트남 방문을 앞두고 베트남전 참전자들을 새로 국가유공자로 인정하기로한 "국가 유공자 예우 및 지원에 관한 법률 개정안" 의 내용중 "세계 평화 유지에 공헌한 월남전쟁 유공자와 고엽제 후유증 환자들을.." 이란 문구에 베트남 정부가 강력하게 반발하자 당시 유명환 외교부장관이 예정에 없던 베트남 방문을 하고 그들의 요구를 받아드려 법률 개정안에서 "월남 (베트남) 전쟁" 이라는 단어를 삭제하기로 합의한다.


 


대한민국의 국가 유공자예우 및 지원에 관한 법률을 만들면서 어디서 어떻게 활동한 공적에 관한 예우 및 지원이라는 문구조차 베트남 정부의 항의와 반대로 삭제하는 정권, 그어디에도 세계평화와 자유민주주의를 지키기위해 베트남전 참전했다는 대한민국 국군의 자긍심과 명예와 주권국가의 권위는 찾아 볼수 없고 수모와 치욕과 비굴만이 있을뿐이다. 94, 95, 그리고 2009년의 집권정부가 친북좌파정부인가?


 


역사는 반복된다. 그역사를 왜곡하고 그역사에서 교훈을 구하지 못하는 민족과 나라는 멸망한다. 나라를 팔아먹은 매국세력은 자손대대로 부귀영화누리고 나라를 위해 모든걸 바친 애국자는 자손대대로 거지가 되는 나라. 역사를 제대로 알아야한다고 친일인명사전을 발간함으로서 부끄러운 과거가 드러난 저들의 무차별 전방위 공격을 받는 나라.


 


국가가 모든 책임을 지겠다고 전쟁터로 보내놓고 보상과 치료는 시치미 떼고 고엽제 제조사로부터 합법적으로 보상받을 기회마저 막아 버렸던 저들이 이제와서 고엽제 전우들에게 악어의 눈물을 흘리고 다시 그 눈물에 속아 열광하는 나라.


 


[caption id="attachment_103336" align="aligncenter" width="520" caption="고엽제 전우회 회원들이 참여연대 앞에서 시위를 벌이고 있던 도중. (사진 : 프레시안-최형락)"][/caption]


 


[caption id="attachment_103337" align="aligncenter" width="520" caption="보닛에 가스통을 매단 고엽제 전우회 승합차 돌진. (사진 : 프레시안-최형락)"][/caption]


 


[caption id="attachment_103338" align="aligncenter" width="500" caption="사진 : 오마이 뉴스 (펌)"][/caption]


 


역사는 반복된다 돌고 돌아 다시 온다.


 


고엽제 천안함사건 미국소고기 광우병


 


천안함사건에 대해 참여연대가 유엔에 서신을 보낸것은 상식적으로 이해가 되지 않는 상황에 대한 그야말로 "상식수준의 의문과 문제제기"일뿐 "북한이 한짓이 아니다라고 주장하거나 특정 견해를 편것도 아니고 국내 여론과 국회에서의 이해와 동의가 불충분하다는 사실을 알린것" 일뿐이다.


 


그런 참여연대에 당신들은 가스통을 매달고 돌진한다.


 


과거 고엽제가 인체에 무해하다고 뿌렸고 지금 월령제한 없는 미국 소고기는 미국이 우리에게 준 선물이라면서 먼저 먹겠다고 약속했던 공무원은 먹지않고 전의경에게 먹인다.


 


그 전의경들이 고엽제전우회 당신들의 아들 또는 손자 일수도 있다.


 


그 고엽제의 끔찍한 고통을 받고 있다는 당신들이 지금 월령제한 없는 미국소고기의 위험을 경고한 MBC PD수첩을 박살내자고 가스통을 매달고 돌진한다.


 


먼훗날 수십 년 후의 대한민국


 


이번에는 어쩌면 광우병전우회가 출범할지도 모른다.


 


고엽제후유증은 신체적 고통이 있을뿐 상황판단 과 인지능력에는 아무 연관이 없다. 그러나 그런 고엽제전우회가 저런 도저히 이해할수없는 모습을 보인다.


 


하물며 뇌가 스폰지처럼 숭숭 뚫리는 치명적 뇌손상의 광우병전우회가 출범한다면…. 그들은 과연 어떤 행동을 할지…. 대한민국의 미래는 상상하기조차 끔찍하다.


 


 


kuru