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력
전기는 현대 사회에서 두 번째로 소비가 많은 에너지가 되었다. 물론 1위는 석유다. 에너지 밀도가 높고 운반과 보관이 용이한 석유가 아직은 가장 각광받는 에너지이다. 불과 1세기 만에 2위로 올라선 전기는 고급 에너지로 사랑을 받는다. 사용해도 흔적이 남지 않으며, 동력을 내는 건 말할 것도 없고 각종 전자제품을 작동시켜 우리 생활에 편리를 안겨주었다.
하지만 전기는 1차에너지원이 아니다. 자연에도 전기가 존재하지만 전기 에너지는 발생과 동시에 양극에서 음극으로 흘러 소멸한다. 구름의 발생 과정에서 전위차가 발생하여 일순간 공간을 뛰어넘어 흐를 때 번개가 된다. 엄청난 에너지이지만 그림의 떡일 뿐이다. 우리가 전기를 사용하기 위해서는 물의 위치에너지나 화석연료의 화학에너지를 연소시켜 발전을 하고, 이렇게 생긴 전기를 전선을 통해 운반하여 기계를 작동시켜야 한다. 하여 전기에너지는 에너지원이 아니라 최종에너지로 분류한다.
세계 최종에너지 소비 구성에서 1973년 9.4%이던 전력의 비중은 2014년 18.1%로 늘었다.
전기현상이 처음 언급된 건 기원전 2750년 무렵 고대 이집트에서 전기물고기를 ‘나일강의 뇌신’이라고 부른 것이다. 전기에 대해 처음으로 관찰기록을 남긴 이는 밀레토스의 철학자 탈레스다. 탈레스는 기원전 600년 경에 호박석을 고양이 털로 문지르면 깃털 같은 가벼운 물체를 끌어당기는 현상을 보고 호박석이 자성을 띠는 것으로 보았다. 오늘날에는 자기와 전기 사이의 관계가 모두 밝혀졌지만 고조선 시대에 이런 생각을 한 건 대단한 일이다.
산업혁명으로 과학기술이 빠르게 발전하던 16세기 말 영국의 윌리엄 길버트는 자석에 대한 연구를 통해 호박과 자철석의 인력이 다르다는 것을 밝히고, 호박의 정전기 효과에 엘렉트리쿠스(electricus ; 호박의)라는 용어를 붙였다. 18세기 말 미국의 벤저민 프랭클린은 연을 띄워 번개의 전기적 성질을 증명하였고, 프랑스의 공학자 쿨롱은 전하를 띤 두 물체 사이에 작용하는 전기력의 크기에 관한 법칙을 발견했다. 1800년 이탈리아의 물리학자 알레산드로 볼타는 두 종류의 금속판 사이에 소금물을 적신 헝겊을 끼운 것을 여려 겹으로 쌓아 최초의 화학전지를 만들었다.
19세기 초 덴마크의 외르스테드와 프랑스의 앙페르는 전기 현상과 자기 현상이 사실 같은 것이라는 전자기 개념의 단초를 만들고, 1821년 영국의 마이클 패러데이가 전동기의 원형인 전자기 회전장치를 발명하였다. 마침내 1862년 제임스 멕스웰은 전기와 자기, 그리고 빛을 하나로 통합하여 전자기학을 정립하였다.
전자기학의 발전은 기술로 이어져 독일의 지멘스는 1866년 전자석을 사용한 대형발전기를 완성하여 전기를 에너지원으로 사용할 수 있는 토대를 만든다. 이어 벨기에의 그람은 1870년 고리형 코일의 발전기를, 독일의 알테네크는 1873년에 드럼형 코일의 발전기를 발명했다. 이제 전기는 일시적인 자연 현상에서 인위적으로 만들어 낼 수 있는 상시적인 에너지가 되었다.
1879년 백열전구를 발명한 미국의 에디슨은 1882년 뉴욕시에 최초의 대규모 화력발전소(증기력)를 건설하고, 발전소에서 말단의 전등까지 110V 직류 송전 계통을 구축하여 전력의 상업화에 성공하였다. 이어 니콜라 테슬라가 교류발전기를 개발하고 웨스팅하우스는 교류 송전 방식을 실현했다. 때마침 1894년 독일의 루돌프 디젤이 개발한 디젤 엔진은 소형 발전의 총아가 되었다. 전기는 석유와 함께 2차 산업혁명을 불러왔다. 삼상 교류 전동기는 산업 현장에 혁명적인 변화를 가져왔으며, 전기 통신의 발전은 정보의 이동을 용이하게 하고 지구촌 시대를 열었다.
이런 전기가 우리나라에 들어온 것은 어느 문물보다도 빨랐다. 에디슨이 백열전구를 발명한 지 불과 7년 뒤인 1887년, 바로 그 에디슨의 백촉광 아크등 2개가 경복궁을 밝혔다. 에디슨이 뉴욕시에 발전소를 건설하고 전선망을 구축하던 1882년은 한미통상협정이 체결된 해이기도 하다. 그 해 8월 미국을 방문한 보빙사절단은 에디슨 전등회사와 계약을 체결하고 왔다. 1886년엔 에디슨전기회사의 윌리엄 맥케이가 내한하여 건청궁 뒤편 향원정 부근에 3kW급 증기발전기 2대를 설치하였다.
1887년 경복궁을 밝힌 우리나라 최초의 전등. 에디슨 전등회사에서 설치했다.
왕실이 거금을 들여 미국의 문물을 들여오는데 적극적이었던 건 무서운 기세로 한반도를 압박해오는 일본을 견제해 줄 또 다른 강대국을 향한 구애가 작용한 것으로 보인다. 허나 어찌 하랴, 일본과 손을 잡고 러시아를 견제하고자 하는 미국 대통령 테오도어 루스벨트는 1905년 미국의 육군성장관 윌리엄 태프트를 보내 일본 수상 카쓰라 타로와 밀약을 맺는다. 미국의 필리핀 지배를 확인하는 대신 일본의 대한제국에 대한 종주권을 인정한다는...
고종은 1898년 황실기업인 한성전기회사를 설립하고 미국인 콜브란과 전차건설 도급계약을, 완공 후엔 전차사업 운영계약을 체결하였다. 그 해 말 한성전기는 서대문에서 홍릉을 잇는 궤도와 전선로를 완공하고 지금의 동대문종합시장 안에 75kW 용량의 발전소를 설치했다. 홍릉은 일인들에게 시해된 민비를 안장한 곳으로 고종은 이곳까지 편하게 다닐 수 있기를 원했다. 마침내 1899년 5월4일 객차 8대와 국왕 전용 전차 1대를 갖춘 한성전기가 전차 시운전을 하던 날, 종로는 정부의 고관과 장안의 남녀노소가 몰려들어 북새통을 이루었다. 동양에서는 일본 교토에 이어 두 번째 전차의 운행이었다.
그러나 시운전을 마치고 5월 20일 본격 운행을 시작한 한양의 전차는 1주일 만에 시련을 겪는다. 5월26일 파고다공원 앞에서 어린이를 치어 사망케 하는 사고가 발생하자 인근의 시민들이 전차를 세워 불태우고 일본인 운전수를 끌어내 폭행하였다. 가뭄과 고물가로 인심이 흉흉하던 차에 백성들은 낯선 신 문물을 제물로 삼았다. 안전조치 강화를 요구하는 일인 직원들이 철수하자 콜브란 측은 미국에서 실무진을 데려와 8월10일 운행을 재개하였다.
1899년 5월 26일 어린이 사망사고로 운행 1주일만에 파괴된 종로의 전차
1899년 12월엔 종로에서 용산 전차노선을 개설하고, 이듬해 4월엔 밤 10시까지 운행 시간을 연장하면서 종로 정류장과 매표소에 가로등 3개를 설치하였다. 이 가로등이 민간에는 첫 선을 보인 전기등이다. 1901년 4월에는 동대문발전소를 증설하고 배전설비를 가설하여 경운궁(덕수궁)과 진고개의 일본인 상가에 600개의 전등을 보급하였다.
그런데 황실의 재정난으로 한성전기가 중도금과 잔금을 제때에 치르지 못하자 콜브란 측은 해당 설비와 재산을 신탁 받고 부채 상환 시까지 운영권을 갖기로 하였다. 부채 상환을 연기해준 미국은 각종 이권 확보에 나섰다. 한성전기회사의 전차 및 전등 사업을 꾸준히 확장하는 한편, 송도까지 경편철도 부설과 양주군 금곡까지 황실도로 건설, 청량리선의 양주군 덕소까지 연장, 상수도 설비 부설 사업권, 각종 황실 소요 물품 조달은 물론 은행설립권까지 확보하였다.
그러나 태평양 너머 미국의 의욕적인 한국 진출은 현해탄만 건너면 되는 일본의 야욕을 당할 수 없었다. 일본은 1901년 9월 부산전기주식회사를 설립하여 조선의 전기사업에 뛰어들었다. 러일전쟁의 승리로 한반도에서 주도권을 잡은 일본은 1905년 인천전기주식회사를 세워 100kW 직류발전기 2대를 설치하였다. 1908년에는 일한와사(가스)주식회사가 동경에서 설립되었다. 조선통감부 부통감 소네 아라스케의 아들 소네 간지의 주도로 동경와사주식회사를 참여시킨 일한와사는 전기를 선점한 한성전기를 피해 가스를 내세워 서울에 진출한 것이다.
철도공사 현장의 보스윅과 한성전기 간부들
한편 조선 황실은 1904년 콜브란과 보스윅이 한성전기의 공인 소유자임을 인정하고 일화 75만엔을 제공하는 한편 새로 설립할 한미전기의 운영권자임을 약속하였다. 전기사업보다는 각종 이권에 열심인 콜브란 측에게 치욕적이라 할 만큼 양보를 한 이유는 러일전쟁의 와중에 미국을 붙들어두려는 안타까운 몸짓이었다. 콜브란 측은 한성전기 일체의 재산을 담보로 엠파이어트러스트 사에게서 100만 달러를 차입하는 한편, 상호를 한미전기로 바꾸고 본사도 미국 코네티컷 주 세이브로크 시로 옮겼다. 사업 운영보다는 매수자 물색에 열중하던 콜브란 측은 조선의 외교권이 일본으로 넘어가자 통감부의 조정으로 1909년 6월 일한와사주식회사에 매각하였다. 한국 경제사에서 최초의 먹튀라고나 할까?
1910년 한일병탄으로 조선반도의 식민지 지배를 본격화한 일본은 지역별로 전기사업체를 허가하였다. 1920년까지 대전·목포·평양전기 등 24개의 회사가 설립되었는데 이 중 민족자본이랄 건 1917년에 문을 연 개성전기주식회사 뿐이었다. 한성전기를 삼킨 일한와사는 1915년 이름에서 가스(瓦斯)를 떼고 경성전기주식회사로 이름을 바꾸었다.
본래 콜브란이 지은 한성전기 사옥은 일한와사로 넘어간 뒤 1915년 경성전기가 되었다.
1920년대에는 안주·울산·천안 등 50개의 전기사업체가 신설되었다. 1931년까지를 도시배전시대라 하는데 일인 거주가 늘어난 도시를 중심으로 전기사업체가 설립되어 전기 보급에 나서는 시기였다. 발전은 주로 석탄화력에 의존했으며 1923년에는 강원도 중대리에서 서울 간 166.9km의 66kV 송전선이 완공되었다. 전력 보급이 늘어나면서 비싼 전기요금의 인하를 둘러싸고 소비자와 전기회사 간에 대립이 격화하면서 전력사업 공영론이 일어나 1927년에 평양전기회사의 평양부 직영이 실현되기도 하였다. 서울과 부산에서 일어난 소비자 운동은 1931년 12월 조선총독부의 전력통제계획으로 해소된다.
전력 수요가 늘어나면서 대규모 수력발전에 대한 요구도 커졌다. 수력발전소는 1905년 미국인이 경영하는 평북 운산광산에 600kW의 자가용 수력발전소를 설치한 것이 최초이다. 조선총독부는 1911~1914년 제1차 수력 조사, 1922~1929년 제2차 수력 조사를 통해 총 150개 지점에 최대 220여만kW의 자원을 파악하였다. 1920년대 전국의 도시를 중심으로 전기보급이 확대되면서 1932년 조선수력전기주식회사의 부전강수력발전소(20만kW)와 남조선수력전기주식회사의 운암발전소(5120kW)가 문을 열었다. 운암발전소는 소형이지만 드물게 남한 지역(정읍)에 유역변경식으로 건설되었다.
압록강 지류인 부전강 상류에 댐을 만들고 고원을 넘어 함흥쪽으로 흘려보내 발전을 한 부전강수력발전소.
일인 자본가 노꾸지 시다가우는 이 전기로 흥남질소비료공장 등 일대 노구찌 계열의 공장을 돌렸다.
1930년 초 전력 보급이 확대되고 전국적으로 전기회사가 난립하면서 조선총독부는 전기사업에 대한 통제에 들어간다. 1931년 12월 총독부는 직속기관인 조선전기사업조사회의 건의를 받아 발전 및 송전망 계획과 전력사업의 기업 형태, 배전통제에 관한 전력통제계획을 수립하여 시행하였다. 1932년 4월에 공고된 발전 및 송전망 계획을 보면 전체 수력발전 개발 목표를 담은 ‘예정 발전계획 및 송전계획’과 그 중 1940년까지 개발할 것을 목표로 하는 ‘발전계획 및 송전계획’으로 구체화하였다.
또한 발전은 원칙적으로 민영으로 개발하고, 송전은 송전망의 유기적 운영을 위해 국영으로 하며, 배전은 전국을 수 개의 배전구역으로 나누어 구역 내의 기존 군소사업을 통합하여 민영으로 하기로 하였다. 이에 따라 1934년 4월 조선송전주식회사가 설립되었는데, 총독부의 예산부족으로 당초 공영화 계획을 취소하고 발전회사와 배전회사가 공동으로 출자케 하였다. 배전 부문은 5년 동안 전국을 4개 지역으로 나누어 54개의 배전회사를 통폐합하였다. 중부지방은 기존의 경성전기주식회사가 매수하고, 여타 지역은 지역 군소업체의 합병으로 남선합동전기주식회사(남부지방), 서선합동전기주식회사(북서부지방), 북선합동전기주식회사(북동부지방)를 설립하였다.
1차 통제 기간 동안 발전 부문에서는 장진강수력발전소(334,300kW)와 허천강수전(333,800kW), 부령수전(28,640kW, 성천강), 압록강수전 제1기공사(계획 70만kW 중 30만kW), 영월화력발전소(10만kW) 등이 준공되고 청평·화천·칠보(섬진강)수전이 착공되었다. 송전 설비는 1935년 10월 장진강 제2발전소와 평양 사이에 154kV 200km를 완공하고, 평양-서울 간 154kV 200km와 영월-대구 간 154kV 170km, 상주-대전 간 154kV 65km의 송전선이 1937년에 준공되었다. 1941년 6월에는 허천강발전소에서 청진과 나남에 이르는 동양 최대의 220kV 송전선, 9월에는 수풍발전소에서 다사도, 평양, 진남포를 연결하는 220kV 송전선이 만들어졌다.
압록강의 수풍발전소는 당시 동양 최대 발전소였다.
1937년 7월 발발한 중일전쟁은 1941년 12월 태평양전쟁으로 확대되고 일제는 조선반도의 자원동원에 대해 고삐를 죄었다. 사전에 조선임시전력조사회의 자문을 거쳐 ‘전력국가관리실시요강’을 마련한 총독부는 1943년 4월 ‘조선전력관리령’을 시행하였다. 조선전력관리령은 나뉘어져 있는 발전과 송전부문을 통합하고 전력수급과 전기요금 결정 등 일체의 전력관리업무를 총독부의 지시와 조정에 따르도록 하였다. 이에 따라 1943년 7월 조선전업주식회사를 설립하여 발전과 송전 부문을 장악하게 하고 별도로 존치한 조선압록강수력발전㈜도 관리령에 의한 일원적 운영에 편입하였다.
8·15광복 직전까지 일제 하에서 건설된 발전설비용량은 총 172만2,695kW로 이 중 대부분은 수력발전설비(158만6,195kW)이고 화력발전시설(13만6,500kW)은 8%에 불과했다. 당시 전력 공급의 42%를 차지한 압록강의 수풍발전소는 발전용량이 60만kW로 명실상부 동양 최대였다. 일제의 이러한 전력산업 투자는 ‘식민지 근대화론’을 주장하는 얼간이들에겐 소중한 ‘팩트’이다. 그러나 일제가 발전소를 세우고 송전선을 깐 첫 번째 이유가 조선반도의 재화를 수탈하고 조선반도에 진주한 일인들의 생활 편의를 위한 것임엔 변함이 없다.
해방과 이어진 분단으로 남한은 심각한 에너지난을 겪었다. 대륙 침략을 위한 병참기지로서 일제의 조선반도 경략은 북동부와 북서부 해안 지역에 중화학공업단지를 설치하고 동력원으로서 풍부한 북부의 수력발전 개발에 집중하였다. 그 결과 해방 당시 전국의 발전시설 중 남한에 위치한 건 수력 62,240kW와 화력 136,500kW를 합쳐 전체의 11.5%에 불과했다. 게다가 화력발전시설의 노후화로 실제 발전량은 겨우 전체의 4%였다.
해방 직후 전력수요는 생산공장의 운휴로 전등과 전열이 대부분이었으며, 38선을 경계로 미소가 양분을 했지만 38선 이북 지역의 발전소에서 이남 지역으로 송전이 이루어졌다. 남측은 조선전업의 서울선(평양-수색)과 한강선(화천-부평), 경성전기의 왕십리선(중대리-왕십리)을 통해 북한으로부터 5만kW 내외를 수전하여 총 6만kW 정도를 공급하였다. 1946년에는 당인리와 영월, 부산의 화력발전소를 수리하여 자체 발전과 북한으로부터의 수전 합쳐 87,000kW를 공급하기에 이른다.
1941년 건설된 영월화력발전소 제1호기는 해방 후 남한의 주요 발전소였다.
그러나 남북간에 수전요금 지불 문제에 합의를 하지 못하면서 북측은 대남 송전량을 임의로 조절·제한하는 일이 잦았다. 이에 미군정청은 1947년 6월 군정청 상무부장 오정수와 조선전업 부사장 김은석 등을 평양에 보내 소련 군정당국과 전력공급료 지불에 관한 협정을 체결하였다. 이후 두 차례에 걸친 전력대금 지불에 관한 남북전력 협상이 실패로 돌아갔으나 북측은 계속 송전을 해주었다. 1947년 11월에는 남한에서 자체 발전한 양과 북한에서 수전한 전력이 평균 112,507kW에 달하여 해방 이전 수준을 회복하기에 이른다.
하지만 유엔한국임시위원단이 1948년 5월10일 남한 단독 선거를 통해 정부 수립에 나서자 상황이 돌변했다. 북조선인민위원회 김책 부위원장은 그날 밤 평양방송을 통해 “미군사령부는 자기의 대표가 서명한 동 협정을 충실히 하지 않고 전력대가 완납기일이 이미 10개월이 지난 1948년 4월1일까지 협정대가의 15.6%밖에 지불하지 않았으며… 1947년 6월1일 이후에 현재까지의 전력공급에 대하여는 결정까지 체결하지 않으려고 하고 있다”(동아일보 1948년 5월12일자)며 “남조선 전력문제에 관하여 조선인끼리 협약을 체결하기 위하여 오는 5월14일까지… 남조선 조선인 대표를 북조선 평양시에 파견할 것을 제안한다. … 불응할 시에는 북조선인민위원회는 본의는 아니나 남조선에 대한 전력공급을 결정적으로 중단할 수밖에 없다”고 엄포를 놓았다.
이를 접한 남측의 전력당국자들은 최악의 상황을 막기 위해 북측과 접촉하고 싶었지만 결정은 미군정청 하지 중장의 몫이었다. 이미 이전부터 소련 군정당국은 미군정청에 북조선인민위원회와 전력 문제를 협의할 것을 요구하였다. 이에 대해 하지 중장은 1948년 4월27일 북조선 소련군사령관 코로트코프 장군에게 발송한 편지에서 “인민위원회를 북조선 정부로 인정하지 않으며 그와 교섭할 의향도 없다”고 밝혔음을 공개하였다.(경향신문 1948년 5월3일자)
미군정청 오정수 상무부장은 5월13일 오후 3시 반 조선전업사로부터 북조선의 전화 통지를 전달받고서야 북조선인민위원회 산업국장 이문환과 통화하였다. 북측은 5월14일 오전 12까지 조선인 대표의 평양 파견을 요구하였고 오 상무부장은 밤새 미군측을 설득하여 일단 회담에 응하기로 하였다고 한다. 그러나 남측 조선인 대표단의 평양 방문을 알리고자 5월14일 오전 8시부터 9시까지 북조선측과 전화하려 했으나 고압선 전화는 이미 절단되어 조선전업사의 전용전화를 이용해 겨우 북측과 연결된 것이 오전 10시. 그나마 북측 수화자 지점과 인민위원회의 거리가 5~6km 떨어져 있어 통화를 기다리는 중 정오가 되자 즉시 송전이 중단되었다는 게 오 상무부장의 설명이다.(경향신문 1948년 5월15일자)
5월10일 밤 평양방송을 듣고도 5월13일 북측의 전화를 받기 전까지 미군정청 상무부는 무엇을 했을까? 오정수 상무부장의 사후 설명으로 보건대 군정청 조선인 담당자들은 어떻게든 대금을 지불하고 수전하는 방안을 찾은 듯하지만 조선인끼리의 협의를 인정치 않은 미군측은 이에 반대하여 대응이 늦어진 것으로 보인다. 북측은 남한의 단독 선거가 치러진 마당에 이제까지 대금 납부 지연에도 불구하고 유지했던 송전에 대해 단호한 조치를 취한 것이고...
북측의 대남 송전 중단은 남한측의 전력난을 심화시켰고 남한 주민들의 공분을 샀다. 남한은 계획 배전과 윤전제(격일제, 3분제)를 실시했으며, 당시 언론엔 “만주에까지 배전하는 잉여의 북조선 전력 – 동족 간에 단전이 웬 말?”이라는 제목이 달렸다. 이런 동족간의 배반감은 21세기에도 반복된다. 서로 입장이 바뀐채로. 바로 2010년 남북교역을 중단한 5.24조치와 2016년 2월10일 개성공단 폐쇄 조치이다.
북한측이 대남 송전을 중단하기 전인 1948년 2월, 미군정청은 남한의 전력 부족에 대응하기 위해 발전함 자코나 호(2만kW)를 부산에 도입했다. 5월초에는 인천에 발전함 일렉트라 호(6,900kW)를 도입하여 수리했다. 그러나 단전에 따른 부족량을 메우기에는 역부족이었다.
발전함 레지스턴스호. 미군을 통해 들여온 발전함은 해방과 전쟁 시기 전력 공급의 주축이었다.
1948년 8월15일 출범한 이승만 남한 정부는 만성적인 전력 부족에 대해 긴급한 조치를 취하지 않을 수 없었다. 1949년 5월 이승만은 특별지시를 내려 발전소 운영을 일원화하여 당인리화전(경성전기)과 부산화전(남선전기), 보성강수전(농림부), 영월화전(상공부)을 조선전업으로 이관하였다. 당시 총 발전설비 용량은 231,144kW였다.
그러나 1950년 한국전쟁은 전력난을 최악의 수준으로 몰아갔다. 많은 사람들이 죽고 시설이 파괴된 전쟁에서 전력시설도 예외일 수 없었다. 목포중유발전소와 발전함 일렉트라호가 전파되는 등 발전설비와 송배전 시설이 파괴되어 평균 공급 전력이 전쟁 발발 전인 5월 73,557kW에서 8월 11,333kW로 급감했다. 전쟁 중 이승만 정부는 미국과 한미합동전력위원회를 구성하였는데, 미국에서 긴급 원조한 6척의 발전함과 자코나 호가 1951년 전체 발전량의 56%, 1952년에는 36%를 담당해주었다. 그나마 38 이북에 있는 화천수전(54,000kW)을 남한에 귀속한 것이 한국전쟁의 수확이라면 수확이었다.
1957년 당인리화력발전소의 모습.
당시 연료는 석탄이었으나 지금은 가스복합화력발전소로 유사시 정부 주요시설에 비상전력을 공급하는 역할을 한다.
한미합동전력위원회는 10만kW의 화력발전소 건설을 결정하고, 1954년 미국 대외활동본부(FOA)의 원조자금 3천만 달러와 원화 1억 3천만원으로 당인리 3호기(25,000kW)와 마산화전(5만kW), 삼척화전 1호기(25,000kW)를 착공하여 1956년에 완공하였다. 국제연합한국부흥단(UNKRA)의 원조자금으로는 괴산수전(2,600kW)과 도서의 발전설비(1,200kW)를 건설했다. 1957년 2월에 완공한 괴산수전은 국내 기술진에 의해 최초로 건설한 소수력발전소이다. 그 해 11월 화천수전의 전면적인 개·보수와 제3호기(25,000kW)의 증설로 1958년에는 연평균 172,000kW를 확보하여 일시적이나마 전력난이 완화되었다. 그러나 지속적인 신규개발이 이루어지지 않아 전력난은 되풀이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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