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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4. 02. 07. 금요일

Ath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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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는 농업의 발견이 적절한 영양 공급을 보장하고, 따라서 엄청난 인구증가를 가능하게 함으로써 인간 역사의 도정에 급격한 변화를 가져왔다고 생각해 왔다. 그러나 농업의 발견은 전혀 다른 이유로 결정적인 결과를 만들어 냈다. ··· 농업은 인간에게 유기체인 생명의 근본적인 일체성을 가르쳤다. 또 그러한 자각으로부터 여성과 들판사이, 성행위와 파종 사이의 더욱 단순한 유추가 생겨났으며, 가장 발전된 지적 통합이 이루어졌다. 리듬으로서의 생명, 회귀로서의 죽음 등등. 이러한 통합은 인간의 발달에 필수적이었던 것으로, 오로지 농업의 발견 이후에만 가능했다.


미르체아 엘리아데 (Mirceca Eliade)-<비교종교학의 패턴>,1958




해롤드 맥기의 <음식과 요리>의 9장「씨앗들」 서문에 인용한 미르체아 엘리아데의 문장을 다시 인용함.


밥과 국.jpg



쌀.


그저 단순히 식량으로 이야기 되어질 수 없는 신비한 어떤 것입니다.


우리는 매일 밥을 먹습니다. 쌀밥을 먹는 아시아의 여러 민족들의 수가 대략 20억 명 이상일 테지요. 단순히 20억 명의 사람들이 한 끼마다 100알의 쌀을 먹는다고 가정할 때 하루 6000억 개의 쌀알이 사람을 살립니다. 6000억 개의 잉태한 생명의 희생으로 아시아의 사람들은 삶을 살아간다고 말해도 과장된 것은 아닐 것입니다.


1년 219조. 이 헤아릴 수 없는 숫자는 어디에서 생겨난 것일까요. 적어도 5000년간 매년 싹을 틔우고 자라나 이삭을 맺어 사람을 살렸고 지구가 멸망하지 않는 한 계속해서 그러할 것인데 어디에서 이 많은 잉태한 생명은 태어나고 또 태어나는 것일는지.


단순히 한 끼의 밥일 테지만 그 밥그릇 앞에서 때때로 왈칵 눈물이 쏟아질 것 같은 기분이 듭니다. 이것을 먹기 위해 살았고 이것을 먹어야 산다는, 논리도, 명제도 좆도 뭣도 아닌 그저 살아 있다는 서러움과 살게 되었다는 기쁨 앞에 무너져 내리는 것일 테죠. 이러한 이유로 밥상 앞에서 떠들지 말라고 했던 것이 이해되기도 합니다만 달리 생각하면 밥을 먹게 되어 죽지 않고 살게 된 것이 즐겁기도 할 테니 왁자지껄하게 밥을 먹는 것도 한 편으론 타당해 보입니다. 아마도 이 땅의 사람들은 잉태한 생명에 대한 미안한 마음이 더 컸던 모양입니다. 아무리 선한 의지로 삶을 살아도 인간이라는 생명체는 잉태한 생명을 먹고 살아가는, 붉은 피가 흐르는 짐승임을 잊지 말고 그 희생이 담긴 밥상 앞에서 겸손해 지라는 뜻일 테지요. 이러한 뜻을 이야기하는 어른이 밥상 앞에서 아이를 가르친답시고 시끄럽게 나무라고 혼내는 것은 이치에 맞지 않을 것입니다. 그 의미를 알리고 스스로 깨달을 때를 기다려야 할 것입니다.


밥은 쌀에 물을 부어 끓이는 음식입니다. 떡은 쌀가루에 물을 부어 반죽으로 만들어 찌는 음식이죠. 국은 여러 가지 재료에 물을 넣고 끓이는 음식입니다. 나물은 끓는 물에 채소를 데쳐 내 무치는 음식이고 찜은 끓는 물위에 재료를 올려 쪄 내는 음식입니다. 열을 가해 조리하는 한식의 대부분은 이렇게 습식조리법으로 만들어집니다. 한민족이 쌀밥에 열광했던 이유는 이러한 조리법에서 기인한 것으로 보여집니다. 어떤 식재료건 끓여먹기를 좋아했는데 여타 곡물들에 비해 쌀을 끓였을 때 가장 부드러운 맛을 느낄 수 있었던 것이죠.


한 선배는 어청도에서 유년시절을 보내다 중학생이 되어 군산으로 나오게 되었답니다. 어청도는 깎아 지르는 바위로 이루어진 섬이어서 쌀농사를 지을 땅이 별로 없습니다. 그래서 유년기엔 보리가 주식이었다고 합니다. 보리 8할에 쌀 1할 잡곡 1할을 넣은 밥을 먹고 살아가다 드넓은 평야를 자랑하는 군산시 대야면으로 이사 왔을 때 처음으로 쌀로만 지은 밥을 먹을 수 있었다더군요. 10년도 넘게 보리밥을 먹고 자랐으니 그 맛에 길들여졌을 만도 한데 하얀 쌀밥을 처음 먹던 순간을 지금도 잊지 못하겠다 말합니다. 너무나도 부드럽고 달달한 밥맛이 황홀해 ‘이것이 쌀밥이구나’ 생각했더랍니다. 섬에서 나고 자라 여전히 생선과 젓갈을 좋아하지만 보리밥만은 지금도 내키지 않는다니 밥을 지었을 때 쌀만한 것이 없다는 것을 단편적으로 보여주는 좋은 예지요.


이러하기 때문에 밥을 이야기 할 때 영양학적으로 접근하는 것은 무리가 있어 보입니다. 영양학적으로 본다면 현미나 잡곡밥이 백미보다 뛰어날 수 있지만 밥을 지어 먹는 생활습관으로 인해 결정된 백미에 대한 애착은 영양이 아닌 감성과 혓바닥이 이끌어낸 것이니까요. 현미에는 무기질, 비타민, 섬유질, 식물성지방 등이 풍부하게 들어 있다고 한들 거들떠도 보지 않았을 것입니다. 대신 무기질, 비타민, 섬유질, 식물성지방이 풍부한 반찬을 만들어 먹었지요.


한식은 밥을 먹기 위해 만들어진 식단입니다. 앞에서 이야기한 된장, 간장, 김치, 젓갈, 나물, 국 등은 밥의 파생상품입니다. 우리가 밥을 먹지 않고 쌀가루로 만든 빵을 구워 먹는 식습관으로 살아왔다면 반찬의 모양은 지금과는 달라졌을 것입니다. 화덕이 주요 조리 도구였을 테니 끓이는 음식보다 굽는 음식이 많았을 테고, 된장을 빵에 발라 먹는 방법을 찾았다거나 물기 없는 김치를 만들었을지도 모릅니다. 문화와 역사, 사람들의 품성도 달라졌을 것입니다.


사직단.jpg

사직단



조선은 농업을 근간으로 500년의 역사를 써내려간 농업국가입니다. 토목이나 전쟁으로 나라를 지켜냈던 것이 아니었죠. 그런 이유에서 ‘농자천하지대본’이란 개소리도 만들어 인민의 귀를 현혹시켰을 것입니다. 대한민국 헌법『제 1조 제 1 항 대한민국은 민주공화국이다. 제 2 항 대한민국의 주권은 국민에게 있고, 모든 권력은 국민으로부터 나온다.』는 말과 같은 말이지만 위정자들의 입에서 ‘농자천하지대본’이란 말이 진심으로 흘러나왔을 경우는 드물었을 것입니다. 국가의 세수를 농산물로 거둬들였으니 그것을 생산해 내는 백성들을 어르고 달래고 채찍질하는 말로 사용되었겠지요. 그렇게 거둬들이는 농산물 중 가장 중요했던 것이 쌀이었을 것입니다. 쌀은 불변의 가치를 지닌 화폐의 역할도 했기 때문에 쌀농사에 국가의 존망을 걸었을 것입니다.


경복궁을 바라보고 우측에는 종묘가 있고 좌측에는 사직이 있습니다. 종묘는 선대의 왕을 모시는 사당이고 사직은 땅의 신(社)과 곡식의 신(稷)에게 제를 올리는 제단입니다. 유교국가의 정신은 종묘에 있고 농업국가의 근간은 사직신에게 있다고 보았던 것이죠. 현재도 그 전통이 남아 5월에는 종묘대제가 열리고 10월에는 사직대제가 열립니다.


사직 외에도 국가에서 농업에 공을 들인 흔적은 곳곳에서 발견할 수 있습니다. 창경궁 안쪽에 보면 춘당지라는 연못이 있습니다. 춘당지는 본래 연못이 아닌 ‘대농포’라는 논이 있던 자리입니다. 왕이 백성에게 모범을 보인다며 직접 농사를 지었다는 논인데 왕이 직접 농사를 지었을지는 심히 의심스럽기는 합니다만 무튼 솔선수범하시었다더군요. 순종 때까지 대농포에서 농사를 지었지만 일제가 대농포를 파헤치고 연못을 만들어 지금에 이르렀다 합니다. 나라에서 뜻이 있다면 연못을 다시 메우고 논으로 만들어야하지 않겠나 생각해 봅니다.


춘당지.jpg

춘당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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선농단



창경궁의 대농포 말고도 제기동에 선농단이란 곳이 있습니다. 지금은 선농단 어린이공원 옆에 문화제로 남아있는데 왕이 농사짓던 밭이 있던 자리입니다. 왕께서 추분과 춘분에 친히 선농단에 올라 풍년을 기원하며 제사를 지내고 그 옆에 마련된 적전(籍田)에서 밭농사를 지었다 ‘카더라’더군요. 선농단에서 선농제를 지낼 때 소를 잡아 인근에 살고 있는 백성에게 맥이시었는데 그날 먹던 소고기국의 이름이 선농탕. 즉, 설렁탕의 어원으로 풀이됩니다.


아무리 바쁘고 귀찮고 짜증스러워도 농부코스프레는 반드시 실천해야만 했을 것입니다. 나라의 근간이 농업이었으니 말이죠. 우리 전임 가카께서 친히 삽질을 하시고 K-3 개머리판에 안구를 들이대는 것과 다를 바 없는 행위인 것이죠. 선농(先農). 백성들 앞에서 먼저 농사를 지어 보인다는 말인데 선삽(先鍤)과 선총(先銃)은 선농 코스프레정신을 계승한 유구한 역사의 찌꺼기다, 마, 그래 생각합니다.


이명박 m60.jpg



왕과 귀족들은 뜻하는 바가 있어 농부코스프레를 하고 농자천하지대본을 입버릇으로 달고 살았겠지만 실제로 그것이 삶이자 목숨인 백성들에게는 위정자들이 알지 못하는 절박한 심정으로 쌀을 대했을 것입니다. 농사를 지어 살아갔던 평민 집안 외가와 개좆망했어도 양반임네 하며 으스댔던 양반 집안 친가의 분위기를 비교해 보면 쌀에 대해 어떤 태도를 보였는지 극명하게 대비됩니다.


외가는 대대로 농사를 지으며 살아왔던 평민 집안이었습니다. 외할머니와 외할아버지는 매우 성실했고 유쾌했으며 허례허식이 없던 분들이었습니다. 그 품에서 나고 자란 외삼촌들과 이모들, 엄마는 성실함과 근면이 몸에 배어있습니다. 곳간이 가득차도 논과 밭에 떨어진 낱알, 콩알 하나를 허리 숙여 주어 담을 줄 알고 싹틔운 씨앗을 피해가며 조심스럽게 발을 디디는 것이 몸에 배어 있습니다. 그 싹이 자라 백배 천배의 결실을 안겨준다는 것을 누구보다 잘 알기 때문이겠죠.


친가는 좆망한 양반의 후손이었습니다. 좆망하고 4대에 이르렀음에도 양반의 자손임을 자랑으로 여겼습니다. 자랑거리로 삼는 것을 나무랄 것은 아니지만 노동을 천하게 여기는 태도는 굶어죽어도 버려지지 않았으니 나무라기보다는 쥐어 패도 시원찮을 일이지요. 엄마가 시집온 첫날 밥을 차려 먹이고 났더니 모두들 다시 누워 잠을 자더랍니다. 된장 간장 담을 단지 하나 변변찮은 것이 없는 집안의 사람들이 일은 하지 않고 다시 잠에 드는 모습이 매우 낯설어서 어이가 가출했나 싶었다더군요. 피죽도 못 먹는 집안에서 제사 때만 되면 빚을 내 제사상을 차리는 모습 또한 도저히 납득할 수 없었답니다.


“무신노메 지사는 그렇게도 많은 거여. 증조, 고조 하다 못해 5대조까지 지사를 지내고 나면 빚이 꼽새등 이라. 1년간 죽게 고생혀야 죽은 사람 좋은 일만 시킨거셔.”


나중에 아빠가 지관을 하고 소를 키워 살림이 나아졌을 무렵에도 엄마의 성실함은 칭송의 대상이 되지 못했습니다. 쌀밥 타령을 하고 쌀의 소중함을 자식들에게 역설했지만 정작 본인은 농사일을 매우 귀찮게 여겼습니다. 지금 와서 생각해 보면 귀찮게 여겼다기 보다는 가오가 떨어진다는 관념이 여전히 남아있었던 것으로 보여 집니다. 종종 엄마의 성실함을 칭송하는 말을 하긴 했지만 논에 나가 떨어진 나락을 주워 오고 마당에 떨어진 콩알을 주워 모으는 엄마의 모습을 마땅찮아 하는 모습들을 떠올려 보면 농부의 피와 양반의 피는 따로 있었던가 싶은 생각마저 들기도 합니다. 폐망하고 4대에 이른 양반의 후손도 이러한데 조선시대 당시 깊이 뜻을 세우지 않고 천박하게 양반구실을 했던 사람들이 농사와 쌀에 대해 얼마나 얕게 이해하고 있었을지 미루어 짐작이 가고도 남습니다. 이 시대의 자본가들이 노동과 노동자를 대하는 태도와 크게 다르지 않았을 테지요. 언제쯤 이 계급사회는 막을 내리게 될는지요. 갈수록 계급의 골은 깊어 가는 것처럼 보입니다.


아빠야 어쨌건 간에 엄마는 논과 밭에 코를 박고 살아냈습니다. 절기에 맞춰 농사를 지어 나갔고 모내기철이나 추수철에는 품앗이를 해주며 바쁜 나날들을 보냈습니다.


절기마다 따르는 이야기들은 대부분 벼농사와 관련된 이야기들입니다. 절기를 하나하나 짚어가며 그때마다 어떤 의미를 두었는지 간략하게 알아보겠습니다.


소설부터 대한까지 농한기에는 볏짚을 이용해 가마니를 짰습니다. 지금이야 가마니를 만들 일이 없으니 볏짚은 소먹이로만 이용되지만 가마니를 만들어야 했던 시절에는 겨울에 볏짚으로 가마니를 만들어 두었다가 보리와 벼를 추수 할 때 사용했다고 합니다. 아빠는 무슨 이유에서인지 모르겠지만 어린 나를 마당에 앉혀두고 가마니 짜는 방법과 짚신 만드는 방법을 가르쳤습니다. 한문과 서예는 백날 가르쳐 봐야 알아듣질 못하는 돌대가리지만 새끼줄을 꼬고 매듭을 맺고 연장을 이용하는 것은 곧잘 하니 쓸데는 없겠지만 가마니와 짚신 만드는 방법을 재미로 가르쳤던 모양입니다. 공부 가르치며 복장이 터지느니 이런 것에서라도 가르치는 재미를 느끼고 싶었을까요? 무튼, 지금도 가마니와 짚신을 짤 수 있습니다. 네;;;


대한이 지나 2월초 입춘이 되면 서서히 농사일을 준비합니다. 거름을 준비하고 농기구를 손질합니다. 우수가 되면 둑과 물고랑을 정비하고 논과 밭에 거름을 뿌립니다. 3월, 입춘이 되면 밭을 갈고 추위에 견딜만한 작물들을 파종하기 시작합니다. 4월, 청명과 곡우가 되었을 때 비로소 벼농사를 본격적으로 시작하게 됩니다. 볍씨를 가려 소독을 하고 발아를 시켜 모판에 옮겨 모를 키워냅니다. 벼는 추위에 약한 작물이어서 이 시기에 온도가 5도 이하로 내려가면 잎이 마르고 말라죽는 경우들이 발생합니다. 그래서 육묘시기의 밤에는 비닐을 덮어주고 낮에는 공기가 잘 통하도록 열어주는 일에 모든 신경을 집중해야 합니다. 이 시기에 연약한 모를 만들면 1년 농사를 망치고 마는 것이죠.


5월, 입하가 되면 경기이북지역에서는 모내기를 시작합니다. 추위가 일찍 찾아오는 강원도와 북한지역은 입하에 벼를 심어 서리가 오기 전에 추수를 마쳐야 하기 때문에 남부지방보다 미리 벼를 심고 미리 추수를 마치게 됩니다. 호남지역에선 보리와 밀이 익어가는 시기입니다. 산과들이 푸르게 물들고 울긋불긋 꽃피는 이 시기에 펼쳐지는 보리들판은 언제보아도 생경하고 독특한 아름다움을 전합니다.


보리밭.jpg



소만이 되면 남부지역에서도 조생종 벼를 심기 시작합니다. 보리를 베기 시작하고 논에 거름을 주고 물을 대 갈고 쎄레질을 하는 시기입니다. 가장 바쁜 시기가 찾아 왔습니다. 보리도 베야지, 논도 갈아야지, 모내기도 해야 하기 때문에 고양이 손이라도 빌리고 싶은 시기입니다. 그래서 이 시기에 품앗이를 했었습니다. 지금은 농업기술이 발달해 전 과정이 기계화 되었지만 20여 년 전까지만 해도 사람 손으로 대부분의 과정이 이루어졌기 때문에 품앗이는 필수적이었습니다. 참 철딱서니 없기는 했지만 엄마가 품앗이를 나가는 이 시기에 보름달빵을 먹을 수 있어서 좋았습니다. 새참으로 나눠준 보름달빵을 먹지 않고 품에 지니고 있다 저녁에 돌아와 저에게 내 주었습니다. 하루종일 품에 품고 있어서 보름달빵이 떡이 되어 있었지만 그래도 맛은 있었죠. 보름달빵.


쫌 웃기긴 하지만 요즘도 엄마는 어딜 다녀오시면 뭔가를 품에 품고 돌아오십니다. 묻지마 관광을 다녀오며 떡 한 조각을 꺼내 내 앞에 들이 민다거나 결혼식장에 다녀오며 휴지에 후라이드 치킨을 싸와서 내 앞에 들이밀기도 합니다. 풉 웃음이 나오지만 맛있게 먹습니다. 철 없던 고딩 때나 20대 초반엔 손사래를 치며 더러운 무엇쯤으로 여기던 시절도 있었습니다. 그놈이 지금 내 앞에 있다면 귀퉁방머리를 한 대 후려갈겼을 텐데.. .쯧. 그 재미로 평생을 사셨으니 그것이 무엇이건 맛있게 받아먹는 것이 키워준 사람에 대한 도리임을 뒤늦게야 깨달은 원숭이입니다.


6월초 망종이 되면 보리를 수확하고 벼를 심는 막바지 작업이 이어집니다. 망종(芒種)의 芒은 보리를 뜻하고 種은 볍씨를 뜻해서 보리를 거두고 벼를 심는 계절이란 뜻을 가지고 있습니다.


망종까지 모내기를 마치고 나면 단오입니다. 모내기 하느라 개고생 졸라 했으니 하루쯤 쉬어가는 것도 좋을 것입니다. 요즘 시골에선 모내기를 마치고 나면 묻지마 관광을 떠나십니다. 꽃구경도 하고 하루 거하게 먹고 노는 것으로 본다면 묻지마 관광도 단오에 견줄만 합니다. 버스에서 춤추는 것 좋아들 하셨는데 요즘은 어떠신지 모르겠습니다. 여전들 하시죠?^^


7월, 소서, 대서 무렵이 되면 김매기를 합니다. 풀도 뽑고 거름도 주는 시기죠. 기계화되기 전에는 개고생의 1번 선수였는데 지금은 제초제를 주고 기계로 비료를 뿌리니 달리 고생이랄 것도 없는 시기입니다.


8월이 되면 입추와 처서로 이어집니다. 음력으로 치면 7월 8월경인데 이 시기까지 농사를 지어주면 벼는 저 알아서 자라고 이삭을 맺고 쌀을 키워냅니다. 이 무렵을 어정 7월, 건들 8월이라고도 했습니다. 별 할 일 없이 어정거리고 건들거려서 그리 말 했던 것이겠죠. 이 무렵에 말복과 백중이 들어 있습니다. 여름내 잃었던 기운도 되찾고 가을에 필요한 힘을 기르기 위해 개, 돼지도 잡아 먹이고 몸보신도 시켰습니다. 입추에는 무와 배추의 씨앗을 밭에 뿌립니다. 이때부터 김장을 준비하는 것이죠.


9월에는 백로와 추분이 들어 있습니다. 이 무렵 추석이 들어있는데 늦은 처서 무렵부터 이른 백로 무렵에 조생종 벼를 수확하고 경기이북지역에선 벼 수확을 시작합니다. 이 때 수확한 벼로 햅쌀을 찧어 밥을 하고 떡을 만들어 추석을 보내게 됩니다.


추석이 지나고 10월이 되면 한로, 상강입니다. 서리가 오기 전에 모든 농작물을 거둬들여야겠지요. 황금들판이 펼쳐지고 하늘은 맑습니다. 모내기만큼 바쁜 시기지만 사람들의 표정이 지쳐 보이지 않는 것은 수확의 기쁨 때문이겠죠. 모두들 가장 열심히 일하고 가장 즐거워하는 시절입니다. 수확한 나락가마니를 트랙터에 싣고 그 위에 올라타 집으로 향하는 저녁 무렵은 어쩐지 끝내주는 기분이 듭니다. 한 해 동안 농사를 지으며 내가 한 일은 별로 없지만, 또한 그것이 내 것이라는 생각도 전혀 들지 않지만 나락가마니 위에 올라타면 둥실둥실 떠가는 기분이 들었습니다. 까칠한 엄마도, 썽질 드러운 아빠도 그날은 웃고 있었던 것 같구요.


벼논.jpg



벼를 베고 나면 볏짚을 묶어 짚눌을 쌓았습니다. 소도 먹이고 이런 저런 용도로 사용하기 위해서 썩지 않게 쌓아두는 것입니다. 짚을 거둬들이고 나면 땅을 갈아 북돋워주고 그 위에 보리를 뿌린 뒤 흙으로 덮어주면 한 해 논농사가 마무리 됩니다. 아직 남아있는 태양의 기운으로 보리가 싹을 틔우고 나면 겨울이 찾아올 테고 다시 내년을 기다릴 것입니다.


어느 시대나 벼농사는 이와 같은 방법으로 지어졌습니다. 쌀에 대한 애정도 변함없이 이어져왔지요. 그런데 어느 시점에선가부터 기형적인 벼농사가 이루어집니다. 그 시기는 일제의 산미증식계획이 본격적으로 진행되던 1920년대 중반부터입니다.




3. 산미증식계획에 의한 수탈


1920년대 일제의 조선 수탈정책은 산미증식계획(産米增殖計劃)으로 대표된다. 일본 자본주의는 세계 제1차대전으로 급성장하게 되었는데, 이는 도시인구의 급증을 가져왔다. 한편 농촌에 있어서의 생산관계의 모순은 충분한 쌀의 공급을 막아 1918년에는 식량부족으로 인한, 이른바 쌀소동(미소동(米騷動)) 이라는 사회소요를 경험했다. 값싼 쌀의 공급은 저임금에 기초를 두고 있었던 일본자본주의의 존립을 위해서도 필수적인 것이었다. 국내 생산을 보충하기 위한 외국산 쌀의 수입은 가뜩이나 취약한 무역수지를 압박하는 것이었다. 일제는 그 해결책을 식민지에서의 쌀의 증산 및 수탈에서 찾아냈는데, 그것이 바로 '산미증식계획'이었다. 이것은 당시에 3·1운동으로 상징되는 전민족적 저항을 분쇄할 수 있는 친일적 지주층의 양성 방안도 될 수 있는 것이었다. 이 계획은 1920년 ∼1925년에 1차적으로 시행되었지만 일본 정부가 일본 국내에서의 쌀 의 증산에 주력함으로써 조선총독부가 낮은 이자의 사업자금을 얻을 수 없어 성공하지 못하 였다. 그러나 일본 국내에서의 개간사업이 여의치 못하고 외국산 쌀의 수입이 늘어나 무역 수지의 불균형을 확대시키자 결국 식민지에서의 쌀의 증산에서 그 해결 방안을 찾게 되고, 이에 따라 조선에서의 사업도 1926년부터 다시 본격적으로 추진되었다. 여기에는 약 3억 2,533만원의 사업자금이 배당되었는데, 이중 3억 327만원(약 93%)이 낮 은 이자의 국고 보조금 및 정부알선자금이었다. 이는 일본 자본주의가 세계 1차 대전 동안 자본을 축적하여 조선에 투자할 여유가 생긴 것을 보여주는 동시에 이제 이들이 식민지 초 과이윤을 찾아 조선의 농업부문으로 침투하기 시작하는 것을 의미한다.


산미증식계획에서 일제가 강조한 것은 수리시설의 확충을 통한 토지의 개량과 벼 품종 개 량 및 비료 증가에 의한 농사개량이었다. 이 중에서 특히 토지개량이 강조되어 전체 자금의 90%에 가까운 2억 8천500만원 가량이 여기에 할당되었다. 1920년 당시 논의 총면적 은 약 140만 정보였는데, 이중 85.7%인 120만 정보가 천수답이었고, 이것이 쌀의 증산에 결 정적 장애가 되고 있었기 때문이다. 이는 경비를 절약할 수 있는 방법 및 품종개량이 강조 되던 1910년대의 농업개량 정책과는 차이가 나는 것이었다. 이같이 막대한 자금은 동척과 식산은행에 낮은 이자율(평균 7푼4리. 시장이자율은 9푼5리∼1할1푼)로 대부되고, 이들은 여기에 다시 1% 내외의 이자를 덧붙여 개인이나 수리조합 에 빌려주었다. 그러나 이러한 저리자금의 혜택은 10정보 미만의 개간, 30정보 미만의 관개 공사, 공사비 5,000만원 미만의 공사에는 허용되지 않았다. 결국 일본인 대지주 및 약간의 조선인 지주에게만 혜택이 돌아간 것을 의미한다.


산미증식계획에서 강조되었던 토지개량 사업과 관련하여서는 많은 수리조합이 설립되었 다. 수리조합은 반관제(半官製) 조직으로서 관개사업을 담당하였는데, 총면적의 2/3에 해당 하는 토지 소유자의 동의가 있으면 설립할 수 있었다. 따라서 몇 사람의 대지주의 일방적인 결정에 의해 조합이 결성될 수 있었으며, 일단 조합의 결성이 결정되면 비록 새로운 수리시 설을 필요로 하지 않는 사람도 조합에 강제로 편입되어 조합비를 물어야 했다. 이러한 대지 주 중에는 일본인들이 많았는데, 이들은 평야지대의 황무지나 척박한 땅을 사서 자기에게 유리하게 물길을 냈기 때문에, 수원(水源)에 가까운 계곡의 비옥한 논의 주인은 피해 를 보기 일쑤였다. 그밖에 조합의 운용도 대지주 중심으로 되어 있어서 강제로 편입된 많은 조선인 중소지주, 자작농은 불이익을 당해야 했다. 조합의 수는 1920년 8개소에서 1931년 174개소로 늘어났으며, 수리조합에 들어간 토지 면적은 같은 기간 8.746정보로부터 188,088 정보로 늘어났다.


수리조합 안의 토지는 수리시설을 이용한 대가로 수세, 즉 수리조합비를 내야 했는데, 이것은 수확의 상황이나 쌀값의 변동과 관계없이 높게 결정된 고정액인 경우가 많았다. 조합 에 들어간 논의 경우 흉년이 들었다든가 쌀값이 폭락할 경우, 중소지주나 자작농들이 조합비를 물지 못해 일인 지주들에게 토지를 값싸게 파는 일이 많아졌다. 그리하여 수리조합이 설립된 일부 지역의 논의 값이 오히려 전보다 떨어지는 이상한 현상이 나타나기도 했다. < 표3-1>은 이러한 현상이 특히 심했던 지역의 사정을 잘 보여 주고 있다.


<표 3-1> 수리조합 구역 안 토지가격의 변화

                                                                                       (단위:단보당/원(円))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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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전: 조선총독부, 1930,《토지개량사업요람》 (1929), 120∼131면.



한편 논리적으로 볼 때 수리시설 등의 개선으로 면적당 소출량이 늘어나면 소작인들의 손에도 보다 많은 몫이 돌아와야 할 것이다. 그러나 지주들은 이를 핑계로 소작료를 올리고, 또 자기가 부담하기로 되어 있는 조합비를 소작인에게 전가하였다. 또 일본 개량종을 제대로 재배하기 위해서는 금비를 쓰는 것이 필수적이었는데, 지주들은 그 비용을 소작인에게 전가했다. 그리하여 수리조합 안에 있는 논의 소작료율은 5할 이상 6할 전후에 이르렀다 한다. 따라서 수리시설 개선에서 온 생산량의 증가는 거의 대부분 고율 소작료에 흡수되었다고 보는 것이 정확하다. 뿐만 아니라 농민들의 궁핍과 불리한 시장 구조는 조그만 이익도 농민들 손에 남겨 두지 않았다. 즉 대개의 농가에서는 빚을 갚거나 세금을 내기 위해 쌀값이 가장 싼 추수 직후에 쌀을 내다 팔 수밖에 없었던 것이다. 또 농가가 현지에서 파는 쌀값은 일본의 쌀 중심지 쌀값보다 싼 것이 보통이고, 그 차액은 쌀 중간 수집상이나 무역업자들이 차지하였던 것이다.


이러한 토지개량사업으로 쌀의 생산량은 분명히 늘어났고, 또 일인들이 주장하듯이 한국 의 농업을 발전시킨 것인지도 모른다. 그러나 이것은 대다수의 조선 농민들의 희생 위에 주로 일인들인 대지주를 살찌우는 방향에서 추진된 것이었다. 동시에 살펴야 할 것은 증산된 쌀보다 더 많은 쌀이 일본으로 빠져나갔다는 사실이다. (<표 3-2> 참조) 쌀이 증산되었음에도 한국인들은 쌀을 더 먹을 수 있게 되기는 커녕 그 소비량이 줄어들게 되고, 대신 값싼 외국쌀이나 만주산 좁쌀을 먹어야 했는데, 그나마 충분하지 못하였다. 그래서 1917년∼1921년간 평균 1.74석 소비되던 주요곡물(쌀·조·보리·밀·콩)의 소비량은 1932년∼ 1933년 평균 1.38석으로 감소하였다.


<표 3-2> 쌀 생산 수출 소비량

                                                                                                    (단위: 천석(千石))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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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전 : 영목무웅(鈴木武雄), 1941,《조선(朝鮮)의 경제(經濟)》, 136면



산미증식계획의 결과 조선의 농업은 쌀농사를 위주로 하는 단작농업의 성격이 더욱 분명하게 되어 갔다. 1910년대 남부지방 농가 수입 구성 중 쌀농사 수입은 37.5%로서 이미 비중이 컸던 것인데, 1930년대 중반에는 70.3%에 달하게 되었다. 그 결과 농가의 경제는 자연적·경제적 변동에 극히 취약하게 되었다. 이것은 쌀이라고 하는 한 작물에 과중하게 의지하게 되기 때문에 쌀농사가 안되었다든가 쌀값이 폭락하면 이를 중간에서 흡수할 여유가 없어지게 되기 때문이다. 1930년의 세계적 공황으로 인한 쌀값 폭락으로 수많은 농가가 빚더미에 올라서서 토지를 싼값에 팔아야 했고 많은 수리조합이 불량화한 것은 한 예에 불과하다. 결국 일제는 산미증식계획을 통하여 제1차대전 기간 동안 축적한 잉여 자본을 조선에 투자하여 높은 이윤을 올리고, 일본인 지주의 토지 소유를 확장시키고, 동시에 식량문제를 해결할 수 있었던 것이다. 또 일제의 무역수지의 적자 확대를 완화시키고 저미가·저임금 구조를 밑받침해주어 일본 자본주의의 산업구조 고도화에 기여하였다.


'토지사업개량'의 결과 일본 대지주의 수는 증가한 반면 조선인 지주와 자작농의 수는 감 소하였으며, 소작농의 수는 증가하였다. 산미증식이 진행되는 동안 자작·자소작 농가가 전 농가 호수에서 점하는 비중은 1924년 52%에서 32년에는 42%로 감소하였고, 소작농의 비율은 43%에서 53%로 증가하였다. 이에 따라 <표 3-3>에서 볼 수 있듯이 전체 경지에서 소 작지가 차지하는 비중도 늘어났다. 또 매년 찾아오는 봄에 식량이 떨어지는 이른바 춘긍농 가(春窮農家)는 1930년 현재 자작농의 18.4%, 자소작농의 37.5%, 소작농의 약 68.1%에 달하여 결국 전 농가의 약 반수가 춘궁농가가 되었다. 그리하여 유리걸식하거나 도시로 흘러가 막노동 등으로 생계를 이어가야 하는 궁민·세민(窮民·細民)의 수도 1926년 216만 명에서 1931년 544만 명으로 늘어갔다.


산미증식계획은 지주를 위주로 하는 일제 농업 정책의 한 대표적인 예였다. 이로써 일부 의 조선인 지주도 성장의 계기를 얻게 되고, 지방사회의 유력자로서 일제식민지 통치 의 동반자가 되었다. 반면 높은 현물 소작료, 공과금의 소작인 전가, 공산품과의 협상 가격차의 확대 등은 모두 조선 농민들의 생활을 압박하는 것이었다. 더구나 식산은행, 동척, 금 융조합과 같은 일제의 국가 자본에 의한 금융기관의 위의 사업에의 개입과 이를 통한 토지 의 집적, 농민을 상대로 하는 고리대 사업은 농민들에게 심각한 고통을 주고 이들의 몰락을 가속화 하는 것이었다.


<표 3-3> 1919~1929년간 소작지의 증가

                                                                                              (단위:천정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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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전: 고교구길(高橋龜吉) 1935, 《현대조선경제론(現代朝鮮經濟論)



한편 이 시기에도 강력하게 추진된 육지면과 양잠의 강제 확장과, 공판을 통한 헐값 매수 역시 농민들의 몰락을 재촉하였다.


이같은 상황에서 조선의 농민들은 자위책을 찾지 않을 수 없었다. 더구나 3·1운동은 한 국농민들의 민족적 각성과 투쟁의식을 고무시켜 주었다. 1920년대 이후 다수 등장하는 농민 단체와 소작쟁의·수리쟁의가 이들에 의해 지도되는 경우도 많았다. 농민단체들의 요구조건은 지역에 따라 약간의 차이가 있었으나 기본적으로 (1) 지주의 자의적 소작권 박탈 반대, (2) 소작료는 3할내지 4할 이내로 할 것, (3) 소작료 이외의 모든 공과금의 지주 부담, (4) 지주·마름의 무상노동·뇌물 요구반대 ,(5) 동척의 이민 반대 등의 지극히 당연하고 온 건한 주장들이었다.


이같은 농민들의 요구를 일제는 지주 편에 서서, 경찰을 동원하여 묵살하는 것이 보통이었다. 왜냐하면 농민운동이 농민들의 절실한 생활의 요구에서 출발한 것으로, 비록 처음부터 민족해방을 위해 의식적으로 진행된 것은 아니었지만, 농민들을 그러한 투쟁으로 내몰았던 사회모순이 기본적으로 일제에 의해 초래된 것이었기 때문이다. 또 조선총독부의 공권력으 로 뒷받침하고 있었던 당시의 상황에서, 이들의 투쟁은 필연적으로 반일적 성격을 띨 수밖에 없었다.



독립기념관 자료실 자료

https://www.i815.or.kr/media_data/chong_new/e0017/e0017_16.htm



위자료에서 볼 수 있듯이 산미증식계획이후 쌀 생산량은 비정상적으로 늘어나고 잡곡의 생산량은 급감하면서 쌀과 잡곡에 대한 인식도 변화된 것으로 보여 집니다. 일제 이후 농업기술 발전과 경지정리로 농산물의 다양성을 확보할 수 있는 시기가 마련되었음에도 여전히 벼농사에만 집중하고 벼 수매제를 실시하면서 그 기회를 놓친 이야기를 녹색혁명과 로컬푸드에서 이야기 했습니다.


태평양전쟁 당시 웃을 수 없지만 그렇다고 웃지 않을 수도 없는 이야기가 어청도에서 일어납니다. 군산은 일제 수탈의 본거지였습니다. 호남평야에서 생산되는 쌀을 일본으로 수탈해가는 본거지역할을 했는데 태평양전쟁이 일어나면서 군수품을 중국으로 이송하는 전진기지 역할을 했습니다. 군산항에 모아둔 군수품과 군량미를 중국으로 이송할 때 어청도를 경유해 이송되었습니다. 어청도는 한반도 최서단에 위치한 섬이어서 군수품과 군량미를 잠시 보관하는 최전방 전진기지가 된 것이죠. 앞에서 어청도를 이야기 할 때 쌀 구경하기 힘든 섬이라고 이야기 했습니다만 이 시기에는 역설적으로 쌀을 밟고 다닐 만큼 풍요로운 섬이 되었다더군요. 선배의 할머니 말에 의하면 태평양전쟁 당시 아무도 굶는 사람이 없었고 가장 풍요로운 시절이었다고 회상했다더군요. 


어청도는 매우 작은 섬이고 집을 지을 땅조차도 변변치 않은데도 태평양전쟁을 거치면서 80년대까지 1000여명의 주민이 모여 사는 큰 섬이 되었다가 지금은 인구가 급감해 400여명의 주민과 해군이 거주하고 있습니다.

영원한 변방이었고 지금도 변방에 위치한 가난한 섬 어청도가 가장 풍요로웠던 시기가 모든 사람들이 가장 고통스러웠던 전쟁 막바지의 몇 년이었다는 이야기는 참으로 아이러니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마치 천명관의 소설 <고래>에 나오는 작은 마을의 이야기처럼 비현실적으로 그려지는 이야기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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쌀의 종류는 수천 가지가 넘지만 크게 나눠 인디카종과 자포니카종으로 나뉩니다. 인디카종은 흔히 월남미라 불리는 장립종 쌀입니다. 찰기가 없어 한국인의 압맛이 맞지 않지만 생산량이 많아 통일벼 개량에 이용되었죠. 역시 맛은 없습니다.


우리가 일반적으로 먹는 쌀은 자포니까종 입니다. 단립종 쌀로 찰지고 끈적한 식감을 자랑합니다. 찹쌀과 멥쌀 모두 자포니카종에 해당되며 흑미와 녹미도 자포니카종의 일종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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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포니카/인디카



인디카와 자포니카의 중간크기의 중립종도 있습니다. 온대지방에서 자생하는 야생미들이 중립종인데 최근 개발된 갈색쌀 ‘가바쌀’이 대표적인 중립종입니다. 아직 먹어보진 않았지만 판매상인의 말에 의하면 “뻐시고 까끌거리지만 몸에 좋다”더군요. 몸에 어떻게 좋은지는 알 수 없지만 뻐시고 까끌거리는 식감은 확실해 보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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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바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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벼 이삭의 모양을 보면 그림과 같습니다.


일단 과피를 벗겨내면 현미가 됩니다. 현미가 아무리 좋다고 해도 치아에 닿는 그 싸늘하고 털이 곤두서는 느낌은 도저히 견딜 수가 없습니다. 유리를 칼로 긁는 느낌이랄지. 사실 곡물의 껍질은 연약하지만 그러한 방어기제를 숨기고 있습니다. 이삭 끝에 나 있는 까락은 새의 공격을 막기 위한 것이고(보리나 밀은 까락이 길어 참새가 범접하지 못하지만 쌀은 까락이 짧아 참새의 공략대상이 됩니다.) 과피는 치아를 가진 동물들에게 불쾌감을 주기 위해 진화한 형태로 보여집니다. 이 과피 즉, 왕겨를 벗겨냈다 하더라도 종피에 여전히 그 싸늘한 느낌이 남아 있습니다. 거칠고 뻐신 것이 문제가 아니라 씹을 때 큰 불쾌감을 줍니다. 우리가 일반적으로 먹는 현미는 종피까지 벗겨내고 호분층이 남아있는 것이 대부분입니다. 여기부터 분도를 정합니다. 종피부터 호분층까지 벗겨낸 가루를 미강(쌀겨)이라 부르는데 닭과 새의 먹이로 활용하기 좋고 퇴비에 혼합하면 좋은 밑거름이 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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쌀겨



종피를 벗겨내면 1~2분도 현미입니다. 호분층을 벗겨내면 3~4분도 현미가 되고, 쌀눈만 남기고 모든 껍질을 벗겨내는 것을 5~6분도 쌀눈쌀이 됩니다. 7분도부터는 일반 백미가 되는데 깎아내면 깎아낼수록 쌀은 하얗게 됩니다. 청주를 만드는 쌀은 10분도 이상 깎아내는데 일반백미가 8분도일 때 10분도로 깎아내면 하얀 쌀가루가 나옵니다. 고기편에서 이야기 했던 소 먹이가 8분도에서 10분도 사이에서 깎아낸 쌀가루였습니다. 이 쌀가루로 떡도 만들어 먹고 부침개도 해 먹었습니다. 소 사료로 들어오긴 했지만 뽀얗고 깨끗한 쌀가루로 만든 떡과 전은 어디하나 흠잡을 데가 없었습니다.


도정한 쌀은 1주일 안에 먹는 것이 가장 좋은데 특히나 현미는 최대한 빨리 먹는 것이 좋습니다. 쌀기름(미강유)이 호분층에 포함되어 있는데 호분층의 기름이 산화되면서 현미 특유의 찝찝한 냄새가 나는 원인이 됩니다.


밥을 짓는 방법은 다종다양할 테니 몇 가지 기본기만 이야기하고 이야기를 마무리 하겠습니다. 도정한 쌀은 시간이 지나면 지날수록 수분이 증발해 밥을 지을 때 물의 양을 조금씩 늘려줘야 합니다. 햅쌀을 도정한 쌀은 평소 밥을 지을 때 물의 양의 10%가량 줄여주는 것이 좋고 묵은 나락을 도정한 쌀은 5%가량 줄여주는 것이 좋습니다. 도정하고 한 달 이상이 되면 되려 평소 밥을 지을 때보다 물의 양을 늘리는 것이 좋습니다. 찹쌀은 물에 1,2시간가량 불리기만 하면 물을 넣지 않아도 찰진 밥이 됩니다. 보통 찰밥은 찐다고 말하는데 찜솥에 면보자기를 깔고 불린 찹쌀을 찌는데 찌는 중간중간 간수를 뿌리고 뒤적여주면 질지 않고 찰진 찰밥이 됩니다. 여기에 간장으로 간을 하고 견과류를 넣고 판에 부어 넓게 펴고 자르면 약밥이 됩니다. 다가오는 정월 대보름 오곡밥은 이 방법으로 지어보라능. 오곡밥에 들어가는 재료 중 팥은 삶아 넣어야 함을 강조합니다. 삶아 넣지 않으면 안 익습니다. 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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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릿쌀(올기쌀)



쌀중에 독특한 쌀이 한 가지 있습니다. 군산에선 오릿쌀이라 불렀는데 ‘올기쌀’이란 이름으로 불리는 찐쌀입니다. 벼가 익기 보름쯤 전에 수확해 껍질째 삶아 말리고 도정한 쌀을 말하는데 찰벼, 메벼 모두 가능하지만 찰벼가 맛이 좋습니다. 도정한 오릿쌀을 한 줌씩 집어 천천히 씹어 먹으면 달달하고 고소한 맛이 일품입니다. 이것을 튀겨 산자나 쌀강정을 만들면 일반 쌀로 만든 것들보다 달고 고소한 맛이 뛰어나죠. 오릿쌀은 시골장터에 나가면 쉽게 구할 수 있지만 그것으로 만든 강정은 찾아보기 힘들더군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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쌀에 대한 이야기는 해도해도 끝이 없겠지만 이정도에서 마무리 하겠습니다. 마지막 사진은 구례군 토지면에 있는 고택 운주로의 쌀뒤주의 모습입니다. 뒤주 아래 쌀을 내는 구멍엔 타인능해(他人能解)라고 적혀있습니다.




이상으로 알고나 먹자 식재료편을 마칩니다. 알고나 먹자는 내용을 보충해 책으로 출간됩니다. 또한 요리편 <그녀를 위한 식탁> 연재는 계속됩니다. 많은 관심 부탁드립니다. 


감사합니다. 새해 복 많이 받으십시오. 맛있는 밥도 많이 드시구요 ^^





Athom


편집 : 보리삼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