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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4. 04. 16. 수요일

펜더
















에피소드 1

 

몇 년 전 일일 것이다. 딴지에서 삼겹살 파티를 할 때였다. 그때 난 총수에게 사과를 받아냈다.

 

씨바, 미안해!”

 

웃었다. 7년 만에 사과를 받아냈다. 딴지 초창기에 온라인 기자의 원고료는 5만 원이었다. 양과 질은 중요치 않다. 무조건 5만 원이었다. 내 기억이 맞다면, 전쟁 이바구 한 편의 분량이 A4 10포인트로 13~17매 사이였다. 재미난 사실은 그 이후 딴지에 파트타임으로 일할 때에도 원고료를 받은 기억은 없다.

 

문래동 시절, 딴지 사정이 안 좋았다. 이해한다. 그래도 총수 입에서 '미안해'란 한 마디가 듣고 싶었다. 결국 7년 만에 들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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딴지일보 in 문래동

 

(요즘 딴지가 원고료를 주는 걸 보면서 문화적 충격을 느낀다. 정말 딴지에서 돈을 주는 것인가? 조만간 지구 멸망의 날이 오는 게 도래하는 게 아닐까란 불안감이 들 정도다)


 

에피소드 2

 

올 초에 있었던 일이다. 중앙 일간지 중 한 곳에서 스포츠 신문을 낸다고 했다. 자세한 설명을 하면, 업체명이 나올 거 같아 익명 처리하겠다.

 

그곳 담당기자가 내게 원고청탁을 했다.

 

5회도 좋고, 6회도 좋습니다. 문화 관련 이야기도 좋고, 역사 이야기도 좋으니 저희랑 연재를 하시죠.”

 

계산을 해보니 주 5회의 경우 20회였다. 원고료가 대충 나왔다. 한참 이런저런 연재 방향성에 대해 이야기를 하던 기자에게 대뜸 물어봤다.

 

그럼 고료는 얼마 정도로 책정 돼 있습니까? OO정도는 받아야 하는데요?”

 

기자는 한참을 머뭇거리더니,

 

“...저희도 사정이 어려워서, 저희들이 좋은 뜻으로 시작하는 것입니다. 작가님이 도와주시면... 저희 월급도 잘 안나오는 상황이라서... 외부 필자에게 고료가 책정되지는 않습니다.”


“...그럼 그냥 공짜로 써달라는 겁니까?”


“(다급) 그게...저희들이 어떤 식으로든 수익을 보전해 줄 수 있는 방법을 찾아서...”


그 수익을 보전하는 방법이 뭡니까?”


그게계속 의견을 조율해 봐야겠지만, 책이 나오면 저희가 홍보기사를 써주거나...

 

실화다. 믿기지 않겠지만, 20141월에 있었던 일이다.


그쪽에서 요구한 원고분량은 원고지 15~16매 분량이다. 이걸 주 5회 월 20회 연재하면, 원고지 600매 분량이다. 좀 작은 책의 경우 원고지 800매면 책 한 권이 나온다. 이들은 지금 책 2/3 분량을 공짜로 써달라고 한 것이다. 그것도 1년 동안.

 

그들의 좋은 뜻을 왜 나에게 강요하는 것일까? 궁금하다한 때 난 작가들은 왜 가난한가에 대해 치열하게(?) 고민했다. 나중에는 한스 예빙의 <왜 예술가는 가난해야 할까>란 책을 읽기 까지 했다(이 책에 대해서는 별로 추천하고 싶지는 않다).

 

내 나름의 결론은 경제적 가치로 바라보는 게 아니라 관념적 가치로 바라보는 게 문제라고 정리했다. 유교에 뿌리를 둔 관념적 세계관이라고 해야 할까? 거기에 더해 비용이 들지 않는다는 의식이 뿌리 깊게 자리 잡은 것도 문제다. 하다 못해 미술이라면 재료값이라도 줘야 한다는 생각이 들지만, 글이란... 머릿속에 있는 걸 끄집어내면 되는 것이니 여차하면 돈을 안 줘도 된다는 생각이 우리의 머릿속에 자리 잡고 있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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에피소드 3

 

1년 전 호되게 당한 적이 있다. 내 실수였다. 원고청탁을 받았는데, 원고청탁서를 자세히 살펴보지 않고, 3~4매라는 분량을 보고 선선히 청탁을 수락했다. 나중에 보니 그 3~4매가 A4 기준이었다. A4 3~4매 분량을 청탁하는데, 고료는 10만 원이었다.

 

충격이었다. 어느 순간 이 사회에서 글값은(칼럼 기준) 10만 원에 맞춰지고 있는 느낌이다. 예전에는 그래도,

 

“200자 원고지 기준으로 매당 얼마입니다.”

 

라는 이야길 들었는데, 요즘은 그냥 분량 상관없이 무조건 10만 원이다예전 글쟁이들에게 최고의 매체로 평가 받던 것이 조선일보였다. 조선일보는 매당 2만 5천 원이란 원고료를 준다는 것이다(200자 원고지 기준으로!! 이게 최하다!!).

 

... 그 정도 고료라면 영혼이라도 팔겠다.”

 

이 말이 괜히 나온 게 아니다.

 


에피소드 4

 

가끔 방송사에서 연락이 온다. 다큐멘터리를 찍는데, 모형총기나 용병(배경이 될), 혹은 자문을 요구하는 경우다. 처음엔 아는 PD 소개였기에 선선히 업체를 연결해 주거나 선후배들에게 연락을 해 방송을 만들어줬다(물론, 그 사람들에게는 비용을 지급했다). 문제는 이런 게 반복되더니 이런 쪽의 연결이나 사전취재의 단골 인물로 내가 '찍히게' 된 것이다. 무슨 일만 있으면 날 찾았다. 나는 내 머릿속에 있는 지식과 내 시간을 들여 그들에게 설명을 하고 아무런 대가도 받지 못한다. 이런 일은 점점 더 늘어났다. 하다못해 재연프로 <서프라이즈같은 곳에서도 연락이 온다. 그게 맞냐, 맞으면 출처가 어디냐, 다른 예는 없냐수화기 저 편의 목소리가 예의바를수록 돈은 못 받는다.

 

어떤 경우에는 전화기를 붙잡고 30분을 설명해야 할 때도 있었다. 결국 난 이런 전화가 오면 이를 피하게 된다.

 

잘 모릅니다.”


그런 글 쓴 기억이 없습니다.”


총은 군대에서, 용병은 프랑스에서...”

 

거의 이런 식이다. 이게 대한민국의 현주소다. 이웃 일본은 인터뷰를 하면 인터뷰피(interview fee)를 제공한다는 이야기를 듣고, 이를 그대로 실천에 옮긴 적이 있다. 다른 매체에 근무할 때 난 인터뷰를 하러 나갈 때에는 하다못해 카스테라라도 한 줄 사들고 갔다. 그게 예의라고 생각해서 말이다. 그런데, 나중에 가다보니 도저히 감당을 할 수가 없게 됐다. 회사에서 비용청구를 받아들이지 않았기 때문이다. 이게 대한민국의 현실이다. 지식은그냥 날로 먹을 수 있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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에피소드 5

 

한때 '진보의 상징'이었던 <>지에서 겪었던 일이다.


10년 전 일로 기억하는데, 그쪽 편집장에게서 연락이 왔다. 연재를 하고 싶다고<>이니 거절의 명분도 없었다. 결국 선선히 수락을 했는데, 2회 연재가 나갔음에도 고료는 들어오지 않았다(당시 매 당 계약을 했다). 나만 그런 게 아니라 같이 글을 건넨 후배도 돈을 받지 못했다. 나중에 알게 됐는데, 글쟁이들 대부분은 원고료를 못 받아도 글을 쓰는 문사(文士)’ 같은 하찮은 것에 연연하는 건 부끄러운 일이라는 관념’ 같은 것에 휩싸여 있었다. 결국 이걸 악용(?) 하려고 든 편집부는 최대한 안 주는 쪽으로 가닥을 잡아갔다(은근히 광범위하게 이런 사례가 많다. 나중에 용기를 내 전화를 하면, '아 그랬어요? 이상하네... 정산이 안 됐나?’ 이런 식으로 넘어간다. 밑져야 본전이다).

 

<>도 그런 식이었다. 뭐 그런 식이라고 퉁쳐서 말하긴 그렇고당시 날 섭외했던 편집장은 날 섭외하고 얼마 뒤 <>을 떠났다. 당시 <>은 근근이 버텨나가던 시절이었고, 기자들도 60~80만 원을 겨우겨우 받던 시절이었다고 한다. 그나마도 안 나오는 때가 많았고, 기자들은 그냥저냥 소풍가는 심정으로 오전 늦게 출근해, 오후 일찍 퇴근하는, 망하기 직전의 상황이었다. 이때 이들의 방법이 필자를 섭외해 원고를 맡기고, 그걸 2~3번 하다가 원고료를 안 준다고 항의를 하면, 그 필자에게 사정 설명을 하고 연재를 계속 이어나가던가, 아니면 그 필자를 버리고 비슷한 다른 필자를 섭외해 비슷한 글을 받는다는 것이다.

 

이걸 알게 된 게, 내가 항의를 하자 날 자르고 그 자리에 후배를 앉힌 것이다. 그리고 그 후배도 고료를 받지 못한 것이다. 결국 난 <말> 홈페이지에 나와 후배의 사연을 올렸고, 한바탕 난리가 났다. 전임 편집장이 부랴부랴 문자를 보내 미안하다고 계좌를 찍어달라고 말하는데, 난 거절했다. 이건 편집장님 잘못도 아니고, 이제 <>에서 고료를 준다 해도 더러워서 못 받겠다고 말이다.


-


2000년대 초반, 매체환경은 급속도로 붕괴됐고(포털의 문제가 크긴 컸다), 블로그의 등장으로 돈 안 줘도 되는 양질의 글들이 넘쳐났다. 블로거들을 데려와 공짜글을 써도 되고, 정 안되면 검색 잘하는 편집기자 앉혀놓고 우라까이를 시키면 글 하나가 뚝딱 완성이 된다. 굳이 돈을 쓸 필요가 없다(그마저도 비정규직으로 앉힌다).

 

매체가 많긴 하다. 이 코딱지만한 나라에 오프라인 매체가 너무 많다. 온라인 매체? 온라인 매체도 많다. 이들 중 제대로 된 수익모델을 가진 매체가 몇이나 될까?

 

칼럼이나 평론으로 대한민국에서 먹고 산다는 건 이제 불가능한 시대가 됐다. 한 후배가 내게 이런 말을 한 적이 있다.

 

... 이제 텍스트의 시대는 지나간 거 같아요.”

 

그 후배는 글 대신에 다른 '방법'을 찾다가 얼마 전 유명을 달리 했다그 후배는 정말 많은 시도를 했다. 매체를 만들기도 했고, 카카오와 연계한 콘텐츠 사업, 동영상, 만화 스토리 등등 콘텐츠의 다변화를 위해 뛰었다. 그러나 역시 벽에 부딪혔다. 대한민국에서 콘텐츠로 먹고 산다는 건너무도 처절하다.

 

포털의 문제점은 더 이상 언급하지 않겠다. 다만, 그 시절, 그러니까 포털이 막 태동하던 시절 스포츠 신문에서 단기적인 안목으로 매절로 자기 기사를 포털에 넘길 때 많은 선배들이 예견했던 한 마디로 대신할까 한다.

 

이제 글 팔아먹고 사는 시절은 지났다.”

 

2003년도 이야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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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떤 작가의 충고

 

모 작가님이 내 작업실로 놀러 온 적이 있다. 그 당시 급한 칼럼 하나를 마무리 하고 있었는데, 그때 내게 이런 충고를 해 주셨다.

 

칼럼이나 에세이 같은 건가급적 쓰지 마라.”

 

칼럼이나 에세이를 가지고 생계를 유지하지 말라는 충고였다. 비용대비 효과라고 해야 할까? 수 십 년간 글로 밥벌이를 했고, 밥벌이의 지겨움을 토로하신 이 초로의 소설가는 한국적 현실에서 칼럼이나 에세이가 받을 수 있는 최대치의 금액을 알고 있었던 것이다(언론사 편집장을 역임하신 분이니, ‘이런 글의 글값에 대해서는 누구보다도 잘 알고 있었다). 그 다음의 조건이란 게,

 

쓰고 싶으면꼭 쓰고 싶은 건 써야겠지. 그렇지만, 이걸 생계로 생각하면 답이 안 나와.”

 

그나마 밥벌이로 생각할 수 있는 것이 이야기였다.

 

2년 전 일이었을 것이다. 정유정 작가의 <7년의 밤>이란 소설이 나왔다아마, 그 당시 기준으로(지금 기준으로도 훌륭하다) 대한민국에서 서사를 이 정도로 풀어낼 작가가 몇이나 될까란 생각을 했었다.

 

대단했다. 그 이전에 문학상을 받을 때부터 주목하고 있었지만, <7년의 밤>에서 정유정 작가는 제대로 자신의 기량을 보여줬다. 이제는 서사란 것이 사라질 때쯤 혜성처럼 나타나 서사문학의 기본을 보여줬다.

 

그 다음은절망이었다(당시의 기준이었다. 당시의)

 

지금부터 하는 말은 내 나름의 주관적’ 판단과 내 주변의 미확인 첩보를 기준으로 쓰는 글이니 신빙성이 떨어질 수도 있다. 이 점 유념해서 들어주길 바란다.

 

당시 정유정 작가는 2년에 걸쳐 이 소설을 붙잡고 앉아 있었다. 자료조사와 플롯구성, 지난한 글쓰기의 시간들, 초조한 퇴고의 과정들을 거쳐 이 역작을 내놓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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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소설은 센세이션을 일으켰다. 당시 20만 부가 나간 걸로 알고 있다(이 부분에 대해서는 정확하지 않다). 그리고 영화 판권이 팔려 나갔다. 내가 알고 있기론(정확하지 않다), 이 판권을 한 영화사가 사기에는 너무 부담스런 액수라서(1억으로 알고 있다. 이 역시도 정확하지 않다) 두 군데 영화사가 손을 잡고 이 판권을 사갔다는 것이다.

 

1억이라... <7년의 밤> 정도의 소설이 겨우 1억이라니(내 주관적 판단이 들어간 것이다). 정유정 작가는 2년을 꼬박 이 소설에 바쳤다. 그 결과 이 소설을 뽑아냈다. 그런데 그 경제적 대가는 내 예상과 달리 너무 초라했다. 물론, 책은 남아있기에 앞으로 계속 팔려 나갈 것이고, 영화가 개봉되고 난 뒤 스코어가 더 올라갈 수 있을 것이다(꼭 그래야 한다!! <7년의 밤> 정도는 팔려줘야 글을 쓰는 우리들도 희망을 가질 수 있다. 그 만큼 잘 나온 소설이다).

 

영화시장을 알고 있지만, 뒷맛이 개운치 않은 게 사실이다.

 

(단순계산으로 본다면, 정유정 작가는 연봉 15천으로 끝이 나는 것이다. 출판시장이 불황이라 그런 것일까? 아니면, 다른 수익원을 내가 간과한 것일까? 2년 동안의 지루하고, 고달픈 과정을 머릿속에서 그려보면 이 금액은 택도 없는 금액이란 생각을 가지게 된다. 그러나 어쩌랴? 그게 작가의 운명인 것을)


 

다른시장

 

얼마 전 '강연계'쪽 인사를 만난 적이 있다.

 

글로 생계를 유지하는 작가가 몇이나 될까?”


순수문학으로?”


순수문학이라면...한 다섯 사람은 되지 않을까?”


정말?”

 

(상대방이 놀란 건 다섯 사람이나 되냐는 의미였다)

 

그때 둘이서 리갈패드를 꺼내 순문을 하는 작가들의 예상수익과 활동방향을 적고, 토론(?)을 했던 기억이 난다. 그쪽의 주장이란 간단한데,

 

어느정도 책이 터진 뒤에는 강연이 주요 수입원 중 하나일 거야. 우리 업체도 그런 식으로 작가들을 초빙하거든.”


글쎄, 작가들 중에서 강연을 싫어하는 작가도 있잖아?”


싫어는 해도, 생계를 유지하기 위해선 강연을 해야 해.”


간단하네. 강연을 하긴 하되 선택을 할 수 있는 작가는 경제적으로 독립했다고 봐야지.”

 

당시 강연을 하지 않고, 생계를 유지하는 작가는, 정말 손에 꼽을 정도였다. 인문학자들은 기본적으로 강연이 없으면 삶을 유지하기가 어렵다(지명도에 비례하여 경제적 수익의 격차가 벌어질 것이다). 업체(지식산업이란 사업을 하는 이들)를 가진 이들은 강연에 목숨을 걸어야 한다. 이게 곧 수익과 직결되니 말이다. 순수문학을 하는 이들 중 문학만으로 생계를 유지하는 건 어려워지게 됐다.

 

아예, 강연계에 투신하는 것도 하나의 방법이야.”

 

이제 한국 사회에서 지식노동자들은, 그러니까 전업작가나 글을 써서 생계를 유지하는 이들에게 있어서 '강연'은 피할 수 없는 운명이 됐다.

 

나같이 말석에 겨우겨우 이름을 올린 이도 강연을 한다고 떠들고 있으니 말이다.


 

시장으로의 진입

 

20039월 난 <영화>를 포기했다.

 

우리가 영화를 선택한 것이 아니라 영화가 우리를 선택했다” <장 뤽 고다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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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 뤽 고다르


고다르의 말이다. 이 말을 지금껏 기억하는 이유는, 이게 감독협회 기념품의 단골문구이기 때문이다. 미안하게도 이 글을 볼 때마다,

 

지랄하고 자빠졌네. 영화사가 우릴 선택했지. 영화가 우릴 선택했겠냐?”

 

대한민국에서 자기의 이름만으로 배우 캐스팅과 펀드를 끌고 올 감독이 몇 이나 될까? 봉준호 감독 정도가 되면, 배우들은 줄을 서고, 투자사들은 감독 개런티 10억과 지분, 진행비, 사무실 등등을 바리바리 싸들고 찾아올 것이다.

 

(분명한 사실은 봉준호 감독과 같은 분이 많이 나타나야 한다. 그래야 희망이 있지 않겠는가? 한국 영화판에서 넘버 1인 사람의 대우가 그 정도는 돼야 할 맛이 나지 않겠는가?)

 

그 외에는 딱히 그렇게 떠오르는 인물이 없다. 몇몇이 있긴 하지만, 이거다할 만한 포스를 가진 사람이 없다. 어쨌든 그런 것이다.

 

내가 20039월에 영화를 포기하고, 이후에도 조심스럽게 선금이 꽂히지 않으면 움직이지 않았던 이유는 바로 장 뤽 고다르의 말 때문이다. 언론에서 스포트라이트를 비추고, 칸에서 레드카펫을 밟는 감독들도 있지만, 그렇지 않은 감독들이 압도적으로 많다.

 

할 게 없으니 하는 거지.”


배운 도둑질이 이건데 뭘 하냐?”


지금 나가서 뭘 하라고?”

 

데뷔작이 대표작이자, 마지막 작품이 되는 감독들이 대부분이다. 충무로에서 입봉 한 신인감독 10명 중 3명만이 다음 작품을 할 수 있다. 그리고 그들은 다시 한 번 영화가 자신을 선택해 주기를 고대한다.

 

까놓고 말해서 우리가 말만 하면 다 아는 유명감독이나 제작자들의 현실은

 

빚으로 빚을 까며 산다.”

 

라고 할 수 있다. 아마 깜짝 놀랄 것이다. 그래도 작품 몇 개가 빵빵 터져서 꽤 많은 배당을 받은 감독들도 다음 작품을 하기 위해선 빚을 내야 하는 경우가 대부분이다. 아무리봐도 계산이 안서서 직접 제작사를 차렸다가 아예 쪽박을 차는 경우도 심심찮게 나오고 있고 말이다.

 

한 중견감독의 말을 들어보자.

 

감독 인생을 60까지 놓고 보면(이건 정말 많이 잡은 것이다. 보통 50 정도로 보면 맞다), 결국 플러스 마이너스 제로야. 괜히 욕심부려 자기 재산 털어놓고 망가지는 경우도 많고, 한 번 삐끗해 다음 작품으로 복구하려다 망가지기도 하고, 타이밍 재다가 시기 놓치고 6~7년씩 놀기도 하고그 사이에 뭐 먹고 사냐? 결국 이리저리 손익계산서 뽑아보면 제로.”

 

그나마 작품이라도 성공했다면, 강연을 나가든가 강의를 할 수 있지만, 그마저도 신통찮으면 영화사 근처를 멤돌다 사라지는 것이다.

 

이 당시 난 고민을 했다. 사이더스에서 경험한 모멸감과 집에 있는 아내와 아이의 모습, 감독들과 작가들의 현실. 그리고 당연히 받아야 할 을 굽신거리고, 눈치보며 받아야 하는 불합리 등을 보면서 선언을 했다.

 

돈 꽂히기 전에는 다시는 영화 안한다!”

 

그리고 난 생계전선에 뛰어들었다. 돈이 될 수 있는 모든 걸 찾아서 뛰었다. 그리고 뼈저리게 느꼈다.

 

대한민국에서 글로 생계를 유지한다는 건 보통 일이 아니다.”

 

앞의 에피소드를 봐서 알겠지만, 제 값 받아가며 글을 쓸 환경이 아니었다. 얼마나 잘 쓰는지, 얼마나 많이 썼는지는 중요치 않다. ‘그들에게는 적당한 수준의 지면을 메꿔줄글이 필요했을 뿐이다.

 

물론, 팔려나가는 경우도 있다. 그것도 단기간에 아주 빠르게 말이다. 바로 방송에 뜨면 되는 것이다. 그런데 이건 말 그대로 인 것이다(실제로 방송에 출연해봤지만, 별로내가 워낙 비호감으로 생겨서).

 

결국 내 판단은 명징해졌다.

 

최대한 많이 써서 양으로 승부를 보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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양질전화의 법칙을 여기에 적용시켜도 될까? ‘시장가는 정해졌다. 그 시장가를 넘어설 수 있는 특장점이 지금 현재 내게는 존재하지 않았다. 그렇다면, 선택 점은 둘 중 하나였다. 특장점을 계발하기 위해 날 단련하고, 연구개발을 하든가 아니면 최대한 많은 글을 써서 낮은 가격의 압박을 벗어나는 길이다.

 

원론적인 방법은 나만의 무기를 개발하고 단련해 시장에 도전해 나만의 개성으로 승부를 보는 것이다. only one이 되라는 경영법칙이다. 작가란 이 말에 더없이 적확한 직종의 직업군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난 이 선택을 할 수 없었다. ?

 

난 부양가족이 있었다.

 

어쩌면 이게 핑계일수도 있겠다는 생각을 요즘 한다(내 가족들에게 미안하다. 어쩌다 이런 직업을 택해서). 가족들을 핑계로 내 일을 하지 못했다는어쨌든 난 내 가족들에게 최저 생계비 이상을 벌어줘야 하는 의무가 있었고, 그 답이 나오지 않는 습작기간(삼각김밥과 꼬마김치 사이에서 고민하던 선배들의 모습이 떠올랐다)을 버틸 수 있을지 계산에 들어갔다.

 

결국 내 계산은 이러했다.

 

“4년 정도 내가 쓸 수 있는 한계치까지 날 끌어내 쓴다. 그리고 이걸로 2년 정도 내 시간을 번다. 그 시간 동안 내가 해보고 싶은, 나만의 작품을 써서 시장을 두드려 본다.”

 

계산이 끝났다. 그리고 내가 할 수 있는, 대한민국에서 할 수 있는 거의 모든 글들을 찾아 나섰다.

 

지옥이 열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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첨언 : 내 담당 PD가 자기 프로그램 안해도 좋으니 절필선언만은 하지 말라며 장문의 이메일을 보냈다. 고맙기도 하고, 밉기도 하다. 그러면 원고 쓸 때 좀 도와주던가아이템 회의도 안 하고 모두 맡기면서... 어쨌든 이렇게 정리해 나가는 거다. 좋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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편집 : 홀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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