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신 기사 추천 기사 연재 기사 마빡 리스트

2015. 04. 16. 목요일

파토








1.jpg 



365일 전 그날, 아니 지난 365일 동안 대체 무슨 일이 벌어진 걸까요.


수백 명의 승객을 태우고 한척의 배가 출발합니다. 승객들 중 대다수가 수학여행을 떠나는 앳된 고2 학생들입니다. 우리들 대부분이 기억하는 그 수학여행이죠. 배는 낡고 숙소는 비좁다 한들, 친구들과 새로운 곳에 함께 떠난다는 흥분으로 가득한 여행길입니다. 이제 겨울의 냉기가 막 가신 4월의 제주도, 한라산, 바다, 오름, 유채꽃이 기다리고 있으니까요.


하지만, 아무도 그곳에 도착하지 못했습니다.


처음엔 모두들 작은 사고인 줄만 알았었죠. TV에서 뉴스를 접하고는 ‘아이고, 이런!’ 하다가 전원 구조되었다기에 ‘다행이네’ 일종의 해프닝으로 끝나는 줄만 알았습니다. 인명이 상하지 않는 한 이해관계가 있는 선주나 보험회사가 아닌 우리는 그저 가슴 쓸어내리고 잊어버리면 그만입니다.


그런데 몇 시간 지나지 않아 이 일은 사고조차 아닌, ‘사건’으로 변하기 시작합니다. 전원 구조는커녕, 선장과 선원들은 아이들에게 ‘가만히 있으라’라고 지시하고 먼저 도망쳤습니다. 그들이 살길을 찾아 도주하는 동안 어른을 믿고 따른 아이들은 바닥으로 가라앉고 있었습니다. 눈앞으로 밀려들어오는 죽음을 차마 실감하지 못하던 순진한 아이들이었습니다.


당일 아침부터 언론은 ‘수많은 함정이 운집해 구조작업을 하고 있다’라고 보도했습니다. 하지만 현장에 있는 사람들은 아무것도 진행되지 않는다고 전해옵니다. 해경이 계약한 구조업체가 와서 움직일 때까지 멍하니 기다리고 있었던 거죠. 와중에 거의 한나절이 지나 어슬렁거리며 등장한 대통령은 ‘구명복을 입었는데 왜 못 찾느냐’라는 희대의 뒷북을 치셨죠.


구조 작전 전체에 걸쳐 책임 있는 통솔이 이뤄지지도 않고, 사태의 브리핑조차 제대로 되지 않습니다. 신속한 결단과 책임감으로 사태를 지휘해야 할 사람들은 서로 눈치만 보고, 시스템과 매뉴얼의 부재 속에서 금쪽같은 시간만 흘러갔습니다. 그렇게 ‘인명 구조’는 서서히 ‘시신 인양’으로 바뀌어 갔고요.


이제 사건은 ‘비극’으로 변했고, 가족과 국민은 무엇이 일을 이렇게까지 만들었는지에 대한 설명이 필요했습니다. ‘비양심적인 선장과 선원’, ‘낡은 배’, ‘불법 개조’, ‘과적’, ‘매뉴얼 부재’, ‘해경 해체’, ‘유병언의 죽음’같은 키워드들이 지나갔습니다. 하지만 여전히 부족했죠. 그럼에도 불구하고 한쪽에서 ‘지겨움’, ‘그만해라’를 거쳐, ‘종북’, ‘시신장사’, ‘유족충’ 같은 말들이 등장하기 시작했습니다.


이 사이 365일이 지나갔습니다. 저 원망스러운 배는 여전히 물속에 있고, 아직 아홉 명의 실종자가 남아 있습니다.


세월호와 함께, 산자와 죽은 자를 품은 세월은 그렇게 흘러갑니다.



2.jpg

이름을 봐야 합니다. 이 분들은 그저 ‘실종자 9명’이란
대명사로 뭉뚱그려지는 추상적인 존재가 아니니까요.
아직도 저 배 한구석 어딘가에 잠들어 있는,
우리 주변에서 진짜 삶을 살았던 진짜 사람들입니다.



세월호 사건의 디테일이나 의혹을 새삼 열거할 생각은 없습니다. 그런 내용들은 본지 독자라면 이미 잘 알고 있지요. 그래서 저는 이 시점에서 좀 다른 이야기를 하고 싶습니다. 굳이 이름을 달자면 초심과 관련된 거라고 할까요.


이 비극의 본질에 대해 정말 많은 말들이 있습니다. 도무지 이해되지 않는 상황을 이해하려다 보면 다양한 해석이 나오는 건 당연한 일이죠. 그래서 ‘잠수함 충돌’, ‘국정원 소유설’ 등을 거쳐 ‘유병언 생존설’, 나아가 ‘고의침몰설’에 이르기까지 여러 이야기들이 등장했습니다.


저는 그런 해석들의 진위를 판단할 입장에 있지는 않습니다. 어느 정도 근거가 있어 보이는 것도 있고 그렇지 않은 것도 있더군요. 하지만 기본적으로 이런 음모론들에 큰 가치를 둘 수는 없습니다. 음모론에 대해 몰라서가 아니라 그 실체와 배경 심리를 잘 알기 때문입니다.


산발적인 증거들은 보는 각도에 따라 다양한 의미로 해석할 수 있습니다. 또 이 증거들을 한 줄로 꿰서 시나리오를 만드는 과정에서 자기도 모르게 의도와 선입견을 집어넣게 되죠. 대부분의 음모론이 일견 그럴싸하지만 대부분 사실이 아닌 것이 바로 이런 이유 때문일 겁니다. 


그래서 객관적으로 증명될 수 없는 의혹들은 아무리 제기된들 의미가 없습니다. 오히려 이런 주장들에 지나치게 집착함으로써 세월호 참사의 본질과 사안에 대한 집중력을 흐트러트릴 수 있죠. 나아가 이 사건을 어떻게든 덮고 넘어가려는 사람들에게 역공의 빌미를 제공하기도 합니다.


그러다보면 우리가 무엇을 하려고 했는지, 그 초심마저 잊고 맙니다.



3.jpg



세월호 참사의 본질은 고통입니다.


배가 가라앉던 순간부터 1년이 지난 지금까지 현재 진행형이며, 앞으로도 결코 사라지지 않을 그 고통 말입니다.


아이들이 배 속에서 죽어가던 그 며칠간 미친 듯 가슴 졸이고, 해경과 정부의 처절한 무능과 정치인들의 무성의에 실망하고, 유민 아빠의 단식에 대한 안타까워하며, 일베나 극우세력의 언행에 우리가 분노했던 이유. 그리고 1년이 지난 지금 다시 힘을 내서 잊지 말자고 말하는 것. 모두 고통 때문입니다.


누구나 살면서 어쩔 수 없이 겪는 고통들도 있습니다. 흔히 생로병사라고들 합디다. 생사마저 초월하는, 말 그대로 천국에서 살지 않는 한, 생로병사의 기본적인 고통에서 벗어날 수 있는 사람은 아무도 없습니다.


그런데 한편으로 생로병사는 그냥 삶 그 자체이기도 합니다. 그래서 그 속에는 고통만이 있는 건 아니죠. 어쩌면 우리가 행복이라고 말하는 것은 그저 저 속에서 고통보다 기쁨이 조금 더 많은 정도인지도 모르겠습니다. 우리는 큰 욕심이 없기 때문에 그 정도만 돼도 나쁘지 않은 삶이죠.


하지만 세월호가 야기한 고통은 이런 게 아닙니다. 삶과 함께 어쩔 수 없이 따라오는 그런 것이 아닙니다. 전혀 불필요한, 그러면서도 치명적이고도 더할 나위 없이 잔인한 고통입니다. 엉뚱한 시간과 공간에 나타난 시커먼 죽음의 손아귀이고 부모의 면전에서 자식의 몸을 갈기갈기 찢어놓은 배신의 칼날입니다. 아니, 찢겨졌어도 좋으니 내 새끼 뼈 한줌이라도 건졌으면, 예전 같으면 최악의 악몽일 그런 것을 소원으로 빌게 되는 그런 고통입니다.



4.jpg



우리가 이 비극에 슬프면서도 분노하는 것은 이 기막힌 고통의 실체를 두 눈으로 보았고 조금이나마 함께 느꼈기 때문입니다. 이런 것은 세상에 존재해선 안 됩니다.


음모론이라도 끌고 와서 설명하려 드는 것은 차마 납득할 수 없기 때문입니다. 거대한 악, 이 모든 것을 계획하고 조종한 무엇인가가, 누군가가 없다면 이런 고통이 세상에 나타날 수는 없을 거라고 여겨지니까요.


하지만 악은 말 그대로의 ‘악함’에서 비롯되지만은 않습니다. 그런 경우는 오히려 드물고 대부분의 악은 실은 못남에서, 약함에서, 비겁함에서 생겨나지 않습니까. 우리는 희생자와 가족의 고통에 이입되어 고통스럽지만, 한편으로는 우리가 만들어 놓은 이 사회의 못남, 약함, 비겁함, 그리고 적어도 우리보다는 나을 것이라고 생각해 권세를 위임했던 자들의 못남, 약함, 비겁함이 또 고통스럽습니다.


그래서 대통령을 위시한 위정자들의 책임을 묻지 않을 수 없죠. 그들이 국정원의 비밀을 숨기고 있거나 충돌한 잠수함을 감추고 있거나 심지어 아이들을 일부로 죽여서가 아니라, 참사의 발생에서부터 수습에 이르기까지 가족과 국민의 고통을 줄이는 일을 아무것도 하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그것만으로도 그들의 책임은 충분히 무겁고, 그런 사람들에게 세금으로 녹을 주고 권력을 위임하는 것에 의문이 생기는 것은 당연한 일입니다.


우리는 주권자니까요.



5.jpg

진정성은 굳이 표현하지 않아도 주머니속의 송곳처럼 드러납니다.
진정성 없음도, 마찬가지로 드러납니다.



우리가 이 일로 겪는 또 하나의 고통은, 함께 고통을 느끼지 조차 못하는 사람들에 대한 깊은 환멸에서 비롯됩니다. 이 거대한 비극조차도 종북과 연결시키거나 나아가 조롱거리로 여길 자들이 있을 거라고는 처음엔 차마 상상하지 못했으니까요.



Untitled-1.jpg



이 트윗은 ㅂㄱㄴ를 엿 먹이기 위해 전라도 해경이 일부러 구조를 하지 않았을 수 있다며, 그걸 이용해 종북이 선동을 벌일 거라는 어이없는 내용을 담고 있습니다. 종북, 전라도, 당시의 이슈이던 채동욱까지 등장합니다. 고통 받은 사람들과 그들을 도우려는 이들에게 ‘악마’라는 단어마저 사용하며 공격하고 모욕하기를 서슴지 않습니다.


기가 막히는 소리지만, 냉정하게 말하면 ‘정부가 일부러 배를 침몰시키고 아이들을 죽게 했다’라는 식의 주장도 이 이야기의 대척점에 있습니다. 이런 식의 싸움은 기본적으로 저열할 수밖에 없고 끝나지 않는 소모전으로 이어질 뿐입니다. 음모론으로 치닫는 걸 적극적으로 경계해야 하는 이유입니다.


물론 똑같은 건 아니죠. 저들은 유가족과 그들에 공감하는 사람들을 싸잡아 모욕하고 있으니까요. 둘 다 지나친 음모론이라 한들, 그 수위나 언사들을 공평하게 저울질하기 전에, 누가 약자의 편에 서 있는지 보면 현실에서의 선과 악은 어렵지 않게 구분할 수 있습니다.


자식을 가슴에 묻고 그 무게를 지고 살아야 하는 사람은 어디에서 어떻게 산들 평생 다시는 행복할 수 없습니다. 수억이 아니라 수십억의 배상금을 받는다고 한들 마찬가지입니다. 행복에의 희망이 없는 삶이라니, 세상에 이런 약자가 어디 있단 말입니까? 그러니 정상적인 사람이라면 유가족의 편에 서는 건 당연한 거죠.


그런데도 저 사람들은 왜 저러냐고요. 약해서 악해지는 겁니다. 거대한 고통을 직시하지 못해 외면하려다 보니 저렇게 잔인해져야 죄책감을 덜 수 있죠. 자신의 이성과 감정이 아니라 힘을 가진 자들의 논리와 가치관을 삶의 기준으로 놓아야 버티는 거죠. 이들은 약자이면서 강자의 편에 서고 있으면서도 스스로 무슨 일을 하는지 모릅니다. 미워하기보다는 불쌍히 여겨야 할 존재들입니다.



4057338.jpg

 모든 잔인함은 약함에서 나온다. – 세네카
니체도 비슷한 말을 했죠.



그래서 생각합니다. 약해지지 않기 위해, 그래서 악해지고 잔인해지지 않기 위해, 우리가 정말 잊지 말아야 할 것은 바로 그날로부터 시작되어 앞으로도 이어질 그 고통 자체라고 말입니다.


침몰하는 세월호의 모습, 4월 16일이라는 날짜, 희생자의 수, 그런 것들은 잊힐지도 모릅니다. 세월호라는 이름조차, 역설적이게도 세월이 오래 지나면 가물가물해질 수도 있고요. 수십 년 후에는 그저 ‘그 배’라고 말하게 될 날이 올지도 모르죠.


하지만 저 고통과 눈물만 잊지 않는다면 결국 아무것도 잊히지 않습니다. 세월호 희생자와 가족에서 시작해 우리에게까지 전파된 저 어이없는 고통의 무게, 그것만 제대로 기억하고 있다면 말입니다. 그것을 야기한 부조리함과 비겁함, 무능, 그리고 외면하고 조롱하는 자들의 나약한 잔인함은 모두 그 고통의 그늘로 항상 존재합니다.


물론 다들 알다시피, 고통을 기억으로 삶 속에 계속 남기는 일은 쉽지 않습니다. 하지만 해야 합니다. 우리 어른들이 어둡고 무겁다고 슬금슬금 도망가 버리면 저 아이들은 물속에서 어쩌죠. 그럴 수는 없는 일입니다.


잊지 않으면, 우리는 저런 일이 결코 되풀이되어서는 안 된다는 점을 늘 마음 한 구석에 남기고 있을 수 있습니다. 또 세월호 뿐 아니라 저런 이유들로 생겨나는 수많은 다른 고통들도 알게 되며, 그 속에서 살고 생각하고 행동하게 되겠지요.


그러면 결국, 언젠가는, 세월호의 죽음이 헛되지 않았다고 말할 수 있는 날도 맞이할 겁니다. 아이들은 돌아오지 않고 고통도 사라지지는 않지만, 적어도 우리 모두가 조금은 떳떳해 질 수 있을지 모릅니다.



끝으로 노래 하나 띄웁니다. 고 이보미양이 녹음했던 이 노래를 김장훈씨가 함께 불렀더군요. 저렇게 맑은 소녀에요. 보미는 이제 이 세상에 없지만 이 노래처럼 우리는 계속 꿈을 꿔야 합니다. 슬픔과 고통을 부여안고, 언젠가는 조금 달라질 눈물의 의미를 위해서.


“애들아. 정말 미안해. 하지만 우리가 이룬 것을 볼래? 너희가 알려 준 거란다. 이제 고맙다고, 해도 될까?”


그런 말을 할 수 있는 날을 위해서.












파토

트위터 : @patoworld

페이스북 : jongwoo.won


편집 : 딴지일보 챙타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