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족’은 어떻게 만들어졌을까?
‘어족’이라는 표현을 많이들 들어보셨을 겁니다. 굳이 언어학에 관심이 없더라도 학창시절에 한두 번쯤은 듣게 되니까요. 학교에서는 어족에 대해 ‘이런 개념이 있다~’라는 식으로 간단히 서술하고 넘어가는데요, 어족은 무엇일까요?
명칭을 풀어서 써보면 ‘언어들의 종족’ 정도라 할 수 있습니다. 영문명칭은 좀 더 직관적인데요. Language Family라고 합니다. 이름에서 알 수 있듯, 어족은 언어들 간의 친족 관계에 대한 개념입니다. 언어학에 관심이 없으신 분들은 대부분 여기까지 알고 계실 겁니다.
바로 어족 이야기로 넘어가기 전에 방송 캡처 사진을 하나 보시겠습니다. 수신료의 가치라는 이름으로 인터넷에서 돌아다니는 사진입니다. 공영방송의 임팩트(?)있는 장면만을 따와 수신료의 가치라는 제목과 함께 올리는 건 일종의 놀이가 된 지 오래지요. 아래 방송은 2017년 1월에 방송되었습니다.
출처 KBS <멕시코 한류 천년의 흔적을 찾아서> 일부 캡처
위 방송에서는 한국어와 멕시코 원주민어 간의 음운·음성적 유사성을 주장합니다. 이걸 바탕으로 고대 멕시코에 한민족이 영향을 미쳤다고 주장하지요. 그러나 이런 식으로 따지자면 Sexy와 색시 가지고 똑같은 주장을 할 수도 있고, Ban(금지)과 反(반대 반)으로도 할 수 있습니다. 이들 음성이 비슷하다고 저 먼 옛날부터 동방문명과 서방문명이 융합을 했네 하는 건 많은 분들이 납득하기 힘들 겁니다.
사실 위 방송에서 직접 한국어와 멕시코 원주민어가 같은 어족이라는 주장을 하는 것은 아닙니다. 우연히 비슷한 음성적 대응을 비교할 뿐이지요. 그러나 위 방송처럼 그 사실에 어떤 의미를 부여하기는 힘듭니다. 이건 말 그대로 우연입니다. 이러한 주장이 주화입마에 빠지면, 아무 연관성이 없는 두 언어가 친연성이 있다고 주장하기 일쑤입니다. 한국어와 영어가 친족 관계에 있다거나 같은 어족이라거나 하는 식이지요. 실제로 인터넷에 이런 주장을 하시는 분들이 있기도 하고요. 그러나 어족은 단순히 이런 비교만으로 설정할 수 있는 것이 아닙니다. 그러므로 이번에는 ‘어족’과 그를 다루는 ‘역사비교언어학’에 대해 간단히 알아보겠습니다.
1.역사비교언어학
어족과 같이 언어의 계통을 다루는 학문은 역사비교언어학입니다. 역사비교언어학은 언어학 중에서도 가장 오래된 분야 중 하나입니다. 그 시초가 영국의 인도 통치 당시 영국인들이 산스크리트어와 영어의 유사성을 발견하고 연구를 시작한 것이니까요. 이때까지 언어는 평행적으로 발전한다고 여겨졌습니다. 예를 들어 라틴어는 산스크리트어에서 그리스어가 되고 라틴어가 되었다고 여겨졌습니다. 그러나 당시 인도에 살았던 영국인 판사 William Jones 경(1746~1794)은 자신의 저서를 통해 산스크리트어와 그리스어와 라틴어 모두 어떤 공통의 조상어에서 독립적으로 발전했다고 주장합니다. 이 주장이 진지하게 연구되어, 현재 우리가 아는 인도유럽어족까지 발전한 것입니다.
관련된 연구는 계속 진행되어 하나의 학문이라고 할 정도로 분화되기 시작했습니다. 그게 역사비교언어학입니다. ‘역사언어학’과 ‘비교언어학’을 합쳐 놓은 말이죠. 이 둘은 매우 긴밀하게 엮여 있습니다. 언어 간의 비교를 통해 공통점을 찾아내서, 그 언어들이 분화되기 이전의 공통 조어(선조 언어)를 밝히는 것이 역사비교언어학의 목표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 즉, 비교를 통해 언어의 역사를 거슬러 올라가는 것이죠. 예를 들면 게르만어파에 속하는 여러 언어를 비교해서 역사에서 사라진 선(Proto)-게르만어를 재구축(Reconstruction)하는 것이죠. (원래는 ‘재구’라는 표현을 쓰지만 이 글에서는 이해를 위해 재구축이라고 표현했습니다.) 이런 과정이 수없이 반복되면 해당 어족의 최초 언어로 도달하게 됩니다.
인도유럽어족의 계통을 나타낸 수형도
역사비교언어학은 발전을 거듭해 수많은 언어들의 친족 관계를 밝혀내었습니다. 그 결과 수많은 어족들을 만들게 되지요. 그렇다면 어떤 기준으로 어족을 설정하는 것일까요?
2. 어족의 설정
어족의 설정에 있어 가장 중요한 요인은 음운 체계의 대응입니다. 음운은 각기 언어의 화자들이 가지는 심리적인 소리의 체계라고 바 있습니다. 자세한 설명은 이전 글을 참조하시면 도움이 될 듯합니다. (알아두면 쓸데없는 언어지식 1 : 김을 왜 '킴'이라고 할까? - 링크) 만약 두 언어 간의 음운 체계를 비교했을 때 명확한 공통점이 있고, 그 공통점을 바탕으로 지금은 사라진 공통 조어의 음운 체계를 재구축할 수 있다면 같은 어족일 가능성이 높습니다. 이것은 달리 말하면 언어 간의 친족 관계를 설정하기 위한 필수조건이라고도 말할 수 있습니다.
정확히 감이 오지 않으실 겁니다. 저도 처음에 듣고 이게 도대체 무슨 소린가 했었거든요. 그럼 지금부터 간단하게 음운 체계를 비교해서 어족을 설정하는 과정을 보겠습니다. 첫 번째 단계는 비교 대상인 언어들의 어휘를 수집하는 것입니다. 아무 단어나 수집하지 않습니다. 기초어휘를 중점적으로 수집합니다.
기초어휘란 다른 언어에서 차용되지 않았고, 각 언어에서 오랫동안 전해 내려온 단어를 의미합니다. 예를 들어 태양, 달, 팔, 다리, 가족 명칭, 낮은 단위의 숫자 등입니다. 복잡한 개념 같은 현대의 단어들은 언어 사이의 계통적 관계를 입증하는 데 사용되지 않습니다.
아래의 표는 1~5를 뜻하는 여러 언어들의 음성 표기입니다.
독일어와 네덜란드어, 터키어를 비교해보면 독일어와 네덜란드어가 훨씬 더 음성적으로 비슷하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당연히 독일어-터키어 혹은 네덜란드어-터키어보단 독일어-네덜란드어 간의 계통적 연관성이 더 짙어 보입니다. 다시 말하면 독일어와 네덜란드어는 언어는 한 어족에 포함될 가능성이 높습니다. 이 둘을 좀 더 들여다보겠습니다.
6부터 10까지의 표기입니다. 위를 통해 음성 표기가 비슷할 뿐만 아니라, 규칙적인 대응을 보여주고 있음을 알 수 있습니다. 예를 들어 독일어에서 말머리에 [s]가 등장하면, 네덜란드에서는 [z]로 등장합니다. 또한 독일어에서 말머리에 [z]가 등장하면, 네덜란드어에서는 [t]로 등장합니다. 이와 같은 방법으로 많은 비교 대상 언어들의 수많은 기초어휘를 수집한 후 음운 체계의 대응을 발견할 수 있다면 해당 언어를 같은 어족으로 묶을 수 있습니다.
그러나 비슷한 음성 대응을 보인다고 무조건 같은 어족으로 묶는 것은 아닙니다. 예를 들어 중국어와 한국어의 숫자 표기도 음성적으로 비슷한 부분이 있습니다.
그러나 우리는 한국어와 중국어를 같은 어족으로 분류하지 않습니다. 왜냐하면 숫자 외의 다른 기초어휘에서 예를 찾아보기 힘들고, 이들 언어의 문법 구조가 유사성을 보여주지 못하기 때문입니다. 숫자의 음성 표시가 비슷한 것은 단순히 한국어의 숫자가 중국어에서 차용되었기 때문이라고 볼 수 있습니다.
3. 공통조어의 재구축
위에서 독일어와 네덜란드어를 한 어족으로 묶은 것처럼 여러 언어들을 한 어족으로 묶고 나면 공통조어를 재구축할 수 있습니다. 음운론적 체계, 통사적 구조 등을 고려해 공통조어를 재구축하는 것이죠.
공통조어를 재구하는 데는 많은 어려움이 따릅니다. 일단 이론언어학에 대한 해박한 지식이 있어야 합니다. 음운 변화와 통사적 구조와 같은 분야에 대한 지식이 필수적입니다. 또한 공통조어는 본질적으로 사어(死語)입니다. 녹음본도 없고, 기록물도 없는 관계로 재구축된 언어가 올바른 모습이었는지는 알 수 없습니다. 말이라는 것은 끊임없이 변하기 때문에 어떤 시점부터 언어분화가 되었는지 특정하기도 힘들죠. 그래서 학자마다 의견이 갈리는 부분이기도 하고요.
그래도 인도유럽어족은 이 분야에서 가장 활발하게 논의된 어족입니다. 학자들마다 다르긴 하지만 원시인도유럽어까지 재구해 내는 경지에 이르렀지요. 공통 조어 재구축 과정을 장황하게 설명하는 대신 그 모습을 엿볼 수 있는 영상을 가져왔습니다. 리들리 스콧의 영화 <프로메테우스>의 한 장면인데, 안드로이드 데이빗이 원시인도유럽어를 배워 사용하는 모습을 보여줍니다.
https://youtu.be/ZTOcA_y1R_U
영화 <프로메테우스>에서 데이빗이 원시인도유럽어를 학습하는 장면
지금까지 어족과 그를 다루는 역사비교언어학에 대해 가볍게 알아보았습니다. 사실 언어학자가 아니면 이런 지식들이 세상 살아가는데 그렇게 필요하지는 않습니다. 기를 쓰고 외울 필요도 없습니다. 그래도 마음 한구석에 ‘이런 게 있군’하는 식으로 기억해두시면, 쓸 데가 생길 수 있지... 않을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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