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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제] 시오니즘의 자발적 동조자가 될 것인가

2001.5.10.목요일
딴지국제부 데이먼

지난 기사 팔레스타인 해방전쟁을 아느냐가 나간 이후 필자, 수많은 분들에게서 지지와 격려의 편지를 받았다(그에 상응하는 폭탄메일들 역시 감사히 전해받았음은 물론이고). 그 중 많은 독자 여러분들이 현 시대에서 유태인이 차지하는 경제, 문화, 정치적 헤게모니에 대해 궁금증을 물어오셨더랬다. 그래서 필자. 이번 기사에서는 다윗의 별에 의해 재단되고 오독되어 온 역사에 대해 간단히 그러나 학실히 까발려 보도록 하겠다. 먼저 이 필자, 하늘에 맹세컨데 인종주의자도 아니며 한 독자분의 친절한 메일에 쓰여있었던 것처럼 네오 나치와는 더더욱 아무런 관련도 없음을 밝히고 들어간다.
 

 

  반유대주의의 역사    




 
 

 

2000년 이상 자의반 타의반으로 유랑민족으로 지내온 유대인들, 그들의 역사를 그야말로 고난의 역사라는 말이 적절하다. 선민사상에 근거한 그들 특유의 배타적인 집단주의와 함께 "예수를 못박아 죽인 민족"이라는 명분 때문에, 사회적으로는 물론 카톨릭 교회에서도 배척받았다. 결국 1215년 카톨릭 공의회가 공식적으로 반유대주의를 선언하자, 그들은 게토라 불리우는 유대인 거주지역에서 집단적으로 유대인 마크를 달고 살아가야했다.  

 

이후 중세봉건 사회의 해체를 가져왔던 흑사병은 더더욱 유대인들에게 가혹한 시련이었다. 사람들은 흑사병을 유대인들이 만들어낸 음모라고 믿었고 이같은 음모론은 집단적 광기에서 터져나온 무차별적인 테러와 학살을 불러 일으켰다. 이러한 개인적 편견들은 국가적 제도적인 유대인 박해 법 제정으로 향했고 14세기부터 유대인 추방령이 시작된다.

 

그들은 나라없이 떠돌면서 생존을 위한 자기개혁을 끊임없이 해야만했고 공직진출이나 땅의 소유가 제대로 허용되지 않았으므로 그들은 돈에 집착할 수 밖에 없었다. 이러한 그들 특유의 민족성 또한 박해와 편견의 원인이 되었다(베니스의 상인에 나오는 독종 고리대금업자 샤일록 역시 유대인이다).

 

이후 대다수의 유대인들은 러시아와 동유럽에 정착하여 살게 되었고(지금도 수많은 유대인들이 이곳에 거주하고 있다) 프랑스 혁명 이후엔 최소한 법적으로는 사회활동이 자유롭게 되었다. 그러나 모두가 알고 있듯이, 제도적 박해가 사라진다고 해서 개인적이고 사회집단적인 편견과 박해가 저절로 눈녹듯이 사라지느냐? 물론 그것은 아니다. 오랜전통을 가진 유럽의 반유대주의는 이후 홀로코스트에서 증명되었고 지금도 여전한, 현재진행형의 문제다.

 

그렇다면 반유대주의의 상징이며 인간역사의 가장 수치스런 일로 여겨지는 나치의 유대인 집단학살 홀로코스트에 대해서 여러분은 얼마나 잘들 아시는가. 어느 역사책에건 정설로 규정되어진 600만 학살설, 그리고 쉰들러의 리스트와 같은 헐리우드 공장제품에서 우려내는 그 광기의 스산한 묘사들. 그 외에 우리는 무엇을 알고 있는가. 우리는 이것들에 대해 의문을 품어 본 적이 있었던가?




 
 

 

팔레스타인의 인권을 유린하고 학살을 자행하고 있다는 이유로 홀로코스트 같은 유대인 집단학살이 가지는 역사적 가치를 부정하고 싶은 생각. 이 필자. 전혀 없다. 그 집단적 파시즘의 광기에 희생당한 원혼들에 가슴이 떨려 눈물이 흐른다.

 

그러나 생각해보자. 유대인이 집단학살을 당했다고 해서 그들의 모든 역사적 주장을 무작정 믿을 수는 없다. 유대인이 박해를 당한 것은 사실이지만, 그것도 어디까지 소설이 아닌 사실에 바탕하고 있어야 한다. 유대인들의 주장을 넘어서 역사의 진실을 찾겠다고 했을 때 네오나치즘이라 해서 비난해버리는 지금까지의 관행이 과연 옳은 것이었을까.

 

그럼 간단하게 질문을 던져보자. 왜 쉰들러의 리스트에는 유대인 밖에 없느냐고.

 

 

 

 홀로코스트에 관한 4가지 거짓말  

 

 홀로코스트는 단지 유대인 학살인가?

 

물론 아니다. 2차대전중 아우슈비츠와 같은 강제수용소들은 유대인들만을 수용하여 학살한 것이 아니라 동성애자, 집시, 장애인들과 같은 사회적 소수계층과 또한 폴란드인, 러시아인과 같은 슬라브 계열의 인종을 동시에 포함하고 있었다. 홀로코스트에 관련된 미디어들은 언제나 홀로코스트 = 유대인 학살이라는 공식을 일반화하여 강요하지만, 이러한 미디어 놀음에 의해 유대인을 제외한 다른 엄청난 희생자들은 쥐도 새로 모르게 잊혀져왔다. 그러니까 우리는 지금까지 한번도 쉰들러의 리스트에서 유대인 이외의 사람들을 보지 못해 왔던 것이다.

 

 정말 600만명(아우슈비츠에서 400만명)의 유대인이 2차대전동안 학살당했나?

 

지금현재 가장 보수적이고 유대편향적인 역사학자조차 모든 원인(학살, 질병, 자연사 등)을 다 포함하여 4백 50만정도의 유대인이 2차대전동안 사망한 것으로 추정한다. 그러나 이같은 추정또한 매우 잘못된 역사적 왜곡임은 다음에서 드러난다. 1989년 이스라엘의 유대인 역사학자 야후다 바우어는 4백만이 아우슈비츠에서 학살당했다는 설정은 완벽한 신화라고 주장했고, 1990년 아우슈비츠 뮤지엄(The Auschwitz State Museum)은 4백만설을 갑자기 부정하고 유대인이든 아니든 모든 희생자는 대략적으로 100만이었다라고 발표했다. 태생적으로 친유대적일 수 밖에 없는 미국의 주간지 뉴스위크 역시 아우슈비츠 해방 50주년 특집 기사에서 아우슈비츠의 희생자를 대략적으로 110 ~ 150만으로 잡았다. 그렇다면 우리의 역사책과 상식을 지배하는 600만 희생설은 대체 무엇인가. 400만 아우슈비츠 희생설이 광범위하게 사람들의 무의식을 장악하고 있는 지금, 왜 아무도 사실을 알리려 하지 않는가.

 

 모든 유대인은 조직적이고 계획적인 학살에 의해 희생당했나?

 

강제수용소에 있었던 수많은 유대인 희생의 원인에서 매우 큰 부분은 질병과 독일의 붕괴이후 찾아왔던 기아였다. 유대인 역사학자이며 프린스턴대의 교수인 아르노 메이어는 자연적인 원인으로 사망한 유대인 희생자가 비자연적인 원인으로 사망한 수보다 더욱 많았다고 밝혔다. 그리고 질병과 기아는 독일인을 포함한 모든 2차대전 희생의 매우 중요한 원인이다.

 

 아우슈비츠에 대한 많은 신화들은 사실인가?




 
 

 

가스실에 대해서는 여전히 수많은 논쟁들이 존재한다. 논쟁에 있어서는 언제나처럼 매우 영리하고 타협적인 스필버그가 영화에서 가스실의 공포를 다루는 듯 하다가 사실은 그곳이 샤워장이었음을 보여주었던 것처럼, 비르케나우 보조 수용실에 있었다고 전해지는 가스실의 흔적들은 가스실 존재여부의 확실한 증거들을 주지 못하고 있다. 시체를 소각하던 거대 소각장의 존재여부와 가스실에 대한 소문이 증폭시킨 공포가 만들어낸 신화라는 설도 존재한다.

 

 나치는 유대인의 기름을 짜서 비누를 만들었나? 이건 아우슈비츠에 대한 가장 말도 안되는 개소리라는 것이 일찌기 입증되었다. 1990년 이스라엘의 공식적인 홀로코스트 기념관 Yad Vashem에서는 인간비누 이야기는 완전한 허구라고 단정지었다. 그들은 이러한 허구를 유포시킴으로써 우리가 받을 수 있는 비난들을 멈추고, 홀로코스트 부정론자들에게 무기를 주지 말아야 한다라고 했다.

 

 안네 프랑크는 알려진것처럼 아우슈비츠의 가스실에서 죽어간 것이 아니라 소련군에 의한 유대인 해방이후 병원으로 옮겨져 치료를 받던중 티푸스로 죽었다. 이는 공식적인 기록이 남아있다.

 
 

 




 
 

 

뉘른베르크 재판 초기에는 유대인들을 학살하는 전기감전 컨베어벨트가 있어서 빠른 시간내에 그들을 죽이고 화장해 곧바로 근처의 배추밭에 그들을 비료로 뿌려주었다, 유대인들을 순간적으로 증발시키는 최신기기로 유대인들을 도살했다라는 허무맹랑한 이야기들조차 있었고, 더욱 놀라운 것은 뉘른베르크 재판에서 이같은 픽션들이 진지하게 논의되어졌다는 것이다. 그 이후 인간비누와 같은 수많은 허구들이 사실인 듯 짐짓 시치미를 떼고 사람들에게 강요되어져왔다.

 

위의 사실들은 가장 보수적인 유대인 학자들조차 인정하는 공인된 것들이다. 600만명 학살설이나 비누를 짰다는 등 하는 주장들은 분명히 허구이고 과장이고 공인된 거짓말이다.

 

나치의 패전이후 그 짧고 사악한 역사의 희생자로서 유대인들은 전세계적인 동정을 받아왔다. 또한 승전국으로서 2000년만의 국가건설을 쟁취하기도 하는 등 많은 이득을 누려왔다. 그러나 지금 그들은 그 역사의 교훈을 잊어버린채 또다른 홀로코스트를 소수에게 자행하고 있는 중이다. 과거에 희생당했다는 것이 현재의 잘못을 덮어주는 면죄부도 될 수 없거니와, 그 과거의 희생 자체가 너무나 과장되어 믿겨지고 있다는 데 문제가 있다.

 

 

 

 세계를 뒤흔드는 큰손의 정체   

 

현대사, 특히 경제사의 많은 부분들에 있어서 ‘유대인 배후설’은 그리 낮설은 것들이 아니다. 그렇다면 전세계 1천 4백만의 인구를 가진, 극히 소수에 불과한 유대인들의 권력은 실지로 어느 정도에 미치는 것일까. 세계인구의 0.3%인 그들이 획득한 헤게모니를 살펴보자.

 

미국전체 인구에서 유대인이 차지하는 비율은 3%이다. 그러나 1백대 기업 소유주의 40%, 백만장자의 20%, 국회내 의원의 10%, 동부 명문 대학교수들의 60%가 유대인이다. 미국에서도 오랫동안 존재했던(그리고 지금도 존재하는) 반유대주의에도 불구하고, 경제분야에 있어서 유대인이라는 딱지는 곧바로 권력의 핵심에 도달할 수 있는 새로운 귀족계층임을 의미한다. 특히 이들은 금융, 귀금속, 영화나 통신분야등의 미디어나 고부가가치 산업에서 발군의 사업력을 획득하고 있다.

 

이러한 유대인의 돈은 미국의 이스라엘 정책에까지 깊숙이 그 영향력을 행사하고 있다. 에이팍(AIPAC : American Israel Public Affairs Committee)이 대표적인 기관으로 이 기관의 목적은 미의회를 로비하여 친이스라엘 정책을 확보하는 것이다. 엄청난 자금력이 승부를 결정하는 거대한 요소중 하나인 미국 대통령 선거에까지 이들의 영향력은 절대적이다. 이들은 상하원 선거자금의 거의 30~40%를 관리하며 미국내 모든 중요한 선거를 좌지우지한다. 그리고 그들의 돈으로 당선된 정부가 그들의 모국인 이스라엘에 대한 충성적인 지지를 감행해야 함은 당연한 일이다.

 

그들의 적인 아랍국가들을 견재하기 위해 테러리즘의 종식이라는 기치로 대이란 테러법등을 비롯한 대아랍 정책들을 만들도록 유도하기도 하고, 소비에트 연방시절에는 러시아의 오랜 반유대주의를 내세워 대 소련 정책들에 깊숙하게 힘을 행사하기도 했었다. 다음 예들을 살펴보자.




 
 

 유대인 자금으로 대통령에 당선된 케네디는 당선후 당시 이스라엘 수상에게 "내가 유대인 자금으로 당선되는 빚을 졌으니, 무엇을 도와드릴까요"라고 했다. 그리고 이후 이스라엘 정부가 오랫동안 원했던 호크 대공미사일의 판매를 승인했다.

 

친 이스라엘 성향이 더욱 강했던 존슨 대통령 정부는 64년도에 4천만달러였던 대 이스라엘 원조액을 66년에는 1억 3천만 달러로 늘렸다.

 

 이스라엘 건국 50주년 행사에서 클린턴은 우리 두 나라간 특별한 관계는 영원할 것이라는 메시지를 전했고 이후 백악관에서 이스라엘 조상들의 용기를 칭송하는 연설을 했다.

 

더욱 더 무시무시한 것은 이러한 모든 구체적 정책들을 거르고 걸러서 일반인들을 감화시키는 그들의 능력이다. 물론 매스-미디어의 힘으로 이 모든 것이 가능하다. 미국 뉴욕타임즈, 워싱턴 포스트, CBS방송 회장, 타임워너, 월스트리트 저널등 권위있는 많은 언론사의 최고 경영자나 회장이 모두 유대인이며 매년 조사되는 헐리우드 파워 100인 리스트의 60%이상이 언제나 유대인이다(대배우 말론 브란도는 한 인터뷰에서 "헐리우드는 유대인들에 의해 장악된 그들의 심부름꾼이다"라는 요지의 말을 했다가 이후 기자회견을 열어 울면서 사과성명을 냈어야만 했다. 이 전설적인, 그리고 직설적이고 거침없는 언행으로 유명한 노년의 배우가 울면서 기자회견을 열어야만 했던 이유는 무엇일까).

 

러시아의 경우는 더욱 심각하다. 근본적으로 사회주의 혁명의 다수세력이 유대인이었으며 이후 소비에트 권력의 핵심은 언제나 그들이 차지하고 있었다. 이런 상황은 지금도 전혀 달라지지 않았다. 자본주의화의 거센 혁명속에서 신음하는 러시아 민중의 피를 빨아먹고 사는 러시아 7대 신흥재벌중 6명이 유대인이며, 러시아 거대 언론재벌은 모두 유대인 소유이다. 그리고 러시아 전체 경제의 절반이상을 차지하는 지하경제를 만들어 러시아를 흔들어대는 경제마피아 역시 유대인의 자본 아래서 움직인다. 성공적이었던 푸틴 대통령의 재벌신문사 해체에서 러시아 시민들이 보여주었던 절대적 지지는 이같은 이유있는 반유대주의에서부터 기인한 것이다.(김대중정부와 좃선일보와의 전쟁에서 외국계 언론들이 보여주는 친좃선적인 반응들과 마찬가지로, 푸틴역시 이런 서방언론으로부터 언론의 자유를 파괴하는 독재자라는 말들을 들었다)         

 

유대인들이 잘나서 성공한 것이 배 아프다는 게 아니다. 유대인에 대한 호의적인 여론의 배경에는 그들의 힘이 작용하고 있다는 것이다.
 

 

 시오니즘의 자발적인 동조자가 될것인가  

 

필자. 예전 어학연수 시절에 한 러시아계 유대인 가정으로 저녁식사초청을 받았더랬다. 대접을 거나하게 받고서 히죽거리며 발코니에서 담배를 피고 있는데 유대인 가장이 다가와서 이것저것 대화를 나누었다. 한국의 대기업들에 대한 선망을 이야기하던 이사람, 갑자기 물었다.

 

"너 여기와서 친구들 많이 생겨서 좋겠다."

 

"응 그래. 지금은 여기 떠난 친구들 모두 너무 보고싶어. 유럽에 있는 친구들 만나러 내년에는 꼭 배낭여행을 갈까 해."

 

그러자 이 사람 이렇게 얘기한다.

 

"그럼! 당연하지! 나도 이민오기전 러시아에 있을 때 미국넘 몇넘 대접해 준 일이 있었는데, 여기 오자마자 바로 그넘들 찾아갔었지. 그넘들은 나 잘 기억 못하드라만은. 내가 준만큼 받아야할거 아냐. 그땐 그넘들이 갚을(pay back) 차례였으니까."

 

물론 이것은 필자 개인적인 경험이지만, 인간관계를 빚짐-갚음의 관계로 치환해버리는 그 사고방식에 싸늘한 한기를 느꼈었다. 물론 특수한 경험의 일반화가 내포하는 오류의 가능성을 필자역시 잘 알고 있다. 그러나 더 이상 이러한 경험들을 특수한 것으로 무시해버리기 힘든것은 2천년의 서러운 역사속에서 빚진것들을, 지금에 와서 더욱 소수의 힘없는 대상에게 갚아버리는 그 무서운 집단적 파시즘의 순환과 그것을 지탱해주는 자본과 미디어의 굴절된 권력이 머릿속에 떠오르기 때문이다.




 
 

 

그 오랜 박해의 역사속에서 유대인들이 겪었던 고통은, 결코 사라지는 것이 아니며 사라져서도 안된다. 누가 홀로코스트를 잊어버리는가. 그것을 인류는 기억하고 끄집어내어 교훈을 체득해야 함이 당연하다. 그러나 자신의 민족만을 선민으로 규정하고, 역사와 경제, 사회체제를 왜곡하여 초세계적인 헤게모니를 장악하려는 그 엇나가는 시오니즘은 그들 스스로가 가장 경계해야만 하는 두려운 존재임을 자각해야 한다. 괴물과 싸워온 그들이지만 결코 스스로 괴물이 되는 것을 방치해서는 안된다. 그리고 그것을 경계하며 유대인 자본속에 장악된 주위의 미디어들에 숨어있는 시오니즘 프로파간다를 골라내는 것은 필자 비롯한 독자제하 여러분 몫이다.

 

필자. 멀더를 자청하는 음모론자도 아니고 네오나치 인종주의자도 아니다. 한가지 명제에 얽매여 다른 한쪽의 역사를 바라보지 않는 것, 바로 그것이 파시스트적 세계관이다. 유대인은 과거 파시즘의 희생양이었지만, 지금 그들은 자신들의 과거 가해자들과 똑같은 모습을 보이고 있지 않은가. 이후에 바라보는 진실은 거기에 있다. 거기 밖에 있는 것이 아니라. 그리고 거기에서 우리의 모습을 바라보는 거울을 찾자.

 

 

 

 에필로그   

 

예전 한 아르헨티나의 유대단체가 아르헨티나 인들을 대상으로 다음과 같은 설문조사를 했다.

 

당신은 아르헨티나에 살고있는 민족중 어떤 민족을 가장 싫어하십니까?

 

물론 이 설문조사는 인종차별이 거의 없다시피 한 남미에서의 반유대주의를 조사하기 위한 것이었다. 놀랍게도 여러분, 유대인은 하위리스트를 차지했으나 2위는 꼬레안이었다. 필자역시 개인적으로 친분을 두고있는 아르헨티나 친구가 있는데, 이 친구 나중에서야 조심스럽게 말하길 첨엔 한국인이라 경계했었어란다. 왜 이런 일들이 벌어지는가. LA 흑인폭동에서는 왜 한국인 가게들만이 불타올랐던가. 여러 독자분들께서 한국의 민족주의는 함부로 건드리지 말라고 근엄하게 충고하셨더랬다. 그러나 이것이 바로 그 한국적 민족주의가 세계에서 차지하는 위상이다.

 

유대인처럼 우리는 세계 어느나라에서 어떤 국적을 가지고 살아가든 한국인이라고 생각한다. "언젠가는 돌아가야 할 땅 한국"이라고 입을 모아 이야기한다. 물론 그러한 근본적인 가슴의 민족주의를 비난할 수는 없다. 그러나 유대인들처럼 그 국가의 경제적 사회적 문화적 질서를 받아들이기를 소홀히하면서 경제적 이득에만 열을 올리고 그 경제적 이득을 자신들이 살고 있는 국가의 다른 구성원들에게 환원하는 것을 거부하는 한국인들.

 

민족이란, 자신이 살고 있는 국가의 다른 구성원들의 이익에 우선하는 절대선인가? 가슴의 민족주의는 정녕 이성의 민족주의로 대체되어질 수 없는 것일까? 진정으로 민족은 우리에게 국가의 도덕적 개념조차 능가해버리는 이데올로기여야 하는가?

 

질문의 대답은 여러분의 방에 있는 거울속에 있다. 거울속의 유대인에게 질문을 던져보라. 아주 친절하게 우리의 손을 덥썩 잡으면서 형제!라고 반가워하지 말란 법 있나? 

 

 

딴지 국제 지역분쟁 전문가
데이먼(closer21@hotmail.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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