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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별걸다 디벼보기 위원회] 성장영화 좀 만들어라!!

2001.5.14.월요일

딴지 영진공 별걸다 디벼보기 위원회
 


 

 

 나는 변화가 싫어요

 

당신은 오랜만에 만난 친구로부터 "너 참 많이 변했다"라는 말을 듣는다면 어떤 기분이 드는가? 지난 시절의 자기 모습이 전혀 마음에 들지 않았던 일부를 제외하고 대다수의 사람들은 아마도 씁쓸한 기분을 느낄 것이다.

 

사실 사람들은 변화하는 것을 별로 원하지 않는다. 우리 같은 평범한 사람들은 애초에 살던 방식대로 계속 살수 있기를 바라며, 머리에 피 마르고 나서 알게 된 세상의 모습이 죽을 때까지 유지되기를 바란다. 그리고 변화하는 것 말고는 다른 어떤 탈출구도 없는 궁지에 몰려야 간신히 쬐금 변화한다. 조언이나 충고가 사람의 행동을 변화시키는 데에는 전혀 쓸모 없는 것도 같은 이유다.

 

그러나 우리가 성장하기 위해서는 변화를 해야 한다. 우리 사회도 마찬가지다. 개혁이라는 것은 결국 변화를 뜻한다. 개혁이 제대로 이루어지려면 시스템과 사람들이 제대로 변화해야 한다.

 

그래서 대부분의 사람 사는 세상에서는 변화를 피하려는 분위기와 함께 변화를 추구하려는 분위기도 존재한다. 변화를 추구하는 분위기가 많을수록 그 사회는 활력을 가지고 있다고 말한다. 그런데 말이다. 문제는 우리나라 사람들의 변화 혐오증은 아무래도 좀 심한 것 같다는 거시다. 이건 머리에 똥찬 인간들이 떠들어대는 "개혁피로감" 어쩌구의 문제가 아니다.

 

그냥 변화가 싫은 거다. 그리고 사회 전반적인 분위기가 변화를 싫어하는 것이다.
 

 

 변화는 배신이요 타락이다?

 

나는 발달심리학을 공부하는 박사 수료생이자 강사다. 그래서 본 우원 가끔씩 대학에서 학생들에게 강의도 한다. (글타... 본 위원, 머리에 먹물 많이 들었다. 그래서 쉬운 말도 어렵게 하는 더러운 습관이 있다. 그래도 어쩌겠냐...나는 우원이고 너희들은 독잔데... 알아서 참아야지)

 

그런데 발달심리학을 강의하면서 "발달심리학이란 인간 마음의 변화를 과학적으로 탐구하는 학문" 이라고 학생들에게 설명하면, 학생들은 "아, 그렇구나!"라고 생각하기보다는 좀 찝찝해 하는 것 같다.






 
 

 

교수님! 구라까지 마세요

 

적응 이라는 개념에 대해서도 마찬가지다. 학생들은 적응이라는 단어를 듣자마자, 그것은 환경에 맞추어 자신을 변화시키는 (굴욕적인) 과정이라고 간주하고는, 우선 매우 안타깝게 생각한다. (실제로 적응은 그렇게만 이루어지지는 않는다. 우리들은 환경에 맞추어 자신을 변화시킬 뿐만 아니라, 우리가 더 잘 살 수 있는 환경을 스스로 찾아가기도 한다)

 

그러면서 "적응을 하는 게 당연할 뿐만 아니라 지능이 높을수록 더 적응을 잘하는 것"이라는 내 설명은 거의 악마의 속삭임처럼 생각하는 것 같다.

 

이런 학생들을 붙잡고 적응이 얼마나 좋은 것인지 설명하다 보면, 나는 이런들 어떠하리 저런들 어떠하리를 읊으며 변절을 설득하던 이방원이 되고, 학생들은 이 몸이 죽고 죽어를 읊으며 절개를 외치는 정몽주가 되는 것 같다. 지금 생각해보면, 아마 발달심리학에 대한 내 설명도 그들에게는 "발달심리학이란 인간이 망가지고 타락해 가는 과정을 지켜봐야 하는 학문" 이라고 들렸던 것 같다.

 

그런데, 우리나라 사람들이 변화를 나쁘게 생각한다는 건 다음 예들을 봐도 금방 알 수 있다.
 

 

 도대체 왜 변화는 배신이요, 타락이요, 죽음이냔 말이다

 

내가 좋아하던 밴드 봄여름가을겨울 의 노래 중에는 <사람들은 모두 변하나봐> 라는 제목의 노래가 있다. 그 노래에서도 사람들이 변하는 것은 기쁜 일이 아니라 어딘지 모르게 씁쓸한 일로 묘사된다. 가수는 "나는 변하지 않고 싶은데 남들이 모두 변하니까 나도 변해야겠구나..." 라고 노래한다.

 

그 외에 대중가요에서 변화는 대부분 연인들의 마음속에서 일어나는데 그 결과는 변심(變心)이다. 변심한 애인에 대한 애절한 한을 노래하는 대중가요는 예나 지금이나 끊임없이 쏟아져 나온다. 그런데 이렇게 변화를 부정적으로 묘사하는 매체는 노래뿐만이 아니다.

 

<박하사탕>이라는 영화에서 주인공은 여러 가지 우여곡절을 겪으면서 계속 변화하지만 변화의 결과는 주인공으로 하여금 절망과 좌절만 가져다 준다. 그래서 주인공은 결국 철로에 뛰어들어 "나 (변화하기 전으로) 다시 돌아갈래!"라고 외친다.






 
 

 

나 다시 빠꾸할래~

 

영화 <투캅스>에서 묘사되는 주인공의 변화는 또 어떤가. 민중의 지팡이가 되겠다는 사명감으로 투철히 무장하고 임무 배치된 신참형사 박중훈은 부패한 선배형사 안성기와의 만남을 통해 점차 변해간다. 그러나 그 변화의 모습은 자기 주머니를 채울 줄 아는 뱃심과, 힘든 일을 쉽게 해결하는 요령을 습득하는 것이다. 결국 영화가 끝날 때 즈음에 박중훈은 또 한 명의 안성기 형사가 되어 있다.

 

심지어 좋게 변화한 주인공조차도 다양한 방법으로 응징을 당한다.

 

예를 들어, 영화 <쉬리>에서 변화하는 인물은 북에서 남파된 저격수 이방희다. 그녀는 엄격한 사상교육과 군사훈련을 통해서 임무수행을 최고로 아는 냉정한 저격수로 남파되지만, 한석규와의 사랑을 통해서 점차 변해간다. 그녀의 변화는 분명히 좋은 일이었다. 그러나 그녀는 결국 자기가 사랑했던 남자의 총에 이마 한 가운데를 맞고 죽는다.

 

<공동경비구역 JSA> 도 마찬가지이다. 냉전시대의 사고방식에서 탈피해 이념보다는 동족 이라는 생각으로의 변화를 보였던 이병헌과 김태우는 모두 자살하고 만다. 왜 감독은 그들이 변화한 채로 남아있게 놓아두지 못했을까? 단순히 분단현실 때문이었을까?

 

최근 영화 중에서는 단연 <친구>가 화제다. 최단시일 전국 600만 관객을 동원했고, 조만간 지금까지의 영화흥행기록을 모두 깨버릴 모양이다. 그런데 이 영화에서 묘사되는 변화 역시 별반 다르지 않다. "함께 있을 때 우린 아무것도 두려울 것이 없었다." 라는 영화의 광고문구에는 예전에는 이라는 한마디가 빠져 있다.

 

 

 

 

이 영화의 줄거리는 결국 "예전에 우리는 언제나 함께였고 겁날 게 없었는데, 언제부터인가 하나둘씩 변화하더니 마침내는 서로 죽고 죽이는 사이가 되고 말았다"는 거다. 그렇지 않은가. 장동건이가 계속 유오성이의 시다바리로 남아있었더라면, 친구끼리 죽고 죽이는 일은 일어나지 않았을 거 아닌가. "우리 너무 멀리 온거 갔다. 그만 돌아가자"라는 마지막 대사는 그래서 더 애절하지 않은가.

 

반면에 변화하지 않는다는 것은 대부분의 경우 미덕으로 간주된다.

 

만화 <공포의 외인구단>을 보자. 고아원 시절 까치는 엄지에게 난 네가 기뻐하는 일이라면 뭐든지 할 수 있어라고 약속한다. 그리고 어떤 댓가를 치르더라도 끝까지 그 약속을 지킴으로써 독자들을 감동시킨다. 무인도에 가서 그렇게 고생을 하고서도, 나중에는 동료들을 배신하고, 자기를 키워준 감독을 죽게 하고, 심지어는 자기 눈까지 멀어가면서 그 약속을 지키려 한다니...

 

솔직히 내가 보기엔 또라이인데, 사람들은 감동했던 모양이다. 그 이후 이현세 만화와 그 아류작들은 모두 이런 식이었으니 말이다.

 

대부분의 멜로 드라마에서도 마찬가지이다. 전형적인 스토리는 다음과 같다. 가난하지만 서로 사랑하는 남A와 여B가 있다. 그리고 그 곁에서 자기 사랑을 감추고 있는 남자 C가 있다. 그런데 A가 출세하면서 B를 버리고 다른 여자와 연애를 한다. 이제 C가 나타나서 좌절에 빠진 B를 보필하면서 A를 응징한다.

 

<젊은이의 양지>가 그렇고, <청춘의 덫>이 그렇고  최근의 <태양은 가득히>도 그렇다. 이 뻔한 스토리를 그렇게 우려먹어도 시청자들은 질릴 줄을 모른다. 아마도 시청자들은 변화한 주인공 A를 변함 없는 주인공 B나 C가 응징하는 모습을 보며 카타르시스를 느끼는 것 같다.

 

자, 우리가 지금까지 보거나 들어본 우리 이야기들을 하나하나 떠올려 보라. 그 중에서 주인공이 변화해서 좋게 되었던 이야기가 얼마나 있었나? 내가 기억력이 나빠서인지 모르겠지만, 본 위원 기억에는 거의 없다.

 

이렇게 변화를 죄악시하다 보니, 우리나라에서는 별 해괴한 일들이 다 일어난다.
 

 

 껏 생각해 낸다는 변화가 "처음으로 돌아가자"냐?

 

외환위기로 IMF의 구제금융을 받아야 하던 시기에 방송에서 떠들던 캠페인을 기억하시는가? 그것은 놀랍게도 "처음으로 돌아가자"는 구호였다. (심리학자들은 보통 이런 생각을 "퇴행적 사고" 라고 부른다.)

 

생각해보시라. 처음으로 돌아가면, 언젠가는 다시 이 자리(IMF 구제금융)로 돌아오고 말텐데 뭘 믿고 뒤로 돌아가자는 거였을까?

 

그런데 더욱 더 놀라운 것은 대부분의 사람들이 처음으로 돌아가자는 말에 공감을 했다는 사실이었다. 일제시대에 있었다던 국채보상운동을 재현한 "금모으기" 행사에 우리 국민들이 보여준 열성적인 참여는 내 생각이 틀리지 않았음을 증명한다. (그때 우리는 IMF 구제금융을 일본 제국주의로 착각하고 있었던 모양이다)

 

그럼 도대체 왜 사람들은 그 메시지를 그토록 열광적으로 받아들였을까? 그것 역시 우리가 갖고 있는 변화에 대한 이미지로 설명할 수 있지 않을까?

 

즉, 이 캠페인의 숨은 메시지는 "우리가 초심(初心)을 유지하지 못하고 마음의 변화를 일으켰기 때문에 지금 이런 벌을 받는 것이다"라는 것이었고, 여기서 전제로 하는 "변화한 자는 벌을 받아야 한다"는 주장에 동의한 것이 아니었을까?

 

어째서 변화는 배신과 변절이고 타락과 좌절과 죽음으로 가는 길이며 기어코 응징 당해야 하는 짓이라는 걸까? 이것은 허무주의와는 또 다르다. 허무주의자들은 변화의 끝에서 우리를 기다리는 것이 결코 좋은 일은 아닐 거라고 믿는다.

 

그러나 위에 열거한 현상들은 단순히 변화를 피하거나 비관적으로 보는 것뿐만 아니라, 주변에서 변화하려는 자를 응징함으로써 변화해서 좋은 일이 일어나는 꼴은 내 눈으로 안보겠다는 적극적인 의사표명처럼 보인다.

 

그럼 혹시 우리만 이런 게 아니라, 다른 나라에서도 변화를 싫어하는 건 아닐까?

 

그렇지 않다. 물론 배신자를 처단하는 이야기는 이 세상 어딜 가든 만날 수 있다. 하지만 모든 문화권에서 변화를 이렇게 부정적으로만 묘사하는 것은 아니다. 긍정적인 변화에 대한 묘사는 주로 성장드라마라는 장르에서 많이 나타난다.
 

 

 대표적인 성장만화, <슬램덩크>와 <드래곤볼>

 

보통 성장영화라고 하면, 그냥 어린애들이 어른이 되어 가는 이야기를 그린 영화인줄 안다. 그렇다면 <옥이 이모>도 성장드라마고, <비천무>도 성장영화 되겠구나. 한마디로 조까다.

 

물론 어린애가 어른으로 커 가는 이야기는 대부분 성장영화이긴 하다. 그러나 <비천무>같은 경우를 성장영화라 하지는 않는다. 성장영화라 함은, 단순히 어린애가 어른이 되어가는 이야기가 아니다. 성장영화는 그야 말로 사람이 성숙해 가는 과정을 다룬 영화들을 말한다. 독자여러분의 이해를 돕기 위해 예를 들어주겠다.

 

일본만화 <슬램덩크>를 보자. 주인공인 강백호는 타고난 불량청소년으로 농구에는 사실 아무런 관심이 없었지만, 단지 귀여운 여자에게 잘 보이고 싶어서 농구를 시작한다. 그런데 이렇게 불순한 동기로 농구를 시작한 이 친구는 만화가 끝날 무렵에는 부상을 당해서 선수생명이 끝날지 모르는 상황에서도 농구장에 서려고 한다.

 

  나는 변신했다. 이거야.....     

 

마지막 경기에서 심각한 부상을 당해 치료받던 강백호가 여자친구에게 들었던 "농구 좋아하세요?"라는 질문을 떠올리던 장면을 기억하시는가. 그때 작가는 강백호의 현재 모습부터 강백호가 처음 농구를 시작하던 순간의 모습(채소연이가 "농구 좋아하세요?" 라고 물어보던)까지를 플래시백(시간의 흐름을 거슬러 올라가기) 형식으로 묘사한다.

 

사족이지만, 이때 강백호가 벌떡 일어나서 "정말입니다. 진짜로 좋아해요" 라고 말하는 장면을 보면서 본 위원은 아직도 눈물을 줄줄 흘리곤 한다.

 

그렇다. 강백호는 계속 농구를 하고 있었지만, 그 행동의 동기는 조금씩 변화해온 것이다. 그리고 나중에는 처음 동기(여학생의 관심을 끌어보겠다던)는 사라지고 농구 자체가 삶의 의미로 다가온 것이다.

 

여기서 주인공의 변화는 매우 바람직할 뿐만 아니라(불량청소년에서 성실한 운동선수로), 아름답고 감동적이며, 그 변화의 결과 주인공은 성장한다.

 

물론 여기서도 변화가 배신처럼 해석될 사건들이 있었다. 예를 들어, 강백호나 정대만이는 농구를 하면서 점차 자기 깡패친구들로부터 떨어져나간다. 하지만 그 깡패친구들은 그것을 배신으로 받아들이지 않는다. 자기가 좋아하고 잘하는 일을 찾아낸 친구를 격려하고 응원할 뿐이다.

 

이것은 출판당시 엄청난 인기를 모으면서 모험만화의 전형을 제시했던 일본만화 <드래곤볼>도 마찬가지이다.

 

주인공인 손오공은 새로운 사람을 만나면서 조금씩 실력을 키우고 성장해간다. 그의 능력이 커질수록 더 강한 도전 대상이 나타나고 그 대상과의 경쟁을 통해 주인공은 더 성장한다. (이런 방식의 이야기구조는 최근 들어 게임산업과 손을 잡고 아예 진화해 가는 캐릭터를 도입하기에 이른다. 포켓몬이나 디지몬 같은 만화가 그것들이다)





 
 

 

나는 얼마나 변화를 좋아하는 지, 나중에는 초싸이아인으로까지 변화한다니깐...

 

그리고 이 과정 속에서 손오공과 대적하던 악역들도 변화한다. 천진반, 피콜로, 베지터는 처음에 손오공의 적이었지만, 결국 손오공과 친구가 된다. 그렇다고 그들이 손오공에 투항한 것은 아니다. 단지 좀더 현명해졌을 뿐이다.

 

또한 이런 과정에서 손오공은 계속 스승을 갈아치운다. 처음 스승은 무천도사였지만, 그를 능가하고 난 다음에는 고양이신선 카린에게서 수련 받고, 그 다음에는 신, 계왕에게서 수련을 받는다. 하지만 어디서도 그렇게 스승을 바꾸어대는 손오공을 배신자로 생각하지 않는다.






 
 

 

 

호스티스 만화 <여제>

 

심지어는 일본의 호스티스 만화인 <여제>에서 조차도 주인공이 시련을 겪으면서 성장하고 새로운 목표를 세우고, 삶의 전환을 경험하고 이전의 조언자에서 벗어나 새로운 조언자를 찾아간다. 물론 호스티스 만화이니 만큼, 이렇게 주인공의 삶이 전환기를 통과하는 과정은 늘 새로운 남자와의 잠자리에서 절정을 이룬다만 우쨌든....

 

이제 성장영화가 어떤 건지 필이 오는가?

 

그렇다. 성장영화란 사람이 어떤 계기로 변화를 일으키며, 그 변화의 결과 사람이 어떻게 더 성숙해지고 자신을 발견하며, 더 행복해지는지를 보여주는 영화를 말한다.

 

물론 앞서 말했듯이 우리나라 만화 중에도 변화를 통해 성장하는 주인공을 그린 경우도 있고, 일본 만화 중에도 변화를 부정적으로 묘사하는 만화도 많다. (<은하철도 999>는 변화를 부정적으로 보려는 일본만화의 전형이다)

 

예를 들어, <아스팔트 사나이>에서 시작해서 최근의 <타짜>로 이어지는 허영만, 김세영 콤비의 몇몇 작품들은 주인공이 주변사람들을 만나면서 성장하고 끊임없이 새로운 목표를 추구해 가는 모습을 (미약하나마) 보여준다.

 

그리고 최근 인기를 얻었던 드라마 <아줌마>에서 원미경은 남편에게 기죽어 사는 무지렁이 아줌마에서, 당당하게 자기 생각을 밝히는 인간 오삼숙으로의 변화를 보여준다.

 

하지만, 허영만의 만화는 한국 만화계에서 상당히 독특한 존재로서 그와 같은 스토리를 보여주는 다른 한국 만화는 본 적이 없으며, <아줌마>도 사람들의 관심은 원미경의 변화가 아니라 장진구의 망가짐에 맞추어져 있었던 것 같다.
 

 

 혹시나 했는데, 이런 배신을... 영화 <파이란>이여!

 

영화에서 변화를 부정적으로 묘사하는 게 뭐 그리 대수냐고 말하지 말라.

 

영화나 만화는 근본적으로 우리가 세상살이에 대한 꿈을 꾸는 곳이다. 우리는 영화를 보면서 세상살이에 대한 새로운 시선을 배우기도 하고, 세상살이에 대한 희망을 품기도 하고, 다른 이의 절망을 함께 경험하기도 한다. 영화 속 세상은 모두 우리의 삶과 똑같지는 않지만, 우리가 상상할 수 있는 거리를 던져주고 결과적으로 우리가 세상을 보는 모습에 영향을 준다.

 

우리 영화 속에서 변화에 대한 희망이 나타나지 않는다는 얘기는, 아직 우리나라 사람들이 변화에 대해 희망을 꿈꾸지 않는다는 뜻이다. 그것은 우리나라 사람들이 변화를 여전히 싫어하거나 두려워하고 있으며, 본 우원의 입장에서는 "변화하는 인간"을 다루는 발달심리학자들이 앞으로 한동안은 계속 환영받지 못할 것이라는 매우 유감스런 사실을 의미한다.

 

이런 본 위원에게 최근 실낱같은 희망을 던져주었던 영화가 바로 <파이란>이었다. <파이란>의 줄거리를 보며 본 위원, 어라? 이건 성장영화의 시작이 될 수 있을 것 같은데?란 생각을 했기 때문이다.

 

물론 최민식이 변화하는 계기가 좀 비현실적이긴 하지만, 사실 우리는 아주 사소하고 우스운 사건을 계기로도 변화하곤 하니까 뭐 그 정도야 받아들여줄 수 있다고 보면, 이 <파이란>은 적어도 변화가 구원으로 묘사되는 아주 드문 한국영화가 될 것 같았다. 그래서 드디어 우리나라에도 변화를 마음 속으로 받아들이려는 분위기가 시작되는 줄 알았다.

 

그런데 최근 본 우원, 청천벽력할 소식을 듣고 말았다.

 

최민식이.... 최민식이가 끝에 가서 죽는다며?

 

   미안... 나, 죽어...

 

도대체 왜들 이러냐? 왜 주인공이 변화해서 잘 사는 꼴을 못 보는 거냐?

 

우리나라 사람들로 하여금 변화의 끝에는 죽음이 아니라, 희망이 존재한다는 말 좀 해달란 말이다. 나도 발달심리학 하면서 먹고 좀 살자!!!

 

 

 

애니메이션 수습 검열우원 및
별걸다 디벼보기 우원회 검열우원
CZ75
(
jnga@dreamwiz.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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