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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민원] <파이란>에 쏟아지는 찬사, 이해할 수 엄따!

2001.5.14.월요일

딴지 영진공 민원 접수처
 




 
 

본 공사는 모든 관객 제위의 민원을 1년 365일 접수하고 있음이다.

 

따라서 최근 개봉하여 여러 관객의 똥꼬를 엑스타시 빠방하게 핥아줌으로써 좋은 평가를 받았던 <파이란>에 대한 민원도 수시로 접수되고 있는 상황이다.

 

비유띠 버뜨, 어떤 영화라도 모든 관객의 똥꼬를 핥아줄 수는 없는 법... 하여, <파이란>에 대해 강력한 이단 옆차기성 태클을 걸고 있는 민원이 접수되어 그 전문을 알리는 바다.

 

 

 

그간 딴지일보 영진공에 소개되던 신랄한 비판이 곁들여진 독자들의 자유투고를 보면 참 이해할 수 없는 점이 많았다. 그냥, 영화 재미있게 봤으면 되지 뭘 꼭 저렇게 짚고 넘어가나 하면서 말이다.

 

그러나, 바뜨!! 나도 이번에는 그냥 넘어갈 수 없다.

 

 

하도 할일이 없어 간 극장. 그 시간에 바로 시작하는 영화는 <파이란> 밖에 없었다. 게다가 요새는 재미있는 영화도 별로 없다. 별 망설임 없이, 그리고 아무런 사전 정보 없이 시작한 <파이란> 감상.

 

 

오호~ 초반에는 쫌 재미났다. 최민식 연기도 봐가면서. 그 디테일들에 놀라고, 최민식의 갖은 지저분한 짓에도 놀라면서. 그러나 영화가 중반을 넘어서자, 본인 졸고 싶었다. 본인은 엥간한 지루한 영화를 봐서 잘 졸지 않는다.

 

 

<내 친구의 집은 어디인가>와 <체리 향기>같은 엽기적으로 지루한 영화도 잘 봐내는 인내의 눈꺼풀을 가진 것이다. 그래서 그런지 졸고는 싶은데 졸음은 안오고, 나는 허리 좌우 꺾기, 앞뒤로 자세를 바꾸기, 꼰다리 헤쳐모여 등의 지루할 때 동원 되는 제반활동들을 반복하면서, 옆 친구를 꼭꼭 찔러 물어보기도 했다.

 

 

"야. 영화 시작한지 몇분이나 됐냐?"

 

 

얼마 후 딴지 영화 검열보고에서 <파이란>이 떴다. 허걱. 그리고 또 베스트 등급을 받았다. 오호 통재라! 이해할 수가 없었다. 영진공이 신파조에 관대하다는 것은 앵가니 알고 있었다. 그래도, 이번만은 참을 수 엄따.

 

 

그런데 내가 왜 이 영화에 대한 찬사에 이렇게 도시락 싸들고 말리러 다니냐구?
 

 

 

 리얼리티(Reality)의 부재

 

 

아니 <파이란>이 리얼리티가 부족해?

 

 

사람들은 의아하게 생각할지도 모르겠다. 그 실감나는 인천 뒷골목의 양아치 생활. 게다가 강재와 경수의 아파트(?)는 세상에 어쩌면 3류 양아들이 적어도 5-6년은 굴러먹은 듯이 생겼는지.... 그 꼬질한 벽지하며 쌓여있는 소품들 하며, 꼭 양아들을 세트로 묶어다가 합숙시키며 "어질러!" 하고 시킨 것 같다 말이지.

 

 

 

 

 

 

 

게다가 심지어는 그 비디오 테잎에 써 놓은 "파이란 봄바다", "XX돌잔치" 등등의 문구마저 중학교 중퇴했을 만한 꼬질이가 써놓은 듯한 글씨체 같았다는 점에서 <친구>를 능가하는 엄청난 디테일의 리얼리티가 있었단 말이다. 싸우는 장면도 괜히 멋있는 액션을 취하지 않고, 기냥 씨멘트 바닥에 머리 갈아놓고, 얼마나 리얼리스틱 하냐 말이다.

 

 

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결정적인 부분에서 고개를 갸웃거리게 하는 데 어쩔 것이냐. 그러니까 내 말인 즉슨....

 

 

왜 시골세탁소냐고...

 

 

파이란은 극중에서 보면 인신매매 비슷하게 매매된 사례다. 직업소개소에서 커미션 떼고, 중간 소개단계에서 커미션 떼고, 무엇보다도 위장결혼해 준 강재에게 커미션 떼고...

 

 

파이란은 중국에서 온 처녀고 따라서 당연히 돈이 없으니까 이 모든 것이 파이란의 몸값에 붙는 빚이다. 당연히 뽕을 뽑으려면 창녀촌이나 술집에 팔아 넘겨야 수지가 맞는 것이다.

 

 

그런데 아무리 파이란이 입의 벽이나 혀를 깨물어 피를 내어 결핵을 위장하는 간특한 꾀를 내었다 하여, 사람들이 그렇게 쉽게 포기하고 시골세탁소에 팔아 넘긴단 말이냐. 그 시골 세탁소, 정말 엄청나 보이던데(작고 외진걸로), 그런 데서 월급을 줘봐야, 소개소 일당들이 얼마나 돈을 뗄 것이며, 그게 어디 본전이 남겠냐 말이다.

 

 

중국인력을 팔아 넘기려면 훨씬 좋은 곳이 많다. 식당이야 말 잘 통하는 연변 한민족들이 와 있다지만, 공장이나 그런 곳에 팔아 넘기는 것이 더 남는 장사라는 말이다. 대체 중국사람 직업소개해서 등쳐먹고 사는 양아들이 그렇게 호락호락하게 동화같은 바닷가의 세탁소에 팔아 먹을 리가 있냐는 거다. 이건 동화다. 리얼리티가 아니다. 전반부의 리얼리즘과는 너무 떨어져 버렸다.

 

 

또, 내 말인 즉슨, 파이란은 왜 죽냐고...

 

 

 

 

 

 

 

 

 

난 왜 죽었을까?

 

 

 

 

 

 

 

처음에 기침해서 피 나온 거야, 파이란이 직업여성(?)으로 안 팔리려고 꾀를 내서 혓바닥 내지는 입안의 벽을 깨물은 거 아닌가. 근데 기침 쿨럭, 두번 하더니 죽대?

 

 

그러면 뭐 생각을 해봐야 결핵 정도일 것 같은데, 파이란은 일반 불법취업인과 달라서 무적인이 아니고, 적이 있으므로, 당연히 지역의보에 자동가입 될 꺼고, 그러면 의료보험도 있을 거고, 그러면 시골마을에서는 보건소에만 가도 결핵약을 구할 수 있을 거라는 게 내가 가진 상식이다.

 

 

근데 어찌된 영문인지, 파이란은 무슨 병으로 죽는지, 대체 병원에는 가보고 자신의 죽음을 확신하는 건지, 도무지 아무런 디테일이 나오지 않는다. 앞에 나온 강재의 디테일이 뛰어난 것과는 엄청나게 대조적인 것이다.

 

 

뒤에 가서 또 원작에 대한 얘기는 하겠지만, 원작에서 보니까 간질환으로 죽는다는 것이 명확히 명시되어 있었다. 원작에서의 파이란의 직업은 "인간세탁기"가 아니라 호스티스 내지는 직업여성(?)이므로, 알콜을 많이 대할거구, 피임약을 많이 먹을 거구, 그렇다면 간질환으로 죽는다는 것은 매우 설득력을 갖는다.

 

 

그 짧은 단편소설인 원작에서도 파이란의 죽음에 개연성이 있는데, 도무지 이 긴 영화에서는 파이란의 죽음에 대한 개연성을 보여줄 수 없다니, 이것이 바로 청순가련형의 인물이 "전 백혈병에 걸렸어요"하는 무작정적인 신파가 아니고 무엇이란 말인가.
 

 

 

 원작과는 이렇게 다르네요

 

 

물론 원작과 다른 것은 절대 잘못이 아니다. 일본을 배경으로 하는 그 짧은 단편소설과 영화는 같을 수가 없는 것이다. 그러나 굉장히 중대한 원작과의 차이가 하나 있다. 대체 원작에서 나오는 파이란의 직업은 왜 바꾼 것일까? 나의 이런 궁금증에 딴지일보는 명확한 진단을 내리고 있다.

 

 

당 영화의 시나리오까지 맡아 한 송해성 감독은 원작과는 다르게 파이란을 호스티스로 만들지 않습니다.

 

 

오히려 순결순수청초지고지순한 백치에 가까운 캐릭터로 만들어 놓은 것이죠. 호스티스보다는 훨씬 더 사랑받기 좋은 캐릭터 아닌가요. 그리고 이 정도 백치쯤 되는 여자여야, 위장결혼해 준 사람을 단지 친절하다는 이유만으로 혼자 외사랑할 수 있을 테니까요.

 

 

 

 

 

 

 

 

 

<파이란>의 원작이 된 아사다 지로의 단편집

 

 

 

 

 

 

 

과연 그럴까? 순결순수청초지고지순한 백치만이 위장결혼해 준 사람을 사랑할 수 있을까? 물론 "단지 친절하다"는 이유만으로 혼자 외사랑을 하려면 바보가 아닌 담에야 불가능할 것이다.

 

 

그럼 원작에서 파이란은 왜 "다카노 고로(영화의 강재)"씨를 좋아하냐. 그녀는 직업여성(?)으로서 많은 손님들을 응대해야 한다. 이런 손님도 있고, 저런 요구도 들어줘야 하고, 그런 상황에서 위장이긴 하지만 결혼해서 적을 두고 있는 남편에게 가상의 가족애를 느끼는 것이다.

 

 

그런 가상의 가족애 때문에 죽을 때도 "당신의 아내로 죽는 것"을 원하는 것이다. 단지 강재의 "친절함"에 감복한 것이 아니라는 말이다.

 

 

파이란에 대한 사랑을 느끼는 것도 "고로"와 "강재"는 명확히 다른 차원에서 좋아한다.

 

 

여기서 "고로"의 말과 "강재"의 말을 들어보자.

 

 

고로:  뭐가 친절하다는 거야. 친절하기는커녕 야쿠자, 경찰, 손님 할것 없이 모두 함께 너를 괴롭혔는데. 그중에서 제일 지독한 놈이 나야. 오십만에 호적 팔아먹고, 그 돈 어쨌는 줄 아니? 사흘 만에 다 써버렸어. 당신 몸으로 갚아야 하는 그 돈을 말야. 피를 토하며 갚아야 하는 그 돈을 말야.

 

 

우린 전부 거머리들이야. 찰거머리들이야. 당신을 뼈만 남도록 빨아먹은 귀신들이야. 어째서 이 찰거머리 귀신들에게 자꾸만 친절하다고, 고맙다고 그런 말을 하니?

 

 

이제 일 같은 거 안 해도 돼. 파이란, 나랑 결혼해 줘.

 

 

(아사다 지로 <러브레터> 철도원 1999. 서울. 문학동네. p78)

 

 

강재:  불쌍한 뇬, 남편은 이강재, 직업 생양아치, 친구대신 빵에 가는 친절한 병신... 너도 불쌍, 나도 불쌍..."

 

 

고로나 강재 둘 모두에게 파이란은 어떤 도덕적 자각을 불러 일으키는 존재이다. 그러나 그 방식은 서로 다르다. 고로는 파이란이라는 몸은 더럽혀졌어도(이 표현이 그렇게 좋은 표현은 아니다만) 자신이 착취당한다는 사실도 모르고, 고로에게 정신적으로 의지하는 여인에 대해 동정하기 시작함으로서, 자신의 도덕적 파렴치함을 깨닫고, 파이란이 자신에게 정신적으로 의지했던 것처럼, 자신은 죽은 파이란에게 정신적으로 의지하게 되는 것이다.

 

 

강재는 다르다. 강재는 파이란이 불쌍하다는 것을 통해, 자신의 불쌍함을 찾아낸다. 그리고 그렇게 순결순수청초지고지순한 여인에게 사랑을 받았다는 것으로 자신의 순수함을 발견하려고 한다.

 

 

그런데 이것이 바로 남자들의 응석이고 억지인 거다.
 

 

 

 남자를 위한 신파극

 

 

며칠전에 <쒸네21>에서 20자 평을 본적이 있다. 영화 하나를 20자로 재단한다는 것이 너무 심한 처사라 생각될 때도 있지만 20자 안에 녹여내는 촌철살인의 맛은 20자 평의 쏠쏠한 재미이기도 하다.

 

 

 

 

 

 

 

 

 

청순가련형이 짱이라니깐.

 

 

 

 

 

 

 

그런데 누군가가 이렇게 써 놓았더라. 정확하게 기억하는 건지 모르지만, "청순가련형의 백치를 원하는 남성들의 환타지". 정말 내가 <파이란>을 보고 석연치 않았던 부분들이 체증처럼 쑤욱 내려가게 만드는 말이었다.

 

 

말두 안되게 파이란이 세탁소 여종업원이 된 것두, 그 긴 영화 속에 정확한 병명이나 병원에 가보았는지 등의 정황설명은 전혀 없이 기냥 기침 두번 쿨룩 쿨룩 하더니 죽은 것두, 파이란이 호스테스에서 청순한 여인으로 바뀐 것도, 다 남성들을 위한 신파였던 것이다.

 

 

"나는 양아인데, 착하고 순결한 예쁜 여자가 날 사랑한다. 이거 웬지 어디서 많이 보던 것 같다. 아... 그래서 나는 이제 착하게 살련다. 고향에도 내려가고. 그 여자가 얼마나 실제적인 여자인가는 난 알 바 아니다. 착하고 순결하고 예쁘다는데 대체 뭘 더 바라려고 하냐. 이 청순가련한 여인이 병약하여 죽었다는 데, 사실 어떻게 죽었는지는 내 소관은 아니다.

 

 

예쁜 여자니까 암에 걸려서 머리 빠지고, 얼굴 띵띵이 불어 죽거나, 신부전증 걸려서 오줌도 못누고 혈액투석하다가 죽지는 않았겠지. 예전부터 있었던 그 흔한 결핵이나 백혈병 정도면 이미지 버리지 않고 이쁘지 않냐? 그러니까 리얼리티가 있건 없건 난 상관 없다."

 

 

이런 정신이 영화에 면면히 흐르는데, 내가 어떻게 눈물을 흘리겠으며, 이 영화를 찬사하겠냐 말이다.

 

 

남성들을 위한 신파에는 폭력장면도 쪼깨 있어야 하고, 또한 여자는 이뻐야 하는 게 당연하지. 바로 이런 상투성(cliche)이 이 영화를 곱게 보지 못하도록 한거다.

 

 

내가 참을 수 없었던 이유는 바로 그것이다.
 

 

 

덧붙여서

 

 

최민식 연기는 정말 잘하더라. 그리고 영화도 못찍은 영화는 아니더라. 화면도 이쁘고. 많은 사람들이 <친구>가 고등학교때 까지만 딱 재미있다고 하는데, 이 영화도 강재씨의 앞이야기까지는 상당히 재미있다. 파이란이 나타나면서 황당해 지기 전까지는....

 

 

사실 신파극이 무조건 나쁜 건 아니다. 여태까지 여성을 위한 신파극이 많았다면, 이제 남성을 위한 신파극도 필요한 거겠지. 그치만 캐릭터에 입체성이 더해졌다거나, 괜찮은 영화라는 평에는 절대 공감할 수가 없다.

 

 

설득력을 전혀 지니지 못해, 몰입을 방해 한다면, 그건 정말 신파가 아니겠지요. 딴지에서는 이 영화가 약간의 사회성도 지니고 있다고 했는데, 본인은 그 사회성은 "남자들에게도 신파가 필요해진 사회"를 반영하는 것이 아닌가  생각된다.

 

 

 

 

 

 

민원인 라이
(
ley78@hanmail.n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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