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들어가면서

 

n번방을 다루며 지난 글에서 극단적인 개인들을 묘사해왔다. 사람은 너무 동떨어진 세상 이야기를 들으면 그냥 부정하게 되기 마련이다. 골초에게 숯덩이가 된 폐 사진을 백날 들이밀어봤자, 설마 나는 이 정도는 아닐 거라고 뭉개고 지나갈 뿐이다. 이런 걸 좀 있어 보이는 말로 인지부조화라고 한다. 싸이코패스나 도착증 이야기 역시 그런 '극단적 사례‘로 받아들여지기 쉽다.

 

Briere와 Runtz의 연구(1989)에 따르면 미국 대학생의 9% 정도가 소아성애적인 판타지를 가져본 적이 있단다. ‘그거야 포르노가 대놓고 유통되는 미국의 케이스가 아니겠냐’라는, 또 한 번의 인지부조화를 발동시켜볼 수 있겠지만, 여기도 못지않다. 미국 법무부가 범죄인 인도 청구를 할 정도의 세계 최대 아동 음란물 사이트 운영자가 한국인이다. BBC의 조사에 따르면 '국민 1인당 포르노에 돈을 제일 많이 쓰는 나라'로 한국을 지목하기도 했다.

 

포르노는 꿈이다

 

그 옛날 프로이트는 꿈이 소망의 발현이라고 보았다. 사람은 소망이란 걸 갖기 마련이다. 개중에는 악한 소망도 있다. 물론 딴지 독자 대부분은 순수하고 착한 마음을 갖고 있겠지만, 세상이라는 게 그렇게 착한 사람들만 있는 건 아니다. 사람들은 종종 누군가가 죽어버렸으면 하는, 혹은 누군가와 잠자리를 했으면 하는 꿈을 꾸기도 한다. 그런데 진짜 대놓고 악한 꿈을 꾸는 싸이코패스들이 아니고서는 대부분 그런 환상을 환상과 공상의 수준으로 묵혀두고 지낸다. 그런 것들은 소위 '억압'된다고 한다. (<싸이코다이나믹스 : 말실수, 왜 하는 건가요?>편 참고) 그럼 그 많던 소망들은 어디로 숨어들어가나? 그런 것들은 ‘무의식’이라는 장소에 모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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꿈을 꿀 때는 그런 무의식 속의 내용이 낮의 잔재(day residue)와 합쳐진다. 이는 낮 동안 보았던 장면들의 조각을 말한다. 아부지의 환갑잔치를 잊어버리고 있다가 하루 전에야 퍼뜩 깨달았다고 생각해보자. 갑자기 생각이 복잡해진다. 이걸 지금 늦게라도 뭔가 수습을 해야 하나. 아님 어물쩡 환갑은 만 나이로 세는 거라고 우기면서 내년으로 은근슬쩍 넘겨볼까.

 

생각이 복잡해지려던 찰나 모니터를 켜고 딴지일보를 무심코 클릭한다. <챙의보감>이라는 기사제목이 눈에 들어온다. 클릭을 했는데 아뿔싸... 총수의 얼굴 사진이 대문짝만 하게 들어가 있다. 기분이 썩 유쾌하지 않다. 그러던 중 우연히 낮잠에 빠진다. 꿈속에서 총수가 나타나 허리벨트를 풀고 나의 엉덩이를 채찍질하면서 너 같은 아들은 둔 적이 없다고 집을 나가라고 소리치기 시작한다. 이런 것이 프로이트가 말한 '매 맞는 아이'의 꿈같은 것이다(Freud 1924). 프로이트는 아버지의 얼굴이 총수의 얼굴로 바꿔치기되고, 아버지에 대한 죄책감이 허리띠로 맞는 행위로 상징화되는 식으로 다양한 변환 과정을 거치면서 꿈이라는 것이 형성된다고 말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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엎드려..

 

학자들 중에는 포르노의 장면이 이런 꿈과 유사하다고 보는 사람들이 있다. 특정 장면이 소망 발현의 극장으로 기능한다는 것이다. 사람마다 꿈 내용이 다르듯이, 성적으로 자극되는 장면도 다른 법이다. Wood(2018)는 이런 장면을 '강력한 시나리오(compelling scenario)’라고 말한다.

 

누구나 끌려 하는 각자의 '강력한 시나리오'가 있다. 싸이코다이나믹스는 여기에 대해 나름의 설명들을 제시한다. 인간은 어린 시절 겪은 오이디푸스적 갈등을 억압한 채 성인기를 맞이한다. 정도는 다르지만 모두들 그렇게 해결되지 않은 잔여분의 갈등이란 걸 갖고 살아가는 것이다. 이런 것들은 무의식 속에 하나하나 쌓여 성인기의 취향을 규정하기에 이르고, 그것은 결국 포르노라는 무대 위에서 각자의 욕망의 투영물을 형성하기에 이른다.

 

의식적으로 시청하는 포르노가 어떻게 무의식적인 꿈과 비슷하게 작동한단 말인가? 여기에서 탈억제(disinhibition)라는 개념이 등장한다. 흔히 술을 마시면 멍멍이가 된다고 하지 않나. 평소에는 선비 같던 사람도 술만 마시면 사람을 패거나 음담패설을 늘어놓는다. 이런 걸 탈억제라고 한다. 대부분 억제는 전두엽에서 담당한다. 싸이코패스는 이 부분이 망가져 있다. 멍멍이가 될 때는 이런 바로 억제 기능이 일시적으로 무너지는 경우다..

 

Wood 같은 사람들은 인터넷이 그런 탈억제의 역할을 한다고 본다. 족쇄가 풀린다는 것이다. 말도 못 하고 쭈구리생활을 하는 ‘아싸’가 일베에 접속하면 어마 무시한 키보드 전사가 되는 것도 같은 맥락이다. 인터넷은, 마치 술 마신 사람이 그런 것처럼, 우리를 견종으로 만든다. 이런 걸 보면 성악설을 이야기한 순자(荀子)는 인간의 본성을 정확히 파악했다. 프로이트나 클라인 같은 정신분석학자들도 인간에게 근본적으로 죽음을 향한 본능이 있다고도 말한다. 그런 본능의 발현은 우리 안의 멍멍이같은 면을 드러나게 해준다.

 

퇴행의 1단계

 

Wood(2011)는 이런 퇴행과 탈억제가 진행되는 과정을 3단계로 나눈다. 첫 단계는 '일상적 시청에서 강박적 시청으로' 나아가는 단계다. 이 단계의 주인공은 소위 우울한 루저(상처받지 말길 바란다. 우리 모두 가슴 한켠에 루저 하나씩 갖고 산다) 들이다. 이들은 일상 속 인간관계에 실패를 경험한 사람들이다. 학교에서는 친구들이 무시하고, 직장에서는 동료들이 같이 밥을 먹어주지 않고, 선 자리에서는 상대가 얼굴을 보자마자 자리를 뜨는 현실이 이들을 비참하게 만든다.

 

이런 사람들도 인터넷이라는 공간 속에서는 일종의 소속감을 경험할 수 있다. 게다가 이런 관계는 언제든 도망갈 수 있는 편안한 인간관계를 가능하게 한다. 이런 걸 전문용어로 '부분 대상적인 관계'라고 말한다. 가령 내가 누군가의 손을 잡아보고 싶다고 생각했을 때, 일반적으로 그 손을 잡을 수 있으려면 일단 그 손을 달고 있는 주인과 모종의 관계를 형성해야만 하는 것이 인지상정이다. 그런데 인터넷이라는 공간은 그런 '손'이라는 부분적인 대상만 관계를 형성할 수 있게 해준다.

 

포르노를 보는 자는 굳이 영상 속의 그 누군가의 전공은 무엇인지, 부모는 누군지, 직장은 있는지, 취향과 세계관은 나와 맞는지 따위는 중요하지 않다. 혹시 이 영상을 찍으면서 누군가에게 폭행을 당하지는 않는지에 걱정할 이유도 없다. 이런 부분 대상과의 관계는 그 자체로 하나의 퇴행(regression)이다. 아기들은 어릴 때 엄마의 눈이나 젖가슴 같은 부분적 대상들과 관계를 맺다가 점차 전인격적인 엄마와 관계를 맺는 식으로 발달하는데, 부분 대상적 관계로 돌아가는 것은 발달을 역행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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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렇게 퇴행적이고 유아적인 수준의 관계를 맺게 되면 유아기 때 억압해둔 성적이고 공격적인 충동들이 되살아 나면서 그것을 향유할 수 있는 길이 열린다. Wood는 이런 공격성이 표출되는 것을 '대리자에 의한 사디즘'의 표현이라고 본다. 영상 속에서 직접 폭력을 행사하는 대리자의 손을 빌려 자신의 공격적 욕망을 충족시킨다는 것이다. 많은 정신분석가들은 우리가 어린 시절부터 이런 사디즘적 경향을 갖고 태어난다고 본다. 다만 성인이 되면서 우리는 현실 속의 법과 도덕과 윤리를 배우고, 전문용어로 ‘초자아'라는 것을 형성하면서 그런 것들을 억압해버린다.

 

인터넷은 이런 초자아의 '부패'를 야기한다. 초자아의 부패란 탈억제의 정신역동적 표현이다. 특히 집단을 형성하게 해주는 인터넷 속 공간, 가령 일베 같은 공간이나 n번방 같은 집단적인 공간은 그런 것들을 더 촉진한다. 인터넷 공간을 통해 아동기에 가졌을 법한 성적 호기심으로 퇴행하는 길이 열리기도 한다. 우리는 어린 시절 엄마나 여동생이 목욕하는 장면을 보며 느꼈을 어떤 성적 흥분 같은 것들을 잊어버리고 산다. 그런 것들은 깊숙한 곳에 억압돼 있다. 그러나 인터넷이라는 공간은 퇴행을 통해 그런 흥분의 수준으로 회귀하게 해준다.

 

퇴행의 2단계

 

두 번째 단계는 '합법적 포르노에서 불법적 포르노로' 나아가는 단계다. 이제 슬슬 영상 속에서도 FBI warning 같은 빨간 글씨가 안 뜨기 시작한다. 이 단계에서는 억압이 붕괴되면서 어린 시절의 근친상간적 금기에 묶여있던 봉인이 풀린다. 소위 더 짜릿한 금기에 도달하는 계기가 마련되는 것이다. 2편에서 잠깐 등장했던 Glasser(1987)는 일차적 아동성애와 이차적 아동성애를 나눈다. 일차적이라 함은 빼박 태어날 때부터 아동성애에 빠진 사람들을 말한다. 이차적이라는 것은 원래라면 정상적으로 멀쩡하게 사는 사람들인데 어떤 계기로 인해 일시적으로 그런 취향에 빠지는 경우를 말한다.

 

아동성애니 성도착이니 하는 건 일부 특이한 애들한테서나 나타나는 거지 나 같은 정상인에게는 해당되지 않는다고 생각한다면 이 글은 바로 그런 당신을 위한 것이다. Meyer(2004)는 오이디푸스기가 보편적이기 때문에 아동성애적인 성향에도 어떤 보편성이 존재한다고 본다. 누구나, 비록 일시적으로라도, 그런 취향 속에 빠질 수 있는 소인을 갖고 있다는 것이다. Wood는 이 두 번째 단계에서 2편에서 잠시 소개됐던 '세대 간의 애착'으로 다시 회귀하고자 하는 원초적이고 유아적인 성욕이 발현된다고 본다.

 

아이들을 보면 '엄마랑 결혼할래', '아빠랑 결혼해서 애기를 낳을래'같은 말을 종종 한다. 놀라워할 필요 없다. 이 글을 보고 있는 당신도 옛날에는 그런 말을 서슴없이 할 때가 있었으니. 어릴 때야 이런 것들은 크게 문제 되지 않는다. 엄마 아빠들은 에이 요녀석 하며 귀엽게 받아준다. 그런데 아이가 초등학교에 들어가고 나서 똑같은 말을 하면 좀 이상한 취급을 한다. 너 어디 가서 그런 말 하면 엄마 아빠가 욕먹는다고 입단속을 하기 시작한다. 바로 이런 시점부터 우리의 유아적 욕망은 억압이라는 것을 겪기 시작한다. 근친상간이라는 것은 일종의 금기가 되고, 부모는 성적 대상화의 영역에서 완전한 면제의 대상으로 들어선다.

 

Wood는 “인터넷 섹스는 마음 안에서 이런 경향들을 결정화시킴과 동시에 자아의 통제를 약화시키는 데 독보적인 능력을 가진 것처럼 보인다"라고 했다. 게다가 어린 시절 성적 갈등을 제대로 해소하지 못했던 사람일수록 이런 장면이 재활성화될 가능성이 높다고 본다. 자신의 무의식적 갈등을 일상 속에서 제대로 표현하지 못할수록 술 먹고 멍멍이가 된 모습이 등장할 가능성이 높다는 것과 같다.

 

퇴행의 3단계

 

마지막은 진짜 심각한 단계다. 여기서는 영상을 보는 것을 넘어 실제 신체적인 접촉을 행동화하는 것까지 나아간다. 사실 대부분의 일베들이 그런 것처럼, 소수의 싸이코패스적인 개인을 제외하고는 실제 이런 행동화까지 나아가지 않는다. Glasgow(2010)는 실제로 아동 성착취물을 반복해서 본다고 해서 그 사람이 실제 아동을 착취하는 범죄 행동으로 나아가는 건 아니라고 본다. 다만 일부 특징을 가진 사람들은 다른 사람에 비해 좀 더 쉽게 행동화하는 경향을 보였다. 이들은 공통적으로 과거 타인으로부터 신체 경계의 침범을 당했던 사람들이다. 즉 자기 자신이 신체의 침범을 경험해본 사람들은 영상을 접촉할수록 그것을 현실로 옮길 가능성이 더 높았다.

 

인간이 폭력적인 영상물에 빠지는 이유가 그가 폭력적이라는 것의 결과인 것인지, 아니면 그것이 원인이 되어 그에게서 폭력성이 나타나는 것인지 하는 문제는 언제나 논쟁거리다. 그래서 이런 사항들은 언제나 양쪽에서 서로를 변호하는 데이터로 사용되곤 한다. 포르노를 반대하는 사람들은 포르노를 많이 보면 볼수록 실제적인 성의 착취도 늘어나기 때문에 금지해야 한다고 하고, 일부 옹호론자들은 포르노를 보지 않으면 오히려 욕구 해소가 되지 않기 때문에 성 착취가 늘어날 수도 있다는 논리를 펴기도 한다.

 

위의 논쟁과 관계없이, 명백한 것이 하나 있다. 실제 접촉을 하지 않더라도 그것이 제작되는 과정에서 거기에 등장하는 아동과 여성은 이미 누군가의 손에 의해 착취를 당하고, 또 비인간적인 사물로 다뤄지고 있다는 사실이다.

 

나가면서

 

이번 글을 마지막으로 n번방이라는 끔찍한 사건을 정신의학이라는 다소 절제된 시각으로 다뤄보았다. n번방의 뒤에는 싸이코패스와 성도착이, 그리고 그러한 경향들로 이끌려가는 우리 일반인의 위험성이 있다. 우리는 저 둘을 대상화하면서 이들을 병리화하고 돌 던질 준비를 딱 마친 와중에, 그러한 대상들 안에서 우리의 거울상을 발견한다.

 

이들에게 돌을 던질 수 있느냐는 물음으로 우리 인간이 다 악당들이라고 말하고 싶었던 것은 아니다. 하물며 패륜을 저지른 악당들에게 면죄부를 주고 싶은 마음은 손톱만큼도 없다. 다만 우리는 언제든 멍멍이가 될 수 있다는 것, 인터넷이라는 매체는 우리를 너무나도 쉽게 퇴행시킬 수 있다는 것을 말하고 싶었을 뿐이다. 세상에 나쁜 개가 없듯이 원래 나쁜 사람도 사실 없다. 그저 누구라도, <다크나이트>의 조커의 말마따나, 'little push'만 있어도 멍멍이가 될 수 있는 것이다.

 

n번방 사태는 남의 이야기가 아니라는 것. 내가, 우리 남편이, 우리 아들이, 겉으로 점잖아 보이는 우리 아부지가, 우리 동네 파출소장님마저도, 누구나 이런 경향에 쉽사리 휩쓸릴 수 있다는 것. 그것은 우리 인간 모두가 가진 공통적인 리스크라는 것을 폭로하고 경각심을 갖게 함으로써 결국 낭심을 붙잡게 만드는 것. 나의 바람은 단지 그뿐이다.

 

REFERENCES

 

(1) Briere J, Runtz M. University Males' Sexual Interest in Children: Predicting Potential Indices of “Pedophilia” in a Nonforensic Sample. Child Abuse & Neglect 1989;13:65-75.

(2) Freud S. A Child Is Beaten. The Psychoanalytic Review (1913-1957) 1924;11:464.

(3) Glasgow D. The Potential of Digital Evidence to Contribute to Risk Assessment of Internet Offenders. Journal of Sexual Aggression 2010;16:87-106.

(4) Glasser M. Psychodynamic Aspects of Paedophilia. Psychoanalytic Psychotherapy 1987;3:121-135.

(5) Meyer L. Paedophilia: Its Metapsychology and Place in Contemporary Culture. 43rd international Psychoanalytical Association Congress 2004;

(6) Wood H. The Internet and Its Role in the Escalation of Sexually Compulsive Behaviour. Psychoanalytic Psychotherapy 2011;25:127-142.

(7) Wood H. Compulsive Use of Internet Pornography. In: Sex, Mind, and Emotion. Routledge;2018. p.65-86.

(8) 연합뉴스. ""한국은 정욕의 나라"<Bbc 발행 `포커스'>." 201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