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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5. 06. 08. 월요일

산하










대한민국 헌법 69조는 대통령 취임 선서를 이렇게 규정하고 있다. 


“나는 헌법을 준수하고 국가를 보위하며 

조국의 평화적 통일과 국민의 자유와 복리의 증진 및 민족문화의 창달에 노력하여

대통령으로서의 직책을 성실히 수행할 것을 국민 앞에 엄숙히 선서합니다.”


2년 전 박근혜 대통령은 또박또박 저 선서를 했을 것이다. 2년 사이에 무슨 일이 있었는지 요즘은 수첩조차 제대로 못 읽고 한국어인듯 그러나 한국어 아닌 언어를 구사하는 지경에 이르렀으나 그날 저 선서문은 또박또박하고 명명징징하였으리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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새삼스레 저 선서를 되짚어 보는 이유는 사실 다른 데에 있었다. 이 선서문에 국민의 ‘생명’ 같은 단어가 반드시 들어가 있을 줄로 생각했기 때문이다. 그래서 세상에 이렇게 국민들이 생명의 위협을 느끼고 공포에 질려가고 있는데 그렇게 오른손 들고 선서한 내용을 지키지 않고 웬 외유냐고 따지고 들 심산이었는데 그만 이 선서문에는 ‘생명’이나 ‘안전’같은 단어가 없다는 낭패감이라니.


어차피 “짐이 국민이다.”는 입헌군주제로 국가 정체를 바꾼 듯하니 헌법 준수는 물 건너 갔고, 조국의 평화적 통일 태평양 넘어 갔고, 국민의 자유와 복리 증진은 태양계 저편으로 날려 버린 듯한 상황이지만 그래도 국민의 ‘생명’만큼은 무거운 책임감을 가지고 대처하라 벼락같이 호통을 올릴 판이었는데 아뿔사 ‘생명을 지킨다는 선서는 안하지 않았느냐’ 한 마디 하면 풀 쑤어 먹은 벙어리가 되게 생겼다. 그럼 이제는 읍소라도 해야 한다. 거적 깔고 도끼들고 지부상소(持斧上疏)라도 올려야 할 판이다. “정부는 어서 대처하시오. 백성들이 고통받고 있지 않소” 라는 식의 애민군주 역의 재미에 빠진 저 양반의 비위를 맞추려면 내 말투도 바꿔야겠다.



왕무도해소 (王無渡海疎) : 저 바다를 건너지 마시라 올리는 상소


“하늘도 공포에 떨고 땅도 두려움에 진동하는 나날이 계속되고 있습니다. 미천한 아무개가 삼가 온 나라가 떠들썩한 일로 아뢰나이다. 제 말이 그릇되면 이 도끼로 제 목을 쳐 주시옵고 제 말이 옳으면 그 도끼로 전하의 부산한 스케줄을 끊어 주시옵소서. 거두절미 단도직입 전하께 아룁니다. 전하. 미국에 가지 마시옵소서."


첫째, 전하는 이 땅에서 지금 당장 하실 일이 너무 많습니다.

돌이켜보건대 전하의 정부는 이번 메르스 사태에서 무능함의 전범을 보여 주었습니다. 신종 전염병 같다는 현장의 목소리에 “아니면 니들이 책임져라.”고 대응하였으며 제발 검사해 달라는 말이 묵묵부답이었다가 집안에 고위층 인사 있다 하니 헐레벌떡 달려온 것이 전하의 정부였습니다. 중동에서 온 괴질임이 밝혀진 뒤에도 전하의 각료들이 한 일은 따로 없었으며 결국 방죽은 구멍나고 구멍은 점점 커졌으며 이제는 여러 곳에서 공포의 물줄기가 쏟아지고 있습니다.


전하가 공화국의 대통령이든 상상 속의 여왕이든 결코 잊지 마셔야 할 것은 모든 책임은 결국 전하에게로 돌아간다는 것입니다. 천안(天顔)을 감히 노려보며 여쭙거니와 전하는 이번 사태에서 도대체 무엇을 하셨습니까. 다섯 개 나라 말을 하신다는 분께서 한국어 실력이 가장 처지는 것은 국제화 시대의 폐해라고 치거니와 그 못하는 한국말로라도 무슨 지시를 어떻게 내리셨으며 누구를 동원하시고 어떤 자원을 동원하셨으며 그 성과는 무엇입니까. 청와대에 열 감지기 설치한 것 외에, 사태 발생 2주일만에 ‘긴급’ 회의를 주재하신 것 외에, 전하는 무엇을 하셨습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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둘째 전하는 부끄러움이 없는 군주가 아니라 무한 책임을 져야 하는 자리에 계십니다.

전하는 조정의 신하들이 하는 일을 평가하는 구름 위의 군주가 아니라 가뭄이 들면 맞아 죽어야 했던 부여의 임금에 가까운 공화국의 수장임을 잊으시면 아니됩니다. 맹자가 말하였듯 백성은 군주를 띄우는 물이기도 하지만 그를 뒤집기도 하는 물일진대, 그 물이 지금 공포에 일렁이고 병균에 더럽혀지고 있는데 도대체 전하는 가기는 어딜 가신다고 지금 이 망녕이십니까. 청년 치매가 유행이라는데 혹시 오늘 아침 먹었는지는 기억하고 계십니까. 지난 국무회의 때 무슨 말을 했는지는 가물가물하지 않으십니까.


죽여 주시옵소서. 생때 같은 아이들과 착한 백성들 수백 명이 떼죽음을 당한 날 서슴없이 남미행 비행기를 타시던 전하의 뒤통수를 보며 ‘천주’(天誅)를 몇 번이고 외쳤거니와 무슨 일만 생기면 알아서 해결하라는 듯 똑같은 스타일에 색깔만 바꾼 할머니 패션으로 비행기 트랩을 사뿐사뿐 오르던 전하의 뒤통수에는 자갈돌이라도 던지고 싶었습니다. 항차 나라가 이 꼴인데 그래도 미국은 가셔야 하겠고 폼나게 사열은 받으셔야겠고 도저히 안되는 한국말 대신 영어로 대화라도 나누셔야겠습니까. 이제는 그 뒤통수에 큼직한 방앗돌 하나 던지고 싶어집니다. 그럴 힘이 없음이 안타까울 뿐.


세계가 한국을 주목하고 중국은 고위급 교류까지 안한다고 도리질이고 관광객들이 끊기고 비즈니스도 중지하는 판에, 그 나라의 수장이 무슨 급박한 일이 있다고 국내를 비우고 태평양을 건너가십니까. 미국 사람들이 전하를 원숭이처럼 쳐다볼 것이 불을 보듯 뻔하고 엄숙한 경례 후에 경멸의 조소를 날리며 뭐 저런 것이 대통령을 한다고 손가락질할 것이 물 흐르듯 뻔한 일인데 그래도 가셔야겠습니까. 도대체 지금 미국과 그리도 급박한 현안이 무엇이관대, 그렇게 무리해서 해결할 난제가 무엇이관대 ‘아몰랑 미국 갈 거양’을 고집하신단 말입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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셋째, 국제적 결례에 앞서 국민에 대한 결례를 범하지 마십시오.

‘국제적 결례’를 말씀하십니까. 나라와 나라간의 의를 따지자면 전하께서는 메르스에 앞서서 다른 문제로 미국 방문을 폐하셔야 옳습니다. 어느 나라가 우방의 땅에 수백만을 죽일 수 있는 세균을 택배로 보내며, 그에 대해 일언반구 문의를 하지도, 허락을 받지도 아니하는 만행을 저지른단 말입니까. 미국산 탄저균은 종북만 골라 죽인답니까.


그런 무시무시한 일을 저지른 나라 방문 일정을 취소하고 그 대사를 불러들여 초주검을 만들어도 시원치 않은 판에 굳이 그 나라를 찾으셔서 샴페인잔 부딪치며 “아 그 건은 미안했어요 찡긋” 하는 화기애애를 연출하고 싶으십니까. 이것은 국민에 대한 결례입니다. 주권에 대한 무례입니다. 미국놈들 믿지 말자고 미국놈 미국놈 타령을 하던 전하의 선친에게도 무안한 노릇입니다.


여왕 전하. “짐은 국가다”라는 루이 14세를 넘어서서 “나에 대한 폄훼는 국민에 대한 폄훼다.”라고 나불대시는 무식하여 대담하시고 무심하여 용감하신 ‘말이 안통하네뜨’ 1세 전하. 미국에 가지 마시옵소서. 물론 전하가 있으나 없으나 대한민국 돌아가는 건 매한가지라 하지만 어쨌건 전하께 옥새가 있고 전하가 하셔야 할 일이 태산이며 막아야 할 것들이 하해와 같은데 어찌 이리 무책임하시고 무도하십니까. 아 어찌 이리도 모자라십니까. 어찌 이리 아둔하십니까. 백면서생은 슬퍼 노래할 따름입니다.



王無渡海(왕무도하) 왕이여 그 바다를 건너지 마소서

 

王竟渡河(왕경도하) 왕은 그예 바다를 건너시네

 

墮河而死(타하이사) 물에 빠져 돌아가셔도

 

當然之事(당연지사) 당연 또 당연한 일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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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산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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편집 : 딴지일보 홀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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