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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04년 2월 8일에 발발한 러일전쟁은 1990년 8월 2일에 발발한 ‘걸프전’과 유사한 것이 하나 있다(많은 부분이 유사하지만, 가장 큰 하나). 바로 전 세계인의 관심을 받았다는 것.


걸프전 당시 우리는 TV 브라운관 앞에서 토마호크 미사일과 스텔스 전폭기, 패트리어트 미사일과 스커드 미사일의 대결을 흥미진진하게 지켜봤다. 단순히 ‘싸움’ 그 자체에 흥미를 느꼈다고 해야 할까? 걸프전을 둘러싼 흥미로운 ‘정치적인 수 싸움’이 몇 번인가 있었지만, 이미 시작하기 전부터 승자(勝者)는 정해진 상황이었고, 지구에서 힘 좀 쓴다하는 국가 대부분은 ‘예비 승리자’인 미국과 어깨를 같이 했기에 정치적인 문제는 부차적인 문제로 밀려났다. 전쟁의 관심사는 오로지 ‘얼마나 압도적으로 이길 수 있을까.’였다. 결국 사람들은 전쟁 자체를 ‘순수하게’ 즐기는 것을 택했고, 이 ‘이상한 전쟁’에서 최종 승자는 CNN이 됐다.


같은 의미 다른 느낌으로 러-일 전쟁은 20세기 초반의 세계 각국 사람들에게 초미의 관심사였다. 걸프전이 신인들의 3라운드짜리 복싱이었다면, 러-일 전쟁은 파퀴아오와 메이웨더의 12라운드 통합챔피언 결정전이었다. 러시아와 일본은 통합챔피언 결정전답게 관객들의 흥미를 돋울만한 전투를 보여줬고(개별 전투적으로 봤을 때는 졸전이었지만), 도박사들은 반전에 반전을 거듭하는 전쟁 상황에 열광했다.


20세기 이후 치러진 최초의 대규모 전쟁이었고, 그 참전국이 노회한 제국 러시아와 이제 막 제국으로 발돋움하려는 일본이었다는 점, 근대화된 대량생산 체제에서 치러진 ‘제대로’ 된 국가 간의 전쟁이었다는 점에서 세계 각국은 이 전쟁에 열광하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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너나 할 거 없이 러-일 전쟁에 대한 소식을 찾았고, 언론들은 이 호재를 놓칠 리 없었다. 세계 각국의 언론사들은 앞다투어 종군기자를 파견했고, 사진을 전송할 수 없었던 당시 기술력의 한계를 극복하고자 수많은 삽화가가 동원돼 러-일 전쟁을 그려냈다. 20세기 초의 러-일 전쟁에서는 걸프전에서 활약한 CNN의 그것을 넘어서는 취재전쟁이 펼쳐졌다.


그 와중에 국제사회는 이 전쟁의 최대 피해국인 청나라와 한국을 비웃기 시작했다.



이상한 전쟁



“우리는 한국인들을 위해서 일본에 간섭할 수 없다. 한국인들은 자신들을 위해 주먹 한 번 휘두르지 못했다.”


- 1905년 1월 미국 대통령 루스벨트가 당시 국무장관이었던 존 헤이(John Hay)에게 보낸 편지 중 발췌



“오늘날 전쟁은 인간사의 마지막 심판자이며 또한 국민성을 최후로 시험하는 관문이다. 이 시험에서 대한제국 국민 은 실패했다. 외국 군대가 자기 나라를 통과해 가려고 하자 어려움을 이기지 못하고 모두 도망갔다. 그들은 문짝이 며 창문이며 할 것 없이 주워갈 수 있는 것 모두를 등에 지고 산으로 들어갔다.”


- 러일 전쟁 당시 종군기자로 활약했던 잭 런던(Jack London)의 기록 중 발췌



러-일 전쟁은 ‘이상한 전쟁’이었다. 분명 러시아와 일본의 전쟁이었지만, 이들은 자국의 영토가 아닌 제3국, 즉, 조선과 청나라의 영토에서 전쟁을 치렀다(전쟁 최대의 피해국은 한국과 청나라였다). 이런 상황임에도 조선과 청나라는 아무런 반응을 보이지 않았다.


잭 런던 기자를 비롯한 서양의 종국 기자들이 본 대한제국의 모습은 충격 그 자체였다. 대한제국 정부는 1904년 1월 21일 국외중립(局外中立)을 선언했지만, 이는 허울뿐인 선언이었다. 2월 8일 개전 이후 얼마 지나지 않아 대한제국은 일본의 후방기지 역할로 전락하게 된다. 주한일본공사는 조선에 동맹 조약을 강요했고, 2월 23일 ‘한일의정서(韓日議定書)’가 체결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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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본 군사행동의 근거가 된 한일의정서


이후부터는 일사천리였다. 4월 1일 조선의 통신망이 일본의 손에 떨어졌고, 병력과 군수물자의 수송을 위해 경부선과 경의선 철도의 부설을 서두르게 된다. 그리고 대망의 1904년 8월 22일 제1차 한일협약을 체결하게 된다.


대한제국 정부는 이후 일본인 재정 고문과 일본인이 추천하는 외국인 외교 고문을 두고, 외국과의 조약 체결 시 일본 정부와 협의(협의라고 쓰고 승낙)를 해야 했다. 대한제국의 본격적인 ‘고문(顧問)정치’가 시작된 것이다(이후 일본은 외교와 재정을 넘어서 군사, 경찰, 교육, 왕실업무 등등 조약에도 없는 고문들을 추가했다. 완전한 ‘식물정부’가 된 것이다).


일반 백성들의 모습은 어떠했을까?


당시 일본인들은 조선인들을 군수품 운반에 동원되었는데, 이때 군수품의 품목을 쉽게 확인하기 위해 조선인들의 뺨에 각각의 색깔을 칠했다(빨간색은 탄약, 보라색은 공병 장비 같은 식으로). 조선인들은 얼떨결에 끌려나가 일본의 후방지원부대로 활약하게 된 것이다.


이 모습을 취재한 종군기자들과 기사를 본 세계 각국의 정치인과 국민은 대한제국에 대해 어떤 생각을 가졌을까? 앞에 언급한 루스벨트와 잭 런던의 말로 설명이 가능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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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신의 땅이 전쟁터가 됐음에도 기껏해야 ‘중립’을 선언하는 게 고작이었던 대한제국 정부의 무능력과 판단력 결여를 보며 세계열강들은 대한제국을 경멸하게 된다.



“대한제국은 러일전쟁의 승자가 전리품으로 가져가도 손색이 없을 정도로 잘 다듬어진 예비 식민지다.”



러일전쟁 이후 포츠머스 조약, 국권침탈로 이어지는 일본의 강경 드라이브에서도 국제사회에서 큰 잡음이 들리지 않은 이유 중 하나가 바로 러일전쟁 당시 보여준 대한제국 정부와 국민의 무능력함이었다. 어느새 우리는 식민지가 돼도 할 말이 없는 국가로 낙인찍힌 것이다.


가슴 아픈 건 이 사실을 반박할 수 있을만한 완벽한 논리가 없다는 것이다.



마지막 카드


일본이 ‘러-일 전쟁’을 결심할 수 있는 배경 중 하나였던, ‘영일동맹’은 러-일 전쟁의 마지막 순간 그 빛을 발하게 된다. 물론, 그 이전에도 엄청난 금액의 일본 채권을 사주며, 든든한 후방지원을 해줬으나 실질적인 군사작전에서의 도움은 거의 없었다.


그러나 마지막 순간 영국은 일본의 결정적인 우군(友軍)이 돼 주었다.


1905년 3월. 일본군 249,800명과 러시아군 309,600명이 봉천에서 만주와 국가의 운명을 건 대 회전(會戰, 일정 지역에 대규모의 병력이 집결하여 전투를 벌임)을 벌인다. 명목상으로 보자면 일본군의 승리였다(러시아군이 패퇴했으니). 그러나 퇴각하는 러시아군을 쫓아가 격멸할 만한 힘이 일본군에게는 없었다. 이미 일본은 전력의 대부분을 소모한 상태였고, 더 이상의 진출은 무리였다. (당시 참모총장이었던 야마카타가 이미 두 손을 든 상황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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봉천회전의 사상자는 일본 7만, 러시아 9만 명으로, 이 전투로 인해 양국은 숨을 몰아쉬며 주저앉은 상태였다(승자는 일본이었지만, 이런 걸 피로스의 승리라고 해야 할까?). 물론, 여순항을 확보한 일본이 전쟁의 승기를 잡았다는 것에 이견을 제시할 사람은 없었다(눈치 빠른 당시 금융권 사람들이 너나 할 거 없이 일본 채권을 사지 않았는가?). 그러나 러시아에게는 아직 ‘카드’가 남아 있었다. 바로,


“발트 함대”


1703년 5월 18일 스웨덴과의 전쟁 와중에(대 북방전쟁) 러시아의 표트르 대제가 창설한 함대다. 러시아 해군 함대 중에서 가장 오랜 역사를 가지고 있고, 러-일 전쟁 당시에도 러시아 해군의 최강 전력으로 분류됐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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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에 ‘만약’이라는 가정을 했을 경우, 여순항을 러시아가 끝까지 지켜냈든가(노기 장군이 최소 2개월 이상 지휘권을 행사했다면), 발트 함대가 더 일찍 태평양으로 출발해 극동 함대와 합류했다면, 일본은 전쟁에서 패배했을 것이다. 아니, 최소한 일본이 승리하지는 못했을 것이다.


왜?


일본은 섬나라이다. 즉, 모든 보급이 해상으로 이어진다는 것이다. 이는 군수품에도 예외 없이 적용 된다(비행기를 띄울 수도 없지 않은가? 라이트 형제가 보잉 747 날개 길이보다 짧게 날아오른 게 1903년이었음을 기억하자). 만약 발트 함대와 여순항의 극동 함대가 합류해 일본 연합함대를 압박한다면, 일본은 최소한 제해권을 러시아에게 넘겨줬을 것이다. 제해권을 넘겨준다는 사실은, 만주에 진출한 일본 육군의 보급로가 끊긴다는 소리이고(최소한 보급에 많은 애로점을 겪을 건 분명한 사실이었다), 가뜩이나 물자부족에 시달려야 했던 일본군은 움직임 자체가 제한됐을 것이다(아니, 그 이전에 패했을지도 모른다).


그나마 일본에게 다행이었던 것은 여순항을 함락시켰으며, 극동 함대는 분쇄됐다는 점이다. 그러나 이건 에베레스트 산 정상을 등반하기 전에 마지막 베이스캠프를 차리는 수준이었다. 일본에게 발트 함대는 그런 존재였다.



영국, 드디어 움직이다



“세상이 시작된 이래 어떤 군함도 시도한 적이 없는 항로”



러-일 전쟁 당시 발트 함대의 태평양 진출 항로를 두고, 당시 사람들이 평가한 내용이다. 220일간 지구 둘레의 4분의 3에 해당하는 2만9000㎞를 항해한 러시아 발트 함대는 이동 그 자체가 ‘기적’이었고, 용감한 감투 정신이라 칭송받아 마땅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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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시 세계는 지구 반 바퀴를 돌 때까지 탈락한 함선 한 척 없이 무사히 태평양으로 진출했다는 점을 들어 발트 함대의 우수성과 지휘관이었던 로제스트벤스키 제독에 대한 찬사를 보냈다. 이는 지금의 관점으로도 칭송받아 마땅한 공적이었다.


러-일 전쟁이 한참 격화되던 시점 러시아 황제 니콜라이 2세는 발트 함대의 출전을 결정한다(당시 흑해함대는 오스만 제국을 견제해야 했고, 다르다넬스-보스포루스 해협 통과가 여의치 않아 차출할 수 없었다). 출전 결정과 동시에 함대 이름이 변경된다.


'제2 태평양 함대'


기존의 태평양 함대(극동 함대)는 발트 함대의 개명과 함께 ‘제1 태평양 함대’가 됐다. 니콜라이 2세는 일본을 확실히 짓밟기로 결심한 것이다. 문제는 ‘보급’이었다. 원자력 항공모함이 바다를 가로지르는 시절도 아니고, 석탄으로 배를 움직여야 했던 시절이니 만큼(심지어 석유도 아니었다!) 석탄의 보급이 곧 원정의 성패를 좌우한다고 봐도 과언이 아니었다. 제때 ‘제대로’ 보급을 받아야지만 배가 움직인다는 것이다.


문제는 당시 질 좋은 무연탄을 보유한 나라가 일본과 동맹을 맺은 영국이었다는 것이다. 영국이 석탄을 줄 리가 만무했다. 애초에 러시아도 기대하지 않았다. 진짜 문제는 ‘기항지’였다. 전 세계 바다를 지배하는 ‘해가 지지 않는 나라’ 영국. 배가 정박할 만한 곳은 영국이 다 차지한 상황이었고, 러시아 함대의 기항을 허락하지 않을 것은 러시아도 잘 알고 있었다. 해결책은 중립국을 이용하는 것인데, 이들도 영국의 눈치를 보며 러시아 함대의 기항을 불허한 것이다.


결국 러시아가 믿을 건 독일과 프랑스뿐이었다.


러시아는 독일의 함부르크-아메리카 석탄선과 전속 계약을 맺고, 석탄 보급을 맡겼다. 기항지는 프랑스의 식민지로 정했다. 이때 당시 영국의 관할 하에 있던 수에즈 운하를 통과한다는 생각은 망상(!!) 이었기에 이들은 멀리 빙 둘러 아프리카의 희망봉을 찍고 인도양으로 넘어가야 했다. 이 과정에 거쳐야 하는 아프리카 동해안, 인도, 남지나해의 말레이시아, 싱가폴 등등은 모두 영국의 힘이 미치는 곳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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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중해와 홍해를 잇는 수에즈 운하


영국의 이러한 ‘간접적’ 도움은 러시아 해군을 지치게 하였다. 덤으로 영국해군의 친절한 ‘정보전달’도 이어진다. 러시아는 일본과의 타이틀 매치를 위해 지구 반 바퀴를 돌아가야 하는데, 그사이 먹을 것도, 잠잘 숙소도 지원받지 못한 채 터벅터벅 걸어가야 했던 것이다(이렇게 지친 상태에서 시차 적응도 하지 못한 채 바로 링 위로 끌려 올라간 것이다).


그럼에도 러시아는 이들을 태평양으로 보내야 했다.


1904년 10월 14일 상트페테르부르크의 인근의 리바우 항에서 발트 함대는 출격하게 된다. 이때 니콜라이 2세는 남아있는 낡은 배를 수리해 뒤이어 보내주겠다는 약속을 해준다. 러시아는 모든 판돈을 다 걸 기세였다. 실제로 니콜라이 2세는 약속을 지켰고, 이렇게 편성된 함대는, 전함 7척, 순양함 7척, 보조 순양함 5척, 구축함 9척 등 총 38척의 전투함에 수송선 26척에 승무원 14,000명을 자랑하는 대함대가 됐다. 영국 해군도 움찔할 수준의 규모였다.


일본 해군은(일본도) 발등에 불이 떨어졌다. 여순항이 함락되기 전에는 노심초사, 하루빨리 극동 함대를 분쇄해야 한다는 생각에 전전긍긍했고, 여순항이 함락되고 나서는 발트 함대가 어디 있는지, 또 발견하더라도 어떻게 싸워 이겨야 할지를 놓고 고민하게 된다.


여기서 한 가지 짚고 넘어가야 할 것이 220일이나 걸린 항해 기간이다. 대서양에서 태평양으로 거슬러 올라가는 대장정이라 하더라도(영국의 방해공작을 고려해도), 220일은 너무 길었다. 항해 일지를 보면, 이들은 1904년 12월 29일 날 이미 희망봉을 돌아 마다가스카르 섬 인근의 생트마리까지 진출했고, 1월 초순이 되면, 생트마리 섬 근처의 노지베 섬에 도착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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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에즈운하를 통과했다면 금방 갈 수 있었던 길을 돌아돌아...


1904년 12월을 전후로 해서 전황은 급격하게 요동치고 있었다. 1904년 12월 5일 문제의 203고지가 일본군에게 점령됐고, 그날 오후 2시부터 여순항에 대한 포격이 시작됐다. 그리고 이듬해인 1905년 1월 1일 여순항은 일본군에게 떨어진다. 발트 함대는 노지베에서 이 소식을 전해 듣게 된다. 그리고 본국의 새로운 명령을 하달받는다.



“블라디보스톡으로 향하라.”



그러나 이 명령을 당장 실행할 수는 없었다. 가고 싶어도 ‘연료’가 없었기 때문이다. 독일 석탄선의 계약이 노지베 섬에서 만료가 됐기 때문이다. 블랙코미디였다.


당시 러시아 본국에서 긴급히 10여 척의 보급선을 보냈는데, 우연인지 요행이었는지 이들은 수에즈 운하를 통과할 수 있었다(이들은 인도양에서 겨우겨우 발트 함대와 만나게 된다).


석탄이 보급될 동안 러시아 발트 함대는 산호초로 유명한 생트마리 섬에서 더위와 풍토병으로 두 달 동안 고생하게 된다(북구의 패자가 더위와 싸워야 했으니, 그 고생이 얼마나 대단했겠는가?). 시작부터 뭔가가 꼬이기 시작했다.







*참고자료


1. 전쟁국가 일본/ 살림출판사/ 이성환

2. http://hohodang.com (호호당 선생의 ‘프리스타일’)

3. 세계전쟁사/ 육군사관학교 전사학과/ 황금알

4. 러일전쟁과 을사보호조약/ 이북스펍/ 이윤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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