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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5. 06. 05. 금요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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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웹의 시작은 모두를 위한 기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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웹은 어느 IT역사보다 아름답게 시작됐다. 팀 버너스리와 CERN의 위대한 결정으로 HTML 등 웹에 관한 기술이 모두를 위해 무료로 공개된 것이다. 하지만 HTML 브라우저이자 편집기였던 WorldWideWeb은 NeXT에서만 실행되었다. 90년대 NeXT 컴퓨터는 소위 망한 상품이었다. 넥스트 주인이었던 스티브 잡스는 회사 경영에서 완전히 실패하고 있었다. NeXT는 우수한 기술을 집대성한 제품이었지만 개인, 기업 모두 어느 누구도 구매하려고 하지 않았다. 자연히 팀 버너스리가 개발한 WorldWideWeb 소프트웨어는 사용자를 확산시키는데 제한이 있을 수 밖에 없었다.

 

우리가 현재 사용하고 있는 웹 브라우저들의 직계 조상은 팀 버너스리의 WorldWideWeb이 아니다. 팀 버너스 리는 WorldWideWeb 소프트웨어와 함께 웹에 관한 기술들 HTML, HTTP 등의 웹 기술을 무료로 공개하였고 모두를 위한 기술이 되자 그제서야 새로운 바람이 불기 시작한 것이다. 즉, 팀 버너스리의 진정한 위대함은 WorldWideWeb 브라우저보다는 Web에 관련된 일체의 기술들을 모두를 위해 공개했다는 것에 있다고 할 수 있는 것이다.


결론적으로 팀 버너스리가 웹 관련 기술을 무료로 공개함으로써 많은 사람들이 인터넷을 향유 할 수 있게 되었다. PC, 테블릿, 스마트 폰, 스마트 TV 등 네트워크만 연결되어 있다면 자유롭게 인터넷을 이용할 수 있게 된 것이다. 하지만 이 여정은 그리 순탄하지 않았다. 


90년대 중반이 되자 팀 버너스리가 생각했던 모두를 위한 기술이었던 웹은 철저히 자본의 논리로 움직이기 시작했다. 자본주의국가에서 인터넷 기술 역사가 다시 리셋하여 시작했기 때문이다. 인터넷 역사는 웹의 고향인 유럽에서 벗어나 IT 본고장인 미국으로 다시 옮겨간다. 그리고 인터넷이 부흥하는 90년대 중반은 공공성에 기반한 보편의 논리보다는 기업간 힘의 논리로 움직이게 되었다.


전편에서(전편보기) 지금의 인터넷 환경인 HTML과 그것을 가능하게 한 기술적 배경에 대해 이야기 했었다. 이번 편은 90년대를 장악했던 ‘브라우저 전쟁’에 대하여 이야기 하려고 한다. 브라우저 전쟁을 이야기 하기 위해 먼저 관련 플랫폼에 대해 살짝 알아보자.




2. 인터넷의 원형, 1969년 APPAN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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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69년 12월 ARPANET 현황 (오직 4개 기관)


Unix*가 나오기 이전 1960년대까지 컴퓨터 OS는 컴퓨터를 제조하는 회사에서 제각각 따로 만들었다. 여러 컴퓨터에서 동일하게 작동가능하게 하는 게리킬달의 BIOS 개념은 1970년대 이르러서야 가능(상품가치전쟁 7편 上 참조 : 링크)해 졌다.



* Unix의 중요성 : 11편(전편보기)에서 NeXT에서 팀 버너스리가 WorldWideWeb 소프트웨어를 개발한 건은 절대 우연이 아니라 언급했다. NeXT 기반은 BSD Unix였다. 컴퓨터 역사를 통틀어서 Unix가 이룩한 성취는 두 말 할 나위가 없다. 지금 사용하고 있는 많은 OS가 Unix 혹은 Unix-like다. 모바일 OS를 지배하고 있는 애플의 iOS, 구글의 안드로이드 모두 Unix 혹은 Unix-like인 것을 보더라도 Unix의 역할은 단연 독보적이다. 


1960년대 이전까지 컴퓨터들은 서로 호환 되지 않았다. 1950년대 후반 ARPA(Advanced Research Projects Agency)의 컴퓨터 단말기들은 MIT등의 대학과 IBM등의 기술 센터들이 서로 연결되어 있었다. 정확히 말하자면 원거리에 위치해있는 대학과 기술센터에 있는 컴퓨터 본체와 APPA에 설치된 단말기들은 서로 공유없이 개별적으로 연결되어 있었다. 즉, APPA에 설치된 IBM 단말기는 IBM 본사에있는 본체와만 연결되어 있고 MIT 단말기는 MIT 대학에 있는 본체와만 연결된 구조였다. 즉, IBM 단말기와 MIT 단말기는 서로 호환되지 않았다. OS도 다르고 통신 프로토콜도 모두 달랐다. 쉽게 설명하면 디지털 무선통신에서 CDMA 전용 휴대전화와 GSM 전용 휴대전화가 서로 통신할 수 없는 것과 비슷한 맥락이다.


ARPA 네트워크 목적은 적(당시 미국의 적은 소련)의 핵 공격과 같은 만약의 사태를 대비해 군이 구축한 통신망이었다. 대재앙 이후에도 군의 통신을 가능케 할 시스템을 필요로 했기때문에 정보기관이 파괴되더라도 네트워크(ARPA)를 통하여 정보를 안전하게 공유하여 보관할 수 있는 장비들의 구축을 목표로하였다. 하지만 1960년대 단말기들은 서로간 접속이 불가능했다. 하드웨어가 다르고 OS가 다르고 프로그래밍 언어가 다르고 프로토콜(접속방식)이 다르니 서로 정보를 교환할 수 없었던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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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80년 10월 ARPANET은 미 전역을 네트워크 하기에 이른다.


ARPA의 연구책임자 테일러는 이런 네트워크간 불소통을 근거로 들어 정부를 꼬드겨 100만달러 추가 예산을 받아낸다. 그 결과 1969년 10월 전화 전용선을 이용하여 UCLA와 스탠퍼드 연구소(SRI)를 잊는 세계최초의 다른 컴퓨터 단말기간 원거리 통신이 실현되었다. 처음 접속시 'Log-In'이라 전송하려고 했는데 시스템 이상으로 인해 'L-O-G' 3글자만 전송된 건 옥의 티였지만 이 디지털 전송*은 유선 통신에서 이룬 벨의 음성전송과 비견될 혁명적인 사건이었다. 드디어 세계최초로 하드웨어 종속없는 ‘멀티 플랫폼’ 원거리 접속 네트워크가 가능하게 된 것이다. 여러 컴퓨터를 지원하는 -플랫폼 종속 없는- 원거리 네트워크 기술개발은 공공성에 입각한 정부의 성공적이고도 제대로된 투자라 할만하다. (우리나라의 공인인증서와는 태생부터가 다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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패킷 스위칭 : 발신자(User1)은 User5에게 빨간 정보를 전달한다. 여러 경로로 보내면서 파란 정보와 섞여도 문제가 되지 않는다.


 

 

ARPANET, 즉 디지털 신호로 원거리 쌍방향 통신이 가능했던 건 ‘패킷 스위칭'이라는 논리적인 개념 덕분이었다. 패킷 스위칭 기술 이전에는 정보전달은 전화통신과 같은 음성전달이었다. 음성전달은 신호를 끊김없이 계속 보내야한다. 이 전달방식은 송신자와 수신자가 각 1명일 경우에 합리적이다. 하지만 같은 회선으로 여러명이 동시 접근할 경우 전달의 문제가 생긴다. 연구자들은 신호 전달에 있어서 혁신적인 방법을 생각해 내는데 신호를 순차적으로 연결해서 보내는 것이 아닌 일정 길이로 쪼개서 보내는 것이다. 신호의 1단위를 패킷(Packet)이라 칭했다. 기존의 음성 전송 혹은 라디오 전송은 연결해서 보내야 한다.(선형구조) 하지만 디지털 전송은 데이터를 일렬로 연결해서 보내지 않고 나눠서 보내는 구조였다. 비선형 방식의 신호전달을 완성한 것이다.




3. 웹 브라우저의 직계 조상, NCSA의 모자이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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윈도우즈용 Mosaic : 사진과 문자를 한페이지에서 동시에 보여준다.


팀 버너스리는 WorldWideWeb 소프트웨어를 공개하였지만 NeXT 하드웨어에서만 돌아갔었다.(팀 버너스리가 WorldWideWeb에서 구현한 HTML은 논문 등 정보공유가 목적이었기에 문자(text)위주였다.)


하이퍼텍스트는 정보를 다루는 연구진과 엔지니어들에게 절대적인 칭송을 받았지만 당시 일반 사용자에게 유행했던 고퍼에 비해 확산이 매우 더뎠다. WorldWideWeb 소프트웨어는 HTTP의 기본제어 기능을 알아야 하는 등 일반인이 사용하기 까다롭기도 하였다. 그야말로 '가방끈 긴' 사람들을 위한 소프트웨어였다.


1990년대에 이르러 맥킨토시와 윈도우즈의 GUI가 대중적으로 확산되기 시작했다. GUI의 근본적인 사용자인터페이스(UI) 변화는 마우스였다. 도스의 커맨드라인 명령어 입력과 달리 파일의 접근을 마우스로 간편히 실행할 수 있게 된 것이다.


1986년 미국에서 설립된 NCSA(National Center for Supercomputing Applications)의 한 연구원이었던 마크 안드레센은 팀 버너스리가 공개한 Web 기술을 금광이라 생각했다. 그리고 팀 버너스리보다 한걸음 더 나가 기존의 업계종사자들만 다루는 네트워크가 아닌 일반 대중이 사용할 수 있는 진정한 의미의 확산을 도모했다. 이를 위해 안드레센은 자신보다 프로그래머 능력이 출중한 동료 에릭 비나를 꼬드겼다. 그들은 처음에 Unix X-window(GUI)로 관련 프로그램을 작성하기 시작했다. 1992년 12월 부터 3개월간 함께 프로그램을 작성했다. 사용 편의성에서 기존의 WorldWideWeb 브라우저를 능가했는데 이는 설계부터 GUI와 마우스를 고려한 프로그램이었기 때문이다. 마우스로 하이퍼텍스트를 클릭하면 다른 명령어 입력없이 바로 페이지 이동이 가능했고 스크린 상단에 마우스로 클릭할 수 있는 ‘전진’과 ‘후진’ 버튼을 둠으로써 사용성을 극대화 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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에릭 비나(좌) / 마크 안드레센(우)


또한 안드레센은 오디오 클립(음악파일)과 사진 파일의 포맷을 표준화하여 사용자들이 접근하기 쉽게 하였고, 화면에 보이는 페이지에서 이미지와 텍스트가 처음으로 공존할 수 있게 했다. (팀 버너스리의 WWW에서는 이미지를 보기 위해서는 별도의 새페이지를 열어야 한다.) 이로인해 웹브라우저에 그래픽과 멀티미디어가 기본 기능이 될 수 있었고 추후에 인터랙티브 기능을 탑재할 수 있는 기반이 되었다. 사용자는 별도의 학습 없이 주소창에 URL을 입력하고 마우스(스크롤+클릭)를 이용하여 웹페이지 보면 그만이었다. 안드레센과 비나는 이 프로그램을 모자이크(Mosaic)이라 명명했다.




4. 멀티 플랫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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현재의 HTML5가 멀티플랫폼으로 공헌한 브라우저는 Mosaic도 해당된다.


모자이크는 Unix X-Window System(GUI)에서 1993년 6월 0.1a 알파버전을, 같은 해 9월 1.0 버전을 발표하였다. 유닉스를 기반으로 개발했지만 안드레센은 모자이크를 더욱 확산시키고 싶었다. 개발 초기부터 애플 매킨토시와 MS 윈도우즈를 염두해 두고 있었다. NCSA에 함께한 여러 기술자들의 도움으로 프로그램은 더욱 정교해 졌고 동시에 많은 플랫폼을 지원할 수 있게 되었다. 사용자는 어느 컴퓨터를 가지고 있건 모자이크를 사용할 수 있게 되었다. 드디어 최초로 멀티 플랫폼 웹 브라우저가 구현된 것이다. ARPA 연구책임자 테일러가 생각한 하드웨어 종속이 없는 멀티플랫폼 네트워크 구성이 드디어 웹 브라우저를 통해 인터넷에서도 구현되는 순간이었다.


멀티 플랫폼 모자이크가 발표되자 사용자 수는 급격히 늘어났다. 1993년 웹 이용자의 성장률은 342,000%에 달했다. 1993년 초 50개에 불과했던 웹사이트가 그해 말 10,000개를 넘어섰다. 이를 가능하게 했던 건 바로 마우스 도입을 통한 너무나도 쉬운 인터페이스와 멀티 플랫폼을 처음부터 고려했던 안드레센의 뛰어난 '촉'이었다. 팀 버너스 리에 의해 공개된 HTML 기술과 앤드리슨의 편의성+멀티플랫폼 지원이 서로 만나 '인터넷=웹페이지'가 완성 된 것이다.


마크 안드레센은 웹 역사에서 또 한번 쾌거를 이루었지만 CERN에서 팀 버너스리는 전폭적인 지지와 찬사를 받은 것과는 상반되게 미국 공공연구소인 NCSA는 안드레센을 무시하고 홀대했다. 1993년 12월 NCSA 학생연구원인 안드레센이 일리노이 대학(NCSC의 모체)을 졸업하자 NCSA 수뇌부는 안드레센이 꼴배기 싫었는지 모자이크 팀에서 손을 떼는 조건으로 입사를 권유했다. 안드레센이 일궈낸 모자이크 팀은 이미 수십명으로 늘어난 상태였다. NCSA는 안드레센이 모자이크를 두고 나대는 것이 싫었고 모자이크를 온전히 자신들의 통제하에 두고 싶어했다. FTP와 텔넷을 공공의 목적으로 개발하여 배포했던 기관으로써 할짓이 아니었다. 안드레센에게 가했던 조건부 입사 권유는 일종의 꼼수로 안드레센을 쫓아내기 위한 계책에 불과했다. NCSA는 22세의 젊은 안드레센을 더욱 궁지로 몰았고 결국 안드레센은 졸업식도 참석하지 않은 채 짐을 싸고 실리콘밸리로 향했다.




5. 벤처기업 네스케이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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실리콘밸리에서 정착은 쉽지만은 않았다. 그가 실리콘밸리에서 첫 출근한 회사였던 ‘인터그레이션 테크놀러지' 또한 안드레센을 홀대하긴 마찬가지였다. 인재를 몰라본 이 회사는 얼마 안되어 문을 닫게 된다.


당시 실리콘밸리는 혁신에 목말라 있었다. 90년대 초 PC 기술은 정체기에 있었고 돌파구가 필요했다. 이때 실리콘 밸리 벼락부자 짐 클라크가 새로운 원동력을 찾고 있었다. 그가 세운 실리콘 그래픽스는 1993년 개봉한 쥬라기 공원으로 일대 파란을 일으켰다. 회사는 3D 영화산업 덕분에 커졌지만 여러 이권이 개입되자 아귀다툼 정치 판이 되었다. 엔지니어이자 경영자였던 짐 클라크는 거대 회사 경영에 환멸을 느끼게 되였다. 그는 다시 초심으로 돌아가 새로운 무언가에 투자하고 싶었다. 1994년 1월 말 그는 시장 분석가 빌 포스에게 새 인물을 알아봐달라고 하였고 그래서 추천된 인물이 바로 ‘마크 안드레센’이었다.


짐 클라크는 바로 안드레센에게 창업하자고 이메일을 보냈고 공공기관과 무능한 벤처기업에 지친 안드레센은 짐 클라크 제안을 흔쾌히 받아들였다.


짐 클라크가 안드레센에게 처음 제안한 사업은 온라인 게임, 쌍방향 텔레비전, 주문형 영화 등 ‘인터랙티브 온라인 서비스’였다. 하지만 당시 여러 여건상 신생 벤처회사에서 불가능하다는 것을 절감한 후 안드레센이 처음 기획하여 만든 모자이크에 집중하였다. 웹브라우저를 꺼내들게 된 데에는 안드레센의 개인적인 복수심도 기여했다. 웹으로 어느 누구도 돈을 벌지 못하고 있었지만 짐 클라크는 자신의 기존 주장을 철회하고 안드레센의 제안을 적극적으로 받아 들였다.


당시 모자이크는 맥용과 윈도우즈용으로 급격히 확산되고 있었다. 그 결과 많은 웹사이트가 생성되었다. 하지만 모자이크는 잦은 오류로 사용자들에게 욕을 먹고 있었다. 게다가 NCSA는 업데이트 없이 그냥 방치해 두고 있었다. 아니 모자이크를 정돈할 정도로 유능하지 못했다. NCSA의 인재들은 모자이크를 진두지휘한 안드레센의 부재를 아쉬워했다. 그런 내부사정을 알았는지 안드레센은 NCSA의 모자이크 핵심 개발 연구원에게 퇴사 권유 메일을 보낸다.


“여기(실리콘밸리)서 진행 중인 일이 있습니다. 함께 갑시다.”


NCSA 무능함에 진절머리가 난 뛰어난 개발자들은 안드레센과 짐 클라크에게 영입되었다. 짐 클라크와 안드레센은 새 회사를 모자이크 커뮤니케이션으로 정했다. 하지만 권리에 있어서 만큼 NCSA는 무능하지 않았는지 모자이크 이름을 가지고 법적으로 대응했다. 결국 인터넷(internet)과 무한한 가상 세계의 풍경(virtual landscape)의 조합으로 명명한 네스케이프(Netcape)라는 벤처회사가 탄생하게 된다.


NCSA는 모자이크를 온전히 자신의 소유로 귀속하고 싶어했다. 네스케이프가 새로운 웹브라우저를 만들것을 알게 되자 거듭 지적 재산권 침해를 주장하며 브라우저 당 50센트 로열티를 요구했다. 당시 NCSA는 스파이글라스(Spyglass)라는 회사를 통해 모자이크 사용권을 다른 기업에 빌려 주었다. (그 중 하나가 추후 MS가 된다.) NCSA는 모자이크를 통해 궁극적으로 ‘돈’을 벌고 싶어했다. NCSA는 넷스케이프 관련된 법적 소송을 언론에 공포하면서 클라크에게 “중지명령 서한”을 보냈다.


빡친 클라크는 네스케이프 명의로 넷스케이프는 어떠한 저작권 침해한적이 없다고 주장하며 NCSA를 캘리포니아 연방법원에 고소했다. 소송은 1994년 말 넷스케이프가 NCSA에 300만 달러를 지불하기로 하고 마무리 되었다. 눈 앞의 돈에 환장한 NCSA는 합의금을 넷스케이프 주식 50,000주로 대신하는 조건을 거절했다. 9개월 후 넷스케이프는 전대미문의 기업 공개를 통해 엄청난 돈을 얻게 된다. 넷스케이프의 조건을 거절한 NCSA는 수천만 달러를 날린 셈이다. 무능한 NCSA는 돈도 못벌고 모자이크 브라우저 개선도 하지 않았다. 결국 모자이크는 모두에게 잊혀지게 된다.




6. 모두를 위한 브라우저, 내비게이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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윈도우즈용 Navigator 1.0


1994년 10월 넷스케이프는 내비게이터 1.0을 출시한다. 모자이크 보다 훨씬 안정적이고, 빠르고, 기능도 풍부한 브라우저를 출시하자 모자이크의 인기를 능가하게 되었다. 안드레센이 모자이크를 통해 구현했던 멀티 플랫폼을 내비게이터에도 실현했다. 내비게이터는 유닉스와 매킨토시 뿐 아니라 윈도우즈도 지원하였다. 또한 모자이크 처럼 무료로 개방하였다. 이내 브라우저 시장의 70% 장악하였고 1995년 사용자는 1천만명으로 불어났다. 웹이 곧 인터넷이 되었다. 멀티 플랫폼에 무료로 공개한 결과였다.


당시 넷스케이프는 인터넷 수익모델을 몰랐다. 단지 기업들을 상대로 서버용 프로그램을 수 십만 달러에 팔았고 기업에서 사용하는 브라우저를 차별하여 유료로 판매하였다.


그 사이 웹은 급속도로 발전하기 시작했다. 온라인 은행, 택배, 서점 등이 등장하고 카드로 결재하는 기술들이 나오기 시작했다. 인터넷을 이용한 수익모델이 서서히 등장하였다. 미국 온라인 유료 서비스 최강자 였던 아메리카온라인(AOL) 마저 웹을 지원하기 시작했다.


안드레센은 내비게이터를 유료로 판매하는 것을 원하지 않았다. 소프트웨어 유료 판매는 구시대적 수익모델이기 때문이었다. 하지만 경영자들은 기업들에게 기술지원을 제공하는 조건으로 1카피당 39~49달러로 판매하기로 했다. 이 수익모델 결정은 MS가 웹브라우저 전쟁에서 쉽게 승기를 잡게하는 단초가 되었다. (하편에서 다루겠다.) 하지만 넷스케이프는 새로운 수익모델이 달리 없었던 상황이어 프리미엄 소프트웨어 유료 판매를 통해 어느정도의 수익을 확보할 수 있었다. 결국 손익분기점도 못 넘을 부질없는 짓으로 결론 났지만...


이제 웹은 순수 공학자인 팀 버너스리의 손에서 벗어나 내비게이터에 이르게 되었고, 거대한 산업으로 전진하고 있었다. 새로운 수익모델들이 나타나자 웹으로 돈을 벌고 싶은 수많은 욕망들이 꿈틀거리기 시작했다.


1996년 내비게이터는 80% 정점을 찍는다.




7. 성장 그리고 보이지 않는 위험, M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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선량해 보이는 빌게이츠 얼굴

 

 

웹이 폭발적으로 성장하자 넷스케이프 또한 가파르게 성장했다. 내비게이터 사용자는 급격히 늘어났다. 이 현상은 미국뿐 아니라 전세계적으로 확산되었다. 내비게이터로 확산된 웹은 플랫폼에 종속되지 않았다. 웹이 급속도로 발전하게 되자 짐 클라크가 처음에 제안했던 네트워크 TV, 라디오 같은 인터랙티브 네트워크가 웹을 통해 조금씩 구현되기 시작했다. 기존의 그림, 영상, 음성, 글자로 구현되었던 HTML은 새로운 시대 기술을 요구하게 되었다. 때 맞추어 인터랙티브에 최적화된 기술이 세상에 나오게 되었다.


네트워크에 능한 신생회사 선 마이크로 시스템즈(SUN)가 인터넷 환경에서 인터랙티브 기능을 구현할 수 있는 프로그래밍 언어 ‘자바’ 개발한 것이다. 자바는 웹과 마찬가지로 플랫폼에 종속되지 않았다. 어느 운영 체제에서나 실행할 수 있었다. 멀티 플랫폼으로 맥이든, 유닉스든 윈도든 가리지 않았다. 한번 자바로 짠 프로그램은 어디서나 동일하게 돌릴 수 있었다.


내비게이터의 성공으로 웹이 부흥하고 그와 동시에 자바가 등장하자 이를 가장 거슬려 한 기업이 있었는데 바로 MS였다. MS는 오직 윈도우즈로 자신의 왕국을 수성하고 싶었다. 플랫폼 종속이 안되는 웹 브라우저와 자바는 MS가 원하는 사업모델이 전혀 아니었다. 모든 사람들이 MS 소프트웨어 제품만을 구매, 사용하게 하는 것이 사업 모델이 되어야 한다 고집했다. 오직 윈도우즈만 플랫폼이 되어야 하고, 소프트웨어는 윈도우즈에서만 돌아가야 한다는 그 고집 말이다.


드디어 MS가 칼을 빼들기 시작했다. 브라우저 전쟁이 시작된 것이다.



이 시리즈는 계속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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편집 : 딴지일보 너클볼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