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감독: 홍상수
주연: 김주혁, 이유영, 김의성, 권해효, 유준상, 공윤영, 백현진, 조웅
음악: 달파란
촬영: 박홍열
청소년 관람불가 / Color / 83분



 

이러려고 감독했나 딱히 자괴감 들거나 괴롭지는 않은 듯한 영화




(스포일러 몇 방울 좀 빰삥했습니다)


최근에 사는 방을 옮겼다. 짐을 옮겼는데 주말에 했는지라 가스 신청이 되지 않았다. 그래서 집이 춥더라. 잠을 자자니 뭔가 서러워져서 한밤중에 영화를 감상하러 극장에 갔다. 가장 가까운 시간대가 홍상수 감독의 신작인 <당신자신과 당신의 것> 뿐이더라. 사실 요 몇 년간 이 감독의 작품들 따라가기가 영 힘들어서 이제부터는 보지말까 싶었다. 그러나 대부분의 멀티플렉스 상영관 스크린 크기가 작아서인지 요 몇 년간 대형관 빼면 참 극장에서 영화 볼 맛이 나지 않았다. 홍상수 감독의 작품들은 다행히도 싸고 빠르게 찍힌 빈티나는 영상미가 돋보여서, 이상하게 작은 크기의 상영관에서 봐도 그러려니 하면서 보게된다. 게다가 이번에는 최소 상영시간이 1시간 20분은 넘는다. 영화제도 아니고, 9천원 내고 영화 보러 들어갔는데 1시간에서 1시간 10분대 였으면 에라이 그러면서 엎어버렸을지도 모를 일이다. 결국 봤다.


<당신자신과 당신의 것> 은 의심으로부터 시작된다. 영수 (김주혁)가 알고 지내는 형인 중행 (김의성)으로부터 애인인 민정 (이유영) 이 밖에서 다른 사람들과 술을 마신다는 이야기를 듣는다. 서로 간에 술 먹지 말자고 약속한 부분도 있지만, 민정이 다른 남자들과 술을 마셨을지 모른다는 생각을 더 하고 있는 듯한 영수. 민정이 어딘가로 외출했다 들어온 날 밤, 그는 의심을 가득 품은 채 격렬하게 그녀를 추궁한다. 이 추궁에 질려버린 민정은 생각의 시간을 갖자며 영수와 떨어지고 두 남녀는 냉전에 접어든다. 훗날 사고가 났는지 어느샌가 목발을 짚는 처량한 신세가 된 영수는, 자신을 만나주지 않는 민정을 간절히 원하며 그녀의 흔적을 찾고자 분투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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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 몇년간 만들어진 홍상수 감독의 작품들은 내게는 다소 난감하게 다가왔었다. 그의 작품들은 언제부터인가 이야기나 대사 등이 주는 흥미보다는, 거기서 미묘한 변화를 감지하여 전체 구조를 파악하는 것이 중요해졌다. 이를 파악하지 않으면 지금 내가 보고 있는 작품이 뭔지도 모르겠다 싶었던 것이다. 글 하나가 떠오른다. 김혜리 평론가가 영화주간지 <씨네 21>에서 쓰는 칼럼인 '김혜리의 영화의 일기' 의 일부다. 김혜리 평론가는 2010년에 홍상수 감독의 <옥희의 영화>를 감상했을 때 친구와 이런 대화를 나눈 바 있다. 김혜리 평론가는 친구에게 그 작품을 감상하게 만들기 위해 나름의 장점을 내세우며 설득하는데, 그걸 들은 친구의 답이 참 재밌다.


'...친구 K와 오래간만에 통화했는데 화제가 요즘 어떤 영화가 볼 만한가로 흘렀고 이야기는 <옥희의 영화>를 묘사하려는 시도로 이어졌다.


“재밌어. 그러니까 이선균과 문성근, 홍상수 감독의 영역이 부분적으로 겹치고 그 교집합을 정유미가 통과한다고 말할 수도 있고, 1편과 4편을 각각 2편과 3편의 현실로부터 파생된 영화 속 영화라고 볼 수도 있는데….” 중언부언하는 내게 친구가 말한다. “그래? 너 말대로라면 전혀 재미있게 들리지 않는걸.”


좌절스럽다. 부정확하더라도 역시 기사에 그림 설명을 넣는 게 좋을까.'


...김혜리 평론가의 친구가 느꼈을 반응이, 감독의 작품인 <다른나라에서>부터 내가 가졌던 감흥이라고 해둘 수 있겠다. <자유의 언덕>이나 <지금은맞고그때는틀리다>에 이르러서는 '아. 이런 영화군' 이 아니라, '아. 이런 차이를 말하는 건가... 그래서 뭐, 어쩌라고?' 에 가까워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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홍상수 감독의 작품을 보면서 느꼈던 재미 중 하나는, 바로 그가 직접 쓴 그날그날의 대사를 소화하는 '배우들의 연기' 에 있었다. 감독과 두 편의 작품을 함께 했던 배우 고현정의 말을 인용하자면 '연기자로서의 자신을 새롭게 깨어나게 해주는' 것이 홍상수 감독과의 작업이었다고. 그녀와 <해변의 여인>을 만들었던 시기의 발언이긴 하지만, 감독 역시 등장인물의 50%는 자신이 준비하지만 나머지 50%는 배우들의 몫이라며 그들의 공헌을 언급한 바 있다. 그런데 최근에 만들어진 작품들에서는 그 50%가 사라진 듯한 느낌을 받곤 했다. 배우들의 태만이라기 보다는, 그들의 연기에 주목할만한 순간을 만들어주지 않는 작품을 만든다고나 할까. 작품 자체가 감독 뿐 아니라 여러 사람들이 모여서 만들어낸 다양한 결을 가진 이야기가 아니라, 의미를 파악하고 해독해야 하는 어떤 문서처럼 느껴지곤 했다. '파고 가고 또 파고 가는' 구석을 만들어주길 기다렸을 사람들에게는 재밌는 작품이 됐겠지만 말이다.


다행히 <당신자신과 당신의 것>은 내가 몰입할 수 있게 만들어주는 구석을 조금 내준 작품이었다. 이번에도 <옥희의 영화>부터 시작됐던 한 배우의 일인다역 연기, 혹은 다역처럼 보이지만 그게 모두 일인일수도 있다는 식의 연기가 등장한다. 그래서 이유영의 얼굴을 그대로 보여주지만 그렇다고 그녀가 모든 순간에서 소민정의 모습으로 나오는지, 아닌지에 관해 아리송해지는 순간을 만든다. 재밌는 점은, 이유영이 연기하는 인물을 소민정이라고 생각하는 다른 남자들이 말을 걸지만 그녀는 끝까지 자신이 그런 인물이 아니라고 주장한다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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윗 사진과 아래 사진의 이유영은 전혀 다른 인물... 이라고 하더라.


<옥희의 영화>의 정유미, <북촌방향>의 김보경, <다른나라에서>의 이자벨 위페르 같은 인물들도 그런 연기를 선보인 바 있다. 그들은 정말 다른 사람처럼 느껴졌던 반면, <당신자신과 당신의 것> 속 이유영은 끝까지 잡아떼는 것만 같다. 그래서 민정일수도, 아닐수도 있는 여자가 자기를 알고 있다고 생각하며 말을 거는 남자들과 만나는 신에서는 언제나 이상한 긴장감이 형성되어 집중에 수월해진다. 물론 잡아떼는 이유영의 모습을 정말 소민정이라고 생각한다면 이 작품을 보는 경험은 여러모로 난감해진다. 사귀던 애인과는 시간을 갖자는 사람이, 그 사이에 자기를 알고 있다고 생각하는 다른 사람들 앞에서 끝까지 아니라고 얘기하며 만남을 이루는 모습에 몰입하기가 쉽지 않으니 말이다. 감상하는 입장에서는 영화를 재미있게 만드는 요소일 수 있지만, 사실 굉장히 기괴한 풍경이지 않은가. 리플리 증후군 환자를 보는 듯한 스릴러도 아니고.


그 기괴함이 싫다면 민정, 혹은 민정일 수도 있는 여자의 행동에 대한 함의를 찾아도 좋다. 이를 표현하는 방식에서 <당신자신과 당신의 것>은 빛을 발한다. 남자와 여자에 대한 개념으로도 생각해볼 수 있겠다. 한국영화계가 여자 캐릭터를 소모적으로 활용하고 있다고 여기고 있는 시점이 다시 대두되어서 그럴까. 이 작품이 여자 캐릭터를 활용하는 모습은 무척 돋보인다. 흔히 여자들은 이럴거야, 저럴거야 라고 생각할 때, 작품은 소민정을 내세우며 당신이 이 사람에 대해 뭘 아느냐고 되묻는다. 작품에서 영수가 목발을 짚어가며 중행과 함께 민정의 집을 찾아가는 시퀀스가 있다. 그녀의 집 초인종을 누를 때 잠시 영수는 민정이 자신을 다시 찾아오는 환상을 본다. 작품의 이야기를 진행하는 와중에 민정을 다시 만나기도 한다. 그러나 후반부에 영수가 다시 민정을 만날 때, 그녀는 그가 알고 있던 민정이 아니다. 출판관계자 상원 (유준상)이 그녀를 만날 때도 그렇다. 술집에서 김의성이 연기하는 중행을 만날 때 잠시 소민정의 모습으로 돌아오는 듯 보이는 순간이 있긴 하지만, 이 때 쯤에는 관객이 그녀가 과연 민정이 맞는지 확신을 하지 못할 상태가 된다.


소민정이라는 이름으로 시작했던 여자는 어떤 남자 캐릭터들의 선입관 속에 종속되지 않는다. 마치 그때그때 옷을 바꿔입는 마네킹처럼 새롭게 해체되고 모습을 바꾸며, 자신을 알고 있다고 생각하는 그들의 생각을 바꾼다. 알고 있다고 생각하는 사람들은 조립식 자전거마냥 자신의 기억을 해체하고 조립한다. 하지만 조립식 자전거는 새롭게 조립해 봐야 결국 자전거가 된다. 새롭게 떠올려 보려 해체해봐도 결국 만들어지는 결과물은 정해져 있다는 이야기다. 소민정, 혹은 민정일 수도 있는 여자는 다르다. 그녀는 만나는 사람들에게 완전히 새로운 존재이자 결과물(체)로서 다가오며, 작품에서 가장 자유롭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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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민정을 만들어낸 이유영의 연기를 거론하고 넘어가야 되겠다. (전문배우도 아닌데 자기 스타일의 연기를 찾은 듯한 백현진을 비롯해서 출연한 사람들 모두가 연기를 잘 하지만) 그녀의 연기는 출연진들 중에서도 특히 생동감이 넘친다. 후반부에 김주혁이 그녀를 다시 만나 자기가 울었다는 막걸리집에 가자고 설득할 때 두 배우의 연기는 작품 전체에서도 정말 최고다. 이미 초반부에서 두 사람이 연인 관계임을 밝혔으니까 민정으로 보이는 여자, 혹은 민정일 수도 있는 여자가 자기가 암만 그 사람이 아니라고 해도 설득이 되지 않을 것 같았다. 그러나 두 배우의 연기가 설득해낸다.


"술 먹고 싶은 만큼 먹어요. 당신 아무 잘못 없어요."라고 웃으며 말하는 영수와, 이 말을 듣고 눈물콧물 슥슥 닦으며 그를 바라보는 민정의 모습에 이르면 어떤 과학적, 현실적 개연성을 초월하며 설득이 이뤄진다. 우주의 기운인가? 그건 아니겠지. 김기춘 비서실장을 비롯한 청와대 사람들이 최순실을 모른다고 얘기하지만, 보고 있는 사람 입장에서는 우주의 기운을 받았을 그들의 연기는 전혀 신뢰가 가지 않는다. 반면 이유영과 김주혁은 해낸다. 하나의 대사를 기점으로 두 사람은 마치 처음 보는 사이가 된 것 같다. 그렇게 <당신자신과 당신의 것>은 몇몇 배우들이 말했던 '홍상수의 영화에서 배우가 새롭게 깨어나는 순간' 을 간만에 느끼게 해준다. 몇 년간 홍상수 감독의 작품에서 보기 힘들었던 '나머지 50%' 가 채워진 광경, 그게 이 작품에 나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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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지막으로, <당신자신과 당신의 것>은 최근 홍상수 감독이 김민희 배우와 함께 일으킨 스캔들 때문에 그의 실생활로다가 대입시켜 볼 수 있는 작품도 된다. 사실 그런 감상법은 굉장히 유치하다는 의견을 온라인에서 몇 번 본 적이 있다. 어떤 한 사람의 견해가 아니라 의외로 그런 의견이 많은 편이었다. 그런데 여기에는 좀 의문이 든다. 현재 잊을만할 즈음 계속 뉴스거리를 가져다 주는 감독 당사자가 자초한 문제 아닌가. 굳이 우리가 작품을 감상할 때 그런 사실을 애써 걸러야 할 필요가 있을까? 그런 건 노력한다고 해서 걸러질 성질의 것도 아니다.


만약 스캔들을 일으키고 이 정도 반응도 얻지 않을 거라 생각했다면 그게 이상한 거고, 작품 감상에 영향을 끼칠 정도로 사생활 관리를 잘못한 당사자 잘못인거지 뭘. 그리고 그 유치한 감상이라는 것이 <당신자신과 당신의 것>을 재밌게 만드는 또다른 방법이다. 작품 바깥에서 감독이 보여주는 행보나 인상, 혹은 촬영장에서의 이야기 등의 요소가 누군가에게 작품을 감상하는 데 있어 엄청난 영향을 끼치기도 한다. 하지만 누군가에게는 별다른 영향을 끼치지 못하기도 한다. 한 2% 정도 끼치려나. 그렇게 생각하고 볼 사람들은 볼테고, 그렇게 생각하지 않을 사람들은 생각하지 않겠지.


감독의 전작이긴 하지만 <옥희의 영화>에서 주연 중 한 명인 이선균은 이런 대사를 한다. "제가 만든 영화가 살아있는 무언가와 비슷하게 만들어지는 물건이 되었으면 좋겠습니다..." 문득 그걸 떠올려 보니, <당신자신과 당신의 것>은 <옥희의 영화>보다 더 성공한 작품이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들었다. 분명 감독이 자신의 스캔들을 염두에 두고 이 작품을 만들지는 않았을텐데, (설사 그랬다 하더라도 홍상수 감독의 작품은 감독이 그건 당신의 생각이라고 말하면 그만이니까) 보는 사람에 따라서 홍상수와 김민희의 관계를 대입시켜도 거기에 맞춰 변하기 때문이다. 확실한 것은, 그렇게 보면 작품이 또다른 재미를 준다. 그렇게 보지 않아도 재밌는 구석이 많고 말이다.


<당신자신과 당신의 것>은 영화 안팎으로 부단한 노력이 이뤄진 덕에, 스크린 안에서 만들어진 형태의 영화로서 남지 않고 살아있는 무언가'들'과 비슷한 물건이 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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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s.

1) <지금은맞고그때는틀리다>보다 <당신자신과 당신의 것>이 더 잘 만들었다고 생각하는데 흥행이나 비평 쪽의 성적으로 봐서는 그 작품은 커녕 실패작이 될 것 같아 안타깝다. 뭐, 이 작품의 운명이겠지만.


2) 작품의 결말에서 이유영이 김주혁과 수박을 나눠먹는 신이 되게 묘하다. 홍상수 감독이 2005년에 만들었던 <극장전> 이 떠오른다. (바로 아래의 사진) 그 작품의 주인공인 이기우가 엄지원과 섹스를 한 후, 화장실에 가려고 문을 열었는데 뜬금없이 집 현관 바깥으로 통하고, 바깥 계단에 앉아있던 백인 여자가 사과 먹겠냐며 권하는 신이 있다. 꿈 신이었는데, 이 <극장전> 때문에 <당신자신과 당신의 것>의 결말 역시 현실이라기 보다는 상상이나 꿈 같다. 하지만 꿈이라고 생각하면 뭔가 작품이 서글프게 느껴지는 듯하여, 그리 생각하지 않기로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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홍준호


편집: 꾸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