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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소게임을 볼 줄 알았다. 시소 위에 왼쪽에서 오른쪽으로 심상정 - 문재인 - 안철수 - 유승민 - 홍준표. 일정한 간격으로 한 명씩 서 있다. 각자 다른 정치적 성향을 대표하면서 결국 팽팽하게 이리저리 왔다 갔다 할 줄 알았다. 그래 그럴 줄 알았는데…(눈물)

 

새롭긴 했다. 겹치는 부분이 있지만 분명 차이가 있는 다섯 명의 후보 토론을 우리는 가져본 적이 없다. 게다가 스탠딩 토론이라는, 처음 보는 규칙이 어떤 풍경을 만들지는 토론 시작 전부터 화제였다. 그리고 분명, 새롭긴 했다. ‘스탠딩' 상태로 벌어지는 4:1 다구리판이.

 

방송사마다 계속되는 토론에 부담을 느껴서인지 각자 다른 방식을 도입해서 차별화를 노린다. 어제 토론은 질문과 답변 시간을 합쳐 모든 후보에게 9분의 시간이 주어졌다는 것. 물론 토론 첫 질문부터 새로운 방식의 허접함은 모습을 드러내기 시작했다. 일반적 토론, 그러니까 주도권 토론이 있는 토론의 경우에도 질문과 답변의 시간은 합쳐져 있지만, 이것은 주도권을 가진 후보의 시간에서 차감된다. 그러니 아무리 쓸데없는 질문을 하고 싶어도 쉽게 할 수가 없다. 시간이 줄어드는 리스크는 오롯이 질문자가 부담해야 하기 때문에.

 

어제, 무려 공영방송을 통해 4:1 다구리가 펼쳐진 것은 규칙의 탓이 크다 하겠다. 상대의 질문에 대답하다 보면 내 시간을 다 써서 나는 질문을 못 하는 참신하고 조잡한 시스템에서 현재 지지율 1위인 문재인에 대한 다구리는 예상된 일이었다. 장장 두 시간 동안 온 국민 앞에서 펼쳐진 4:1 다구리를 통해 문재인은 본인이 말할 기회를 잃었고, (양강구도를 주장하던 안철수는 존재감을 잃었으며), 지켜보는 사람들이 욕을 할지언정 본인은 욕을 하지 않은 신선 멘탈을 인증했다.

 

하지만 시청자가 얻고 싶었던 득은 그게 아니다. 이 정도 집단 린치를 예측 못 한 룰의 불공정함. 제작진은 모두 종아리를 걷어야 한다.


 

토론회 최악의 순간 4

 

1. 안철수, 아재개그에 대한 모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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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번은 없습니까? 저는 3번으로 하고 싶은데.

 

지난 SBS 토론회 때 시종일관 경직된 이미지를 보여서 그런지 이번에는 편안하게 농담도 하고 여유 있는 모습을 보이고 싶었던 것 이해한다. 이해는 하는데, 피식이라도 웃을 수 있어야 개그다. 미안하지만 시작부터 스튜디오뿐만 아니라 시청자들이 있는 시공간까지 얼어붙는 줄 알았다. 아...평가할 가치도 없다. 제작진과 함께 안철수도 종아리 걷어야 한다. (개인적으로는 이 개그 안 들은 귀 삽니다)

 


2. 유승민의 첫 질문, 암 유발은 이미 시작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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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 SBS 토론에서 후보들이 뽑은 토론왕은 유승민이었다. 그간 토론에 등장했던 (구) 새누리당 의원들의 토론 실력이 충격과 공포 일색이었던 것에 반해 유승민은 의견이 명확하고 주장에 대한 근거가 명확했다. 반론과 질문도 영리하게 던졌다. 그 정책에 동의하고 안 하고는 토론 실력과는 별개의 문제다.

 

첫 질문이 토론의 질 전체를 대표한다 할 수는 없겠지만, 그것을 통해 이 토론의 미래를 대충 그려볼 수는 있다. 그런 의미에서 스탠딩토론의 첫 질문을 던지는 사람이 유승민이라는 게 참 다행이었다. 정책을 주제로 영리한 질문을 하겠지.

 

북한에게 물어봤냐 안 물어봤냐.

김정일에게 물어봤냐.

누구한테 물어봤다는 거냐.

 

기대와 달리 유승민의 첫 질문은, 결국 색깔론이다. ‘물어보다'와 ‘알아보다'의 차이를 모를 정도로 유승민이 말귀를 못 알아듣지는 않을 게다. 그래서 ‘북한에게 물어봤냐’는, 조금 더 세련된 버전의 ‘너 빨갱이지’는 마치 한 20년 전 토론을 보는 듯 모두에게 시간여행을 선사했다. 4차 산업혁명을 얘기하는 2017년에 들춰보는 색깔론. 암세포는 여기에서 시작된다. 더불어 이따위 쓸데없는 질문에 답변하느라 문재인이 자기 시간을 깎아 먹는 것을 보면서 시청자는 이 룰에 깊은 빡침을 느낀다. 본격적으로 토론이 시작된 지 약 2분이 지나지 않아서. 그리고 그 빡침은 약 2시간 동안 현실이 되는데...

 


3. 홍준표, 보편적 복지의 맹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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홍준표는 이번 토론에서 유일하게 시간 신경 안 쓴 후보가 아닐까. 그도 그럴 것이 이번 룰의 특성상 말을 들어보고 싶은 후보는 시간이 없어 말을 못 하고, 말을 안 들어보고 싶은 후보의 시간은 차고 넘칠 수밖에 없게 되어 있었다. 역시나 아무도 질문해주지 않는 홍준표의 시간은 홀로 거꾸로 갔다.

 

애초에 정책이 아니라 색깔론 하나로 공격하는 홍준표에게 9분은 너무 길었다. 조금 고무적인 사실은, 시청자들이 이번 토론을 통해 보편적 복지의 맹점을 체감했다는 것. 모든 후보에게 공평하게 9분을 나눠주면 안 된다는 걸 몸소 느끼게 해주었다.

 

, 이정희 보는 같아서.


홍준표 옹께서는 시간이 남아서 주제와 무관한 각종 헛소리를 시전하셨다. 안철수 포스터 지적과 박지원 대표 부분은 대체 토론 주제 중 어떤 것과 연관 있는지 누가 좀 알려줬으면 좋겠다. 간간히 이정희 전 의원을 소환하는 마법을 부렸으나, 단언컨대 이정희가 있었다면 홍준표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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입도 뻥긋 못했을 거다. 어쩌면 죽었을지도...


 

떼쓰는 수준인 색깔론 덧칠에 문재인 기억력 검증인지 토론인지 아닌지 모를 이것을 보고 있자면 연정과 통합, 협치 등을 논하던 지난 민주당 경선 토론회가 얼마나 고차원적인 토론이었는지를 알 수 있다. 이건 좀 뜻밖의 성과인데 개인적으로 이런 성과는 좀 안 얻고 싶다.


 

4. 심상정, 전략적 실패


심상정에게는 납득할 수 없는 이유로 나오지 못 할 뻔했던 토론이었다. 그런 점에서 마침내 출연하게 된 심상정이 어떤 불을 뿜을 것인가 내심 기대했다.


심상정을 조금이라도 안다면, 심상정이 말을 잘한다는 걸 모르진 않을 거다. 장관이고 뭐고 다 조져버리는 모습. 그게 우리가 시각적으로 기억하는 심상정이다. 유승민이 돋보이기도 했지만, 다른 후보에 비해 기대치가 커서 그런지 지난 토론회에서 심상정은 조금 아쉬웠다. SNS를 통해 "다 정리하고 오겠습니다"는 메시지를 보낸 것으로 볼 때 후보 본인이 이번 토론에서 만회하리라 생각한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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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른
 분은 몰라도 우리  후보님 그렇게 말씀하시면  됩니다.

왜냐하면 지난번 대통령 선거 이후 5 동안 준비 기간이 있었는데 지금 와서 수정하신다는  설득력 있습니까?

준비되신 대통령이 아니시죠.


어떤 후보든 본인과 본인이 속한 정당의 가치관을 주장해야 한다. 민주당보다 더 선명한 진보 정당인 정의당의 시선에서 민주당의 복지정책, 노동정책은 미완의 정책일 수밖에 없다. 본인의 시선에서 미완의 정책에 문제를 제기하는 것은 자연스러우나, 상대적으로 보자면 미완 정도가 아니라 거의 없다고 할 만한 보수정당에 대한 문제제기는 거의 없었다. 선명함을 주장하자면 다들 문재인에게 질문할 때 보수정당에 질문했어야 한다.


선거 전략적으로, 심상정과 문재인은 서로에게 독특한 포지션이다. 지지층은 완벽히 같지는 않지만 겹치는 부분이 많다. 그런데도 표 나눠 먹기는 잘 일어나지 않는다. 문재인 지지층에게 심상정은 좋은 대안이지만 이들의 결집력이 강하다. 그래서 오히려 문재인이 당선 가능성이 올라갈수록 심상정에게 올 표도 많아진다. 문재인을 공격한다고 해서 심상정이 그 표를 얻게 되는 것은 아니다. 문재인의 당선 가능성을 올리려면 2위 후보의 지지율이 떨어져야 하고, 그 표가 심상정에게 올 거다. 그런 의미에서 심상정은 불을 잘못된 방향으로 뿜었다. 홍준표의 표현을 빌리자면 심상정의 주적은 바로...ㅇ...읍읍!!


 

(실낱같은) 최고의 순간 4

 

1. 회초리를 든 심상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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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북송금이 도대체 몇 년 지난 얘기입니까? 선거 때마다 대북송금을 아직도 우려먹습니까? 국민들 실망할 겁니다. 앞으로 대통령돼서 무엇을 할 것인지를 말씀하셔야지. 선거 때마다 대북송금 얘기 계속 재탕, 삼탕하면 무능한 대통령들이지 뭐예요, 그게.

 

아마도 팝콘을 들고 편안히 관람 중이거나 잠든 것으로 추정되는 사회자 대신, 개판을 정리한 건 심상정이다. 북한이 없으면 1초도 말을 이어갈 수 없는 프로 종북러 홍준표와 유승민이 벌인 판을 한 방에 끝내자 누구도 감히 이의를 제기할 수 없었다. 실제로 종아리 걷어서 회초리 친 효과. 심지어 아무말 전문가 홍준표마저도 고개를 떨구고 민망한 웃음을 지었다. 덕분에 사회자는 편안하게 팝콘을 마저 먹을 수 있게 되었다.

 


2. 문재인과 심상정, (아마도 이번 토론회의) 유일한 토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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심 : 그렇게 말씀하셔서 될 문제가 아니고요. 김대중 정부 때 정리해고법, 파견법 만들어졌죠. 노무현 정부 때 이른바 비정규직법, 기간제법 만들어졌죠. (...) 그 점에 대해서 그냥 앞으로 잘하겠다 이렇게 하시면 되는 겁니까?

문 : 100% 동의하지 않지만 그러나 그런 부분들이 우리의 한계였다고 생각하고 성찰을 해 오고 앞으로 우리가 넘어서야 되는 부분들이죠.


토론에는 대화를 통해 서로 설득을 하려는 노력만 있을 뿐, 이기고 지는 건 원래 없다. 가치에 동의하되 방식이 다를 수도 있다는 걸 발견하는 게 토론이다. 그런 점에서 어제 최고의 (그리고 아마도 유일했던) 토론은 심상정의 문제 제기와 문재인의 답변이었다. 발언 내용 자체는 이미 여러 번 다른 채널을 통해 두 후보가 이야기해왔던 것이나 토론의 목적을 충족시키는 유일한 대화였다.


참여정부의 노동정책에 대한 문제 제기는 최소한 답변하는 문재인도 한계를 인정해온 것이었고, 방식의 차이는 있지만 서로 큰 가치에 동의했다. 다른 정책의 경우 원래 다른 게 너무나도 당연한 각자의 방식을 두고 '내 방식에 동의할 때까지' 후려치는 방식이었던 것에 비해 이 순간의 대화는 잠시나마 성숙한 토론이었다. 다만 너무 짧았다. 순식간에 사라져서 도깨비인 줄...

 


3. 안철수가 맞고 있는데 문재인이 나타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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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 : 저는 애매한 답변하지 않았습니다.

유 : 공과 과라고 그러셨어요.

문 : 제가 시간이 없지만 제가 유승민 후보님 말씀에 대해서 조금 다른 의견 말하고 싶습니다. 그때 김대중 대통령이 남북정상회담 연 것은 남북 관계를 획기적으로 개선한 역사적인 결단이죠. 거의 통치행위적 결단이라고 봐야 됩니다. 그거 없었으면 어떻게 남북관계의 대전환이 있었겠습니까?


어제 다구리판에서 거의 내내 코너에 몰렸던 문재인의 유일한 휴식 시간은 안철수에게 그 공격이 집중될 때였다. 보수도 진보도 아닌 안철수의 정체성에 대해 유승민이 공세를 벌이고 있을 때, 그러니까 유일한 휴식시간에 갑자기 문재인이 참전한다. 유승민이 대북송금을 들어 안철수에게도 '너 빨갱이지'를 시전하고 있을 때, 홀연히 나타난 문재인은 안철수 일병을 구해주었다.


아무나 끼어들어 할 수 있는 토론, 이었던 어제의 형식을 올바르게 사용한 예인 동시에 드디어 3인이 모여도 토론이란 게 되긴 한다는 걸 보여준 사례. 빨갱이 프레임으로 물고 뜯기 딱 좋은 것을 통치행위적 결단이라는 프레임으로 정의한 문재인의 소신 발언 사례도 되겠다.


당시 횡설수설하던 안철수의 입장에서는 자신에게 쏟아지는 화살을 문재인이 대신 맞았으니 고맙기는 했겠으나, 공격과 함께 콩알만큼 쏟아지던 관심 역시 문재인이 다 거둬가고 다시 외로움이 찾아왔다. 



4. 안철수의 학제개편, 유승민의 영리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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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승민의 토론은 지난 SBS 토론회에서 빛났다. 지난 토론에서 정치인 유승민이 그리는 미래 대한민국의 구상을 조금이나마 엿볼 수 있었다면 이번 토론은 문재인 공약 검증단 1인으로 참여해서 유승민 본인의 생각을 들을 기회가 거의 없었다. 안철수의 대표적 공약 중 하나인 학제개편에 관한 질문은 이번 토론에서 유승민의 토론 스킬을 볼 유일한 기회였다. 지난 토론에서 더 집요하게 질문한 부분이긴 하나 그때 제대로 대답을 듣지 못했기 때문에 다시 질문한 것으로 보인다.


유 : 저는 제일 충격을 받은  교육부 폐지하고 5-5-2 학제 바꾸는 건데요. (...) 그래서  후보님 공약을 보면서 제가  후보님 혹시 자제분이 얼마나 한국에서 교육받으셨어요? 


이런 질문에서 돋보이는 스킬은 절대 논리적으로만 질문하지 않는다는 것. 지난 토론에서는 '아이들이 무슨 죄냐'를 슬쩍 섞어 부모들의 심금을 울렸다면, 이번 토론에서는 '안 후보의 딸은 한국에서 얼마나 교육받았냐'를 뒤에 슬쩍 섞었다. 이로써 안철수는 금수저에다가 한국 교육에 대해 잘 모르고 정책을 만드는 후보가 돼버렸다. 안 그래도 유치원 때문에 전국 미취학 아동의 부모 표를 잃은 안철수 후보에게서 이제는 전국에 애 키우는 모든 부모 표를 싹 다 뺏어올 작정인 것 같다. 토론은 절대로 논리로만 받아들여지지 않기 때문에 이런 감성 호소는 대단히 영리했다.

 


어디에나 승자는 있다

 

SBS 토론이 끝나고 후보들은 본인을 제외하고 토론을 가장 잘했던 후보를 뽑았다. 토론회 관전기를 마무리하며 이번 토론의 승자는 누구일지 생각해본다. 서서 하는 깽판 다구리쇼, 그럼에도 이번 토론의 승자는 있다. 아무리 생각해봐도 이번 토론의 승자는 얘 뿐인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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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 암세포. 2시간 동안 대체 암세포라는 것이 어디까지 자라날 수 있는지 경험했다. 하… ㅅㅂ 

25일 JTBC 토론, 부디 손석희 사장의(a.k.a. 손 박사) 건투를 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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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년토론 전원책 씨 대신 홍준표 후보를 보낸다.(찡긋)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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