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 글을 어떻게 써야 할까. 사실 쓰지 않아도 상관 없다. 지난 가을을 끝으로 딴지에 글을 보내지 않은 이후, 편집부 측에서 별다른 압박도 없다. 뭐, 나같은 필진 따위 별로 필요 없다는 거겠지. 후후. 그래도 지금 내 머리를 지배하는 이 생각을 나누고 싶다는 욕망이 너무나 도 강하게 나를 휘감는다. 결국엔 굴복하고야 만다.
또 서두가 길다. 무언가 말에 뜸을 들이는 것은 나의 습관이다. 프랑스어로 말할 때는 그렇지 않다. 내 프랑스어 실력이 모국어인 한국어에 한참 못 미치기 때문이다. 또 하나의 변명을 덧붙이자면, 두 언어로 실현되는 작문의 차이도 있다. 하지만 이 글의 서두를 질질 끄는 데는 지금부터 내가 하려는 이야기가 내게는 그리 쉽지 않은 주제라는 이유가 가장 클 것이다.
나는 뚱뚱하다
적어도 한국에서는. 한국에서 친구들과 만날 때, 지하철이나 버스같은 대중교통 수단 안에서 다른 사람들과 마주칠 때 내 몸의 부피가 가장 큰 것을 발견하고는 매번 움츠러 든다. 인정한다. 프랑스에서 내가 보통의 범주에 속한다고 느끼는 사실은 분명 내가 이곳에서의 삶을 선택한 여러 이유 중 하나다. 처음 프랑스에 왔던 그때, 내 몸에 맞는, 그것도 예쁜 옷들이 도처에 널려 있음을 발견하고는 너무나 행복했음을 떠올리면, 이는 어쩌면 가장 큰 이유일 수도 있다.
처음으로 내가 뚱뚱하다는 사실을 인지한 것은 초등학교 3학년 때. 짓궂은 4학년 남학생들이 날더러 '돼지'라고 했다. 처음에는 놀랐고 다음에는 분노했다. 화를 내는 내 모습에 그들은 놀림의 수위를 높였고 결국 나는 수긍의 단계를 밟았다. '아, 나는 돼지구나. 나는 돼지니까 더 먹어야 되겠지. 더 먹어도 되겠지.' 뭐, 이런 생각들.
재미있는 것은 지금에 와서 초등학교 3학년 때 내 사진들을 보면 나는 전혀 뚱뚱하지 않았다는 사실. 하지만 그 이후로 내 체중은 급증했다. 때에 따라 줄어들기도, 다시 늘어나기도. 이른바 비만과 요요로 점철된 인생을 나는 지금까지 살아 오고 있다. 한국식 사이즈로 말하면 55에서 77 사이를 널뛰 듯 넘나드는 삶.
"살만 좀 빼면 참 예쁘겠다", 혹은 "얼굴은 예쁜데..."
한국에 살면서 가장 많이 들은 말이다. 옷가게에 들어가자마자 생판 본 적도 없는 직원이 함박웃음을 얼굴에 머금은 채 내게 다가와 위와 같은 말을 내던진 적도 있다. 그것도 여러 번. 하지만 그때 나는 그 말에 화를 내지 않았다. 아니, 화를 낼 생각조차 하지 않았다. 나는 이 말을 그저 칭찬으로 받아들였다. '그래, 나는 얼굴은 예쁘니까 희망이 있는 거야'하며 스스로를 위로했고, 몸에 대한 컴플렉스의 반대급부로 얼굴에 대한 과한 자신감이 넘쳐났다. 이른바 ‘긁지 않은 복권’. 외출 준비를 할 때도 화장이나 머리에 많은 공을 들였다. 얼굴이 더 돋보여야 사람들이 몸을 덜 쳐다볼 거라는 생각.
하지만 얼굴에 대한 자신감도 몸에 대한 열등감을 커버해 주지는 않았다. 몇 해 전 여름, 한국에 들어갔다. 당시 딴지 벙커에서 여행에 대한 세미나를 주최하던 여행작가 환타 님이 내게 파리를 소개해 달라고 했다. 흔쾌히 수락했다. 하지만 결국 취소해 버렸다. 이런 저런 이유가 있었다. 그 중 그 누구에게도 감히 말하지 못했던 것은 내 몸이 부끄러웠다는 사실. 그곳에 모인 사람들이 나를 보고 "이 여자 뚱뚱하네"라고 생각할 거라는 것이 끔찍했다.
연애에서도 마찬가지였다. 내가 마음에 둔 사람이 나를 별로 매력적으로 보지 않을 때면 매번 내 몸을 원망했다. 상대가 무슨 말을 해도 모든 원인은 결국 내 몸에, 접쳐 지는 뱃살에, 얼굴만한 팔뚝에, 튼실한 허벅지에 있는 것 같았다. 아니, 그렇다고 확신했다. 나는 내 몸이 미웠다.
나는 달라지고 있다
이런 생각이 조금씩 달라지기 시작한 것은 지금부터 몇 달 전. 이별과 논문, 외국 생활로 인한 스트레스로 다시 체중이 증가하면서 발목골절로 중단했던 운동에 다시 몰두했다. 아침에 일어나자마자 요가, 필라테스. 시간이 있을 때마다 수영장. 그리고 저녁에 하는 근육운동과 스트레칭. 그러면서도 식욕에는 매번 굴복하면서 다이어트는 좌절의 연속. 불행해 하는 내 모습을 보며 친구 하나가 페이스북 메세지로 보내 준 링크 하나가 나를 바꿨다.
Ashley Graham
출처: 허핑턴포스트 캐나다
애슐리 그레이엄.
미국의 유명 플러스 사이즈 모델. 친구가 보내 준 링크를 타고 간 그레이엄의 인스타그램에서 그녀는 비교적 '육중한' 몸에도 불구 아름다웠다. 아름답다는 말보다 더 적합한 표현이 떠오르지 않았다. 그녀는 온 몸으로 내게 '아름다움'이라는 것이 무언지를 알려주고 있는 듯 했다. 동시에 혼란스러웠다. XXL 사이즈의 그녀가 왜 이리도 아름다운 걸까. 그러면 안 되는 거 아닌가.
이건 배신이다
그레이엄의 모든 사진과 비디오를 뒤지기 시작했다. 그 아름다움을 믿을 수가 없었다. 그래서 다른 플러스 사이즈 모델들을 찾기 시작했다. 모두들 환상적이었다. 작게는 XL에서 크게는 XXXL 사이즈의 여성들이 어떻게 내게 이런 영감을 줄 수 있는지 이해하기 힘들었다. 그래서 더욱 집요하게 이들의 모습을 관찰해야만 했다.
아름다움. 사실 아름다움은 주관적이지 않다. 사회가 어떠한 필요에 따라 만들어 놓은 틀에 적합할 때 그 사회의 구성원들은 보통 대상을 예쁘다고 여긴다. 학습과 사회화의 결과. 따라서 아름다움은 시대에 따라 변화한다. 그러하기에 플러스 사이즈 모델들은 특히나 몸에 대한 컴플렉스를 평생 안고 살아 온 2017년의 내게 아름다움의 대상이 될 수 없어야 한다. 그런데 그들의 아름다움을 도저히 부정할 수가 없었다. 사회가 내게 주입한 미의 기준을 초월하는 무언가를 그들이 가지고 있다는 것.
도대체 그게 뭘까? 사진 속, 그리고 영상 속 그녀들은 실제로 그렇든 그렇지 아니하든 행복해 보였다. 그리고 자신감에 넘쳐 보였으며 자신의 몸을 사랑한다는 것이 확연히 드러나 보였다. 그녀들은 셀룰라이트조차 부끄러워 하지 않았다. 타인이 만들어 놓은 기준에 맞추기 위해서가 아니라 사랑하는 자신을 위하여 몸을 가꾸고, 좋아하는 옷을 입고 포즈를 취하고 소중한 삶을 살아가고 있었다.
결국은 자기애. 스스로를 사랑하고, 사랑받을 가치가 있는 존재로 여기는 그들의 마음이 내 가슴 속 깊은 곳 어딘가에 변화를 일으키기 시작했다. 뱃살이 부끄러워 박시한 옷을 찾고, 얼굴만 한 팔뚝이 끔찍해 더운 여름에도 긴팔 가디건을 몸에 두르던 나는 일종의 커밍아웃을 시작한다. 평소에 입고 싶었던 타이트한 원피스, 소매 자체가 없는 튜브탑을 걸치고 파리의 봄날을 온 몸으로 느끼며 산책에 나섰다. 자유로웠다. 결국 나를 가두고 있었던 것은 나 자신이었을지도 모른다.
프랑스니까
그러다 문득, 내가 느끼는 해방감이 이곳이기 때문에, 한국이 아니라 프랑스이기 때문에 가능한 것이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모르는 사람의 외모를 스스럼없이 평가하고, 못생기거나 뚱뚱하다고 여겨지는 이들에 대해 조롱 섞인 비하 발언을 부끄럽다 생각하지 않는 사람들이 적지 않은 내 나라. 과연 그곳에서도 나는 파리에서만큼 자유로울 수 있을까.
아마도 아닐 것 같다. 매년 여름, 한국에 가면 나를 아는 모든 사람들의 대화는 매번 내 몸의 변화로부터 시작된다. 살이 쪘다느니 이번에는 살이 좀 빠진 것 같다느니 하는 그런 류의 ‘일상’ 대화. 그런 말을 언급하는 자체가 예의 없는 것으로 여겨 지는 프랑스와 한국은 분명 많이 다르다. 최근 한국에서 대머리라는 이유로 채용이 취소된 사건은 프랑스에서도 적지 않은 반향을 일으킨 바 있다. 물론 어느 사회에나 미의 기준은 존재한다. 하지만 외모가 한 인간의 경쟁력의 주요 척도 중 하나로 기능하는 한국 사회에서의 아름다움에는 보다 엄격하고 협소한 기준이 적용된다. “예쁘다”거나 “멋지다”는 말은 이를 통과한 대상에만 수여되는 것이다. 외모의 경쟁사회.
그래서 며칠 전, 트위터에 요즘 잘 나가는 10명의 플러스 사이즈 모델에 대한 기사를 링크하며 "이들의 몸이 아름답다고 여겨지는 걸 보면 나는 이제 한국 사람 아닐지도 모르겠다"는 멘션을 해 봤다. 재미있는 결과였다. 적어도 내게 답변을 해 준 이들은 그들에게도 역시 모델들이 아름답다고 이야기했다. 딴지 편집장도 그랬다. 한 번 가서 보시기를 권한다.
반면 한국인 플러스 사이즈 모델에 대한 평가는 처참하고 저열하다.
"뚱뚱한 년들은 밖에 나와 돌아다니지 마라"
"날씬한 게 좋은 거고 그래서 덜 뚱해 보이는 옷만 입으믄서"
"역겹다"
"더럽고 추한 돼지 몸뚱아리"
한국인 플러스 사이즈 모델 김지양 씨의 인터뷰 기사에 달린 댓글 중 일부. 물론 이런 말들이 한국인 전부의 생각을 대변해 주지는 않는다. 하지만 인터넷 상에서, 혹은 현실세계에서 이런 말들을 별 생각 없이 내뱉을 수 있다는 것은 사회의 용인이 존재함을 보여 준다 하겠다.
풀영상(유투브)
출처: 링크
한국인 플러스 사이즈 모델 김지양 씨
출처: 김지양 씨 인스타그램
그럼에도 불구, 중요한 것은 스스로에 대한 사랑이다. 나에 대한 태도 변화는 내 삶을 바꾸어 가고 있다. 뭐, 아직도 내 몸에 대한 사랑이 조금은 부족하기는 하지만. 나의 변화는 주변 사람들에게도 영향을 미친다. 이 글을 쓰고 있는 나는 파리의 한 까페 테라스에서 햇살을 맞고 있다. 그리고 방금 전, 까페 직원이 내게 다가와 말했다. "저기 앉아 있는 남성 분이 한 잔 사고 싶다고 하시는데요, 어떤 걸로 드릴까요?"
나는 아름답다. 그리고 당신도 아름답다. 스스로를 사랑하는 한.
결국 이렇게 아주 추상적이고 식상한 말로 글을 마무리하게 된다. 내 필력이 이 정도밖에 안 된다. 용서하시길.
참! 이번 여름에도 어김없이 나는 한국에 간다. 한국에서 여전히 나는 뚱뚱할 것이다. 그래도 올 여름엔 조금은 덜 움츠러 들지 않을까 기대가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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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까이 소라
트위터 : @candy4sora
편집: 꾸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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