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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긴급출동 SOS 24> 할 때 생각이 요즘 자꾸 나서, 옛날 얘기 하나 더.

저와 제 동료들은 그 패악의 행태가 오묘할만큼 다채로운 이들의 뒷덜미를 잡아채기 위해 가볍지 않은 마음 고생을 해 왔습니다. 그들을 미행하고 엿듣고 그 행각을 파헤친 뒤 결국은 얼굴을 맞댄 채 설득 아닌 설득을 펼치거나 경찰을 부르거나 하는 것이 결국 제 임무였지요.

그들을 상대하는 스트레스는 경찰이나 의사의 그것보다 윗길이라 호언할 수는 없으되 열 번 죽어도 그 아래는 아니었습니다. 그런데 이따금씩 그 ‘만땅’의 스트레스에다가 형언할 수 없는 공포스러움이 얹어질 때가 있습니다. 방송을 본 사람들 입에서 “그 새끼들 다 삼청교육대로 보내야 돼.”라는 뇌까림이 튀어나올 때지요.

내가 만든 방송이 그들을 주위 사람들의 등골을 빼먹고 사는, 도무지 함께 살 수 없으며 그 출생의 배경부터가 의심스러운, 마땅히 기름 붓고 불화살 쏘고 쇠파이프로 찔러 죽여 버려야 할 영화 ‘괴물’ 속의 괴물로 만든 게 아닌가 하는 생각, 그리고 제가 관여한 방송이 촉발한 분노가 영화 속의 괴물보다 백 배는 더 잔인하고 표독했던 전두환사우루스의 발톱으로 표변하는 것은 아닐까 하는 근심이 그 공포의 이유가 되겠지요.

하지만 뭐니뭐니해도 가장 무서운 것은 미군의 포름알데히드가 아니라 바로 우리들 자신이 뿌리고 다니는 무관심과 무개념이라는 독극물이 ‘괴물’들을 양산하고 있다는 것을 절감하는 순간입니다.

“남의 가정집 일”일 뿐이며 “내 아이 내가 교육시킬 뿐”이며 “원래 저 사람은 그런 사람”일 뿐이며 “스토킹은 무슨, 청춘 남녀의 사랑 싸움일 뿐”이며 “처벌하고 싶으면 몇 대 맞아서 어디 부러져서 오면” 될 뿐이라는 강변 속에서 그 유독성은 배가되었고, 한강 유역 뿐 아니라 낙동강 금강 영산강 섬진강 소양강 기타등등 기타등등 모든 강 유역에서 공룡도감의 공룡 종류만큼이나 다양한 괴물(?)들을 빚어 놓고 있었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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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느 해 겨울 ‘괴물같은 아이가 있다’는 제보가 들어왔습니다. 초등학교 5학년이지만 키는 170에 가까울 정도로 커 버린 이 아이가 괴물이라 불리운 이유는 그 폭력성 때문이었습니다. ‘황룡검’이라 자칭하는 목검을 가지고 다니면서 학교의 유리창을 박살내거나 친구들을 두들겨 패는 것은 물론, 그 누구에게라도 반말에 욕설을 사양하지 않으며 오로지 게임에만 몰두하는 그런 아이였습니다.

등교를 권하러 온 담임 선생님께 시발년이라는 호칭을 아무 거리낌없이 선사하고 심지어 엄마의 목까지 수시로 졸라대는 아이가 점퍼에 달린 모자를 깊숙이 눌러 쓰고 목검을 차고 밤거리를 누비는 모습은 실로 괴물의 그것이었습니다.

도대체 이 아이가 언제부터 왜 이렇게 변하였을까 궁금하기 짝이 없어 이런 저런 취재를 하다보니 뜻밖의 사실들이 접수되기 시작했습니다. 지금 사는 곳에서는 엄마를 때리는 괴물로 알려져 있었지만 이전 살던 마을에서는 괴물 같은 엄마에 밤새 두들겨 맞으며 울부짖은 아이로 기억되고 있었던 겁니다.

아이의 엄마에게 사실 여부를 여쭈니 엄마는 펑펑 울면서 고백을 해 왔습니다. 떠나버린 남편과 그 후 이어진 고통스런 삶 속에서 아이에게 그 분노를 폭발시킨 적이 많다고 말입니다.

그녀는 피해망상에 가까울 정도로 사회에 대해, 주변 사람들에 대해 적의를 보이고 있었습니다. 주위에서 누군가 싫은 표정을 하고 있어도 그 표정이 자기를 향한 것이라고 믿었고, 주변 사람들이 똘똘 뭉쳐 자기를 음해한 적이 많았다고 굳게 믿고 있었습니다. 그것은 또한 지금의 저 자신으로서도 차마 밝히기 어려운 그녀의 가족사의 결과였고, 아이는 그녀에게 목숨 다음으로 소중한 존재였지만 목숨을 위협하는 애물단지이기도 했고, 자신의 분노를 퍼부을 수 있는 유일한 대상이기도 했던 겁니다.

“여름날 비오는 밤이었어요. 일을 나가야 되는데 애가 너무 울고불고 하는 거예요. 아무리 달래도 말을 안 들어. 그래서 애를 야산에 데리고 가서 나무에 묶어 놓고 내려왔어요. 이 죽일 년이... 애가 그 끈을 어떻게 풀었는지 자기가 풀고 집으로 왔더라구요.” 라고 울먹이면서 엄마가 고백했을 때 저는 정말 눈 앞이 하얗게 아득해져 왔습니다.

자기도 왜 그랬는지 모르겠다면서 온몸을 뒤트는 엄마를 달랠 때 제 머리 속은 무척 복잡했습니다.

시댁도 외면하고 남편은 떠나 버리고 친정에서는 버린 자식으로 공부조차 시켜주지 않아 문맹을 겨우 면한 수준의 30대 여자가 어떻게든 아이와 자기 입에 풀칠이라도 하려고 발버둥치는 모습과, 그 엄마를 가로막고 혼자 있기 무섭다며 울어대는 아이와, 그를 달래다가 갑자기 분노를 폭발시키며 비오는 여름 밤 아이를 나무에 묶어 버린 어머니와, 그 칠흑같은 공포 속에서 몸을 묶은 끈을 풀려고 악을 쓰는 아이의 실루엣이 고속도로를 달리는 헤드라이트들처럼 제 뇌리를 빠르게 할퀴고 지나갔기 때문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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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문가들을 모시고 이 아이의 상태를 지켜보게 했지만 답은 하나 밖에 없었습니다. 무조건적인 격리와 치료가 필요하다는 것이었지요. 그 누가 말을 걸어도 개새끼와 시발놈이라는 대답으로 되받는 아이, 결국 식칼을 들고 저희를 위협했던 이 아이에게 치료가 필요하다는 데에는 동감했습니다.

그렇다면 어디에서 치료를 받아야 하나가 문제였지요. 물론 정신병원은 감옥이 아니고, 의사 선생님이 교도관이 아니라는 것을 모르지 않았습니다만, 그래도 저는 12살 난 아이를 정신병원에 넣는 것이 내심 껄끄러웠습니다. 그래서 대안학교든 특수학교든 이런 아이들에게 치료와 교육을 동시에 베풀 수 있는 시설을 찾아 보라고 우겼지요. 그러나 울상이 된 작가의 대답은 “그런 데가 없어요.”였습니다.

그나마 서울에는 얼추 구미에 맞는 시설이 있긴 한데, 그 시설은 서울에 주소지를 둔 사람만이 입소가 가능하다고 했습니다. 그리고 그곳에 들어가고자 하는 이들의 대기 순번이 까마득하게 밀려 있었지요. 그때 저는 작가에게 괜한 분통을 터뜨렸습니다. “아니 서울 사람만 아프라는 법 있어?”

결국 아이는 정신병원으로 갔습니다. 병원 사람들에게 끌려가면서 아이는 처음으로 존대말로 울부짖었습니다. “엄마 살려 주세요. 말 잘 들을께요.” 엄마는 옆방에서 그 소리를 들으며 쓰러져 울었습니다. 잘못했다 엄마가 잘못했다를 되풀이 하면서 말입니다. 촬영하다 말고 어머니 괜찮을 겁니다 나아질 겁니다 하며 달래지 않으면 안되었을만큼 그 울음은 그녀의 야윈 몸을 잔인하게 집어삼키고 있었습니다.

방송을 보면서 사람들은 뭐 저런 괴물같은 넘이 다 있나 하는 탄식을 했을 것이고 어머니가 벌였던 비 오는 여름밤의 공포극에 이르러서는 뭐 저런 괴물같은 여자가 다 있나 손가락질을 했을 수도 있습니다. 하지만 오히려 관심을 기울여야 할 것은 그 괴물들이 왜 탄생하게 되었으며, 그 괴물들을 퇴치(?)하기 위해 함께 해야 할 일이 무엇인가를 고민하는 일이라고 생각해 봅니다.

전신이 올챙이였을지 도마뱀이었을지 알 길이 없는 영화 속 '괴물'은 화염에 휩싸인 채 쇠파이프 산적 꽂이로 생을 마감하는 수 밖에 없었지만, 제가 마주친 괴물(?)들은 사회가 그들을 어떻게 돌보고 따뜻이 맞아 주느냐에 따라서 상처받지 않았던 그들의 과거로 돌아갈 수 있느냐 없느냐가 결정될 수 있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일하러 나가야 하는 엄마가 마음 편하게 아이를 맡길 수 있는 곳이 근처에 하나라도 있었더라면, 그 모자 가정에 대한 사회적 배려가 조금이라도 더 있었더라면, 아이의 폭력적 행태가 가히 공포스러운 수준에 이르기 전에 전문적 치료가 주선되었더라면 (나중에 얘기할 기회가 있겠지만 아이의 학교 담임 선생님들은 정말 존경할만한 분이었습니다. 하지만 그분들은 치료의 전문가는 아니었지요.) 엄마와 아이는 그 행태로 우리를 경악에 빠뜨리는 ‘괴물’의 모습으로 나타나지 않았을지도 모릅니다.

물론 똑같은 환경에서도 안 그런 사람들은 뭐냐는 반문이 살천스레 튀어나올 수도 있겠습니다. 하지만 똑같은 환경에서도 병에 걸리는 사람이 있고 걸리지 않는 사람이 있습니다. 거기서 병자의 약함을 탓하는 것만큼 우매한 일은 없을 것이고, 병균이 존재하는 환경을 개선하고 병에 쉽게 노출된 약자를 보호하는 것이 바로 복지라는 생각을 해 봅니다.

영화 속의 괴물이 배두나씨의 불화살로 화염에 휩싸일 때 괴물이 내지른 비명, 배우 오달수씨가 입에 뭘 물고서 표현해 냈다는 괴물의 절규가 저는 가슴 시리게 와 닿았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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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 사회가 탄생시키고, 온전한 인간으로서의 길을 열어 주기에 인색한 우리 사회가 그 덩치를 키우고, 따뜻한 시선보다는 응징과 경멸의 총질과 화살질과 몽둥이찜질에 더 익숙해진 괴물들은 결국 오달수씨의 비명처럼 구슬프게 울다가 죽어가거나, 아니면 또 다른 분노를 우리에게 폭발시킬 수도 있을 겁니다. 그리고 그때 합동영결식장에서 퍼질러 앉아 울부짖는 사람들이 누가 될지는 아무도 모르는 일일 테구요.

괴물에 대한 분노가 괴물의 존재에서 멈춘다면 분노는 그 존재의 이유에 대한 알리바이로 '소비'될 수 있습니다. 괴물을 격리하는 것으로 만족한다면 우리는 끝없는 괴물과 맞닥뜨리게 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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산하

편집 : 꾸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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