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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과생들은 뭐하나


내 평생에 면허 딸 일은 없을 줄 알았다. 내가 운전할 때쯤엔 무인자동차를 타게 될 줄 알았으니까. 전 세계 이과생들의 저력을 믿었다. 그 근거 없는 낙관으로 친구들 다 면허 따던 고3 겨울방학을 탱자탱자 흘려보내고, 20대 내내 '운전면허를 따야 어른'이라는 말에 분연히 맞섰다. 과학이 우리를 자유케 할 것이라고.


그런데, 2000년, 2010년, 심지어 2017년이 되었음에도 귀찮은 운전은 사람의 몫이다. ‘자율주행, 눈앞에 다가오다!’ 기사를 수십 번은 본 거 같은데, 도로엔 아직도 혼자 굴러가는 차가 없다. 자율주행 기능이 포함된 차가 나오기 시작했지만, 결국 핸들은 사람이 쥐어야 한다. 아니, 인공위성도 혼자 날아댕기는 시대에 운전은 아직도 사람이 한다니! 이과생들은 대체 뭐했냐고 따져 묻고 싶은 심정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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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려 23년 전, 1994년 11월 12일 동아일보 기사

출처 - 뉴스라이브러리


어쨌든, 더이상은 운전을 피할 수 없게 됐다. 딴지 공채 면접을 보던 날, “면허 있어요?” 질문에 "아, 곧 따려구요" 라는 구라를 날리고 합격, 3년째 "곧 따려구요", "요번주에 접수하려구요", "요번 글만 쓰고 딸게요"를 번갈아 사용하며 버텼다.


혹시 선배들이 볼지도 모르니까 변명을 붙이자면, 진짜로 따려고 마음 먹은 적도 있었다. 지인짜로. 다만, 택시만 탔다 하면 아슬아슬한 곡예를 봐야 했고, 쫄보인 내 기준으로 죽을 위기도 수없이 겪은 탓에, 운전이라는 건 내가 범접할 수 없는 엄청난 것이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들어 마음을 접었을 뿐이다.


어쨌거나 저쨌거나, 이제 한계다. 회사도 회사지만, 스스로 불편함을 느끼기 시작했다. 뚜벅이 취재로는 못 하는 게 너무 많고, 비효율적이다. 실은 일보다 생활에서 느낀 불편함이 컸다. 물론 차 살 돈은 없고, 앞으로도 없을 것 같지만(잠시 눙물 좀..), 렌트카는 운전할 수 있게 면허를 따두는 게 좋겠다는 게 지금의 생각이다.


그리하여 결국, 인류와 문명, 특히 이과생들의 저력에 걸었던 기대를 저버리고, 직접 핸들을 잡기로 했다.



재미가 없으면 의미도 없다 


이승에 구르고 뒹굴며 들은 바에 따르면, 운전면허를 따는 방법은 크게 두 가지다.


 1. 학원에 다닌다


 2. 아빠, 친구 등 지인에게 배워서 딴다


운전은 잘하는 사람에게 직접 배우는 게 베스트라 했다. 몸으로 익힌 감각을 배워야 한다나. 해서 주변에 운전을 가르쳐 줄 수 있는 사람이 누가 있는지 생각해보니... 없다. 우리집엔 차가 없고, 취준생뿐인 친구들도 차가 없다. 차뿐만 아니라 미래도 없다.


다들 잘 알다시피, 운전면허 학원에 가는 것이 가장 일반적인 방법이다. 흔히 필기는 혼자 조지고, 실기와 도로주행을 학원에서 배워서 딴다. 많은 사람들이 택하는 데에는 다 이유가 있는 법이라고, 학원에서 베테랑 선생님에게 배우면 운전은 몰라도 운전면허 시험만큼은 걱정할 게 없다.


내 목표도 우선 운전면허를 따고, 운전은 잘하는 사람에게 다시 배우는 것이었으니, 학원에 등록해 그냥저냥 배워서 면허를 따려고 했으나.. 갑자기 이런 생각이 떠올랐다. 


 '면허를 좀 다르게 딸 수 없을까?'


바로 그 순간, 이것이 내 머리를 스쳐 지나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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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로트럭


 "Euro Truck Simulator 2 gives you the chance to become a real truck driver from the comfort of your home!"


유로트럭 공식 사이트의 유로트럭 설명이다. 정확하고 깔끔한 해석은 다른 분들에게 양보하고, 느낌만 해석하자면 유로트럭이 집안에서 진짜 트럭 운전사가 될 기회를 준다고 한다. 꽤나 괜찮은 설명이다.


유로트럭은 운전 게임이다. 이름에서 유추할 수 있듯, 유럽에서 트럭을 운전하는 게임이다. 게임의 목표는 트럭으로 화물을 배달해 돈을 벌고, 더 좋은 트럭을 사는 것이다. 운송 회사를 차리면 더 많은 돈을 벌 수 있고, 돈을 벌면 더 좋은 트럭을 사고, 화물을 배달해서 더 많은 돈을 벌고, 더 좋은 트럭을 사서... 무한 반복의 늪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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죽자고 운전만 하는 게 무슨 재미냐 할 수 있겠지만, 유로트럭의 참 재미는 유럽 곳곳을 누비며 아름다운 경치를 구경할 수 있다는 것과, 실제 운전과 꽤나 비슷하게 운전을 할 수 있다는 것이다. 오죽 현실과 비슷하면 게임 정식 명칭을 유로 트럭 '시뮬레이터'라고 지었을까.


한 번도 해보지 않았고, 유투브에서 두어 번 영상으로 본 게 전부인 이 게임이, 면허를 어떻게 딸 수 있을까 고심하던 그때, 갑자기 떠올랐다.


 '재밌겠는데..?'


수풀을 헤메다, 탁 트인 바다를 발견한 것처럼 눈앞이 밝아졌다. 이게 가능한 것인지 아닌지를 따지기도 전에 나는 이미 마음을 정해버리고 말았다.


목표는, 학원에 다니지 않고 유로트럭으로 1종 보통 면허 따기!



유로트럭을 유로트럭답게


게임을 아무리 리얼하게 만들었다 한들, '리얼하게' 플레이하지 못하면 김수현, 설리가 나온 리얼만도 못한 것이다.


운전 게임을 '리얼하게' 플리이 한다는 건 뭘까? 운전 프로그램뿐 아니라 환경을 실제와 최대한 비슷하게 만드는 것일 테다. 이쯤 되면 이미 눈치 깔 사람들은 눈치를 깠으리라 본다.


운전 게임을 운전답게 해주는 것, 바로 핸들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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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다못해 오락실 운전 게임도 핸들이 있는데, 유로트럭으로 면허를 따겠다는데 핸들이 없을 수 있나. 기왕 이렇게 된 이상, 진지하게 해봐야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핸들은 실제 핸들과 최대한 비슷한 것으로, 1종을 따야 하니까 기어 조작이 가능하고, 클러치가 달린 패달로 진짜 운전을 하는 기분을 낼 수 있도록 말이다.


의외로 다양한 종류의 핸들을 찾을 수 있었는데, 싸게는 5만 원대 제품부터 비싸게는 100만 원에 이르기까지 했다. 버릇처럼 가장 싼 가격의 제품부터 살펴봤는데, 10만 원 이하 제품은 운전게임을 즐기기엔 그럭저럭 무난하지만, 실제 핸들과 다른 장난감 느낌이 있다고 했다. 나는 지금 궁서체니까 이건 패스. 60만 원 이상 제품은 운전면허 학원비보다 비싸고, 그러면 왠지 지는 것 같은 느낌이 드니까 그것도 패스.


너무 비싸지는 않으면서, 실제 운전과 비슷한 퍼포먼스를 내는 제품을 찾기 위해 산기슭을 어슬렁거리는 하이에나의 심정으로 구글링을 해본 결과, 로지텍 G27로 결정을 내렸다. 핸들이 900도 회전 가능하고, H시프터가 된다고 하는데, 아직 그런 건 어디에 쓰는지 모르겠지만 그나마 쓸만한 핸들이라고 사람들이 그랬다. 운알못


다행히 누군가가 덜컥 구입했다 등짝 스메싱을 맞은 후 내놓은 것으로 추정되는 중고를 발견, 정가보다 꽤 싼 가격에 구할 수 있었다. 후다닥 스팀에서 유로트럭2를 구입하고, g27 핸들을 설치했다.


이제, 모든 준비가 끝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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뱀발. 


1. 이 기사는 유로트럭의 협찬 같은 건 없고, 사비를 털어서 쓰고 있습니다.


2. 많은 분들이 운전만큼은 똑바로 배워야 한다고 말씀해 주셨습니다. (할 수 있을지 모르겠지만) 혹시 유로트럭으로 면허를 따더라도 반드시 운전 잘하는 사람에게 다시 운전을 배워, 안전운전 할 수 있도록 노력하겠습니다. @_@


3. 사무실에 핸들을 설치했더니, 동료 직원들이 저를 이상한 사람으로 봅니다. 자기들이 더 이상하면서.


4. 챙 모 기자가 자꾸 니드 포 스피드를 깔라고 협박합니다. 지면을 통해 오피셜로 답하자면, 싫다.


5. 마지막 사진의 페달 앞 괴물체는 포탄이 아니라 보온병입니다. 앞에 앉은 락x 이 떨궈놓고 한 달째 안 치우고 있습니다. 이 기사를 읽었으면 빨리 치워줬으면 좋겠습니다.




다음에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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