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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4. 10. 01. 수요일

편집부 독구





 



본 기사는 


영화 리뷰가 아닌

여성 딴지스의, 여성 딴지스에 의한, 여성 딴지스를 위한

영화 잡담으로

남성 딴지스들의 심기를 불편하게 만들 가능성이 농후하지만

필자가 그 점에 전혀 신경쓰지 않는다는 점을 감안하여

읽어 내려간다면

여성 심리 이해에 피가 되고 살이 되지 않는다는 것을

알게 될 것이외다.

                                                                                                 




 







2탄 <우리 선희> : 난년을 바라보는 안 난년의 시선


 

 1. M25와 <우리 선희>


M25. 매주 월요일(초기에는 목요일) 아침 지하철에서 만날 수 있었던 주간 무료 잡지. 한때 지하철 역사 곳곳에 비치되어 있어 구하기 쉬웠던 잡지. 어느 순간 가판대가 지하철 밖으로 나오더니 일부 역에서만 비치되면서 구하기 힘들어졌던 잡지. 그리고 올해 여름, 창간 7년만에 장렬하게 폐간된 잡지.


내 심장이 ‘짜짜라 짜라짜라 짠짠’ 외치며 무조건 돌진하게 만들었던 M25는 월요일 출근길의 우울함을 확 날려줄 만큼 된통 웃기고 참신했다. 마치 딴지일보처럼... (응? 자체 PPL?)


어느날, M25의 영화 리뷰를 보던 나는 두 눈이 번쩍 뜨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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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 M25 영화 리뷰 



실은 홍상수 영화를 별로 좋아하지 않는다. 그나마 재미있게 본 영화가 <오! 수정>과 <생활의 발견> 정도. 그런데 <우리 선희> 리뷰가 어찌나 재미있는지 아직 출근도 안 했는데도 불구하고 퇴근하고 싶어서 안달이 날 지경이었다. 드디어 저녁 6시가 되자 우사인 볼트보다 빠르게 집으로 돌아온 나는 기대감을 잔뜩 가지고 영화를 보았다. 그런데... 리뷰만큼 재미있지는 않았다. 중간 중간 피식대기는 했지만 엔딩 크레딧이 올라가자 ‘홍상수 영화가 그렇지 뭐’하면서 씁쓸한 마음을 달랬으니까. 그러나 이 해프닝은 내게 큰 화두 하나를 안겨주었다. 리뷰에서 말하는 '난년'이란 도대체 어떤 여자일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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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 난년

 

난년! 성인이 되고 나서 알게 된 단어다. 대충 이런 뜻이지 않을까 느낌은 오는데 확신은 안 가고, 섣불리 쓰기에는 긴가민가하고 그래서 함부로 입 밖에 낼 수 없는 그런 단어랄까. 정확한 뜻을 알기 위해 절친(여자)들에게 전화해서 물어도 보고, 구글링도 했지만 딱 부러지는 답은 얻을 수 없었다. 여기저기 흩어진 정보를 대충 정리해보자면

 



1. 난년은 현재 잘 나간다. 

    잘 나간다는게 꼭 사회적 성공을 말하지 않는다. 시집 잘 간 여자한테도 난년이라고 한다.

2. 난년은 돈 감각이 좋아서 남들보다 돈을 잘 번다.

3. 난년은 남자 후리는 기술이 탁월하다.

4. 난년은 그냥 겉보기에는 한없이 평범한데 뭔가 매력이 있다.

5. 난년의 유년시절은 대체로 평범하다.



 

이것이 내가 파악한 ‘난년’의 실체다. 틀릴 수도 있고 빼 먹은것이 있을지도 모르겠다. 친구말로는 어렸을 때 동네 할머니들이 평범한데도 시집 잘 간 여자보고 난년이라고 했단다. 난년이 잘난년에서 ‘잘’ 자를 뺀거라는 해석도 많았다. 그런데 비꼬는 뉘앙스를 잔뜩 담아서 사용할 때도 있기 때문에 난년은 복잡미묘한 의미를 내포한, 뭔가 순수하지 못하고 잔망스러운 단어로 치부되는 듯하다.

 

명확한 단어 정의에 실패한 나는 예시 찾기에 나섰다. 나와 친구 모양은 전화 통화를 하던 중 우리가 공통적으로 알고 있는 여인네들 중 누가 난년인지 과거를 복습해보았다.


A양은 그렇게 특출난 학생은 아니었다. 성적이 뛰어나다거나 말솜씨가 화려하다거나 머리가 좋다거나 얼굴이 예쁜것도 아니었다. 그런데 우리가 시급 5천원짜리 알바도 못 구하고 있을 때 몇 만원짜리 알바를 잘도 구해왔다. 지방출신이라 연고가 있는 것도 아닌데 말이다. 참 신통방통했다. 그러더니 대학을 졸업하자 전공과 전혀 상관없는 분야에 취직을 하더니 요리조리 돈 많이 받는 곳으로 여러번 이직을 했다. 직장들도 딱히 연관성이 있지는 않았다. 안정적인 직장을 가진 남자와 꽤 오래 사귀고 헤어진 후, 7살 연하남을 만난다고 했다. 최근 2년간 소식을 들은적이 없으니 지금은 또 얼마나 잘 나가고 있는지 모르겠다.


B양은 애교도 많고 욕구도 많고 색기도 있는 여자다. 키는 작지만 볼륨이 아주 훌륭하다. 긴 생머리를 찰랑찰랑 거리며 싱긋 웃을때면 여자인 내가 봐도 오금이 저릴 정도로 귀여웠다. 그년이 끼 부리는걸 보면 이것 참.. 물건이다 싶었다. 그러니 남자들이 B양에게 목 매다는 것을 봐도 질투도 나지 않았다. 뭐, 이거는 아는 사람만 아는 사실이다. 왜냐면 B양은 학교생활을 그닥 열심히 하지는 않았기 때문이다. B양에게는 남자가 끊이지 않았다. 애인이 있어도 항시 대시를 받았고, 술자리에서는 처음 만난 남자들의 시선을 독차지 했다. 심지어 내 소개팅자리에 꼈다가 소개팅남이 걔만 바라보는 바람에 내가 어이 없었던 적도 있었으니까. 연락 끊긴지 몇 년 되었는데 지금도 여전히 인기가 많은지 모르겠다.

 

A양이 난년이라는데는 둘 다 동의했지만 B양이 난년인가에 대해서는 의견이 엇갈렸다. B양은 정도 많고, 착하고, 머리도 똑똑했지만 자존감이 낮았고 악착스러운 게 없었다. 그래서 인지 싸구려 일자리를 전전했다. 한겨레21에 ‘난년들’ 이라는 칼럼을 쓴 김소희 기자도 세 명의 여인을 소개 한 후 이들의 공통점으로 첫 번째 ‘제 손으로 악착스레 벌어 먹고 산다’고 하지 않았던가. <우리 선희>의 선희도 자신이 원하는 것, 좋은 추천서를 결단코 얻어낸다. 이 과정에서 교수님을 일부러 꼬셨는지 아니면 교수님이 알아서 넘어갔는지는 나도 잘 모르겠다. 선희의태도는 영화 내내 남자들이 입이 마르도록 말하는 ‘내성적인 성격’과는 맞지 않는 것처럼 보인다.

 

난년이 여시 같은 년과 다른 점은 바로 이런 은근함이 아닐까 한다. 난년들은 물밑작업에 능하다. M25 리뷰에 나온대로 의뭉스럽다. 선희를 보자. 교수님 앞에서 몸을 배배꼬면서도 언성을 높이지 않고 자신의 요구사항을 딱딱 말하지 않는가. 그 맹랑함이 멋 모르는 사람들 눈에는 순진해보일수도 있을 것 같다. 이렇게 난년은 자기가 필요한 것은 반드시 얻어내지만 그 과정에서 미움을 사지 않는다. 여시같은 년들이 숱한 원망과 질투를 받는데 비해 난년들은 오히려 선망의 대상이 된다. 별 것 없어 보이는 쟤가 의외로 저런 면이 있네 하는 놀라움을 던져준달까. 그런면에서 정유미는 난년에게 가장 어울리는 외모일듯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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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 기억속의 정유미는 억울한 표정이 가장 잘 어울리는 배우다. 환하게 웃는 모습보다 얼굴을 살짝 구긴채 조근조근 반대 의견을 말하는 이미지로 각인되어있다. 아주 예쁘지는 않고, 때론 평범해 보이며, 오히려 밋밋하기도 한데 참... 매력적이다. 사람을 매혹시키는 뭔가가 있다. <우리 선희>에서 세 명의 남자들에게 하는 걸 보면 맞다, 요물이다. (내가 똑같이 굴어도 결과는 같지 않을 듯) 그런데 밉지가 않다. 거기에 놀아나는 남자들이 오히려 측은지심을 불러일으키니 원. 다른 여배우였으면 그런 효과가 났을까 싶다. 상대방을 무장해제시키는 외모, 결국 난년도 타고나야하는걸까. 아놔.

 

 

3. 난년과 안 난년 그리고 남자


영화로 돌아가보자. 도대체 선희가 뭐라고 남자 셋이 난리가 나냔 말이다. 옛 남자친구는 아직도 너를 못잊었으며 여전히 너를 사랑한다고 목소리를 높이고, 중년의 교수님은 그녀 앞에서 오늘 술이 먹고 싶다며 수줍게 말을 건넨다. 남자들과 술 마실때는 오만 인상을 구기던 선배님은 선희 앞에서 풍이 올 정도로 입이 헤벌쭉 벌어진다. 못났다 참.

 

우리 선희는 술도 쎄다. 영화내내 등장인물들이 술을 마시는데 선희의 주량은 가히 혁명적이다. 그런데 절제의 미덕이 있다. 선배님과 만취하도록 술을 마시고 부둥켜안은 채 비틀비틀 선배님 집 앞에 도착한 선희. ‘하고 싶죠?’ 라고 물으니 선배님 왈 ‘응’. 그리고 대로변에서 장시간 딥키스. 그런데 여기서부터 우리 선희는 난년의 진가를 보여준다. ‘저 별로 안 취했어요. 들어가세요’ 그리고 진짜 헤어진다. ‘우리 시간 많아요’라는 말을 남기고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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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 같은 안 난년에게는 저 놈의 기술이 궁금하기 짝이 없었다. 홍상수 영화를 좋아하는 내 친구는 <우리 선희>를 보고 나서 한마디 했다. 


“우리는 왜 술만 마셨을까”


안 난년들이 주구장창 술과 안주를 탐하며 주사의 늪에 빠져드는 사이 난년들은 뭔가 다른걸 하나보다. 나도 소싯적에 술자리에서 선희가 했던 비슷한 멘트와 제스처를 남자들에게 날렸던 것 같은데 제대로 먹힌적이 별로 없으니 술만 줄창 먹는다고 되는 건 아닌게 확실하다. 선희처럼 자신은 아닌척, 모르는 척, 남자를 달아오르게 했어야 했는데 안 난년들은 본인이 먼저 후딱 달아오르니 이래서 안 되는 거다! (안 난년도 여러 종류가 있겠지만 여기서는 그냥 나를 지칭하는 것이다.)

 

그러고 보니 옛 추억이 하나 생각난다. 대학교 3학년때, 나와 친구들은 복학생 오빠들과 잘 어울려다녔다. 그 중 비실비실하고 머리숱도 적고 말주변도 없던 만만한 선배가 있었다. 설령 만수르의 재력을 가졌다해도 사귀고 싶은 생각이 안 드는 오빠였는데 웃기게도 우리들을 큰 혼란에 빠뜨렸다. 다들 그 오빠가 자기를 좋아하는건 아닌가하는 착각에 빠진 것이다. 나 같은 경우는 다음날 일찍 지방에 가야한다며 우리집에서 재워달라고 해서(고속터미널과 그닥 가깝지도 않았는데) 그 인간이 침대에서 자는 사이 마룻바닥에서 뜬눈으로 밤을 지새운 적이 있었고, 다른 친구는 둘이서 자주 만나 데이트 비스무리한 걸 했단다. ‘설마’라는 생각이 들면 게임 끝이다. 오빠는 방심한 여자들에게 ‘설마’라는 떡밥을 던지는 수작이 능수능란했는데 막상 본인이 좋아했던 여자는 그 떡밥에 넘어가지 않았던 C양이었다나. 어쨌든, 나중에 여자들끼리 모여서 떠들다가 이러한 사실을 알게되었는데 다들 하도 어이가 없어서 말 그대로 ‘헐’ 상태가 되었다. 제길. 우릴 갖고 놀았어! 아니, 우리가 너무 쉬웠던게 아닐까. 아마도 그 오빠가 난놈이었나보다. 훗날 거의 열 살 차이 나는 후배랑 사귄걸 보면.

 

이렇게 안 난년들은 헛짓거리만 하는 불상사가 종종 일어난다.

 

 

4. 남자에게 한없이 착한 난년

 

영화 마지막 장면. 선희 때문에 한껏 가슴이 설렌 남자 셋이 그녀에 대해 이야기를 한다. 선희는 이렇단다.


착하다. 내성적이다. 안목있다. 머리가 좋다. 때론 또라이같다. 용감하다. 솔직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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와~ 나는 이 장면에서 깜짝 놀랐다. 정말 남자들이 이런 여자를 좋아하는거야? 정말정말? ‘예쁘다’는 기본 옵션이니 굳이 언급하지 않는것이겠지. 특히 ‘착하다’는 대목에서는 실소를 금치 못했다. 분명 그 착함이라 하면 마더 테레사가 연상되는 그 뜻과는 전혀 다를테니 말이다. 도대체 어디를 봐서 선희가 착한건지 알 수가 없었다. 그때 이 책 내용이 떠올랐다.

 



남자들은 여자가 자신을 거절하지 않고 무조건 수용해 줄 때 첫 번째 욕구를 충족받는다. 이 욕구를 충족시켜 주는 여자가 바로 그들이 생각하는 ‘착한 여자’다. 다시 말해 남자들이 말하는 착한 여자란 노인과 아이에게 친절하거나 주변 사람들을 배려하는 여자가 아니라 ‘내 말을 고분고분 잘 들어주는 여자’인 것이다. 그런데 착한 여자가 되는 것도 말처럼 단순한 일만은 아니다. 두 번째 욕구, 즉 성취욕을 느낄 수 없는 너무 쉬운 여자여서도 안된다는 것이다. 지금은 고전이 되어버린 하루키의 장편소설 ‘노르웨이의 숲’(혹은 ‘상실의 시대’)에 등장하는 여주인공 나오코가 남자들이 말하는 착한 여자의 전형이다.

-‘어쨌거나 남자는 필요하다’ 101쪽, 남인숙 지음, 자음과 모음-



 

그들은 당연히 마음에 드는 여자에게만 다가가지만 거절당하기 위해 구애를 하는 게 아니다. 최종적인 목적은 어디까지나 성공적인 짝짓기다. 그렇기 때문에 그들은 여자에게 접근하면서 본능적으로 그녀가 자신보다 우월해 거절당할 가능성은 없는지를 먼저 관찰한다고 한다. 그 과정에서 통과가 되어야 호감도 느끼게 되는 것이다. 남자들은 자신을 허용할 것 같은 여자에게 애정도 느끼는 것이다. (중략) 만일 어느 여자가 너무 많은 남자들의 구애를 받는다는 것은 그녀가 달고 있는 가격표를 수용할 수 있는 남자의 폭이 넓다는 의미다

-위와 같은 책 49~50쪽-



 


이 책 내용이 맞다고 하면 선희를 착하다고 하는, 넋이 홀라당 뺏긴 남자들의 넋두리가 이해 된다. 역시나 안 난년에게는 한없이 어려운 일이다. 안 난년이 착한 여자로 포지셔닝 하는 것 역시 힘들고. 그러고 보니 난 남자들에게 착하다는 형용사를 들은적이 없네. 내 주위의 안 난년들도 마찬가지일듯. 


어쩌다보니 난년의 연애 습성에 초점이 맞춰지게 됐는데 차후로는 난년의 업무 습성을 자세히 관찰해봐야겠다. 그럴려면 일단 난년이 누구인지부터 알아야하는데 이게 또 문제구나.

 

난년이야 어찌되었든, 오늘도 안 난년은 또 다른 안 난년을 만나 술이나 마셔야겠다. 안 난년의 삶도 살아보니 나쁘지 않다. 이 세상에 죄다 난년만 있을 필요가 있겠는가. 용두사미가 되어버린 글을 마무리 하는데 친구에게 문자가 왔다. 


‘잘난년 못난년 내 생각엔 한 끗 차이일 듯’ 


잠깐, 내가 못난년이란 뜻은 아니지?

 

 

 P.S. M25의 기자님들 얼른 자리잡아서 재미있고 유익한 글 써주시길! 7년간 수고하셨고 그간 너무너무 고마웠어요~

 





독구

트위터 : @zorbajiyoung