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신 기사 추천 기사 연재 기사 마빡 리스트
파토 추천7 비추천0

2014. 12. 29. 월요일

파토






2014년 우리 사회의 결산이라는 쉽지 않은 글을 쓰게 됐다. 모든 게 개판인 이 나라에서 하루하루를 맨정신으로 넘기기도 만만찮은데, 지난 1년을 회고해서 다시 써 내려간다는 건 개인적으로 깨나 부담스러운 일이다. 잊지는 않아야 하지만 수시로 깊이 회고하기는 힘들고 괴롭고 무섭기 때문이다.


허나 우원은 저널리스트가 아니던가. 그러니 해야지.


여기에 나열하는 것들은 우원이 주관적인 관점에서 뽑았고, 굳이 팩트를 다시 설명하는 건 의미가 없으니 논평 위주로 다뤘다. 2014년 ‘국내 10대 뉴스’ 같은 것과는 다른 느낌의 사안이 들어갈 수 있는데, 그럼에도 이 사회에서 나름대로의 의미를 갖고 있거나 의미를 찾아볼 필요가 있는 일들이라고 본다. 1번 외에는 순서도 큰 의미는 없다.



1. 세월호


1.jpg


전쟁과 4.3, 5.18 등을 제외하고 이 나라 현대사에서 일어난 가장 큰 비극 중 하나이며 가장 참혹한 민간인 희생 사건이다. 희생자의 대부분이 10대 학생들이었다는 점에서 그 비극성은 더 심각하게 다가왔다.


이 사건과 관련해서 수많은 정치사회적 문제들이 대두됐고, 해경 등 관료조직의 폐해는 물론 ㅂㄱㄴ 정권의 비정함과 무능도 명료하게 확인되는 계기가 됐다. 또 사건의 발생 원인부터 유병언의 생사 여부 등에 이르기까지 많은 의문들이 제기되기도 했다.


허나 이 사건 언저리에서 우원히 특히 심각성을 느끼는 지점은 정부나 정치권 등의 태도보다는 일부 국민들의 염증 반응이다. ‘유족충’이라는 비인간적 단어를 만들고 유포한 일베를 정점으로 서북청년단같은 단체들의 공격적인 행태는 물론 상당수의 보통 사람들에 이르기까지, 이 나라를 지배하는 비정한 자기중심적 정서가 이 일을 통해 적나라하게 드러났기 때문이다.


정부나 단체가 잘못된 것은 개혁에서 혁명에 이르기까지 어떻게든 고치거나 바꿀 여지가 있지만, 무시 못할 수의 국민들이 비뚤어진 관점과 세계관에 젖어 살아가며 이를 대놓고 드러내는데 아무 문제도 느끼지 못할 정도로 타락한 것은 해결해 나가기 너무나 어렵다. 이 점이 지금 이 사회의 특히 암담한 부분이다.


그렇게 세월호를 계기로 등장한 정권퇴진 구호는 소위 종북론과 오버랩되어 되려 일부 국민들의 반발심으로 연결됐다. 한편 잠수함 충돌설을 비롯해 수없이 쏟아져 나온 음모론들은 객관적인 증명이 어려운 상태에서 사건의 포인트와 논점을 흐리게 만든 면도 있다. 이렇듯 근본적인 차원에서의 정의 확립과 진실 규명 노력이 상당수 국민들에게 정치적인 것으로 해석되면서, 이미 작동 중이던 이념의 프레임속으로 끌려들어가는 결과를 낳기도 했다.


이런 비극이 적어도 나라를 하나로 모아 주는 역할이라도 해야 하는데, 이제 어떤 일이 생겨도 무조건 갈등과 반목의 단초가 되고 있다. 세월호 상황에서조차 지지율 40%선을 유지하던 모습은 비합리적이라 한들 ㅂㄱㄴ의 지지 세력의 기반이 얼마나 공고한지 역설적으로 말해준다.



2. 신해철 사망


2.jpg


사망 직후 본지에 쓰기도 했듯이 나와 그는 개인적인 인연도 있었다.([추모]불멸을 꿈꾸며) 그리고 그의 이른 죽음은 이 나라 사회와 문화계의 거대한 손실이기도 하다. 하지만 오늘은 그런 이유보다는 이런 이들의 갑작스런 죽음이 우리 사회에 주는 절망감과 무기력함에 대해 이야기하고 싶다.


그를 알던 사람이라면 겉은 좀 거칠게 느껴질 정도로 강해 보이지만 속은 고민 많고 섬세한 사람으로 기억할 거다. 그래서 스스로 죽음에 대한 노래도 여럿 써서 남겼지만, 그렇다고 쉽게 세상을 뜰 것 같은 사람이었던 건 절대 아니었다. 그런 이가 이렇게 어이없고 허망한 방식으로 생을 마감하는 것은 남아있는 사람들에게는 큰 상처로 남는다.


성격 때문이든 이미지 때문이든 중요성 때문이든, 요절이나 자살과는 정말 어울리지 않는 사람들이 있다. 그래서 그들은 본의 아니게 삶의 밝음이나 살아가는 힘의 상징 같은 존재들이다. 경우는 아주 다르지만 생의 어려움을 밝게 해쳐나가는 이미지로는 최진실이 있었고, 강하게 버텨내는 뚝심으로는 노무현이 있었다. 그들은 자기 손으로 세상을 떠났다.


개인적 인연 때문인지, 아니면 아티스트로서의 그의 느낌 때문인지는 모르지만 해철형의 경우는 이상하게도 차라리 스스로 목숨을 끊었다면 이보다는 덜 허망하지 않았을까 하는 생각마저 스쳐 지나간다. 인간의 유한성에 대해 깊이 자각하고 노래해 온, 그래서 늘 마지막을 준비해 온 듯했던 그가 스스로 자기 운명을 결정하지 못했다는 점, 특히 의료사고로 추정되는 상황 속에서 어이없는 죽음을 맞이했다는 사실은 참으로 받아들이기 어렵기 때문이다.


모두들 여러가지로 힘이 필요한 시점에서 이렇게 에너지를 잃게 만드는 일들이 벌어진다. 세상이 좋았거나 형 같은 이가 살아 있었거나, 적어도 둘 중 하나는 되었어야 하지 않을까.


그나마 며칠 전 발견한 아래의 그림이 어느 정도 위안이 된다. 형이 살아 생전 보여줬듯, 예술의 힘은 위대하다.


3.jpg

그와 아이들이 이러고 있길 진심으로 바란다.

이 그림을 남겨준 석정현 일러스트레이터에게 감사.



3. 통진당 해산


4.jpg


어느 정도 예상된 결과였다. 8:1이라는 스코어까지는 생각하지 않았지만 그렇다고 그리 놀랍지도 않다. 통진당이 존재할 수 있는 사회는 이 땅에서 진작에 사라졌기 때문이다.


우원은 통진당에 문제가 없다고 보지는 않는다. 이석기 등의 RO 관련해서 밝혀진 이야기들도 그렇고 2012년 총선을 전후해서 통합진보당 -당시 구 민주노동당, 노회찬 심상정의 진보신당 탈당파인 새진보통합연대, 유시민 계열의 국민참여당이 연합되어 있던- 내부에서 벌어진 여러 사태와 분열 양상에서 소위 NL 계열, 즉 지금의 통합진보당 인사들이 어떤 행태를 보였는지 내부로부터 실시간으로 전해 들었기 때문이다.


하지만 볼테르가 했다고 전해지는 -확실하진 않다지만- “나는 당신의 의견에 반대하지만 당신의 말할 권리를 위해 싸우겠다”는 관점에 의거해 통진당의 이런 식의 해체에는 동의할 수 없다. 현행법상 헌법재판소에 정당 해산 권한이 있는 것은 사실이지만, 그것이 꼭 그 권한을 자유로이 구사해도 된다는 말과 동의어는 아니다. 더욱이 이석기 등 RO의 언행에 대해 아직 최종심 판결이 나지도 않은 상황에서 이를 근거로 정당해산을 서둘러 결정한다는 것 자체가 언어도단이다.


통진당이 당으로서의 자격이 있는지 아닌지는 국민이 선거를 통해 판단하면 되는 거고 그게 민주주의의 원칙이자 자존심이다. 총선 몇 달 전 겨우 통합을 이루고도 이들과 당을 같이 할 수 없다고 결국 박차고 나온 노회찬 등이 해산 반대 의견을 공개적으로 개진한 것도 같은 맥락이다. 이 일은 지지 여부나 개인적인 호불호의 문제가 아니다.


안타까운 점은, 이전에도 언급한 바 있지만 지금 수구 보수와 권력에 의해 철저하게 이용되고 있는 종북 개념과 용어는 실은 진보 쪽에서 별 경계심 없이 던져준 면이 없지 않다는 거다. 그런 위험스러운 개념이 더 이상 크게 문제가 되지 않을 거라는, 김대중 노무현 정권을 지나면서 형성된 진보 쪽의 안일한 순진함이 그야말로 철저히 악용되고 있다. 이 종북의 부메랑은 원래 의도했던 목표 지점 뿐 아니라 궤적 주변에 서 있는 모든 것들을 때려 쳐내면서도 떨어질 줄 모르고 이 사회 구석구석을 끊없이 날아다니는 중이다.



4. 쌍용차 정리해고 대법원 판결


지난 2009년 이후 소위 ‘쌍차’사태는 해고와 갈등, 투쟁, 조정, 화해, 법정 투쟁의 반전과 반전을 거치면서 지금에 이르렀다. 그러는 동안 자살이나 병 등으로 사망한 해고 노동자가 25명에 달한다.


5.jpg

지난 2012년 겨울, 쌍차 해고노동자 2명은 30미터 15만 4천 볼트 송전탑에 올라 투쟁했다.

금속노조 쌍용차 지부장 김정우 지부장이 41일 단식으로 후송된 직후다.


여기서 기나긴 쌍차 사태를 다시 복기할 수는 없지만, 2심에서 원고 승소한 것을 대법원이 파기 환송한 것에 정치적인 영향이 없다고 생각할 사람은 많지 않을 거다. 이명박 정권 이후 ㅂㄱㄴ 정부에 들어서면서 사법부의 친기업적 판결은 여러 분야에서 드러나고 있는 것은 분명한 사실이며, 이번 판결의 경우 회계조작도 받아들여지지 않았다. 판결 관련 자세한 내막을 알고 싶은 분들은 <미디어 오늘>의 변호사 인터뷰를 참고하시기 바란다.


쌍차 대법원 판결이 직간접적으로 주는 사회적 절망감은 크다. 해고 노동자들 본인들은 말할 것도 없거니와, 안그래도 고용안정이 붕괴되고 노동의 가치가 폄하되어 가는 이 사회에서 이런 대규모 부당 해고가 용인된다는 사실이 대법원 판례로 정착되는 것은 정말 답이 없는 그림이기 때문이다.


소위 사회안전망이라는 것은 직접적인 복지와 관련된 것들을 지칭하는 용어이긴 하지만 이것만으로 진짜 사회의 ‘안전’이 보장될 수는 없다. 보육, 의료, 각종 연금, 급식 등 세금과 국가 예산을 통해 운용되는 복지 정책들도 중요하지만, 이 모든 것들은 일자리의 원활한 수급과 노동 환경의 안정이 근간에 자리잡고 있어야 제대로 효력을 발휘할 수 있기 때문이다.


허나 지금 이 나라에서 노동자의 지위는 점점 낮아지고 그들의 자존감이나 위상 역시 바닥으로 떨어지는 중이다. 고용주의 의사에 의해 언제 어떤 형태로든 해고될 수 있는 처지에서 자기 삶에 대한 자부심이나 명예심을 갖고 공동체의 발전에 기여할 여력을 가질 노동자는 없다. 이런 세태가 결국은 맨 처음 언급한 세월호 사건에 대한 염증 같은 비정한 자기 중심주의로 또 표출된다. 그래서 이번 쌍차 대법원 판결은 기업가들의 단기적 이익을 위해 이런 악순환을 장려하는, 비뚤어진 2014년 대한민국의 자화상이다.



5. 제 2 롯데월드


6.jpg


아직 거대 뉴스로 다룰 큰 일이 일어난 것은 아니다. 하지만 단편적인, 그러나 결코 가볍지 않은 사건들은 계속돼 왔다. 여러 건의 건설 노동자 사망사건을 비롯해 컨테이너 박스 화재, 쇠파이프 50미터 추락 사고, 극장 내부 진동 사태, 바닥과 벽 마감재 균열과 수족관 누수 사태, 주변의 잦은 싱크홀 출현, 그리고 며칠 전의 1층 출입문 사고에 이르기까지.


우원은 사실 고층빌딩을 좀 좋아한다. 그냥 사람이 저런 걸 만들었다는 걸 대견하게 여기는 편이다. 그래서 두바이의 800미터 높이 부르즈 할리파나 토론토의 CN 타워 등에 올랐던 기억도 즐겁게 간직하고 있다. 하지만 그런 우원 조차도 저 제2롯데월드 타워는 오르고 싶지 않다. 두 가지 이유다.


첫째는 물론 정말 위험한 것 같아서다. 지금까지 일어난 일들을 보면 저 타워를 둘러싸고 뭔가 안좋은 그림이 ‘빌드 업’되는 느낌이 분명 있다. 공사중의 사고 같은 것은 서두르다가 벌어진 일반적인 인재 -아무 문제도 아니란 건 물론 아니다. 사망한 사람들이 있다- 로 볼 수도 있지만 싱크 홀이나 바닥과 수족관 균열, 무엇보다 아주 잘 붙어 있어야 할 1층 출입문이 넘어진 일 등은 이 건물이 그 바탕이 되는 지반부터 별로 실하지 않다는 추정을 가능케 한다. 눈에 띄지는 않지만 아주 작은 뒤틀림이 생기고 있고 그래서 저런 일들이 여기저기서 일어나는 게 아니냐는 거다. 이런 생각은 다들 비슷하게 하고 있을 거다.


두번째는 저 건물이 상징하는 바의 불편함 때문이다. 처음 인허가 단계부터 억지에 억지를 거듭해서 짓기 시작하고 또 다 짓지도 않은 상태에서 성급하게 오픈하고 삐까번쩍한 가운데 여기저기서 금이 가고 물이 새는 모습. 붕괴 같은 큰 사고가 일어나서는 절대 안되겠지만 설사 그런 일이 일어난다 해도 그리 놀라울 것 같지 않은 건물이 지금 버젓이 지어지고 또 사람들이 가득 들어차 있다.


그런 저 건물이야 말로 말 그대로 사상누각, 바로 이 나라의 현실을 응축해서 보여주고 있는 게 아니면 무엇이냐는 거다. 기본과 원칙을 무시하며 억지로 건설하고, 그나마 성급하게 만들어 준비도 안된 상태에서 수익을 내기에 급급하고, 잠재적인 위험 요인은 감추거나 축소하고, 그러면서도 화려한 외형으로 사람들을 현혹하는 천민자본주의 대한민국의 바벨탑.


실제로 얼마나 그런지의 문제를 떠나 위와 같은 이미지가 있는 건 분명하고, 우원은 굳이 그런 곳에 발걸음을 들이밀고 싶지 않다. 그 건물 밖의 현실에서 갖는 불편함과 갑갑함 만으로도 이미 충분하기 때문에.


7.jpg


...불과 10여년 전, 우리는 실제로 저런 열정과 희망에 젖었었다. 수구 언론들의 거짓말과 달리 저 5년 동안 우리는 민주주의와 자유는 물론 경제적으로도 상당한 성과를 거뒀다. 소위 선진국이라는 영국에 살다 들어온 우원의 눈에 비친 참여정부 말기 우리나라 사람들의 얼굴은 놀라울 정도로 밝았고 걸음걸이는 여유로왔으며 길거리의 차들은 젊잖았다. 자랑스럽고 대견했다.


그런데도 사람들은 겨우 얻어낸 자유와 행복의 가치를 깨닫지도 누리지도 못한 채 곧바로 욕망이라는 이름의 마약에 빠져들고 말았다. 돈 벌어 준다고, 부자 되게 해준다고는 결국 (최소) 수십 조를 날려먹은 전임 가카의 시대를 거쳐 이제는 OECD 회원국 운운하기가 창피한 극우 전체주의 사회를 향해 치닫고 있다. 사람들은 다시 탐욕스러워졌고 얼굴은 찡그러졌으며 길거리의 자동차들은 신호를 무시하고 제 맘대로 다니는 걸 당연하게 여긴다.


급기야 이제는 사람을 목표로 인화물질을 던진 것이 언론에 의해 ‘의거’로 일컬어지고 과거 수많은 사람을 죽인 테러 단체가 버젓이 재창립을 선언하는 지경이다. 나라 전체가 심각한 정신병에 걸린 것이다. 2006년 영국에서 돌아왔을 때는 이 나라가 10년도 안돼서 이 꼴로 전락하리라고는 상상도 하지 못했다. 역사적으로 봐도 전쟁이나 혁명 등의 사태가 아닌 한 이렇게 빠른 사회적 타락의 기록이 있을까 싶을 정도다.


그런데 요즘은 실은 추락한 게 아니라는 생각이 든다. 우리는 그저 민주주의와 자유를 누릴 준비가 돼 있지 않았던 거다. 경험도 부족했고 계몽도 되지 못했고 자신의 운명을 주체적으로 결정할 내면의 힘도 없었다. 늘 그랬고, 따라서 김대중과 노무현의 그 10년간이 그저 일시적인 기적이었을 뿐이다.


따라서 이 사회에 만연한 정신병적 상태는 단기적 처방으로는 해결되지 않는다. 처음부터 다시 시작한다는 생각이 아니면 안 된다. 모든 성급함을 버리고 기본의 기본으로 돌아가서, 수십 년 후를 목표로 하나씩 쌓아가는 수 밖에 없다. 이것은 정권 교체 등의 당면 과제와는 또 별개의 문제다.


물론 그러기에는 당장의 부조리한 세상을 견디기 쉽지 않다. 한 해 전체를 되돌아봐도 좋은 일이라고는 떠오르지 않는 이 비관적인 상태. 씁쓸한 우리들의 세상. 하지만 버텨야 한다. 포기하는 순간, 게임은 끝나는 것이기 때문에.


그런 의미에서 안토니오 그람시의 말로 글을 맺을란다. 아마 지금 우리에게 꼭 필요한 한 마디가 아닐까.


“이성으로 비관하되 의지로 낙관하라.”







파토

트위터 : @patoworld


편집 : 홀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