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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배운 게 도둑질이라고 또다시 국회로

 

첫 직장을 6개월 조금 넘게 다니고, 다시 실업자가 되었다. 생일을 앞두고였다.

 

처음 며칠은 집에 사실을 알리지 못했다. 매일 출근하는 시간에 일어나 차려입고 나와 찜질방에 갔다. 곧바로 씻어야 하는 화장을 며칠간 했다. 정신적, 육체적으로 너무나 힘이 들었는지, 찜질방에 들어가 옷을 갈아입고, 시사 잡지 하나 들고, 수면실 어느 구석에서 하루 내내 잤던 것 같다.

 

저녁이 되면 씻고, 사우나 하고, 오밤중에 들어갔다. 퇴근해 들어오는 사람이 말끔히 씻고 오는 모양새면 의심을 살까봐 일부러 퇴근하고, 목욕탕에 갔다가 오는 시간에 맞춰서 들어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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찜질방에선 그간 몇 개월의 일들이 주마등처럼 지나갔다.

 

당시 여당이었던 한나라당 홍준표 원내대표에게 쌀 직불금 수령한 한나라당 국회의원들이 몇 명이냐는 유도질문을 하니 “네가 검사야? 어디서 되도 않는 심문을 해? 내가 대한민국 최고 검사였어!”라며 고함을 질러 많은 기자들 앞에서 무안을 샀던 일. ‘아니 왜 고함을 지릅니까? 묻지도 못합니까? 없으면 없다, 아니면 아니라고 하지 왜 고함을 지르십니까?’라고 받아치지 못해서 뒤늦게 후회했던 일, 연말 예산안 처리를 두고 야당이 국회본회의장 점거 농성과 함께 여야 의원과 보좌관들이 국회에서 난투극을 벌일 때 나름대로 열심히 취재하면서, 기사 썼던 순간, 대변인에게 취재를 위해 전화 한 번 안 했던 일, -정확히는 전화취재를 할 수 있는지도 몰랐다- 처음으로 야당 내 비주류였던 이종걸 의원에게 전화해서 인터뷰하고 제대로 기자다운 기자가 된 것 같아 들떴던 순간, 또 나름 기자랍시고 가오 잡았던 순간.

 

그리고 정치인들과 슬슬 안면을 트기 시작하면서 개별적으로 저녁 약속을 잡아 식사대접을 받기도 했던 일도 있었다. 회사 나온 사실을 알리지 않아 약속을 잡아뒀으나 약속장소에 나가지 않은 그 정치인에게 -당시 친박연대 소속의 대변인이었다- 본의 아니게 결례를 범했던 일은 두고두고 미안함으로 남았다. 

 

찜질방으로 출근하는 것도 일주일이지, 더 할 수가 없었다. 퇴직 열흘이 지나자 어머니가 먼저 물어왔다.

 

“너 회사 그만뒀니?”

 

그렇다고 하니 아무런 질책도, 타박도 없었다. 그런데 문제는 다시 구직 기간이 길어지면서였다. 집에서도 눈치를 줬다. 직장생활이라고 해봐야 고작 6개월이고, 그중 인턴 기간이 2개월, 수습 기간이 1개월이라 모아 놓은 돈이라곤 일 원 한 푼도 없어 궁핍한 생활을 보냈다.

 

그래도 ‘해 본 도둑질’이라고, 언론사만 찾아보았다. 4개월 동안 대 여섯 군데 면접을 봤던 것 같다. 정치와 경제를 전문으로 하는 월간지 기자로 면접을 보았으나, 기자 업무만 하는 게 아니라 책 파는 영업까지 해야 하는 매체는 본 기자 쪽에서 거절을 했다. 또 면접 때 국장이 대놓고 “우리는 월급을 못 줄 때가 많아요. 월급이란 개념이 아니라 활동비라고 하는데 월 80만 원 정도 나가고, 그것도 밀릴 때가 많고, 못 줄 때도 있어요. 그리고 우리 매체 특성상 민주노총 시위나, 광우병 촛불 집회 때처럼 집회나 시위가 있으면 반드시 취재를 가야 하고, 집회 끝날 때까지 지키고 있어야 합니다. 괜찮아요?”라고 물었다.

 

당장 취직이 급해 “네, 괜찮습니다”라고는 했지만, 그쪽에서도 “괜찮지 않다”는 기자의 속마음을 안 것 같았다. “다시 연락주겠다”던 말들이 모두 “불합격”의 다른 표현인 줄 그때 제대로 알게 되었다.

 

취재 기자 둘, 셋이 일간지 모든 면을 마감하고, 실시간 인터넷 기사까지 담당하느라, 퇴근시간이 없으며, 심지어 부장이라는 사람은 사무실에서 점심과 저녁을 냄비 한 사발에 끓여 먹으며 일만 해대는 경기도 지역의 지방지는 하루 나가고 말았다. 그 때 본 기자가 국장 겸 사장에게 댔던 핑계는 “A형 간염 확진 판정을 받았다”는 거였다. 그런 기자에게 “병 치료 다 하고 다시 출근하라”는 국장에게 약간 미안했지만, 본 기자는 솔직히 국회출입기자가 다시 하고 싶었다.

 

그래서 구직 사이트에 1년 365일이면 300일 동안 구인공고가 올라오는 정치전문 인터넷 일간지에 취직했다. 그곳은 사람 로테이션이 많은 곳이었다. 사람이 자주 바뀌는 업체는 문제가 많았고, 그 문제는 나조차도 비켜가지 않는다는 진리를 그 당시에는 무시했다.

 

국회에서 그 매체 소속 기자들과 안면을 트기도 했고, 오래 다니는 기자도 있었고, 정치 분야에서는 그곳을 디딤돌 삼아 더 좋은 매체로 옮겨갔다는 이야기도 들은 터였다. 나름 각오를 단단히 먹고, 이미 국회에서 안면을 튼 그 매체 소속 선배 기자에게 ‘거기 들어가고 싶다. 국장한테 말씀 좀 잘 해달라’며 특별히 청탁까지 넣어 결국은 실직 4개월 만에 재취업이 되었다. 다시 수습부터 시작하기로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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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 지나고 보니 전부 모욕 아니면 수모

 

이전 회사에서 인턴, 수습을 했지만, 제대로 기자 업무를 배웠다고 할 수 없어, 진짜 기자 생활을 하고 싶어 내린 결정이었다. 수습 기간 3개월 동안 오전 7시까지 국회로 출근해서 국장한테 전화로 보고해야 했다. 그 시간에 출근해 아침 조간이랑 그날 맡은 당의 일들을 모두 파악해 보고하라고 했고, 각 당의 업무가 시작되는 9시부터 통상 업무 마감인 저녁 7시까지는 취재하고 기사 마감을 해야 했다. 그리고 저녁 9시까지 기사 쓰는 공부를 해서 내부 게시판에 올려야 했다. 좋은 기사를 선정해 필사하거나, 취재 및 기사작성과 관련된 책을 선정해 읽고 정리, 요약해서 올려야 했다.

 

그런데 대부분 써야 하는 기사들이 많아 공부할 시간은커녕 출근해서 물 먹은 기사 없나 챙기다가 취재하고 후속 기사 쓰기 바빴고, 매일 12시가 다 되어야 퇴근할 수 있었다. 어떤 날은 집에 못 들어갔다. 국회 여자휴게실에서 눈을 붙이는 둥 마는 둥 하다 다시 브리핑룸 본 기자의 자리로 돌아와야 했다.

 

처음 출근한 날이 6월 10일이었으니 그날은 6.10 항쟁 22주년 집회가 있었고, 밤까지 커버하다 전철 끊기기 전 막차를 타고 집에 귀가했다. 그리고 여야는 신문이 방송사업까지 할 수 있는 내용의 -지금의 종편을 탄생하게 한- 미디어법 처리를 두고 대치중이었고, 절대 소수였던 야당은 매일 주말마다 대전, 대구, 부산 등 광역시를 돌면서 장외집회를 이어갔다.

 

같은 민주당 담당 선배는 퇴사를 준비 중이었고, 필자가 입사한 지 2주 정도밖에 안 돼 개인 사업을 하겠다며 나가 버렸다. 결국 본 필자는 수습임에도 불구하고 또다시 민주당 일진이 되었다.

 

각오했지만, 힘든 건 이루 말할 수 없었다. 월급 130만 원이 안 되는 돈을 받고, 일주일에 6일을 일했고, 평균 15시간을 일하니 몸이 피곤한 건 이루 말할 수가 없을 정도였다. 몸이 피곤한 거야 다른 언론사 수습 기자들도 다 이렇다고 하니, 참을 수 있었다. 문제는 내부의 문제였고, 폭언과 신경질, 욕설까지 쏟아내는 국장과 사장이었다.

 

국장과 사장은 부부였다. 이 매체는 정치컨설팅 회사를 모회사로 끼고 있었다. 여의도에서 한 사무실을 사용하고 있었고, 사실상 수익은 정치컨설팅회사에서 나왔다. 선거철 선거 홍보대행을 비롯해 후보자와 계약을 맺고 선거를 치르는 데 있어 포스터 제작부터 필요한 모든 일을 했고, 인터넷신문은 그 후보나 당의 승리를 위한 기사를 쓰기도 했다. 이 컨설팅 업무를 사장이 담당했고, 인터넷신문의 국장일은 사장의 부인이 담당했다.

 

이 부부는 우리가 흔히 말하는 386세대였다. 서울대와 연대 재학 시절 학생운동과 노동운동을 하다 만났다고 한다. 그래서인지 이들이 대학 시절 함께 운동했던 선, 후배 중에는 정치인들이 꽤 있었다.

 

사장은 대학 시절 노동운동을 하다 잡혀가 수감생활을 했었다고 들었다. 그런데 문제는 이들이 노동자를 위한다며 노동운동을 해놓고 자신들의 노동자들에게는 막대해도 너무 막대했다.

 

사장은 회의를 한다며 소집해 놓고, C8과 같은 쌍욕을 추임새로 넣어가면서 일장 연설 -대부분 사원들을 쥐 잡듯 잡는 내용이었다-을 늘어놓았다. 안에서 새는 바가지 밖에서도 똑같다고, 정치인들과 만나 식사할 때에도 진한 부산사투리와 걸쭉한 욕설은 더하면 더했지 자제라는 걸 몰랐다.

 

화가 나면 자기 분에 못 이겨 남자 기자들한테는 손찌검까지 했다. 본 필자의 후배 남자 기자도 두드려 맞았다. 이 남자 기자는 이전의 본 필자가 있었던 매체에서 잠시 동안 같이 근무했던 기자였다. 이 기자뿐 아니라 본 필자가 들어오자마자 퇴사해버린 선배도 사장한테 맞은 전력이 있다고 들었다. 사장은 몸무게가 130kg는 족이 넘어 보이는 육중한 몸을 자랑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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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즘 세상에 누가 사장한테 맞아가면서도 일하는 사람이 있냐고 할지도 모른다. 그런데 그만둘 수 있는 것, 돌아갈 수 있다는 것, 끝낼 수 있다는 건 누구에게나 허락된 축복이 아니었다.

 

특히, 취재기자가 꿈인 사람들은, 어디에서건 버텨야 한다. 이력과 경력이 필요하다. "그 기간에 좋은 언론사 공채를 보면 될 거 아니냐?"고 반문하는 사람이 있을지도 모르겠다.

 

그런데 몇 년씩 공채를 준비해도 안 되는 사람들이 있다. 1차 서류조차 통과되지 못하는 사람들이 있다. 이미 충분한 실패와 거절만 당한 이들이 있다. 언론계야 말로 견고한 학력사회가 유지되는 곳이었다. 특히, 3사 방송사를 비롯한 조,중,동,한,경,오,프(조선,중앙.동아,한겨레,경향,오마이뉴스,프레시안) 같이 웬만한 언론사로 평가받는 곳의 기자들 대부분이 명문대 출신이었다. 거기다 진보 매체는 총학생회 간부나 학생운동 전력도 이력으로 추가되었다.

 

이름 없는 대학이나, 지방거점국립대학이 아닌 지방 대학 출신들은 몇 년씩 공채를 준비해 봐야 2차까지 가지도 못하니, 바로 기자 일을 할 수만 있다면, 기자로 살 수만 있다면, 경력직 이직이라는 마지막 희망을 위해서라도 버틸 수밖에 없었다. 더군다나 처자식 딸린 남자들은 그만둔다는 게 허락되지 않았다.

 

사장은 밤 10시고 뭐고 상관없이, 국회에 있던 기자들을 사장실로 불러들여 욕설과 잔소리를 퍼붓고 끝에는 자신에 대한 자랑을 늘어놓고는 했다. 그리고 툭하면 사원들과 기자들이 졸업한 대학교를 가지고 수모를 주고 비하했다.

 

홍보 일을 담당하는 여자 신입사원한테는 “니는 와 이리 멍청하노? 니 대학 어디 나왔노? D대? 거기 나오면 그리 멍청하나?”

 

그리고 본 기자에게는 멍청하다, 멍하다, 곰탱이 같다에 더해 “니 ㅇㅇ대 나왔나? 기자일 하는데 여대 나온 건 핸디캡이다. 도움받고 기댈 선·후배가 몇 명이나 되나?”라는 공격이 추가되었다.

 

그래 놓고는 내키면 갑자기 회식을 잡아, 술이 거나하게 취하면 음식집이건, 어디건 상관없이 기자들에게 노래를 시켰다.

 

“니 노래 함 해봐라!”

 

“별 빛이 흐르는 다리를 건너~”

 

음식집 주인이 “손님 죄송하지만 조금만 조용히 해주시면… 이 주변은 다 아파트 아니면 오피스 사무실이라…”고 해도 사장은 아랑곳하지 않았다.

 

그래 놓고는 다른 직원한테, 카드를 주고 근처 ATM기기에서 현금 30만 원을 뽑아오라고 시켜, 노래를 마친 기자들에게 만 원씩, 이만 원씩 그렇게 줬다. 노래 몇 곡 부르고 적게는 만 원씩 많게는 십만 원 가까이 받아간 기자들도 있었다.

 

본 기자도 여의도 오피스 빌딩이 자리한 어느 상가 1층에서 쏘맥을 몇 잔 마시고, 이만 원인가 받아 온 적도 있었다. 시간이 지날수록 그때 생각이 날 때마다 드는 모욕감은 깊이를 더해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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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 ‘강약약강’ 쩌는 사장과 국장은 부부

 

또 이런 일도 있었다. 당시 민주노동당 강기갑 대표를 인터뷰하는 날이었다. 대담을 사장이 했는데, 아침잠이 많은 사장이 인터뷰에 30분이나 늦었다. 사장은 기본적인 예의라는 걸 몰랐다. 미안함, 수치, 부끄러움이란 게 있는지 의심스러웠다.

 

인터뷰를 끝내고 나왔는데 사장이 카메라와 영상을 담당하는 PD 선배와 본 기자에게 “느그 밥 무야 하지 않나?” 이러면서 여의도 국회 앞의 설렁탕집으로 데려갔다.

 

설렁탕을 놓고 먹는 둥 마는 둥 하는데 사장이 바로 앞에서 주사기를 꺼내 펑퍼짐한 와이셔츠를 걷고는 흘러내린 뱃살에 주사기를 꽂는 게 아닌가. 당뇨가 있는 사장이 인슐린 주사를 놓는 건 이해를 하겠으나, 공공장소에서 그런 모습을 보자니 블랙코미디를 보는 것 같았다.

 

그리고는 “아지매! 여기 김칫국물 한 사발 주이소!” 하고는 자기 설렁탕도 모자라 본 기자와 함께 앉은 PD선배 설렁탕 그릇에도 김칫국물을 부었다.

 

“이건 이래 무야 맛나다! 김ㅇㅇ이 니 ㅇㅇ대 나왔다고?”

 

“네.”

 

“내 대학 때 내 쫓아다니던 가스나 그거 ㅇㅇ대 다녔는데… 엉가이 쫓아다녔지.”

 

그 순간 본 기자는 설렁탕만 묵묵히 비웠던 기억이 10년이 지난 지금도 생생하게 남아있다.

 

성질이 지랄 맞기로는 국장도 만만치 않았다. 매일, 매순간 짜증과 신경질, 고함으로 시작했다. 본인들 입장에선 기자들 훈련을 제대로 시키기 위함이었을 것이다. 혹독하게 기자들을 훈련시키는 것은 좋으나, 전화로 소리 지르고, 달달달 볶는 걸로 모자라, 남의 머리 스타일 가지고도 시집살이를 시켰다.

 

“너 그 긴 머리 잘라! 단발로 잘라! 싫어?”

 

국장의 머리스타일이 단발이었다. 국장처럼 될까봐 더 자르기가 싫어 버텼다. 그리고 집에서 새벽 5시 30분에 나와 밤 12시가 다 돼서 들어가는데 언제 머리를 자를 시간이 있단 말인가. 일요일까지 그렇게 일을 하는데.

 

처음부터 취재와 기사 쓰는 훈련을 제대로 받지 못한 데다, 4개월의 백수기간을 보내고 오니 기사 쓰는 역량이 제대로 발휘되지 못했다. 거기다 하도 국장이 달달달 볶아 대니 더 능력발휘를 못하고, 매일 매 순간 위축돼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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새벽에 출근해 어쩔 땐 국장의 전화 잔소리에, 빠듯하게 돌아가는 국회일정을 소화하느라, 점심과 저녁 식사도 못 챙기고 하루를 꼬박 굶은 적도 있었다.

 

이런 분위기다 보니 이 회사도 인력 로테이션이 자주 이뤄졌다. 아주 빈번하게. 본 기자가 입사하고 한 달 동안 들어왔다 짧은 시간에 나간 사람만 대여섯 명이나 되었다. 지역 신문 기자로 있다가 들어와 수습 기간을 모두 넘기고, 조금 편해지고, 익숙해질 때 즈음 퇴사한 기자도 있었다.

 

멍청하단 소리를 들은 홍보팀 여직원도 “차라리 애들 과외 하면서, 용돈 벌어 쓰고, 공채를 준비하겠다”면서 나가버렸다.

 

심지어는 이런 사장과 국장에 반기를 들어, 본 필자가 입사하기 불과 한두 달 전에 기자들이 모두 총파업하고, 세 명이 동시에 사표를 쓰고 나가버리는 사건도 있었다. 그런데도 사장과 국장은 바뀌지 않았다.

 

필자의 부탁을 받고 이 회사에 들어올 때 국장에게 말을 넣어주었던 선배도 총파업에 참여했었고, 사장에게 이의제기를 가장 강력하게 했지만, 그도 결국은 다시 회사로 돌아왔고, 사장과 국장은 여전했다.

 

이 선배는 한나라당을 담당했다. 이 선배는 이력이 화려했다. 참여정부 시절 자신이 모셨던 정치인이 장관이 되는 바람에 청와대에서 일했던 경험이 있다. 그리고 당시 창조한국당 창당준비위원회에 몸 담기도 했었다. 그러한 이력으로 이 선배는 잠시 기자 생활의 공백이 있었지만, 정치권에 속칭 ‘빨대’들이 많아 정치기사에서 좀처럼 나오기 힘든 특종들을 쏟아냈다.

 

그렇다 보니 본인도 어깨에 힘이 많이 들어갔고, 국장과 사장한테 개길 수 있었다. 청와대를 출입하는 부장과 어울려 다니면서, 대놓고 취재기자 경험이 없는 국장을 무시하기도 했다. 그래도 국장은 정치판 돌아가는 능력, 본인이 스스로 취재기자 경험이 없어, 누구보다도 많이 신문과 뉴스를 봤다. 객관적으로 능력이 없다고는 할 수 없었다. 어쨌든 그 선배가 여러 번 반란을 일으키고도 다시 회사로 들어올 수 있었던 이유는 어쨌든 능력이 있어서였다. 그리고 정치인들과 매일 술자리를 가지면서 관계를 잘 다져 놓아 사장과 국장 입장에서는 그걸 무시할 수 없었다.

 

정치인들과 술을 심하게 마신 다음 날은 오후 다 돼서 출근해도 아무런 제재를 받지 않았다. 그리고 어쩔 땐 현장에 함께 있어서인지 몰라도 국장이나 사장보다도 더 본 필자를 비롯한 후배들한테 잔소리를 해댔고, 본인은 우리들과 급이 다른 기자라는 듯한 발언을 무시로 해댔다.

 

이 선배의 성격은 여러모로 사장과 닮아 있었다. 심지어는 고향도 같은 부산이었다. 그래서인지 사장, 국장과 끊임없이 부딪쳤다. 여러 번 짐 싸서 회사를 나갔다가 다시 들어오기도 잘 들어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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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 노동강도는 살인적인데, 영업압박까지…

 

한번은 이 선배가 한나라당 소속 의원들과 저녁 식사 약속이 있는 날 사장이 갑자기 전 직원 회식을 잡아버렸다. 선배는 그 회식자리에 늦게 나타났다. 마포의 어느 고기 집에서 술이 거나하게 취한 사장이 회식에 늦은 그 선배한테 고래고래 소리를 지르며 듣기 싫은 소리를 한동안 계속해댔다.

 

그리고는 얼마 안 있어 또 전 직원에게 돌아가면서 노래를 시켰다. 본 기자는 또 알고 있는 유일한 노래 “별빛이 흐르는 다리를 건너~”하는 아파트를 불렀고, 기분이 상해있던 그 선배도 “긴 밤 지세우고~”로 시작하는 아침이슬을 불렀다.

 

그러다 사장은 또 퇴사한다는 여기자 이야기를 하면서 울었다. 사장의 진상과 추태가 계속되자 그 자리에서 사장의 선배가 -정치권에 오래 몸담은 인물로 논설실장을 겸했다- 회식자리에서 나가버렸고, 사장한테 회식자리에서 깨진 선배는 다음 날부터 그만두겠다며 회사를 나오지 않았다.

 

이렇듯 ‘불난 호떡집’ 같은 회사 분위기가 1년 365일 계속됐던 것이다.

 

좀처럼 익숙해지지 않아 꼭 매일매일 산지옥에서 매일 매일 하루를 버텨내는 게 과제였다. 살아남기 위해 살았다. 일주일에 한 번씩 들어가는 사무실의 퀴퀴한 먼지 냄새까지 고역스럽다 못해 울적하게 만들었다. 언제 끝날지 알 수 없는 괴로운 날들이 계속됐지만, 그래도 버텨보자 싶었는데, 기어코 일이 벌어지고 말았다.

 

사장은 종이 신문과 잡지가 하향세를 그리던 그 시점에 돈을 벌겠다며 월간지 창간을 강행했다. 주로 정치인과 경제인 인터뷰와 선거 전망, 분석을 다루는 월간지였다.

 

본 기자가 창간 멤버가 되었다. 일이 두세 배로 늘었다. 인터넷 실시간 데일리 마감에 더해, 주간지 기사까지 챙겨야 했다. 정치인 인터뷰가 있으면, 질문지 작성부터, 인터뷰 섭외와 날짜 조정까지 모두 일이었다. 일이 많은 건 괜찮았다. 아니 오히려 고마울 지경이었다. 덕분에 일을 많이 배웠다. 취재, 기사 작성 스킬이 늘었고, 인터뷰부터, 정치 맥을 짚는 일, 야마(기사의 핵심 주제) 잡는 능력이 눈에 띠게 향상되었다. 대형 언론사에서도 5년차 정도는 돼야 감당하는 많은 일들을 익힐 수 있었다.

 

문제는 사장의 영업압박이었다. 창간한 월간지를 인터뷰이들에게 몇백 권씩 사달라는 전화를 넣으라는 압박이 심했다.

 

“김ㅇㅇ이, 니는 민주당 담당이니까. 민주당 의원들한테 하는 건 좀 그렇고, 니가 한나라당 이번 호 이은재 나왔지? 갸한테 전화해서, 150권 사달라고 해라. 알겠나?”

 

“김XX이, 니는 반대로 민주당에 전화해서 200권 사달라고 해라!”

 

무참했다. 영업까지 시키면 기자들한테 출입처 사람들이 취재나 제대로 응해 줄지 의문이었다. 더러 주간지, 월간지 기자들이 영업도 한다는 소리를 듣긴 했지만, 이번처럼 인터뷰이한테 실질적으로 영업을 하는 회사는 드물었고, 업계에서도 평판이 좋을 리 없었다.

 

전화를 안 하고 버텼는데, 또 안 했다고 사장한테 공개적인 회의에서 깨졌다. 사장은 그래도 영업 전화를 하지 않고 버티는 내게 별 걸로 트집을 잡아 시집살이를 시켰다. 여름휴가 기간 사흘 동안 기사 한 꼭지 올리지 않았다며 몰아세웠다. 그 휴가 기간 동안 특별한 현안이 터지지도 않았다.

 

의도는 명백했다. 회식 시간에 늦어 사장에게 깨진 선배에게 어떻게 했으면 좋겠냐고 조언을 구했다.

 

“니는 그 영업 전화 하면 앞으로 이 업계에서 끝이다, 끝! 책 장사지, 기자가? 이제 니한테 민주당에서 누구라도 하나 인터뷰 해주겠나? 그냥 나오는 게 상책이지 싶다.”

 

그날로 나는 업무 마감과 동시에 국회 정론관을 걸어 나왔다. 그렇게 또 나의 두 번째 직장에서 기자 생활도 세 달 만에 막을 내렸다. 정작 나에게 퇴사가 답이라고 했던 그 선배는 내가 퇴사하고 얼마 지나지 않아 다시 회사로 복귀했다. 들리는 말로는 사장이 그 선배를 다시 찾았다고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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