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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The L’ 의 장윤정 변호사는 최유정 변호사의 사건을 예시로 들며 ‘사시 인맥 카르텔 속 만연하는 법조비리, 대안은’이라는 제목의 기사를 보도했다.

 

장 변호사는 ‘국정농단’ 사태의 발단이 된 네이처리퍼블릭 정운호 대표의 변호인 최유정 전 판사의 사례를 인용하며 우리 사회에 만연한 법조계의 ‘엘리트 카르텔’에 대한 우려의 목소리를 냈다. '연수원 출신'이라는 집단의식과 사회의 상위 ‘계층’(엘리트)이라는 자부심이 그들만의 카르텔을 만들어냈고,  이로 인해 서로가 비리를 저지르는 일이 적지 않다고 꼬집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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삼성전자의 이재용 부회장이 석방됐다. 구속된 지 353일만이다. 이 부회장의 석방 자체도 큰 화제였지만, 무엇보다 그에게 집행유예를 선고한 정형식 부장판사의 판결문에 더 많은 이목이 집중됐다. 라면을 훔쳤다는 이유로 징역을 선고하는 법원이 ‘재벌’ 앞에서는 깍듯하게 고개 숙이는 듯한 내용 때문이었다. “어떤 기업인이 대통령의 제안을 뿌리치겠는가?”라는 담당 판사의 인터뷰 내용도 문제였다. 언제부터 재판부가 피고의 입장에 감정적 배려까지 해주었단 말인가.

 

영국의 ‘파이낸셜타임즈’(Financial Times)도 이번 판결에 대해, 재벌의 화이트칼라 범죄에 관대한 한국 법원의 관행이 반복되었다고 보도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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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렇다. 정권이 바뀌었도 ‘우리가 남이가’로 똘똘 뭉친 기득권 세력은 여전히 건재하다. 이 전 부회장의 공판이 처음부터 예고된 것이었다고 분석한 박주민 의원의 말처럼, 재판은 잘 짜여진 각본대로 흘러갔던 것이다.

 

삼성의 이 부회장이 어마어마한 금액의 뇌물 혐의를 받고 있음에도 감옥을 빠져나올 수 있었던 것도, 각종 비리에 불구하고 제대로 된 처벌 없이 유야무야 넘어갔던 법조계의 인사들이 수 없이 많은 것도, 이와 같은 ‘엘리트 카르텔’형 부패와 연관이 깊다.

 

혈연이나 학연, 지연 등으로 복잡하게 얽혀 있는 정재계에선 늘 서로서로 봐주기 식의 관행이 있었다. 뿐만 아니라 ‘관피아’로 대표되는 각 정부기관의 고위관료들이 퇴직 후, 대기업의 자리를 보장받는 조건으로 얼마나 부당한 일들을 해왔던가.

 

 

‘엘리트 카르텔’이란?

 

2015년 4월 23일, 김영란 전 대법관은 ‘KBS 명견만리’에 출연하여 한국의 부정부패에 대해 진단했다. 뉴욕 주에 위치한 ‘콜게이트 대학’(Colgate University)의 ‘마이클 존스턴’(Michael Jonston) 교수의 연구를 인용하며, 한국을 ‘엘리트 카르텔’(Elite Cartel)형 부패국가로 분류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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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엘리트 카르텔’이 뭔가? 사전적 의미부터 알아보자. ‘엘리트’는 우리말로 ‘사회에서 뛰어난 능력이 있다고 인정한 사람’이라는 뜻이다. 우리나라에서는 흔히 ‘엘리트’를 ‘뛰어난 사람’ 혹은 어려운 시험을 통과한 학식/인격을 갖춘 인재로 인식한다.

 

하지만 영어식 표현의 ‘Elite’는 단순히 사람의 능력을 평가하는 단어로 사용되지 않는다. ‘귀족주의’(Peerage)적인 발상에서 시작된 단어로 ‘지배계급’(The ruling class)과 같은 특정한 ‘계층’을 나타낼 때 사용된다. 대단한 능력을 가진 사람이나 집단이 아니라, 좋든 나쁘든 모종의 권력을 가진 집단을 ‘엘리트’라 부르는 것이다.

 

‘카르텔’(Cartel)이라는 단어는 원래 네덜란드어에서 유래했는데, ‘서로 적대하는 국가들 사이에 체결된 서면조약’이라는 뜻이다. 지금은 ‘기업연합’이라는 의미로 해석되기도 하는데, 같은 산업에 종사하는 기업들 간의 자유경쟁을 배제하여 독과점으로 수익을 올리기 위해 시행하는 ‘부당한 공동행위’를 의미한다.

 

결론적으로 ‘엘리트 카르텔’은 특정 계층이 부당한 공동행위를 통해 독과점으로 수익을 올리는 행위라는 뜻이라 할 수 있다. 즉,  한국의 부패는 정치인이나 정부관료, 법관, 대기업 임원, 대학교수 등 우리 사회의 ‘엘리트’라 불리는 특수계층의 사람들이 자신들만의 네트워크와 인맥을 통해 연줄을 만들고 부당한 이득을 취하는 권력형 부패인 것이다.

 

 

 

사회에도 있는 엘리트 카르텔, 교회에도 있다

 

서울의 한 대형교회에서 헌금을 강요했다는 언론의 보도가 이어지면서 한국교회가 또 구설수에 올랐다. 권사 300만원, 장로 3000만원과 같이 교회내 주요 직분을 맡을 경우 교회 측에 ‘감사헌금’을 내야했다고. 교회는 교인들의 자발적인 헌금이었다고 해명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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교회는 교인들의 자발적인 의지라고 했지만 석연찮은 구석이 있다. 헌금이 어찌 자발적이겠는가. 그동안 한국교회에서 헌금은 암묵적으로 강요되어 왔다. 감사, 건축, 생일 등 성경에도 없는 이유를 고안하여 교인들에게 헌금을 내야한다고 가르쳐오지 않았나.

 

물론 한국에 있는 모든 교회들이 이와 같은 방식으로 헌금을 내도록 종용하진 않았다. 유독 내노라 하는 유명 대형교회들에서 이와 같은 관행들이 이어져 오고 있다. 이번에 문제가 된 대형교회도 30년이 넘도록 정해진 액수의 헌금을 하도록 요구했다고 하니, 직분을 맡게 될 이들에게는 사실상 보이지 않는 규칙이나 다름 없었던 것.

 

그렇다면, 교회가 이렇게 암묵적인 방식으로 헌금의 액수를 규정해 놓는 것은 올바른가?

 

고린도후서 9장 7절에는 다음과 같이 헌금에 대한 기준을 제시하고 있다.

 

“각각 마음에서 우러나는 대로 내야지 아까워하면서 내거나 마지못해 내는 일은 없어야 합니다. 하나님께서는 기쁜 마음으로 내는 사람을 사랑하십니다.” <고린도후서 9장7절>

 

그렇다. 사실 성경에서 말한 바와 같이 헌금은 교회에서 금액을 정해줄 수 없다. 위의 구절에 언급되어 있듯, 내는 사람이 ‘우러나는 대로’, 자발적이고 ‘기쁜 마음’으로 내는 게 헌금이다. 기쁘지 않으면 억지로 낼 필요 또한 없다는 뜻이다. 이번에 문제가 된 한 대형교회의 헌금 강요가 심각한 사안인 것도 받는 쪽에서 액수를 정해주었기 때문이다. 이는 성경을 따른다는 교회가 성경과는 상반된 기준을 제시한 것이나 다름 없다.

 

그렇다면 이처럼 명명백백하게 잘못된 규정을 교인들은 왜 그토록 열심히 따랐던 걸까.

 

 

한국교회의 엘리트 카르텔

 

형태는 다르지만, 우리 사회가 가진 것과 같은 맥락의 ‘엘리트 카르텔’의 문제는 한국 교회에도 존재했고, 존재하고 있다. 사회에도 고위관료가 존재하듯 교회에도 계층이 있고 각 계층별로 보이지 않는 계급이 있다. 이와 같은 반성경적인 계급구조는 대부분 집사, 권사, 장로 등의 직분을 통해 현상화된다. 사회에서 성공한 이들이 교회에 안착하여 그 시스템을 그대로 교회에 도입하면서 시작된 문화다.

 

조선시대를 지배했던 유교적 가부장제의 영향에서 시작된 한국교회의 계급화는 일반사회에서 발생한 조직문화 속의 계급화와 다를 바 없었다. 평등을 우선시하는 기독교에 유교적 가부장제가 악의적으로 변종되어 교회 내에 자리매김한 셈이다. 목사와 성도 간 수직적 위계 관계, 성차별, 그리고 믿는 가문과 그렇지 않은 가문과 같은 구분은 그동안 한국교회에서 수없이 해왔던 관행 중 하나였다. 모순을 정당화 하기 위해 성경의 몇몇 구절들에 대해 앞뒤 고려 없이 적용해 성역화시키기까지 했다.

 

결과적으로 성경적으로는 단순 역할 분담으로 끝났어야 할 권사와 장로와 같은 직분에 계급이 부여되었다. 왜 300-3000만원에 달하는 금액의 헌금을 내야 했을까? 교회가 헌금의 기준을 제시한다는 지침이 철저하게 반성경적임에도 왜 그 많은 돈을 내가면서까지 권사, 장로가 됐어야 했을까? 답은 간단하다. 특권을 누릴 수 있는 계급, 존경과 선망의 대상이 될 수 있는 위치가 되기 위함이다.

 

 

대형교회에서 부여한 직분에는 대단한(?) 상징적 의미가 있다. 권사, 장로라고 다 같은 게 아니라, 어느 교회에 따라 신분이 달라진다. 대형교회를 중심으로 서민의 옷을 벗고 귀족의 옷을 입은 채 종교적 카르텔이 형성되어 있는 것이다.

 

한국교회의 카르텔은 이 부회장이나 최유정 변호사의 그것과는 사뭇 다르지만, ‘특수계층’(엘리트)으로서 맛볼 수 있는 상대적 우월감에 대한 향수는 동일하다. 결국 그들에게 부여된 기득권으로 교회 내의 또 다른 ‘엘리트 카르텔’을 만들어 냈다고 볼 수 있지 않겠는가.

 

 

목사, 그들만의 리그

 

엘리트 카르텔은 목사에게 더 두드러지게 나타난다. 전병욱 성추행 사건이 대표적인 예다. 서울 용산구에 위치한 삼일교회의 담임목사였던 전병욱은 2010년 9월 성추행 사건에 휘말린다. 당시 엄청난 인기를 모으고 있던 청년들의 대표 목사였던 그가 성추행을 했다는 소식은 교계에 큰 충격을 가져다 주었다.

 

문제는 여느 유명 목사가 성폭력의 가해자라는 것에 그치지 않는다. 중요한 점은 여전히 사건이 해결되지 않았다는 것이고, 총회 또한 이 사건을 유야무야 덮고 넘어가려 했다는 것이다. 아래 기사에도 볼 수 있듯, 교회의 치리를 담당하는 대한예수교장로회(합동) 총회가 더이상 전병욱의 성폭력 사건에 대해 시시비비를 가리지 않겠다고 했다. 다수의 피해자가 증언을 하고, 고등법원의 판결이 있음에도 불구하고 더 이상의 에너지 소모는 낭비라는 입장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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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교회 내에서 성공(?)한 목회자들은 삼성의 이 부회장과 같이 잘못이 있어도 이에 대한 정확한 조사를 받지 않고, 재판을 받는다고 해도 법의 그물망을 피해갈 수 있다. 치리를 하는 사람들과 얽히고 설킨 인간관계, 그들만의 카르텔이 존재하기 때문이다. 처벌도 미비하다. 현재 해당 목회자는 홍대에 새로운 교회를 개척하여 왕성한 목회활동을 하고 있다. 성범죄자로 의심 받고 있는 사람이 서울 중심가에서 목회를 하는 일, 이러한 일이 어떻게 가능했겠는가.

 

 

그들만의 리그: 목사라고 다 같은 목사가 아니다

 

우리나라의 ‘혼합주의’와 교회의 모습을 연구했던 ‘토마스 케른’(Thomas Kern)은 한국에서의 성공은 개인의 땀으로만 이뤄지지 않는다고 분석했다. 특히 집안의 내력이나 부, 혹은 명문대 졸업과 함께 영미권의 유학 경험 등이 사회적 성공의 주요 요인으로 작용한다고 생각했다.

 

대표적으로 국회의원(19대)에 대한 학, 경력을 조사한 결과, 서울대 38%, 연세대와 고려대가 각각 9%이며 박사학위 소지자도 25%나 되었다. 이와 관련 ‘토마스 케른’은 한국 사회에서는 특별한 매커니즘이 있는데, 이를 ‘규범적 동형화’라고 표현했다. 즉, 어떠한 규범이나 제도에 국민들이 집단적 쏠림 현상이 있다는 것. 결국 이러한 거대한 사회적 혹은 정치적 움직임이 ‘엘리트 카르텔’과 깊은 연관이 있다고 분석했다. 수직적 계급이 존재토록 한 원동력이 ‘엘리트 카르텔’에 있다는 것.

 

한국교회의 목사에게도 자신들만의 ‘리그’(League), 즉, 카르텔이 있다. 이는 일반적으로 교인 수에 따라 ‘리그’가 결정된다. 상황이 비슷한 이들끼리 말도 잘 통한다고 했던가. 교인 수가 몇 천 명 이상 되는 교회의 목회자들에게 주어지는 특권의식은 ‘보이지 않는 권위’와도 같다. 이와 같은 특권의식은 또 다른 계급으로 그리고 한국교회의 패거리 목회 문화를 양산했다. 사회에서 사용된 부패의 개념인 ‘엘리트 카르텔’과 같은 집단적 특권의식 구조화 현상이 교회와 목사들에게 나타나게 된 것이다.

 

흥미롭게도 이러한 ‘엘리트 카르텔’은 목사를 양성하는 과정 중에 하나인 신학대학원의 서열과도 관련이 깊다. 마치 서울대, 연세대, 고려대와 같은 대학별 서열이 존재하듯이. 우리나라를 대표하는 몇몇의 대형 기독교 교단들은 교육부에서 정식 인가를 받아 학부와 석박사 학위를 수여할 수 있는 대학교를 소유하고 있다. 이러한 학교들도 순위가 있다. 그래서 인지도가 높은 학교를 졸업하면 졸업 이후 취업에 대한 선택의 폭이 넓어진다. 대표적인 몇몇 신학대학교 출신 만을 등용하는 교회들도 많다.

 

반대로, 같은 교단이라 하더라도 지방에 있는 신학교나 규모가 작고 인지도가 낮은 신학교를 졸업하면 그만큼 특정 교회에 부임하는 것은 엄두조차 못 낸다.. 사회가 가진 엘리트 카르텔이 교회와 신학교에 그대로 존재하고 있는 셈이다. ‘평등’을 가장 우선시했던 종교개혁의 이념을 따른다는 한국교회는 ‘불평등’의 본산지가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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