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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재인 정부의 방북 성과는 보수적으로 접근해도 대박이라고 해야할 것 같다. 장진호 연설에서부터 외교의 클래스는 지난 정권들과 격이 다름을 증명했지만 방북 성과를 보면 외교/국방을 가장 잘 했다는 참여정부 시절보다도 업그레이드되었나 싶다.

 

아무리 김정은이 배가 고팠고, 제2의 고난의 행군은 불가능에 가까운 현실적 조건이 있었다 한들 핵의 주가는 강경할 때 상승하며 포기하지 않을 때 유지된다. 같은 조건이라도 선수에 따라 결과는 달라진다. 전면적인 화해무드와 핵 포기 논의를 이끌어낸 일은 굉장하다.

 

한국은 하필 세계 4대 강자인 미, 중, 일, 러에 둘러싸인 분단국이다. 이 중 미국을 제외하면 한국은 가장 민주화가 성취된 예측 가능한 국가이며 문재인 자신이 혁명의 결과로 대통령이 된 인물이다. 그에 반해 문 대통령이 상대하는 주변국의 지도자들은 정치적 속성이 건전하지 못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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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정은은 논외고, 시진핑은 등소평이 수립한 룰을 깨고 장기독재의 길을 깔았다. 아베도 일본의 기준에서는 독재적이며 급격한 우경화의 총사령관 격이다. 푸틴의 별명은 짜르다. 트럼프는 미국의 기준에서는 놀랄 만큼 예측 불가능한 인물이다. 문재인 정부는 이들의 틈바구니 속에서, 더욱이 지난 정권이 어질러놓은 외교의 폐허 위에서 북한에게 전향적 태도를 받아냈다.

 

북핵 위협은 일본의 재무장에 절대적인 호재였다. 미국의 중산층 붕괴와 맞물린 트럼프의 대국민 민심관리 전략은 한 문장으로 요약할 수 있다.

 

<국민이 굶는데 지금 외국이 문제냐?>

 

그러나 이 말은 약해 보인다. 트럼프도 미국인도 자존심이 용납치 않는다. 그래서 다음의 버전으로 바뀐다.

 

<미국은 호갱이 아니다!>

 

값싼 외국인력도 큰소리 쳐서 막고, 외국기업의 공장 유치도 큰소리 쳐서 얻어낸다. 트럼프는 좀 한심한 인간일지언정 바보가 아니다. 그의 강경한 태도는 세계패권국 국민으로서의 자존심과 붕괴된 중산층으로서의 빈궁한 처지가 결합된 유권자의 심리를 찰지게 낚아챈다.

 

군사도 마찬가지다. 트럼프는 모양 빠지게 "우리가 좀 힘들게 됐어"라고 말하지 않는다. 국민들 앞에서 "호의가 계속되니 권리인 줄 안다. 미국은 호구가 아니다!"라고 외친다. 그리고 미군이 지켜주던 나라에 무기를 판다. "방어전력은 그대로야. 단지 돈을 니들이 쓰게 된 것일 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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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국의 무기를 일본이 산다. 일본은 미국의 무기를 쥔 병력이 자위대가 아닌 군대이기를 바란다. 일본 우익의 꿈인 재무장은 북핵과 트럼프, 아베 3자 각자의 상황에 의해 실현 직전까지 갔다. 결과가 어찌 될지는 모르지만 남북 화해무드는 일본에 크나큰 타격이다.

 

지금 일본은 방북 성과에 부정적 여론이 집계되고 우리 정부에 해명을 요구하는 등 상식적으로 괴상한 반응을 보인다. 분단국이 서로의 '미수복영토'와 대화하는데 왜 이웃나라 국민이 찬반 여론조사를 하며, 전쟁도 아닌 평화에 해명을 요구하는가? 평소답지 않은 흐트러진 모습은 일본이 얼마나 충격을 받았는지를 보여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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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본은 이번 방북의 성과를 전혀 예측하지 못했다고 추측할 수 있다. 일본은 정보력이 대단한 나라다. 90년대까지만 하더라도 일본의 일개 일간지의 정보력이 우리나라 국가기관을 앞서기도 했다. 우리가 아는 만큼 그들도 안다. 방북 성과가 일본의 예상 범위를 초월했다는 것에서 그만큼 우리 정부의 대북협상이 뛰어났음을 알 수 있다.

 

황당하기는 중국도 마찬가지다. 북한에 지속적으로 삥을 뜯겨온 중국도 호구는 아니다. 완성단계에 들어간 미국의 대중국 포위망 속에서 중국이 안정적으로 태평양 냄새를 맡을 수 있는 숨구멍은 북한이다.

 

김정은이 방남하고, 미국과 직접 대화한다?

 

외치에서 시진핑에게 이만한 타격은 상상하기 힘들다. 그러나 동북아에 핵이 줄고 평화가 증진된다는데, 그 앞에서 할 말은 없다. 보복은 잃을 게 없는 북한보다 남한을 향할 것이다.

 

미, 중 양자와 모두 사이좋게 지내면 당연히 좋겠지만 그게 쉬운가. 이미 박근혜 정권은 미국과 중국 양대 강자와 동시에 친하게 지내는 일을 불가능에 가깝게 만들어놓고 무너졌다.

 

미국이냐, 중국이냐. 양자택일의 마지막 순간이 왔을 때 문재인은 누구를 선택할 것인가? 이미 미국을 내정해두고 있다고 확신한다. 외교의 근본은 원교근공(먼 나라와 친하고 가까운 나라를 경계함)이다. 거리가 먼 친구사일수록 강자는 약자를 소중히 여긴다. 또한 미국은 태평양의 지배자이며 우리는 수출로 먹고 사는 나라다. 대중국 수출의 물량만 봐서는 안 된다. 수출의 질은 태평양이 서해를 압도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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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국과의 관계도 희망이 없지만은 않다. 적어도 우리는 시진핑을 곤란하게 만들었다. 기왕 고통을 주게 되었다면 그것을 활용할 수도 있는 것이다.

 

트럼프의 반응에서 떨떠름함이 느껴진다. 어쩔 수 없이 긍정적인 반응을 내면서도 '두고 봐야 하겠지만', '거짓일지라도'라는 공연한 단서가 붙는다. 그에게 미국은 강해야 하며, 그 힘은 자신을 통해 드러나야 한다. 트럼프 개인의 성격과 상관없이 정치인으로서 자리매김한 위치가 그렇다.

 

트럼프에게 북한과 김정은은 자신이 제압해야 할 상대다. 설득을 해도 자신이 해야 한다. 강력한 압박을 해가며 분위기를 고조시켜 놓았는데 맥이 빠지게 됐다. 쌍수를 들어 환영할 수도, 볼멘소리를 할 수도 없는 기묘한 처지에 놓였다.

 

바로 이 지점에서 문재인 대통령이 항구적인 평화를 위해 한반도 비핵화의 공을 트럼프에게 넘겨줄 수도 있다고 본다. 적어도 외교에 있어 실리를 위해 황제에게 명분을 진상할 정도의 수준은 가졌다고 믿는다. 자존심이나 지도자 간의 알력 따위 필요없다.

 

앞으로의 형국이 정부의 뜻대로 된다면 트럼프가 얻을 수 있는 타이틀은 '김정은을 제압한 자'에서 '김정은을 교화시킨 자'로 바뀐다. 지향점이 보안관에서 목사로 옮겨간다. 그렇다면 그 앞에서 재빨리 기도를 드려줄 수 있는 일. 우리는 평화와 남북교류를 얻으면 된다. 아니 얻어야 한다.

 

앞으로가 문제다. 푸틴은 중동문제에 푹 빠져있는 모양이지만 트럼프에게는 정치적 주가가, 아베에게는 일본 우익의 노스텔지어가, 시진핑에게는 신격화작업의 완성도가 걸려 있다. 남북에게는 국운이 걸려 있다. 문재인 정부가 갈 길이 구만리 뻘밭이지만 지금은 우려 대신 응원을 받아 마땅하다. 미래가 조금씩 기대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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