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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르틴 루터’(Martin Luther)의 종교개혁이 기독교에 새로운 혁명을 불러온 것은 사실이다. 루터가 주장한 믿음과 개인 구원의 연결고리는 ‘교회주의’였던 로마교회에 폭탄과도 같았다. 하지만 ‘개혁’이라는 이름 뒤에는 그림자가 있었다.

 

인문학자이자 루터 전문가인 ‘뤼시앵 페브르’(Lucien Febvre)는 저서 ‘Martin Luther, un destin’(‘마르틴 루터, 한 인간의 운명’)에서 루터의 평가에 대한 ‘단순화’(Simplify)를 경계해야 한다고 지적했다. 신앙적 업적에만 집중할 것이 아니라 그가 살아왔던 시대와 신앙 이외에 남겨진 것들을 볼 필요가 있다고 했다.

 

뤼시앵은 1500년대의 유럽과 지금 독일의 복잡하고 다양한 역사적 사건들에 대해 조명했다. 지금이야 독일이라는 국가가 존재하지만 당시만 하더라도 국가가 존재하지 않았고 이렇다 할 통치자도 없었다. 영국과 프랑스엔 국가라는 기틀이 있었지만, 그 때 독일은 각 영지의 제후들이 큰 권력을 쥐고 있었다. 그는 고대 부족국가와 같던 당시 독일 사회에서 권력의 핵심이었던 제후들의 입장과 루터-제후의 관계에 주목했다. 당시 독일의 제후들은 국가적인 기틀이 없음을 불안해 했다. 이러한 비참함에서 자신들을 건질 ‘구원자’가 필요했는데, 때마침 로마교회에 대항한 대표적 ‘프로테스탄트’(Protestant, 항의자) 마르틴 루터가 등장한 것이다.

 

당시 루터는 로마교회로부터 ‘이단’(Pagan)으로 판명 받아 쫓겨났다. 제후들의 입장에선 신성로마제국을 벗어날 수 있는 유일한 기회였다. 국가도 아니고 그렇다고 종교적 기틀도 없었던 독일의 제후들에게 루터는 시대적 소명을 가진 인물이나 다름없었다.

 

이러한 역사를 바탕으로, 뤼시앵은 루터의 개혁에 제후들이 합세한 동기를 단지 성경과 신앙으로만 연결지을 수 없다고 말한다. 제후들에게 루터는, 종교적인 존재였던 동시에 정치적인 존재였다는 걸 이해해야 루터에 대해 종합적인 판단을 할 수 있다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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뤼시앵은 루터의 운명이 가진 양면성에 대해 언급한다. 당시 독일은 루터를 종교인이면서도 사회운동가, 정치인으로 생각했다고 평가했다. 따라서 루터의 개인적 순수 신앙이 굴절될 수밖에 없었다는 것이다. 농민들에게 '제후에게 절대 복종해야 한다'고 가르쳤던 사실은 루터가 남긴 또 다른 모순이라 볼 수 있다. ‘만인제사장’(Priesthood of all believers)를 주창하며, 모든 인간은 사회적 신분에 관계 없이 평등하다고 말했던 루터였기에 그가 보여준 모순은 여전히 그림자로 남아 있다.

 

루터로 대변되는 독일의 국가교회는 루터와 제후가 손을 잡았기 때문에 가능했다. 종교의 권력화는 모양만 다를 뿐 이어져왔다는 것이 종교개혁에서도 어느 정도 증명된 셈이다. 시대적 특수성은 있으나 루터를 계기로 깃발을 올린 독일의 국가종교 형태가 전세계로 뻗어 나갈 수 있었던 것이 사실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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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간 예수: ‘엘리트 카르텔’을 지양한다

 

예수는 누구보다도 ‘엘리트 카르텔’을 경멸했던 인물이다. 예수는 당시 함께 활동하던 율법학자들과 ‘바리새인’(Phaisees)들을 향해 이렇게 말했다.

 

‘이 뱀같은 자들아, 독사의 족속들아! 너희가 지옥의 형벌을 어떻게 피하랴!”

<마태복음 23장 33절>

 

성경에서, 그리고 기독교에서 죄된 인간의 허물을 대속하고자 하늘 보좌를 버리고 세상에 온 예수는 ‘거룩’의 상징이다. 하지만 ‘거룩’의 이미지와는 다르게 거친 욕설을 퍼붓는다. ‘뱀같은 자들아’라는 말이 별로 대수롭지 않다고 생각할 수 있겠으나 고대 근동 사회에서 ‘뱀’이라는 단어가 가진 의미는 대수롭지 않았다. 1세기 팔레스타인 지역에서 어미까지 잡아먹는 뱀은 천박한 대상을 지칭할 때 사용되는 단어였다. 따라서 당대 최고의 권력집단이자 이스라엘의 최고 종교 지도자인 율법학자와 바리새인에게 한 ‘뱀같은 자들아’라는 발언은 거친 욕설이나 다름없다.

 

왜 인간 예수는 이와 같이 불을 뿜어 냈던 걸까? 겉으로 보기에 율법학자나 바리새인들은 성경을 연구하는 일에 부지런했고 금식 기도, 십일조 등과 같은 종교적 의식도 철저하게 준행하는 모범적인 종교인이었다. 그러나 예수는 이들이 단지 하나님을 사랑하고 성경을 아끼기 때문에 이런 태도를 보인다고 보지 않았다.

 

이들에게 있어 종교는 권력을 유지시켜주는 하나의 매개체였다. 그런데 예수가 유대의 새로운 지도자로 떠올랐으니 이들은 예수에 대해 끊임없는 적개심을 품었다. 자신들의 카르텔을 위협하는 인물이 달갑지 않았던 것이다. 성경에서 말하고자 하는 바가 무엇인지를 설파하기 보단, 자신들의 위치를 견고하게 하기 위한 방편으로 성경을 이용하고 있었다. 2000년 전, 예수가 퍼부었던 저주는 ‘엘리트 카르텔’, 즉, 권력을 모아 기득권을 만들었던 집단에 대한 경고였던 것이다.

 

예수가 욕설을 퍼붓는 장면이 극히 드문데, 그 대상은 당대 종교지도자들이었다. 정의와 자비, 신의와 같은 성경의 원리들은 헌신짝처럼 여기는 그들에게 예수는 분노했던 것이다.

 

“너희 같은 위선자들은 화를 입을 것이다. 너희는 겉은 그럴싸해 보이지만 그 속에는 죽은 사람의 뼈와 썩은 것이 가득 차 있는 회칠한 무덤 같다. 이와 같이 너희도 겉으로는 옳은 사람처럼 보이지만 속은 위선과 불법으로 가득 차 있다.”

<마태복음 23장 29-30절>

 

가난하고 병든 자, 사회적 약자들 편에 섰던 예수, 보잘 것 없는 계층의 사람들을 자신의 제자로 삼았던 예수, 그가 싸웠던 대상은 사람들을 붙잡고 혼란스럽게 만드는 집단, ‘엘리트 카르텔’이었다.

 

예수의 분노가 거룩하게 느껴지는 이유는 그것이 ‘의분’(義憤)이었기 때문이다. 예수는 분노했다. “하나님은 … 매일 분노하시는 하나님이시다”고 언급된 시편의 구절처럼, 예수는 분노했다. 특히 이권과 권력에 눈이 먼 탐욕스런 종교지도자들에게 분노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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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엘리트 카르텔’을 대하는 한국교회의 자세에 관하여

 

성경에서 말하는 ‘비판하지 말라’의 대상은 다름 아닌 ‘외식하는 자’, 종교지도자들인 당대의 ‘엘리트 카르텔’이었다.

 

"남을 판단하지 마라. 그러면 너희도 판단받지 않을 것이다. 남을 판단하는 대로 너희도 하느님의 심판을 받을 것이고 남을 저울질하는 대로 너희도 저울질을 당할 것이다. 어찌하여 너는 형제의 눈 속에 있는 티는 보면서 제 눈 속에 들어 있는 들보는 깨닫지 못하느냐? 제 눈 속에 있는 들보도 보지 못하면서 어떻게 형제에게 '네 눈의 티를 빼내어 주겠다.' 하겠느냐? 이 위선자야! 먼저 네 눈에서 들보를 빼내어라. 그래야 눈이 잘 보여 형제의 눈에서 티를 빼낼 수 있지 않겠느냐?"

<마태복음 7장 1-5절>

 

여기서 ‘위선자’는 당대 종교 지도자들이었다. 헌금을 하지 않는다고, 금식을 하지 않는다고, 기도하지 않는다고 남에게만 철저한 기준과 잣대를 들이밀었던 종교 지도자들, 특히 율법학자와 바리새인들에게 자신은 보지 못하고 타인의 눈 속에 있는 티만 보려 한다고 비판한다. ‘너희는 누구를 비판할 자격이 없다’고 말한다.

 

건전한 비판은 필요하다. 종교지도자들은 카르텔을 지키기 위해, 자신들에게 향한 비판의 화살을 다시 비판자에게 되돌렸다. 예수가 그랬던 것처럼 ‘분’을 참지 않는 것은 ‘의’(義)를 이루는 방편이다. 따라서 분노를 회피하고, 안위를 위해 침묵을 지키는 것, 자신의 영혼에만 집중하는 것은 예수와 함께 하기를 거부하는 것과 다를 바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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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무리

 

해방 이후 최초로 권력을 갖게 된 집단은 우리나라의 사회구조를 형성해 특수계층으로 성장, 지배계급이 되었다. 상층부와 하층부를 나누어 갑과 을, 승자와 패자 등의 개념을 새롭게 부활시켰다. 조선 600년간 양반사회를 경험했던 우리민족에게 뿌리 깊이 내재되어 있는 상하/수직적 ‘계급’ 사회에 대한 익숙함은, 이렇다 할 저항조차 하지 못하고 ‘엘리트 카르텔’에 무너져 왔다.

 

한국교회도 예외는 아니었다. 대형교회를 필두로 한 기독교인들의 ‘엘리트 카르텔’은 지금의 한국교회를 만들었다. 정의와 자비, 신의는 져버린 채 명분을 위해 싸우고 온갖 종류의 비리를 양산하는 한국교회. 지금의 한국교회는 희망의 메시지를 전달하는 가교 역할에 실패했다. 그래도 일말의 희망이 남아 있는 이유는 역사는 늘 반복되기 때문이다. 사회가 타락할 때 교회가 타락했던 것처럼 사회가 변혁을 이루면 교회 역시도 개혁을 꿈꿀 수 있지 않을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