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흔히 보험설계사라 부르는, 폼 나는 이름으로 파이낸셜 컨설턴트(FC)란 이름의 직업을 갖고 있을 때의 일이다. ‘우리는 흔한 보험아줌마와는 다르다’는 기묘한 자부심과 전문가적 소양을 드러낼 목적으로 넥타이에 정장은 기본이고 뭔가 있어 보이는 가죽 서류가방을 들어야 했으며 단정한 헤어스타일과 손발톱까지 신경 써야 했다. “고객의 필요에 따라”는 “고객의 니즈에 따라”라 말하고 ‘수익’은 ‘베네핏’으로, 지금은 다 까먹었지만 뭔가 알 수 없는 경제적 용어들을 영어로 쏼라쏼라 지껄여야 했다. 더해서 종국엔 돈을 많이 벌 수 있다는(많이 벌어야 한다는) ‘유일한’ 욕망을 불어넣기 위해 멘탈 교육에 많은 시간을 쏟던 외국계 회사였다.

 

교육시간에 틀어준 영화는 윌 스미스 주연의 <행복을 찾아서>였고, 실화에 바탕 했다는 그 영화는 주인공이 엄청난 경제적 절박함에 기인한 엄청난 근면성실과 그에 따른 엄청난 행운으로 대박을 치고 엄청난 부자가 되었더라는 얘기였다. 너희들도 할.수.있.다.는 얘기다. ‘노오력’만 한다면.

 

뿐만 아니라, 어느 한 분야에서 성공했다는 ‘강사’들을 달마다 초빙해서 강연도 들었다. 소위 ‘인기 강사’로 이름 난 분들이라 그런지 재미로만 따지자면 참 재미난 시간들이었다. 내용? 구체적 목표를 가지고 열심히 하면 (경제적) ‘성공’의 문이 활짝 열리리라는, 하나마나한 소리들이었다.

 

참 의문스러웠다. 저 양반과 내 인맥이 다르고 환경이 다르고 성격이 다르고 처지가 다를진대, 심지어 저 아저씨는 대머리인데! 저 양반의 ‘성공 비결’이 과연 나에게도 온전히 적용될 수 있을까. 그 시간에 차라리 다양한 실패 사례들을 살피고 연구하는 것이 훨씬 효과적이지 않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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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즘은 ‘아프면 환자다’라는 말에 환호하지만, 그 조금 전 시대만 하더라도 ‘아프니까 청춘’이라는 말이 ‘힐링’으로 포장되어 엄청 팔렸더랬다. ‘힐링’은 치유란 뜻이지만 소비되는 꼴을 보면 그냥 ‘위로’다. 어느 철학자나 어느 스님이 “그렇게 살지 말고 이렇게 살아라”고 골백번을 얘기해 봤자 또 그 얘길 들으며 고개를 주억이고 감동의 눈물을 쏟아봤자, 그 시간에 차라리 재미난 영화 한 편 보는 게 더 낫다고 생각하는 나로선, ‘힐링’이라는 단어에 일종의 거부감이 있다.

 

물론 힘든 사람에게 ‘위로’도 필요하겠지. “네 탓이 아니야.”라는 말이 갖는 힘의 위대함도 있겠다. 하지만 그것도 케바케지. 너도 알고 나도 알다시피 아픈 사람에게 필요한 건 약, 배고픈 사람에게 필요한 건 밥이잖냐. 약이나 밥이나 돈이 필요한 사람에게 그것을 줄 수 없을 때 우린 ‘위로’라는 저비용 고효율(실제로 효율이 좋은지도 무척 의심스럽다만) 솔루션을 건네지 않던가.

 

이 글은, 내 인생의 실패 선언문이자 구직을 위한 <자기소개서>이다. 내 나이 마흔 여섯. 뭘 더 어찌해 볼 시간도 힘도 없다. 난 이미 졌고, 실패했다. 재기도 힘들 터다. 그걸 굳이 기록하고 공개적으로 나누는 이유는, 누군가의 실패담이 성공담보단 재밌지 않을까,란 생각이 들어서다. 담담히 써 내려가며 스스로 복기함과 더불어 이 글을 읽는 이들에게 차라리 ‘위로’보다는 일말의 쓸모가 있지 않을까 하는 되도 않은 희망도 없다. 앞에 서술했다시피 성공 사례니 비결이니 따위를 담은 자기계발서보다 효용 가치는 있다고 여기지만, 그 또한 딱히 무슨 실질적인 도움이 되거나 하진 않을 게다. 더해서, 누군가가 나와 비슷한 생각을 하고 있다면 우리 같이 의기투합해 일을 도모해보자는 ‘자기소개서’이기도 하다.

 

앞으로 나올 실패담을 잠시 뒤로 하고 우리 한 가지는 합의하고 넘어가자.

 

앞서 나는 이 글을 일종의 ‘실패 선언문’이라 했는데, 실패란 무엇이고, 성공이란 무엇일까. 그리고 그 행간에 담겨 있는 행복이란 무엇일까. ‘경제적’으로 망했다면 과연 인생 자체가 망한 걸까. 왜냐하면, 난 이 글에서 오로지 돈 문제의 관점으로만 이야기할 것이기 때문이다.

 

고 신해철 형님이 오래전 설파한 바를 살펴보자.

 

“이제 나의 친구들은 더 이상 우리가 사랑했던 동화 속의 주인공들을 이야기하지 않는다.

고흐의 불꽃같은 삶도, 니체의 상처 입은 분노도 스스로의 현실엔 더 이상 도움될 것이 없다 말한다.

 

전망 좋은 직장과 가족 안에서의 안정과 은행 구좌의 잔고 액수가 모든 가치의 척도인가.

돈, 큰 집, 빠른 차, 여자, 명성, 사회적 지위 그런 것들에 과연 우리의 행복이 있을까.

 

나만 혼자 뒤떨어져 다른 곳으로 가는 걸까.

가끔씩은 불안한 맘도 없진 않지만 걱정스런 눈빛으로 날 바라보는 친구여,

우린 결국 같은 곳으로 가고 있는데”

 

- 신해철, ‘나에게 쓰는 편지’ 중에서...

 

해철이 형의 주장에 따르면, 우린 결국 같은 곳, 즉, 죽음을 향해 달려가고 있다. 그 거시적 전망 속에서 돈, 큰 집, 빠른 차 따위에 과연 우리의 행복이 있겠냐는 얘기다. 다시 말하면, 그냥 하는 얘기다.

 

형은 이 가사 써서 돈 많이 벌었잖아! 큰 집, 빠른 차에 초미녀 와이프도 얻었잖아! 비록 어처구니없는 일로 인해 안타까운 죽음을 맞이했지만, 형! 그래도 이건 아니지!

 

고흐의 그림이 어쩌라고. 정작 본인은 처돌아서 제 귀까지 자르고 비참하게 살다 갔는데. 니체의 분노가 뭐요? 상처를 입으셨다고요? 그럼 병원에 가보시든가요.

 

단언컨대, 돈, 큰 집, 빠른 차, 여자, 명성, 사회적 지위 그런 것들에 우리의 행복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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물론, 몇백, 몇천 억 하는 빌딩 소유주는 물론 이건희와 포브스 순위 짱 먹는 아랍 왕족 같은 전 지구적 부자들의 삶은 내가 겪어본 적이 없어서 모르겠다. 강간을 해도 “넘어졌을 뿐인데 우연히 삽입이 됐다”거나 “회사 자금을 빼돌렸지만 하필 그게 외국이었을 뿐”이어서 무죄가 난다거나 제 배때지 부르려고 불법을 저질렀을 뿐인데 휠체어 타고 들어갔다가 국가 경제에 이바지했다는 칭찬까지 받으며 걸어 나오는 뉴스는 많이 봤다만, 그런 세태를 ‘행복’과 다이렉트로 연결 짓는 건 무리지 싶으다.

 

(가만 생각해 보면, 술 처먹다가 옆에 앉은 사람한테 뜬금없이 느그 아부지 뭐하시냐고, 허리 펴고 똑바로 앉으라고 싸대기 올려붙이거나 매뉴얼 제대로 한 거 맞냐면서 가던 비행기 돌려세울 정도의 권력이 있다면, 세상 참 살 맛 날 거 같긴 해.)

 

하지만 어린이날에 사람들 미어터지는 놀이동산 가서 초주검이 되고, 휴가철에 해외여행은 못갈 망정 서해 어느 섬이나 계곡 같은 데에 가서 찬물에 발 담그고 찰박거리고, 부모님 생신, 가족 생일이나 기념일에 가까운 동네 식당이라도 가서 고기라도 구울 수 있는 것. 즉, 남.들.다.하.고.사.는 소소하고 평범한 생활도, 돈이 있고 여유가 있어야 할 수 있는 짓이다.

 

은행에서 하루 열 두통씩 독촉 전화 오지. 추심원이 아침 9시 땡 치자마자 벨 눌러대지. 외식은커녕 쌀 떨어졌는데 라면 살 돈도 없지. 라면 물이라도 끓일랬더니 가스는 끊겼지. 수도관은 얼어 터졌지. 결국 보증금 빼서 해결하고 고시원 기어 들어가지. 다달이 고시원 월세 내기에도 빠듯하지. 알바를 할래도 콜센터 아웃바운드 아니면 택배밖에 없지. 그나마도 나이 때문에 걸리는 게 많지. 경비 일은 또 너무 젊어서 안 되지. 발렛 파킹이나 대리 운전 뛰지. 아차 하는 순간에 외제차 긁지. 빚만 지고 또 찾다보니 건설 쪽 조공 자리가 일당이 좋길래 찾아가지. 나이 마흔 넘어 노안도 있는데 노가다 뛰려니 발바닥은 터지고 허리는 나가지. 이 짓 계속 하다간 죽겠다 싶어서 찾다 보니 공단 쪽 박스 공장 들어가지. 거기서 방글라데시 인부들과 컨테이너 집에서 숙식하며 살지. 그렇게 몇 달 살면 외로움에 찌들지. 술 처먹고는 술김에 헛돈 쓰지. 먼지 마시면서 일하다가 절단기에 장갑 말려서 손꾸락 잘리지. 업주는 일용직이라고 산재 처리도 안 해주지. 뒤늦게 병원에 달려온 마누라는 더는 못하겠다고, 그만 살자고 이혼 서류 내밀지. 야 씨발, 전두환 대가리에서 모발을 찾는 게 더 쉽지, 여기 어느 구석에서 행복을 찾을 수 있겠냐.

 

즉, 상대적인 부의 크기로 가늠하자는 게 아니라 어느 정도 기본적인 경제력은 결단코 행복의 기본 요소인 것이다.

 

이게 무서운 건, 무슨 알콜중독이나 도박, 범죄 따위를 저지르다가 타게 되는 거창한 망크리가 아니라는 점이다. 내 장담컨대, 평범한 사람도 그냥 저냥 살다가 딱 한 번 재수가 없으면 어어? 하는 순간에 누구나 빠질 수 있는 처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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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연한 얘기지만, 소위 ‘헬조선’이라 칭하는 우리나라만의 이야기는 아니다. 사람 사는 게 다 그런 거란 얘기다. 다만, ‘헤븐’이라 일컫는 나라에선 패자 부활전이라도 모색해볼 수 있다더라는 얘길 귀동냥으로 들었을 뿐이다. 하지만 내가 발을 딛고 사는 바로 이곳은 대한민국이다. 그리고 이 이야기는 내가 어어? 한순간의 이야기인 것이다.

 

 

 

(다음에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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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가오면 찌른다-_-