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신 기사 추천 기사 연재 기사 마빡 리스트

 

 

 

 

 

“사람은 성이자 성벽이며, 해자이니라. 인정은 아군이요, 원한은 적이다.”

 

신겐이 남긴 무수한(!?) 명언들 중 가장 유명한 말이다. 다케다 신겐을 대표하는 명언이라고 해야 할까? 내용 자체도 상당히 의미심장하다.

 

“성이 아무리 견고해도 사람의 마음을 잃으면, 나라가 망한다.”

 

라고 해석할 수 있다. 요즘 말로 바꾸면 휴머니스트? 인본주의에 입각한 경영방식이라고 해야 할까? 신겐이 주변국들과 외교적으로 보여준 수많은 ‘배신’들을 보면, 고개가 갸우뚱 하다. 물론, 이건 어디까지나 ‘타국’에 한해서이고, 자신들의 수하들에게는 나름 인망을 얻었다. 다케다 가문이 느슨하게 연결된 호족 집합체 같은 성격을 가지고 있었지만, 다케다 신겐의 휘하에 모인 많은 무장들은 다케다에게 충성을 다했다. 다케다 4명신, 다케다 24장이란 이름으로 유명한 다케다 신겐의 부하들은 지금까지도 기록으로 전해지고 있다.

 

24shouzu1.jpg

 

이들의 충성심은 어디까지나 신겐의 카리스마란 토대 위에서 존재했다. 신겐이란 구심점이 존재했기에 이들은 다케다 가문 아래에 모였던 거다. 이 가신들을 신겐은 적재적소에 잘 활용했다고 자랑했다. 스스로 인재활용의 대가라 자부했었다(인사팀에 들어가면 잘 했을 것 같다).

 

그는 수시로 측근들에게 인재활용법을 말했는데, 성격이 급한 부하에게는 지나치게 신중한 부하와 함께 붙여서 보내는 식의 활용이었다(1+1인가?).

 

여기까지만 보면, 한 가지 의문이 든다.

 

“어째서 신겐은 일본을 제패하지 못했을까?”

 

영화 <카게무샤>를 보면, 다케다 신겐의 ‘한(恨)’이 절절하게 느껴진다. 21살에 가독(家督)을 물려받고는 32년간 척박한 카이 땅을 통치했다. 그 사이 군략(軍略)으로는 오다 노부나가를 떨게 만들었고, 가신들의 충성은 하늘을 찔렀다. 그가 육성한 기마군단은 전국 최강을 자랑했다. 그런데 어째서 다케다 신겐은 천하인의 자리에 오르지 못했을까? 아니, 신겐의 급작스런 죽음은 인간의 힘으론 어쩔 수 없는 것이니, 그 다음을 생각해 보자. 어째서 다케다 가문은 붕괴했던 걸까?

 

“아들인 가쓰요리(武田勝頼)가 바보라서 그렇지.”

 

영화 <카게무샤>를 본 사람이라면, 대번에 이런 답이 나올 거다. 실제로 다케다 가문의 운명을 가른 나가시노 전투의 주장(主將)은 가쓰요리였으니, 이 말이 틀린 건 아니다. 그러나 그만의 잘못이었을까? 나가시노 전투 이전에 이미 다케다 가문은 몰락의 길을 걷고 있었다. 가쓰요리는 침몰해 가는 나라를 물려받은 거였다.

 

이 글을 처음 시작할 때 다케다 신겐의 운명을 말하며,

 

신겐은 어째서 카이에서 태어난 것일까?’

 

라는 대망의 한 구절을 언급했다. 맞는 말이다. 만약 신겐이 오와리에서 태어났다면, 역사는 바뀌었을 거다. 그러나 카이에서 보여준 그의 통치와 대외적인 투쟁이 과연 최선이었을까?

 

당시 천하제패의 방법은 하나였다.

 

교토에 상경해 덴노를 만나고, 그의 인정 하에 막부를 열고 장군의 지위를 얻으면 된다. 그리고 덴노를 배경으로 통치를 하면 된다. 문제는 이 상경길이 보통 어려운 길이 아니라는 거다. 저마다의 세력을 내세워 조각조작 찢겨진 땅을 누더기처럼 기워서 하나하나 발판을 만들어 올라가야 할까? 아니면, 힘으로 밀어붙여야 할까?

 

영화 <카게무샤>를 보면, 신겐은 조급해 하고 있었다. 수 십 년간 차곡차곡 준비해 인생 말년에 모든 공력을 들인 상경을 시작했는데, 마지막 순간 불의의 일격을 맞고 꿈을 접는 것으로 결말이 난다.

 

영무자1.png

 

영화 그대로라면, 다케다 가문은 신겐의 카리스마 하나에 의지해 버텨왔다는 걸 자인하는 게 된다. 오다 노부나가가 두려워했던 신겐. 그러나 신겐이 빠진 다케다는 왜 허약해진 걸까? 앞에서 언급했듯 ‘카이’와 ‘시나노’란 지역의 한계가 크다. 그러나 단순히 지역의 문제로 한정하기엔 무리가 있다. 신겐은 살아남기 위해, 강해지기 위해 할 수 있는 모든 걸 다 했다. 싸우지 않고 이기기 위해 온갖 모략과 권모술수를 동원했고, 자신보다 약하다 싶으면 동맹이라 하더라도 바로 쳐들어가 자신의 이익을 챙겼다.

 

“이익을 위해선 이용할 수 있는 모든 걸 다 이용하고, 할 수 있는 모든 걸 다 한다.”

 

천민자본주의라고 해야 할까? 아니, 생존에 대한 절박감이라고 해야 할까? 그의 이중적인 언행은 보는 사람들에게 혼란을 야기한다. 그러나 ‘이익’의 관점에서 그를 바라보면, 모든 게 명쾌하게 해결된다.

 

“...매일같이 불상에 기도를 올리며, 승복을 즐겨 입고 전장에도 수백 명의 승려를 대동하는 등 신앙이 독실해 보이지만, 사실 그 신앙은 타국을 정복하기 위한 정치적 도구에 불과하다.”

- 루이스 프로이스 <일본사> 中 발췌

 

잘 알려진 대로 신겐은 출가를 했다. 당시 신겐의 출가 이유에 대해 의견이 분분했는데, 여러가지 설이 있지만, 개인적으론 계속된 기근으로 흉흉해진 민심을 다독이기 위한 퍼포먼스란 것에 무게를 두고 있다. 솔직히 불교로의 귀의는 신겐에게 ‘현실적인 이득’이 됐다.

 

(오다 노부나가는 ‘히에이잔 엔라쿠지比叡山延暦寺’를 불태워 남녀노소 가라지 않고 모조리 학살했었다. 겉으로 보면, 오다 노부나가가 불교를 탄압한 것처럼 보이지만 실상은 좀 달랐다. 엔라쿠지 승단의 경우 백성들을 착취한 걸로 유명했다. 절에서 고리대금업을 했다면 말 다한 거 아닌가? 이 당시 오다 노부나가의 엔라쿠지 승단에 대한 토벌을 백성들은 환영했다.

 

까놓고 말해, 오다 노부나가의 천하통일에 최대 걸림돌은 ‘불교’였다. 콕 찍어서 ‘혼간지本願寺’, 세력이었다. 오다 노부나가가 상경한 직후인 1570년. 혼간지의 법주였던 ‘켄뇨顕如’는 오다 노부나가를 ‘불적佛敵’으로 선언했다. 기나긴 11년 전쟁의 시작이었다.

 

당시 불교는 봉건 영주들의 영향권 밖에 있었는데, 이들을 오늘날의 절이나 교회 수준으로 바라보면 안 된다. 전국시대의 절들은 자체적인 무장을 했었고, 병력이 있었다. 하나의 독자적인 세력이라고 봐도 무방했다.

 

혼간지의 총본산이 되는 ‘이시야마 혼간지石山本願寺’는 사찰이라기보다는 ‘요새’나 ‘성’에 더 가까웠다. 아니, 어지간한 성보다 훨씬 더 견고했다. 이 이시야마 혼간지 절터 위에 세워진 게 일본 3대 성 중 하나로 이름을 알린 ‘오사카성’이다.

 

d311c1bb.jpg

 

켄뇨는 당시 쇼군이었던 ‘아시카가 요시아키足利義昭’와 손을 잡고, 다케다, 아사쿠라, 아자이, 모리 등의 反노부나가 세력을 끌어들여 그 유명한 ‘노부나가 포위망’을 만든다. 보면, 알겠지만 이 당시 ‘절’이란 개념이 부처님께 공양 올리고, 신도들 보살피는 종교의 의미를 한참 뛰어넘은 존재였다. 한 가지 재미난 사실이 켄뇨와 다케다 신겐은 동서 사이였다는 거다)

 

신겐은 오다 노부나가에게 핍박 받은 불교세력을 끌어들였고, 혼간지와 손을 잡고 反 노부나가 전선에 뛰어들었다. 그가 불교에 귀의한 목적이 어디인지에 대해 다시 한 번 생각해 볼 수밖에 없는 대목이다. 솔직히 말해 그의 행적을 보면, 과연 불교신자일까란 생각이 든다. 불같은 성격에, 배신과 음모, 수많은 전쟁터에서 보여준 잔혹한 만행. 이 모든 게 불교완 거리가 멀다. 아무리 전국시대라 해도 이해의 범위 밖에 있다. 결국 그는 하나의 목적,

 

“이익”

 

을 추구하기 위해 이용할 수 있는 모든 걸 이용했다고 볼 수 있다.

 

개인적인 의견이지만, 다케다 가문의 몰락원인 중 가장 큰 것은 신겐 시절에 있었던 ‘배신의 정치’ 때문이라고 생각한다. 신겐의 모습은 오늘날의 중국과 비슷하다.

 

중국은 육지로 14개 국가와 국경을 접하고 있다. 세계에서 인접국이 가장 많은 나라다. 이 중 12개 국가와 국경 조약 및 협정을 맺은 상태다(중국 국경선은 90%정도가 확정된 상태다. 즉, 10%의 국경분쟁 불씨를 떠안고 있다는 소리다). 이 14개 국가 중 중국에 우호적인 국가는 거의 없다.

 

원교근공(遠交近攻)이란 말이 있지 않은가? 중국 인접국들이 중국에 대한 반중감정은 꽤 심각한 수준이다. 신겐의 모습이 그러했다. 신겐은 주변국들과 계속해 전쟁을 벌였다. 이는 전국시대에선 일상인 모습이지만, 문제는 그 후다. 전쟁만으로 나라를 이끌 수 없기에 신겐도 수많은 외교 전략을 구사했고, 그 결과 동맹을 맺었다. 그리고 이 동맹을 자기 손으로 박살내 버렸다. 이게 한 두 번이 아니었다. 이제 주변국은 신겐은 신뢰하지 않게 됐고, 그의 아들대가 되면 온 사방이 적인 상황에서도 그 누구도 다케다 가문에게 손을 뻗어주지 않았다.

 

 

1ccbf62f.jpg