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칸트의 인생은 단순하지만 그의 일상은 결코 그렇지 않다. 그는 매일 아침 5시에 일어났다. 하인은 정확히 4시 45분부터 칸트를 깨우기 시작해야 한다. 칸트가 조금만 더 자겠다고 아무리 화를 내고 하소연을 해도 억지로 깨워야 한다. 이미 일말의 동정심도 없어야 한다고 명령을 들은 상태다. 15분은 칸트가 자기가 잠을 깰 때까지 걸리는 시간을 계산해 나온 답이다.

 

아침은 차와 파이프 담배였다. 칸트는 애연가였지만 아침의 담배는 식욕감퇴제의 의미도 있었다. 그는 적게 먹어야 건강하다고 믿었다. 차도 절제의 의미로 일부러 묽은 차를 마셨다. 필요 이상으로 먹는 일을 죄악시했다.

 

칸트는 커피광이었다. 그래서 거꾸로, 욕망에 굴복하면 안 된다는 생각으로 커피를 정해진 양만 먹었다. 커피 냄새를 맡으면 몹시 괴로워했다. 참아야 하니까 말이다. 식욕감퇴용 흡연 이후 서재에서 공부를 하고 강의 중비를 한다. 저녁은 완전히 없애 버렸다. 칸트는 평생 체중 50kg을 유지했다. 대신 점심은 긴 시간 동안 충분히 먹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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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공한 후의 칸트는 하루의 유일한 식사인 점심을 정확히 세 시간 동안 즐겼다. 물론 이 시간 동안 먹기만 한 건 아니다. 칸트에게 세상과 교류하는 중요한 시간이었는데, 손님은 최소 2명 최대 5명이었다. 대화는 둘일 때 도그마에 빠지기 쉽고 8명부터 맥락을 잃는다는 계산 때문이었다. 말년에는 독일의 유명 인사들, 외국의 명사들과 외교관들까지 칸트와 식사하는 영광을 누리기 위해 '웨이팅'을 했다.

 

식사에는 엄격한 규칙이 있었다. 인사와 덕담을 하고 근황과 가십 등의 가벼운 수다로 시작하여, 대화 주제가 점점 진지해져야 한다. 절정부에서는 꼭 인문학적인 대화를 해야 한다. 결코 감정싸움을 해서는 안 된다. 나중에는 다시 일상적인 수다로 되돌아가 기분 좋게 끝나야 한다. 기분이 좋지 않으면 좋은 척이라도 해야 한다.

 

기승전결의 시간까지 완벽히 정해놓았다. 연출 의도를 따라가지 못한 손님은 다시는 초대받지 못했다. 칸트에게 낙제 판정을 받는 일은 문명인으로서 수치였기 때문에 모두 복종했다.

 

오후 3시에 점심이 끝나면 잠깐 읽을거리를 훑고 정확히 3시 30분에 산책을 시작했다. 쾨니히스베르크에는 물길이 복잡해서 다리가 7개나 있다. 매일 같은 시간에 같은 장소를 지나쳤기에 사람들은 그 모습을 보고 시계를 맞췄다고 한다.

 

유명한 오해가 있다. 하이델베르크라는 도시에 칸트의 산책로가 있다는 소설이다. 또 칸트가 지나쳤던 다리의 이름이 칼 테오도르 다리라고 한다. 이런 사실은 없다. 한국에서만 유통되는 도시전설이다. 하이델베르크에는 헤겔이 산책을 다녔다는 ‘철학자의 길’이라는 산책로가 있다. ‘철학자의 길’은 쾨니히스베르크에도 있다. 물론 이쪽은 칸트의 산책로다. 동명의 지명이 만들어낸 오해다.

 

사실 따지고 보면 같은 지명도 아니다. 칸트의 산책로는 '필로소펜담', 헤겔의 산책로는 '필로소펜베그'다. 여기서 '담'은 포장도로, '베그'는 비포장도로에 가깝다. 심지어 여행책자나 여행사에서도 헤겔의 산책로를 칸트가 걸었던 길이라고 소개하곤 한다. 사실과 다르니 속지 말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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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 자크 루소

 

칸트는 3시 30분 산책을 평생 딱 두 번 빼먹었다. 한 번은 장 자크 루소의 책 <에밀>을 읽다가 푹 빠져서 산책을 놓쳤다. 그럴 만 하다. 루소의 사상은 칸트에게 커다란 충격을 안겼다. 그는 데이비드 흄에 의해 합리론의 독단에서 깨어났고, 루소의 저서 덕에 지식인의 오만에서 벗어났다. 39세에 루소의 <인간불평등기원론>를 읽고 계몽주의 철학자가 되었다.

 

"나는 천성적으로 진리를 추구하는 자로 지식만이 인류의 영광을 이룬다고 믿어왔다. 아무것도 모르는 평범한 대중을 경멸했다. 루소를 읽고는 이런 맹목적 편견이 사라졌다. 나는 인간성에 대한 존경심으로 도덕적 평등주의자가 됐다."

 

갑갑한 선비지만 담담한 몇 문장으로 통렬한 자기반성을 완성한 모습에서 선비의 값어치가 느껴지는 것도 사실이다. 이 영향으로 칸트가 만들어낸 유명한 명제가 있다.

 

“인간은 수단이 아니라 그 자체로 목적이다.”

 

산책을 놓친 또 한 번의 이유는 신문 기사다. 그날 실린 내용은 프랑스 시민 혁명 뉴스였다.

 

쾨니히스베르크 주민들이 칸트를 보고 시계를 맞추는 두 번째 시각은 저녁 7시였다.

 

칸트는 매일 그린이라는 친구의 집에 방문했다. 방문했을 때 그린은 항상 의자에 앉아 칸트를 기다리며 잠을 자고 있다. 칸트는 잠시 이런저런 생각을 하다가 역시 졸기시작한다. 그러다가 은행 지배인인 루프만이라는 친구가 와서 또 잠에 든다. 마지막으로 모터비라는 친구가 와서 세 사람을 깨운다. 그때부터 이런저런 주제로 대화를 하고 정확히 7시에 헤어졌다.

 

칸트는 잠자는 자세도 연구를 통해 완벽히 수립했다. 동시대 목격자의 증언이다.

 

“수년간의 습관을 통해 그는 특별한 기술을 습득하였다. 그 기술은 자신의 몸을 이불로 둘둘 싸는 것이다. 잠자리에 들 때, 그는 먼저 침대 끝에 앉았다가 가볍게 침대 안으로 뛰어들고는, 이불의 한쪽 모서리를 한쪽 어깨 위에서 등 밑을 지나 다른 쪽 어깨에 닿도록 끌어당기고, 특별한 기술로 역시 다른 쪽 모서리를 그 밑으로 싸 그렇게 계속 온몸을 감싼다. 이렇게 몸을 싸서 마치 누에가 고치를 짓는 것과 같은 모양을 하고는 잠이 들기를 기다린다.”

 

칸트는 모든 사람들은 처음부터 일정한 양의 잠이 배정된 채 태어난다고 믿었다. 잠을 많이 자는 게으른 사람은 늙어서 적게 자야 할 텐데, 그럴 리가 없잖은가. 그러면 자기가 평생 할당받은 수면 시간을 넘어선다. 칸트는 초과된 수면 시간만큼 수명이 준다고 믿었다. 나름 연구와 관찰 끝에 내린 ‘과학적’ 결론이다.

 

그렇다. 과정이 과학적이라고 진리는 아닌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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칸트는 매일 정확하게 7시간 수면을 지켰다. 10시에 자 5시에 일어났다. 한 번은 귀족의 마차 드라이브에 초청된 적이 있다. 귀족은 존경받는 철학자에게 시골길을 달리는 즐거움을 선사해주고 싶어서 마부에게 교외를 한 바퀴 돌라고 지시했다. 당연히 드라이브는 길어졌다. 칸트의 기준으로는 하루 일과가 엉망이 되었다. 그는 밤 10시에 집에 돌아와 분통을 터뜨렸다. 지금쯤 침대에서 이불로 누에고치를 만들고 있어야 하는데 옷부터 갈아입어야 하니 견딜 수 없는 일이었다.

 

칸트는 생활에 규칙을 부여해 엄수했다. 당연히 어느 누구의 마차 드라이브에도 따라가지 말아야 한다는 항목이 추가되었다.

 

이런 사람에게 결벽증이 없을 리 없다. 모든 물건이 정확히 그 자리에, 그 각도로 놓여 있어야 했다. 가위나 주머니칼 따위가 조금 비뚤게 놓여 있으면 견디질 못했다. 의자가 제자리에 놓여 있지 않으면 불안해서 안절부절못했다.

 

칸트는 소음에 예민했다. 옆집 병아리가 자라서 수탉이 되자 그는 일생일대의 위기를 맞았다. 수탉의 울음소리에 칸트는 노이로제가 걸렸다. 당시는 이백 년도 더 전이다. 아무리 도시라 해도 현대의 주택가와는 생활 환경이 다르다. 수탉 소리에 노이로제에 걸리다니, 칸트가 별종인 탓이다.

 

소음 때문에 철학 연구를 못 할 지경이 되자 수탉을 사들여서 요리로 만들려고 했지만 뜻대로 되지 않았다. 수탉 주인은 ‘명망 있는 철학자가 고작 수탉의 방해를 받는 걸 이해할 수 없다’고 말했고 칸트는 설명에 실패했다. 결국 수탉을 피해 이사를 갔다. 이사한 집은 쾨니히스베르크 감옥 옆이었다. 감옥에서는 수감자들에게 죄를 뉘우치게 한다는 목적으로 매일 찬송가를 큰 소리로 부르게 했다. 그것도 창문을 열어놓고서 말이다. 수탉과는 비교도 되지 않는 피해였다. 칸트는 시장에게 항의했다.

 

“감옥에서의 그와 같은 행위는 위선적이오.”

 

“나는 수감자들이 작은 목소리로 노래를 부르면 그들의 영혼이 구제받지 못하기라도 하듯이, 창문을 닫아도 노랫소리가 들릴 정도로 그들이 그토록 큰 소리로 찬송가를 불러야 할 이유가 있다고 생각하지 않습니다.”

 

얼마나 화가 쌓였는지 책에도 써서 복수했다. 칸트는 <판단력비판> 2판 각주에서 굳이 이 일을 언급했다.

 

칸트는 진보적인 인물이지만 예측 불가능한 변화는 싫어하는 정도가 아니라 공포스러워했다. 성공하고 나서 집사를 부릴 수 있게 된 칸트는 집사에게 무려 10년 동안 같은 옷만 입도록 명령했다. 집사도 사람이다. 명령을 받은 지도 오래되었고, 한 가지 옷차림만 고수하기엔 너무나 지겨운 나머지 집사는 딱 하루 자기 취향대로 옷을 입었다. 칸트는 충격을 받아 실신 직전까지 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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칸트는 철학뿐 아니라 일상생활에도 영국 경험론을 적용했다. 일상의 소소한 문제에 과학적으로 접근했다. 시도 때도 없이 가설을 세우고 이론을 수립했는데, 그중의 걸작은 <호흡조절을 통한 정신치료 및 예방>이다.

 

코감기가 잘 걸리던 칸트는 이런저런 방식을 시도해보다가 실패한 후 홧김에 코로만 숨을 쉬기로 했다. 당연히 코가 막혀 있으니 잘 안 되고 괴롭지만 정신력을 가지고 반복하다 보니 마침내 코가 뻥 뚫리더라는 이야기였다. 이걸 하다 보면 정신력도 단련된다는 이론을 수립한다.

 

기침감기 역시 약 대신 정신력으로 극복 가능하다고 주장했다. 사람은 기침을 하면 입이 벌어지기 때문에 당연히 입으로 숨을 들이켠다. 침대에 바로 누워서 입을 다물고 코로만 숨을 쉬도록 노력해보았다. 입에 침이 고이고 얼굴에 피가 몰리는 등 대단히 괴롭지만 인내심을 발휘해 오직 정신력으로 코로만 숨을 쉬어 본 것이다.

 

“실로 대단한 정신 집중이 요구된다.”

 

성공하고 나면 스스로가 뿌듯해져셔 기분도 좋아지고 감기도 물리친다는 이론이 이렇게 나왔다. 코감기와 기침감기를 연구한 결과 칸트는 호흡을 많이 하면 폐가 약해진다고 믿게 되었다. 때문에 단전호흡 비슷한 느리고 차분한 호흡법을 개발했다.

 

작은 곤충의 생존과 번식에 관한 이론도 빠질 수 없다. 칸트는 외출할 때 방의 창문 덧문을 항상 닫았는데, 그날은 깜빡하고 덧문을 열고 나가 방 안에 빛이 들어왔다. 돌아와 보니 빈대가 눈에 띄는 게 아닌가!

 

칸트는 빛이 빈대와 같은 작은 곤충이 증식하는 데 결정적인 기여를 하고, 빛을 차단하면 효과적으로 해충을 없앨 수 있다는 이론을 세운다. 신이시여, 그럴 리가 없다. 헌데 칸트는 평생 동안 자신의 이론을 철석같이 믿었다. 이유는 따로 있다.

 

칸트는 자기 이론이 틀리면 상처받는 정도에서 그치지 않았다. 눈곱만한 의심도 불쾌하게 여겼다. 친구들은 당사자가 모르게 칸트의 하인들에게 주인 몰래 침대와 침실을 깨끗이 청소하고, 칸트가 없을 때 창문을 활짝 열고 햇볕과 바람이 들어오게 해 달라고 부탁했다. 하인들은 시키는 대로 했고 빈대는 줄어들었다. 당연히 칸트는 자신의 이론이 귀납적으로 증명되었다고 믿고 자랑스러워했다.

 

칸트는 '과학적 태도'로 독일인들을 관찰한 결과 맥주가 몸에 해롭다는 결론을 내렸다. 독일이었으니 맥주를 많이 마셨을 게다. 술병이 나도 주정뱅이가 되도 다 알콜 탓이겠지만 칸트가 보기에는 알콜이 아닌 맥주가 문제였다. 와인을 마시는 사람들은 비교적 멀쩡했다는 게 증거였다. 그야 경제적 계층이 달라서였을 것이다. 아무튼 칸트는 와인은 괜찮고 맥주는 나쁘다는 결론을 내렸다. 와인을 너무 마시는 사람도 아예 안 먹는 사람도 이성적으로 문제가 있다고 보았다.

 

칸트에게 식사 초대를 받은 사람이 선물로 맥주를 꺼낸 적이 있다. 칸트는 '그 맥주를 마실 거면 당장 내 집에서 나가라'고 했다. 그럴 만도 하다. '비이성적인' 행동을 하는 손님을 내버려 두는 건 칸트에게 크나큰 모욕이었을 테니.

 

칸트를 정신병자 취급할 필요는 없다. 그는 자신의 일상생활에 과학적인 접근을 할 때 바보 같은 결과를 도출했지, 실생활과 상관없는 데서는 탁월했다. 칸트는 태양계의 근원이 태양이며, 지구를 비롯한 다른 행성은 태양에서 떨어져 나온 결과라는 사실을 맨 처음 주장한 인물들 중에 하나다. 그의 천재성을 알 수 있다. 어디까지나 학문적 영역에서는 말이다.

 

학문적 접근이 취미에서 꽃을 피운 분야도 있었다. 칸트는 당구 실력이 출중했다. 그냥 즐기는 게 아니라 자세와 기하학 등에 대한 이론을 수립해 학문적으로 접근했다. 잘 할 수밖에 없다.

 

칸트는 발명가이기도 하다. 그것은 바로... 가.터.벨.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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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신 의학에 관심이 많았다. 그는 혈액 순환이 건강에 좋다는 이론을 믿었다(사실이기도 하다). 당시 스타킹과 양말은 여성보다는 남성들의 의복이었는데, 그때는 고무줄이라는 게 없다 보니 스타킹에 탄력이 없었다. 흘러내리지 않게 하기 위해 줄로 꽉 묶어야 했다.

 

보통 사람이라면 그냥 그러려니 했겠지만 칸트는 과학적으로 접근했다. 혈액 순환을 방해하지 않고 스타킹과 긴 양말을 신을 수 있는 장치를 고민했다. 가터벨트다. 현재 이 복식은 페티시의 상징과도 같다.

 

가터벨트의 발명자치고는 공교롭게도, 칸트는 동정으로 죽었을 가능성이 높다. 칸트가 마냥 고루한 선비처럼 보일 수도 있겠지만 그는 위트 있고 지적인 대화로 나름 사교계의 스타였다. 완벽한 신사다 보니 보다 보면 매력적인 남자였달까.

 

자신의 볼품없는 외모를 냉정하게 평가했기에 원래는 결혼 계획이 없었다. 그러나 그에게 청혼한 여인이 있었다. 칸트는 '생각을 좀 해볼 테니 기다려 달라'고 했다. 사랑과 관련된 책을 모두 읽고 결혼을 해야 할 이유와 하지 말아야 할 이유를 모두 정리해 기록했다. 마침내 결혼을 해야 할 이유가 4개 더 많이 도출되었다.

 

칸트는 청혼을 받아들이려고 여성을 찾았다. 문제는 고민의 시간이 7년이었다는 것. 해당 여성은 이미 결혼해서 애까지 있었다. 청혼한 여성은 한 명 더 있다. 역시 칸트는 시간을 들여 학문적으로 접근했고, 승낙하려고 하니 그녀는 이미 다른 도시에 이사를 간 상태였다.

 

상처받은 칸트는 심술이 났는지 “결혼 생활은 수명을 단축시킨다”는 이론을 수립했다. 그래도 성욕이 아주 없지는 않았던 모양이다. 칸트는 70대에 자기 소원이 "저 아랫마을 우물가 처녀 엉덩이를 보는 거"라고 고백한 적도 있다. 매일 산책하면서 그 처녀가 빨래하는 모습을 내려다보았던 모양이다.

 

비극인가, 희극인가? 가터벨트의 발명자가 동정일 확률이 높다는 것은...

 

(다음 편에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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