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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편에서는 최근에 발견되는 온라인 게시판 문화를 통해 ‘정치성 대립의 일상화’라는 현상을 파악했다. 이 현상이 존재한다는 사실은 확인했으니 이번에는 그 질적 측면을 좀 더 파고들어 보자. 눈에 띄지 않은 채 서서히 진행되던 변화는 불과 몇 년 사이에 역사적 사건을 이뤄낼 잠재력을 지니고 있었다. 그 변화의 특징을 담아내는 상징적 행동들을, 우리는 의외의 지점에서 찾아볼 수 있다.

 

바로, 부먹 vs 찍먹 논란이다.

 

 

 

1.부먹찍먹 논란의 기본적 특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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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른바 부먹찍먹 논란은 탕수육을 어떻게 먹느냐에 대한 논란이다. 탕수육 소스를 부어서 먹느냐, 아니면 그릇에 담겨있는 소스에 찍어서 먹느냐. 별것 아닌 이 논란은 지금도 여느 게시판에서 아주 손쉽게 작지 않은 분쟁을 만들 수 있는 주제이다. 물론 이 내용은 앞장에서 다룬 정치성 대립에 비해 매우 가벼운 주제에 해당한다. 하지만, 이 논란이 그저 농담이 아니라 제법 진지한 토론으로 발전하는 과정을 살펴보면, 단순히 가벼운 주제만은 아니라는 사실을 알 수 있다.

 

‘부먹’, ‘찍먹’이라는 줄임말이 등장해서 대중적으로 쓰인 것은 대략 2010년대의 일이다. 하지만 그보다 훨씬 전에 중국음식을 배달시켜 먹은 경험이 많을 현재 30대 이상 사람들은, 분명 ‘부먹찍먹’이라는 말이 없던 시절에도 탕수육 소스를 부으려는 사람과 붓지 않으려는 사람의 대치를 경험한 바 있을 것이다. 생활속에서 파편적으로 누적된 경험이, 2010년대 온라인 문화를 만나면서 공감을 산 사례라고 볼 수 있겠다.

 

비슷한 형태의 논란 거리가 많이 있을만도 한데, 유독 탕수육만 이런 논란을 지닌다. 식문화에서만 봐도, 각자 알아서 먹으면 되는 식사류에서는 이렇게 ‘논란’으로까지 받아들여지는 요소가 없다. 짜장이냐 짬뽕이냐 같은 오랜 고민도 그저 개개인이 느낄 양자택일의 고민일 뿐 논란이라 부를만 할 여지는 없다. 탕수육과 같이 여럿이 나눠먹는 다른 메뉴들도 많지만, 대부분의 경우 메뉴를 선택하는 과정에서 합의가 이뤄지기 마련이다. 어떤 피자를 주문하느냐, 어떤 치킨을 주문하느냐와 같은 선택의 문제에서 대립이 일어난다면, 이는 주문 전 단계에서 벌어진다. 그래서 어떻게든 음식을 주문하고 그 음식이 눈앞에 등장한 시점이 되면 그 대립은 이미 종결되어있다. 이 역시 논란이 불거질 단서를 찾기 어렵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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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른 메뉴들과는 달리 탕수육은 눈 앞에 음식을 둔 상태로 소스를 부을 것이냐 붓지 않을 것이냐라는 한 가지 선택이 더 주어진다. 그 선택은 누군가의 독단에 의해 소스가 부어지면서 순식간에 결정될 수 있다. 게다가 이미 부어진 소스는 돌이킬 수 없다는 불가역성이 존재한다. 탕수육이 등장한 순간 누군가가 묻지도 않고 소스를 부어버리는 사태가 벌어지기 쉽고, 그만큼 소스를 부으려는 행위를 민감하게 받아들이고 이를 제지하면서 배려심이 없다는 비판이 가해지는 사태가 벌어지기도 쉽다. 둘 중 어느쪽이라도, 벌어진 사태에 대해 서로 다른 입장의 사람들이 갑론을박을 벌이기 용이한 것이다.

 

이렇게 부먹찍먹 논란은 '그것을 어떻게 먹느냐의 고민’이 아닌, ‘어떻게 먹어야 하느냐의 논란’을 품는다. 즉, ‘이렇게 해야만 하는 이유’, 또는 ‘저렇게 해서는 안되는 이유’와 같은 당위성의 대립이 되는 것이다. 찍어먹는 사람들의 기본적 논거는 소스가 없는 상태로 먹을 기회나 바삭한 식감을 유지한 채 소스를 적당히 찍을 기회를 유지하는 합리성에 있다. 그 반대에 있는 부어먹는 사람들의 논거는 ‘원래 그렇게 먹는 것’이라는 정통성에 있다. 이후 논쟁은 점점 심화되어, 온라인 상에서는 탕수육이란 음식의 역사적 기원, ‘볶먹’이라는 새로운 절충안의 제시와 그 실패, 유명 중식 쉐프들의 발언에 기반한 주장과 그에 대한 반박 등, 끝없는 논쟁이 이어진다. 이 대립 자체를 일종의 유희로 받아들이는 문화까지 만들어진다. 이렇게까지 논란이 심화될 수 있는 것은 이 두 측의 대립이 ‘정통성’과 ‘합리성’이라는 서로 다른 기준에 근거하기 때문이다. 이런 형태의 대립은 합의가 어렵고, 어떤 형태의 합의라도 재반박할 여지가 쉽게 만들어져 논쟁이 길어지기 쉽다.

 

물론, 실생활에서는 적당히 붓거나 어느 한쪽이 양보하는 형태로 별 문제 없이 합의가 이뤄진다. 탕수육 하나 때문에 실제로 얼굴을 붉히고 싸우는 일로 이어지는 경우는 흔치 않을 것이다. 그러므로 이 부먹찍먹 논란이 실생활에서의 갈등을 일으키는 것은 아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 논란이 ‘정치성 대립의 일상화’의 단서를 제공하는 지점은 어디에 있는지, 좀 더 파고들어 보자. 키워드는 역시, 정통성과 합리성이다.

 

 

 

2. 가치의 대립, 그리고 두 ‘파벌’의 형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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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탕수육은 원래 소스와 돼지고기 튀김이 버무려져 있는 음식'이라고 보는 시각. 이 시각에서라면 소스가 부어져 있는 상태의 탕수육이 옳다. 탕수육이라는 음식에 대해 정통성을 강조하는 시각이다. 반대로, 여럿이 나눠먹는 음식인 만큼 각각의 입맛이 서로 다를 가능성을 염두에 두자는 시각이 있다. 이에 따르면 소스를 붓지 않은 상태에서 각자가 입맛에 맞는 방식을 정하고 남의 방식을 침해하지 않아야 한다. 바로 합리성을 내세우는 것이다. 정통성을 기준으로 하면 소스가 부어지지 않은 상태는  탕수육이라 할 수 없다. 그렇다고 소스를 붓는 순간 합리성은 결여된다. 이 둘이 대립하는 이상 둘 모두를 만족할 수 없으므로  반드시 어느 한 쪽을 선택해야만 한다. 결국 정통성과 합리성, 두 가치의 대립인 셈이다.

 

어떤 선택이든 두 가치 중 하나를 선택하게 된다는 것은, 나머지 하나를 져버려야 한다는 것이 된다. 어떻게든 ‘그거보다는 이게 중요하지’라는 우위가 등장하는 것이다. 탕수육이든 고기튀김이든 합리성이 중요하든가, 식감과 취향이 어찌됐든 탕수육 본연의 형태가 중요하든가. 이 대립과 선택의 과정을 일반화해서 표현하자면 이렇다. 서로 다른 가치가 타협의 여지 없이 하나의 선택만을 놓고 대립하는 구도에서는, 두 가치 사이의 우위를 정하는 과정이 불가피하다. 두 가치 모두 의의를 지닌다는 데에 모두가 동의하더라도, 둘 중 하나가 선택되는 순간 나머지 하나는 우위를 점하는 데에 실패한 것이 된다.

 

탕수육 소스라는 주제는 지극히 작고 일상적이기 때문에 이 과정은 대부분 별 느낌 없이 지나간다. 누군가 소스를 붓는다고 해서 ‘합리성이 결여된 전근대적 인간’이라는 진지한 비난을 하진 않는다. 하지만 분명, 부어지든 부어지지 않든 어떤 선택이 발생했다면 그로 인해 두 가치 중 하나를 우위에 둔 것으로 여겨질 여지는 주어진다. 이 불가피한 가치의 선택 과정에 따라 작게는 서운함이 느껴질 수도, 크게는 상급자의 권력에 의해 억압 당했다는 해석으로 이어질 수도 있다. 이들 각각은 너무 하찮은 문제에 본인이 민감하게 받아들이고 있다며 생각을 할 수도 있고, 남들은 공감하지 못하는 나만의 불편함이라는 점에서 외로움을 느낄지도 모른다. 그저 내가 특이해서 벌어지는 일이라고 결론지어지기 쉬운 것이다.

 

하지만 분명, 이러한 서운함, 불편함, 억압받은 느낌은 단순히 개인의 특성에서 오는 것이 아니다. 이는 ‘가치의 모순적 대립’이라는 구조적 특성에서 기인한 것이다. 그러므로, 탕수육 소스에 대한 의견 충돌이 벌어지는 모든 상황에서, 이러한 결과는 유사하게 재현된다. 내가 특이해서 혼자만 느끼는 문제인 줄 알았던 것이, 알고보니 구조적인 특징에서 오는 보편적인 문제였던 것이다. 이 시대의 온라인 문화는 바로 이 점을 끄집어낸다. 나만 그렇게 느낀게 아니었구나 하는 깨달음은, 같은 느낌을 가져온 사람들의 공감 속에서 자신들이 왜 그렇게 느껴왔는지에 대한 배경과 구조를 파악하는 바탕이 된다. 이렇게 서로 반대되는 느낌을 가져온 사람들이 각각 공감을 이루며, 파편적인 개개인이었던 이들이 서로 대립하는 두 집단을 형성한 채 마주하게 된다. 부먹파와 찍먹파의 실질적 형성과정이다.

 

 

 

3. 대립의 보편성, 그리고 정치성

 

부먹파와 찍먹파의 대립은, 분명 그 결과적 행위만을 놓고 보자면 극히 작고 일상적인 주제이다. 하지만, 파편적인 개인의 느낌으로만 여겼던 이 작은 주제가 수많은 이들 사이에서 공감되고 있음을 발견하는 순간, 더이상 작다고만 할 수는 없는 문제가 된다. 그리고, 나와 공감하는 이 집단이 다른 집단에 의해 폄훼되고 비판받는 장면을 발견하는 순간, 일상적인 문제에 머무르지 않게 된다. 앞서 언급했듯, 탕수육이라는 요리의 역사적 유래나 권위있는 사람의 증언 등을 근거로 논쟁을 이어가는 과정이, 장난스러울 지언정 그 내면에 진지한 논리성을 지니는 이유는 여기에 있다. 유희로 즐기는 가운데에서도, 논쟁 자체에서는 보다 우월하고 싶은 의도가 있는 것이다.

 

그 진지함은 논박의 과정에서 여실히 드러난다. 한 예를 들자면, 부먹파가 주장하는 레퍼토리 중 하나는 ‘탕수육’이라는 이름의 분석이다. 여기서 ‘탕수’란 중국어 糖醋에 해당하는데, 설탕과 식초라는 뜻이다. 이 탕수라는 말머리가 붙은 메뉴들은 모두 새콤달콤한 소스에 버무려져 있는 요리이므로, 탕수육은 소스가 버무려져 있는 채로 먹어야 한다는 주장이다. 이에 대한 반박은 크게 둘로 나뉘는데, 한 가지는 어원 자체만을 볼 때 그 새콤달콤한 양념을 버무려야 한다는 당위는 찾아볼 수 없다는 주장이다. 또 한 가지는, 마치 닭도리탕에 ‘탕’이라는 말이 들어갔다고 해서 매운탕과 같은 선상에서 볼 수 없듯, 한국으로 이주한 화교들이 이해를 돕기위해 인용한 말머리만을 놓고, 그 이후의 문화적 변천을 무시한 채 부먹을 주장하는 건 극단적인 원리주의에 해당한다는 반박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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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먹찍먹 논쟁에서 빠질 수 없는 명작

원본 : 링크

 

이 논쟁의 한 면을 진지하게 분석하자는 것은 아니다. 다만, 이를 통해 논쟁이 얼만큼의 진지함과 깊이를 지니는지를 확인할 수 있다. 과거에는 그저 ‘부으면 눅눅해져’, ‘부어야 탕수육이야’ 정도의 말이 오가는 데에 그쳤다면, 온라인 커뮤니케이션이 가미된 현대에는 이정도의 인문학적 소양이 묻어나는 논쟁으로 심화된 것이다. 바로 이 점이, 이 시대에서 ‘보편성’이라는 특징이 지니는 힘이다.

 

이 시대에 많은 사람들이 공감하는 보편적 문제는, 그 많은 이들 사이에서 다양한 형태의 의견교환과 상호보완이 이뤄지면서 그 깊이를 더해간다. 그리고 그 과정에서 ‘온라인 커뮤니케이션’이라는 소통의 새로운 형태는, 그 양적 외연을 확장하는 데에 혁혁한 공을 세운다. 흔히 말하는 오타쿠 문화나, 매니아 문화가 몇몇 글로벌 기업의 생계를 유지해주는 현상도 이와 같은 맥락에서 볼 수 있으며, 21세기의 팬덤이 20세기와는 다른 시장파급력을 지니는 이유도 마찬가지 맥락에서 그 근거를 찾아볼 수 있다.

 

하지만 부먹찍먹 논란이 지니는 상징성은, 단순히 보편적 공감과 온라인 문화의 융합 사례에만 그치지 않는다. 이 논란이 보편성을 지닐 수 있었던 이유는 우연찮게 공감하는 사람들이 많았기 때문이 아니라, 이 대립이 가치의 모순적 대립이라는 구조적 특성을 지니기 때문이었다. 그렇다면, 다른 가치의 모순적 대립이 벌어질 때 비슷한 수준의 첨예한 논란으로 이어질 개연성이 높아진다. 그리고 우리에겐 지겨울만치 오래동안 겪어온, 가치의 대립들이 있다. 성장이냐 분배냐, 평화냐 안보냐, 전략투표냐 소신투표냐, 등등. 바로 정치적 대립 구도들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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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답이 뻔하거나, 타협이 용이한 구도에서는 당연히 대립이 심화되지 않는다. 우리가 기억하는 첨예한 정치적 대립은 대부분 제한적인 선택지 속에서, 하나를 선택하면 다른 한 가치를 양보해야하는 구도에서 벌어진다. 또 다른 관점에서 보자면, 서로 다른 가치가 대립하는 구도 자체가 이미 정치성을 지니는 셈이다. 즉, 부먹찍먹 대립과 여타 정치적 대립은, 구체적 소재에 있어서는 식문화와 현실정치라는 차이를 지니지만, 서로 다른 두 가치의 모순적 대립이라는 구도에서는 동일하다.

 

그러한 관점에서 볼 때, 부먹파와 찍먹파의 논란이 심화되는 과정에서 그 논거 수준의 변화 양상과, 이 시대의 대중문화 속에서 정치적 논쟁이 벌어지는 수준의 변화 양상은, 매우 비례적인 상관관계를 지닌다. 부먹찍먹 논란에 대해 논문수준의 게시물을 만들어내는 커뮤니티는, 현실정치의 첨예한 주제에 대해서도 높은 수준의 식견을 지닌다. 큰 사회적 사건이 터졌을 때, 과거의 여론은 주로 ‘누가 나쁜놈이냐’를 밝혀내는 데에 급급하고, 그렇게 골라진 나쁜놈을 다함께 맹비난하는 수준이었다면, 21세기의 여론은 언론에서 지목한 나쁜놈이 진짜 나쁜놈인지, 이면에 숨어있는 더 나쁜놈은 없는지, 혹은 구조적 결함이 배경을 이루진 않았는지, 심지어 이런 사건이 회자되는 이 순간 언론에서 쉬쉬하는 더 큰 문제는 없는지를 예리하게 찾아본다.

 

이러한 변화가, 물론 탕수육 소스 논란에서 기인했다는 것은 아니다. 하지만, 이 두 가지 흐름 모두, 어떤 가치들이 대립하는 과정에서 발생하는 다양한 양상에 대해 친숙하고 노련한 사람들이 보여줄 법한 변화라는 점은 확실해 보인다.

 

 

 

4. 대립의 불가피한 비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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앞서 두서없이 살펴본 내용들을 정리해보자. 가치의 대립이라는 구조적 특징에서 파생되는 대립 과정이 있다. 이 대립은 필연적으로 가치 간의 우위를 정하게 한다. 이러한 대립은 각각의 가치를 우선시하는 개인들에게 보편적인 인식과 감정을 낳는다. 그리고 이 보편성은, 과거에는 개개인의 사적 영역에 머물렀지만, 이 시대의 온라인 커뮤니케이션이라는 환경과 만나면서 공감을 형성하며 서로를 발견하게 한다. 이렇게 서로 다른 가치를 우선시하는 이들은 온라인 상에서 집단화되어, 외적으로는 논쟁을 벌이고 내적으로는 논거를 확립하면서 대립과 논쟁의 수준을 높여간다. 이러한 변화는 탕수육 소스라는 작고 일상적인 단면에서부터, 현실 정치나 국제 정세, 경제정책과 같은 거시적 주제에서까지 공통적으로 발견된다.

 

이 내용은 전편에서 논의한 '정치성 대립의 일상화'가 실제로 어떤 과정에 의해 형성되었는지를 설명한다. 정치성의 대립은 결국 서로 다른 부류 사이에서 만큼은 보편성을 지니게 되므로, 그 보편성이 온라인 문화와 만나면서 일종의 일상적 담론의 장을 형성한다고 볼 수 있겠다. 이 시대의 대중들이, 과거 어느 시대의 대중들보다 더 예리하며, 쉽게 현혹되지 않는 이유이기도 하다.

 

하지만 이렇게 본다고 해서, 정치성 대립의 일상화가 가져다주는 그 숱한 ‘갈등’과, 이에서 기인하는 스트레스를 마냥 긍정적으로 받아들일 수만은 없다. 이전 시대와는 달리, 이 시대의 갈등이 유독 날카롭게 느껴지는 것은 우연이 아니다. 분명 그 날카로움을 키워내는 힘이, 이 시대에는 존재한다.

 

본편의 소재를 그대로 이용하자면, 작고 일상적인 소재인 탕수육에서 높은 수준의 지적 유희를 만들어낸 데에서 머물렀으면 좋으련만, 서로를 ‘부먹충’, ‘찍먹충’으로까지 만들어낸 그 과정. 이 과정은, 단순한 철없음도 아니고, 폭력에 둔화된 온라인 문화의 폐해도 아니다.

 

정치성이 일상화되는 과정에서의 불가피한 비용. 다음 편에서 이어서 알아보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