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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폴레옹 전쟁이 근대를 만들었다면, 제1차 세계대전은 근대의 힘을 확인한 전쟁이었다. 인류는 그때까지 이뤄놓았던 모든 산업역량과 잠재력을 쏟아부었다. 사상 최대의 병력, 사상 최대의 화력과 물자를 동원해 전투에 뛰어든 것이었다. 전투 한 번을 하기 위해 며칠 동안 사전포격하는 건 일상이었고, 백만 단위의 병력을 동원하는 건 예사였다.

 

사상자 숫자가 천만 단위를 우습게 넘어가는 전쟁을 치르는 동안, ‘일상’이었던 평범한 풍경이 낯설게 다가오는 상황이 벌어졌다. 대표적인 것이 포로와 섹스다.

 

제1차 세계대전 이전에도 포로는 있었다. 전쟁이 있는 한 포로는 당연히 발생한다. 문제는 이전까지 전쟁과는 확연히 다른 ‘규모’였다. 전투 한 번에 몇 만의 포로가 발생하는 상황에서 각국은 포로 관리에 골머리를 앓는다. 그 결과 한없이 ‘방목’에 가까운 관리가 이루어졌다.

 

독일에서는 장교 출신 포로들에 대해 ‘수용소로 다시 돌아올 것을 맹세한다.’란 서약서만 쓰면 주말 외출을 허용할 정도였다. 모든 국가는 이 정도 규모의 포로를 어떻게 다뤄야 할지 아무런 ‘대책’을 갖고 있지 않았고, 이는 전쟁 역사상 가장 ‘인도적인’ 포로 대우로 이어졌다. (2차 세계대전 때에는 볼 수 없는 인도주의였다. 1차 세계대전의 ‘경험칙’이 포로를 어떻게 대우해야 하는지를 학습시켜 준 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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섹스 역시 마찬가지였다. 전쟁터에서 ‘성매매’는 흔한 광경이었다. 

 

제1차 세계대전은 군인의 ‘단위’가 달랐다. 독일제국만 보아도 병력이 1천 3백 만을 훌쩍 넘었고, 최소 2백만 명 이상이 성병에 걸렸다. 나치당이 권력을 잡은 뒤에 '제국성병박멸법(das Gesetzz ur Bek mpfung der Geschlechtskrankheiten)'을 만든 것에는 이런 배경이 있었다. 성병으로 인한 병력손실의 아픔을 알았던 거다.

 

독일 뿐 아니다. 참전국 중 성병피해가 가장 심각했던 미국도 마찬가지였다. 2년도 되지 않았던(19개월) 참전기간, 고작(?) 470만 명 내외를 파병한 미국이지만, 성병에 가장 많이 노출되었다. 이유는 간단한데, 미국 스스로 성병에 대한 대비를 거부했기 때문이다.

 

“매춘부와 섹스할 정도로 바보 같은 병사라면 성병에 걸리는 게 낫다.”

 

참전군인들에게 콘돔을 나누어줘야 한다는 의견이 나왔지만 미국사회위생협회에서 반대했다. 결과는 참담했다. 미군은 가장 심각한 성병 피해를 입었고, 귀환한 병사들에 의해 미국 전역에 성병이 퍼져나갔다.

 

제1차 세계대전은 미국의 ‘성생활’에 엄청난 변화를 가져왔다. 성병의 대규모 유입도 유입이었지만 ‘프랑스식 섹스’ 즉, ‘오럴섹스’가 전파되었다. 이 때까지 미국은 서구사회에서 가장 금욕적이었다. 대부분이 ‘선교사 체위’만을 알고 있던 때 오럴섹스는 문화적 충격이었다.

 

2차 세계대전 때 미국은 무작위로 콘돔을 뿌려댔다. 당시 고무는 전략물자로 분류돼 사용이 제한됐지만, 군인에게 보급되는 콘돔만은 무제한이었다. 한 달 평균 5천만 개의 콘돔을 뿌렸다. 병사 1인당 한 달에 8개의 콘돔을 보급 받았다는 소리다. 하지만 아무리 콘돔을 뿌려도 성병을 100% 막지 못했다. 1943년 미군 사령부는 이탈리아에 주둔하고 있는 4개 보병 사단에 대해 전수조사를 했는데, 전투에 의한 사상자 숫자보다 성병에 의한 사상자가 더 많았다. 미군 전체 병력의 5%가 성병에 걸렸던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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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본도 마찬가지였다. 제1차 세계대전 때 일본군은 실질적인 참전 없이(유럽에 파병하지 않았다) 전승국의 이득을 챙겼다. 그러나 욕심이 지나쳤다. 1918년 시베리아를 침공했던 것이다. '10월혁명'으로 혼란스러웠던 러시아를 '볼셰비키 정권을 붕괴시킨다'는 명분을 대며 치고 올라갔다.

 

연합국 내에서도 시베리아 침공에 대해서 말들이 많았다. 애초 블라디보스토크까지만 진격하겠다고 약속했던 일본이지만, 사할린, 연해주, 만주 철도를 넘어 시베리아의 바이칼호 동부까지 밀고 올라갔다(최종적으로 바이칼호 서쪽 이르쿠츠크까지 점령했다). 문제는 이 때부터였다. 일본군은 '대규모 파병을 했다'고 하지만, 7개 사단 수준이었다. 이 병력으로는 광대한 시베리아를 통제할 수 없었다. 결국 교통의 요지들을 ‘점’으로만 연결해 점령할 수밖에 없었고, 이 사이를 소련군과 파르티잔이 치고 들어왔다.

 

애초에 성공할 수 없는 작전이었다. 병력피해가 막심했다. 동원된 7개 사단 병력 중에서 사상자가 5천여 명이었다(별다른 큰 전투 없이 말이다). 놀라운 사실은 이들 중 2천여 명이 성병에 감염돼 전투를 할 수 없었다는 것이다. 비전투 손실로 보기에는 너무 컸다.

 

시베리아 침공으로 ‘성병관리’의 중요성을 깨달은 일본은 1931년 만주사변(滿洲事變)을 직후부터 일본군 ‘위안부’를 보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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육군용 ‘군용콘돔’인 ‘돌격일번(突擊一番)’과 성병 예방 연고인 ‘성비고(星秘膏)’는 전선에서 쉽게 구할 수 있었다.

 

일본에게 있어서 일본군 ‘위안부’는 생소한 개념이 아니었다. 만주사변 이전에 이미 ‘위안부’가 있었다. 

 

시작은 홋카이도 개발이다. 아이누족의 땅이었다가 일본으로 편입된 홋카이도는 메이지 유신 직전까지 불모지였다. 남부 일부를 제외하고는 중앙행정부가 방치하다시피 버려놓은 땅을 메이지 유신과 함께 본격적으로 개발했다.

 

일본은 홋카이도 거주민의 병역까지 면제해주며 개발을 지원했는데, 미국의 서부개척과 비견할 만한 대장정이었다. 토착민들을 쫓아내거나(강제이주) 착취하고 수탈했다. 문제는 토착민 뿐 아니라 이주민들도 힘들었다는 거다. 아이누족이 북극 문화권의 최남단 민족인 걸 생각한다면, 홋카이도가 어떤 땅인지는 미루어 짐작할 수 있을 것이다. 생명을 위협할 정도의 혹한의 날씨, 생활이 곧 목숨을 건 생존이었다. 벼농사도 거의 불가능했기에 늘 굶주렸다.

 

여기에 ‘위안부’가 투입됐다. 대상이 군인이 아니었을 뿐이다. 공식적인 첫 ‘위안부’는 일본군이 아닌 탄광 노동자를 대상으로 했다. 탄광 노동자들을 고용한 산업체가 장소를 제공하면, 포주가 섹스를 공급하고, 관공서나 경찰, 보건소 등이 행정적 편의를 봐주고 성병검사를 했다. 민과 관이 이것을 육성하고 보호했던 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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